박정수 05 여성 작가에 주목하라
“내 작품이 연금술 같았으면 좋겠어요. 연잎을 바라보면 그래요. 살랑거리는 물결 위에 가만히 내맡겨진 이파리가 내 작품에 와서 정말로 살랑거렸으면 좋겠고, 솜털을 스치는 작은 바람결이 내 작품에 묻어나면 얼마나 좋을까요.”
사람과사회™
2019 겨울 제3권 제4호 통권 제12호
ISSN 2635-876X 94
연재
박정수, 『나는 주식보다 미술투자가 좋다』 005
사람과사회™는 박정수 정수화랑 대표(관장)가 쓴 『나는 주식보다 미술투자가 좋다』(BMK, 2007)를 간추려 연재합니다. 이 책은 ‘미술 재테크로 가는 길’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듯이 미술과 재테크를 중심으로 쓴 책입니다. 현재 박 관장은 서울시 종로구에서 정수화랑과 현대미술경영연구소를 운영하면서 젊은 작가 후원과 지원, 아트 페어 참가, 좋은 작가 초대 등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과사회 thepeopleciety@gmail.com
여성 작가에 주목하라
여성 작가와 왜곡된 이미지
우리나라 유명 화가들 중 여성 화가가 얼마나 되는지 살펴보면 남자에 비해 비율이 너무 낮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회적 여건 문제만은 아닌 듯싶다. ‘여류 화가’란 말부터 느낌이 묘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남류’가 없으니 ‘여류’를 쓸 이유도 없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일상적인 성 구분 관점에서 호칭되어야 한다.
화가라는 직업에 남성이면 어떻고 여성이면 어떤가. 그런데 ‘여류 화가’라는 말이 아직도 허용된다. 여류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전문적인 일에 능숙한 여성’을 이르지만 단어가 주는 느낌은 ‘남성이 주도하고 있는 사회에 여성이 끼어들다’로 인식된다. 성차별이 없어져 간다고는 하지만 특별히 뛰어나지 않으면 남성이 더 낫다는 생각은 여전해 보인다.
사실 우리나라 젊은 화가들 중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상당히 높다. 여성 작가에 주목하다 보면 정말 좋은 작품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남성이나 여성이나 능력이 비슷하기 때문에 수적으로 우세한 여성에게 좋은 작품이 더 많은 것은 당연하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 미술대학에 간다는 것은 화가로서의 길보다는 고상한 취미 활동을 하는 모습으로 오해되기도 한다. 좋은 감성과 냉철한 판단에 따라 훌륭한 화가의 길로 가고 있지만 사회에서 보는 시선은 좀 비틀려 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모습도 왜곡의 요소가 있다. 미술을 전공한 여성은 항상 고상하고 우아하다. 넉넉한 집안에서 고이 자라나 좋은 곳에 시집이나 가려는 모양새다.
기회가 된다면 미술대학 실기실을 한 번쯤 방문해보는 것도 좋은 일이다. 늦은 시간까지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학생과 마찬가지로 밤늦게까지 그림을 그리는 여성들이 남성보다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미술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는 이들 중 남학생보다 여학생이 훨씬 많은데, 미술시장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수는 남성이 훨씬 많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몇몇 여성 작가 작품이 경매에서 아주 높은 가격에 거래되고 있지만 전공자의 수에 비해 그 비율은 턱없이 낮다. 어쨌든 소수라도 뛰어난 감수성과 서정성, 그림을 그리는 실력이 대단한 분들이 많다.
확률적으로 우세한 여성 작가
“그림 그리는 우리 같은 남자는 참 불쌍해요. 여학생은 하다하다 안 되면 시집이라도 가면 되잖아요. 남자가 사회 활동하기가 훨씬 편한 것은 인정하지만, 그림 그리면서 가족들 부양하는 것이 쉬운 일인가요. 먹고 살아야 하는 절박한 심정으로 작업하는 남성 화가가 많거든요. 절박해야 좋은 그림 나온다고 생각해요. 아마 그래서 남성 화가가 많지 않나 생각해요.”
“무슨 소리! 생각해보세요. 사회에서 활동하는 우리 여자 선배님들 보세요. 끼워주기나 하나요? 유명한 그룹이나 단체장들은 전부 남자거든요. 결혼해서 아이 낳는 것은 성 유별이거든요. 집에서 애 키우고 교육하고, 이런 것 안 하려면 결혼도 하지 말아야 하거든요. 사회에서 인간관계는 남자들끼리 더 편하다고 하거든요. 작품 활동에 대한 욕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 사회가 남자 중심으로 돌거든요. 그래서 그런 거거든요.”
멕시코 진보적 여성이자 초현실주의 화가로 유명한 프리다 칼로(Frida Kahlo, 1907~1954)를 이야기할 때 사고로 인한 후유증을 극복한 화가라거나 멕시코 벽화 운동의 거장이었던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1886~1957)의 아내라는 말을 한다. 이런 이야기는 1984년, 멕시코 정부가 그의 작품을 국보로 지정한 것보다 더 우선한다. 프랑스의 여성 조각가 까미유 클로델(Camille Claudel, 1864~1943)이라는 사람은 조각가 명성보다는 로댕의 연인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는 최초 여성 서양화가, 여권운동 선구자, 진보적 사상가였던 나혜석(羅蕙錫, 1896∼1948)이 있다. 호는 정월(晶月), 부유한 관료의 딸로 태어나 일본에서 유화를 공부했다. 그 위로는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도 있다. 조선 중기의 뛰어난 여성 예술가다. 여성 화가로도 뛰어났지만 율곡의 어머니라는 명칭이 항상 함께 다닌다.
