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 그림과 미술 교과서
“미술 교과서를 만들 때 밀레 그림을 대거 삽입했던 것을 광복 후 바로 6.25동란을 거치는 극도의 혼란 중에 어느 우리나라 미술가가 그 일본 미술 교과서를 바탕으로 우리 미술 국정 교과서를 만들어 사용케 함으로 필자와 같은 바보(?)를 만든 게 아닐까?”
밀레의 그림과 미술 교과서
김하진 한국정보과학회 명예회장
감격사회 162호
2017.01.25.
필자는 1950년대 중반에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6·25동란의 막바지 때다. 봄에 장관동의 가교사에서 입학했다가 가을에 대명동의 새 교사까지 제각기 책걸상을 둘러매고 마치 오늘날 아프리카 어느 나라의 고등학생처럼 먼 거리를 도보로 이사했던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역사다. 그 당시는 한 반에 80여 명 학생이 교복만을 입고 비좁은 교실에서 학교생활을 했고 저학년 때는 예·체능의 거의 모든 과목을 공부했다.
특히 미술을 좋아해서 미술 교과서를 열심히 익혔다(당시는 교과서 외에는 참고할 게 없었다. 후일 컴퓨터로 시각화하는 ‘컴퓨터 그래픽스’ 전공 교수가 된 것이 그 때 미술을 좋아했던 것이 바탕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미술 선생님의 배려로 특별히 미술실 출입을 하며 실습도 조금 할 수 있는 특혜(?)를 누릴 수 있었다. 미술교과는 교실에서 교과서를 교재로 선생님 강의에 의해 교과에 대한 소양(?)을 높이고 필기시험으로 평가 했으니 정말로 부실하기 그지없었다.
음악 교과는 한 반 학생 모두가 풍금이 있는 음악교실에 가서 음정연습과 창법을 공부하는 것으로 수업을 했으니 우리 세대는 음정을 제제로 배우지 못한 탓에 오선지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음치가 많은 이유가 아닐까?
그 미술 교과서에는 그림 그리기에 대한 설명에 주로 서양화의 내력과 보기 그림이 많았다(한국화와 동양화에 대한 내용은 전혀 없어 지금도 한국화와 동양화를 잘 모른다).
특히 밀레(Jean-François Millet, 1814년 10월 4일 ~ 1875년 1월 20일)의 그림 ‘만종’, ‘이삭줍기’, 그리고 ‘씨 뿌리는 사람’이 흑백으로 선명치 않게 인쇄되어 있었다. 선생님의 설명과 극찬으로 필자는 밀레가 프랑스의 대표적 화가라고 생각했다. 또한 당시는 어디를 가나 특히 달력에는 밀레의 그림이 걸려 있어 유명했다.
그 후 대학에서 수학을 공부하고 좀 늦은 나이에 프랑스에 프랑스 정부 장학금으로 산업수학과 컴퓨터를 공부하러 유학을 가게 되어 프랑스 예술 특히 미술을 탐닉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주어졌다.
밀레의 진본을 볼 수 있다는 흥분을 갖고 프랑스로 갔다. 학위를 위한 공부는 알프스(Alps)에 속한 그랑노블(Grenoble)과 생테티엔(Saint-Etienne)대학에서 열심히 했다.
여름방학에 시간을 내어 파리에 가서 가능한 여러 미술관을 돌아다니면서 밀레의 진본그림을 찾았으나 허탕이었다. 반면에 프랑스에는 고전 미술에 어마어마한 사실파, 자연주의파, 인상파, 후기인상파, 입체파, 초현실주의파 화가가 필자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많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 그림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프랑스에서 공부가 끝나고 귀국할 때까지 밀레의 그림은 끝내 찾지 못하여 못내 아쉬움을 갖고 귀국했다.
필자는 1984년에 프랑스의 베르샤유 소재 ‘INRIA(국립 정보 및 자동화 연구소)’에 초빙교수로 초청되어 파리 13구 아파트에서 살게 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주중에는 연구소와 파리6대학에 출근하여 연구에 몰두했고 주말이면 빠짐없이 파리의 미술관과 박물관을 순서를 정해 놓고 방문하는 계획을 시작하였다(파리에는 가봐야 할 미술관과 박물관이 어림잡아 150여개가 있음을 이때 알았다).
첫 번째로 루브르박물관을 5일에 걸쳐 도시락을 지참하고 전관을 뒤졌더니 ‘밀레 홀’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홀은 화요일만 개관하게 되어있어 시간을 내어 화요일에 다시 갔더니 별로 큰 홀이 아니었고 필자가 찾던 진본 그림을 가까이서 볼 수 있어 소망은 이루어졌지만 다른 작가의 그림에 비해서는 좀 초라하여 상시 개관 안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프랑스의 미술관과 박물관 그리고 백화점은 월요일에는 모두 휴관한다).
가을 어느 날에 파리 남쪽 약 80km 거리에 있는 퐁텐블로(Fontainbleau)성 부근의 마을 바르비종(Barbizon)에 밀레가 만년에 ‘만종’등을 그리며 여유 있는 삶을 누렸다는 ‘밀레의 집(Maison de Millet)’을 찾아갔다.
마침 가을이라 밀레가 석양에 ‘만종’과 ‘이삭줍기’를 그리던 배경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정경을 볼 수 있어 정말로 행복했다.
그런데 ‘밀레의 집’과 주변은 밀레가 살던 19세기 후반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고 그 집에는 밀레의 외증손녀가 기념품 가게를 하며 살고 있었다. 몇 가지 기념품을 사며 불어로 인사를 했는데 ‘안녕하세요!’하고 우리말로 응답하기에 깜짝 놀랐더니 자기는 한국 사람과 일본 사람을 거의 정확하게 구별한다는 것이다.
그 당시 그 집에 찾아오는 관광객의 대부분이 한·일 두 나라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국의 귀빈이 다녀간 사진첩을 보여주었는데 여러 유명인사의 면면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왜 이렇게 한·일 관광객이 몰려오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다.
그 이유에 대한 필자의 생각과 추측은 다음과 같다. 20세기 초에 일본 유학생이 유럽으로 몰려 유학을 할 때 어떤 일본 미술가가 프랑스에 유학을 갔다가 밀레 그림에 열광해 (그림에 동양적 풍치가 넘쳐나서?) 귀국 후 미술 교과서를 만들 때 밀레 그림을 대거 삽입했던 것을 광복 후 바로 6.25동란을 거치는 극도의 혼란 중에 어느 우리나라 미술가가 그 일본 미술 교과서를 바탕으로 우리 미술 국정 교과서를 만들어 사용케 함으로 필자와 같은 바보(?)를 만든 게 아닐까?
이 추측과 판단이 틀림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당시는 비단 고등학교 교과서뿐만 아니라 대학에서의 교육에도 교수가 일본서 공부하고 귀국한 경우가 허다하여 일본 것을 복사(?)하는 것이 다반사라 일본색이 짙었다. 초등과 중등학교의 교과서 내용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간과한 서글픈 우리 교육의 역사를 필자는 깊이 곱씹어보곤 한다.
김하진
한국정보과학회 명예회장. 아주대학교 정보통신대학 명예교수. ISO/IEC JTC 1/SC 24, Chairman.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ReSEAT 프로그램 전문연구위원. 전 아주대학교 정보통신대학 컴퓨터공학과 교수
※ 이 글은 (사)동북아공동체연구재단이 운영하는 ‘감격사회(감사와 격려로 사랑을 회복하는 칼럼공동체)’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과사회는 ‘감격사회’ 원고를 함께 게재합니다.
저 [씨뿌리는 사람] 작품은 밀레가 아니라 반고흐의 작품입니다. 밀레의 씨뿌리는 사람에서 영향을 받아 만든 작품으로, 밀레가 그린 그림이 아닙니다. 한 눈에 보아도 붓질의 방식이나 색상, 표현이 다른데요… 수정 바랍니다.
박민정 선생님, 고칠 수 있도록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방금 고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