너무 깊이 파고들지 말자. 근본적인 이유 등 따지지 말자. 사회 구조와 성차별에 대한 주제는 나중으로 돌리자. 필요한 것은 보편적 관점에서 젊은 예술인들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면 그 숫자에 놀랄 것이다. 왜 남학생이 부족하냐는 이유도 물을 필요가 없다. 지금 주어진 상황에서 더 나은 미래를 생각하면 그 뿐이다.
젊은 여성 작가를 주목하자. 이들에게 사회성과 약간의 경제적 가치를 보장하면 좋은 미술품을 확보할 여지가 엄청 많다. 여성 작가가 특별히 뛰어나다는 말이 아니다. 미술을 전공한 여성의 숫자가 훨씬 많기 때문에 확률적으로 좋은 작품이 더 많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모든 것은 미술이다
이제 주목 받는 젊은 작가, 윤경아 작가 이야기를 해보자.
많은 사람들은 그를 공예가라 부른다. 하지만 그를 공예가라 불러서는 그의 미술품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의 작품은 회화적이다. 그림을 그리는 재료가 붓이 아니라 금속일 뿐이다. 사전에 붓으로 그림을 그린다. 그 그림을 바탕으로 금속을 두들기면서 재단한다. 불기운과 망치를 통해 작은 생명체가 탄생한다.
긴 겨울 지나 대지(大地)의 봄 햇살, 따사로움 흠뻑 받아 연(蓮)은 동그랗게, 동그랗게 나의 마음속에 싹을 틔우고 일상(日常)에 지치고, 나른함에 졸고 있는 영혼(靈魂)을 깨워 작업실의 망치소리와 톱질의 손놀림이 다가와 새롭게 생동(生動)하고 있다.
연(蓮)을 통해 무얼, 표현(表現)할 수 있을까? 채움과 비움의 작업(作業)을 반복(反復)하면서 심상(心象)에 투영(投映)된 삼라만상(森羅萬象)들의 모습들을 연(蓮)꽃의 맑은 향기(香氣)로 퍼져나가게 할 수 있다면……. 영혼(靈魂)을 두드리고, 다듬고, 깨워가면서 작품삼매(作品三昧)에 빠져들 수만 있다면……. 작품 속에 담겨져 있는, 그 모든 것들은 곧 나의 세상 이야기이며 나의 숨소리이다. 연(蓮)꽃의 바람에 흔들림이다.
-윤경아, 작업 노트 중에서
“벌써 10여 년이 흘렀군요. 참 빠르네요.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예술가는 여전히 힘든 것 같아요. 1996년 6월 대학원 석사 학위 전시로 ‘서정적 이미지의 조형 표현 연구’라는 논문과 함께 인사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어요. 그때 어떤 갤러리에서 제 작품을 사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너무 싸게 살려고 하는 겁니다. 사실 판다는 것도 생소했지만 재료값이라도 되어야 하거든요. 고민 많았죠. 마침 고모부께서 그 작품을 사시겠다는 거예요. 본인의 어릴 적 개울가에서 노닐던 추억과 개구리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며 80만 원에 사셨어요.”
첫 전시 기억에 대한 윤경아 작가의 말이다. 그때 이미 작품 가격에 대한 갈등을 겪어본 모양이다.
“처음 하는 전시는 누구나 희망과 고민이 함께 하거든요. 인공적으로 만든 사물과 자연에서 오는 생명체를 결합해서 우리들의 정서를 말하고 싶었어요. 2~3년 동안 최선을 다했죠. 그러다보니 벌써 8번의 개인전을 했답니다.”
회화, 조각, 공예 등 전공의 과정을 다르지만 미술품을 제작하는 결과는 비슷하다. 세기의 거장이라는 피카소는 회화, 도자, 조각 등 다양한 방면에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전공이 무엇이냐에 따라 작품 성향도 일방적으로 분류한다.
윤경아는 공예를 전공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공예가라 부른다. 하지만 그를 공예가라 불러서는 그의 미술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는 예술가일 뿐이다. 그의 작품은 회화적이다. 그림을 그리는 재료가 붓이 아니라 금속일 뿐이다.
사전에 붓으로 그림을 그린다. 물 위에 철썩 내려앉은 듯한 연잎 위에 한가로운 잠자리를 그리고, 바람결에 숨죽이는 풀벌레를 그려낸다. 그려낸 그림을 바탕으로 금속을 두들기면서 재단한다. 불기운과 망치를 통해 작은 생명체가 탄생한다. 얇은 바람에 따라 잔잔히 움직이는 물결 아래 작은 물고기들이 따라간다. 참으로 행복하다.
“2007년 5월 세종호텔 세종갤러리에서 초대전을 하던 중 중년 남자에게 연락이 왔어요. 화랑 담당자를 만나지 못해서 작품 가격을 물어보지 못했다는 겁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작품 설명도 했더니 본인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작품을 구매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화랑 초대전이라서 작품 가격이나 판매 관계를 담당 큐레이터와 직접 상의하라고 연결해줬죠. 500만원에 판매했다고 하더군요.”
21세기에 아직도 쇠를 두드리고 있는 느낌이 어떨지 궁금하다.
“하고 싶은 말이오? 뭐, 사실 요즘 같은 과학시대에 연금술을 믿는 사람은 없거든요. 쇠를 금으로 바꾼다거나 하는 따위요. 하지만 내 작품이 연금술과 같았으면 좋겠어요. 연잎을 바라보면 그래요. 살랑거리는 물결 위에 가만히 내맡겨진 이파리가 내 작품에 와서 정말로 살랑거렸으면 좋겠고, 솜털을 스치는 작은 바람결이 내 작품에 묻어나면 얼마나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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