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림에 기대어 꽃처럼 피고 싶다
"남실바람에 꽃이 미세하게 흔들린다. 패랭이꽃 그림자가 흔들리며 제 복사뼈까지 내려왔다. 이 흔들림에 기대어 꽃처럼 피고 싶다."
사람과사회™
2019 여름·가을 제3권 제2·3호 통권 제10·11호
ISSN 2635-876X 92·93
기고
흔들림에 기대어
최재선 한일장신대학교 교양학과 교수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무덥다. 가마솥처럼 날씨가 푹푹 찐다. 참나무가 울창한 숲도 초록의 귀퉁이마다 닳아 풀이 죽었다. 그저 죽은 듯 누워 있다. 마을 정자나무는 온몸 덩이로 볕을 주체하며 그늘의 견적을 잰다. 정원 금잔디는 겨우내 추위와 맞섰던 힘으로 열기를 버티고 있다. 폭염은 눈치 없이 잠시 머물다 떠날 기세가 아니다. 밤까지 살아있다 가건물인 열대야의 집을 지을 조짐이다.
몇 가닥 바람이 분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댓 걸음 물러서서 봐야 선명하게 눈으로 들어오는 게 있다. 대숲이 느릿하게 술렁거린다. 들깨 밭에 은둔하고 있던 향기가 부유물처럼 떠돈다. 해바라기는 해를 바라보지 않고, 바람의 향방을 엿보며 쫓는다. 제 안에 심장을 갖고 있는 것 죄다 바람에 흔들린다. 한동안 흔들릴 뿐 제자리로 각자 돌아온다.
“바람은 우리가 삶의 여로에서 만난 아픔”
바람은 우리가 삶의 여로에서 만난 아픔이다. 몰인정하게 닥친 역경이다. 희망이 무너져 생긴 절벽 같은 절망이다. 자칫 잘못하여 저지른 실수다. 바위에 깔려 꼼짝달싹하지 못할 정도로 크게 당한 충격이다. 부음이 바람을 타고 왔다. 모 교수님께서 15년 동안 길렀던 ‘코니’가 오늘 힘을 풀고 잠들었다. 얼마 전 사고로 아들을 잃은 지인은 공황장애의 바람이 밤낮으로 분다고 했다. 아프다. 크기를 알 수 없을 만큼 아프다.
바람은 예고 없이 분다. 어떻게 손 쓸 겨를 없이 들이닥친다.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면, 꺾이거나 부러지고 만다. 흔들림은 순응하는 각도이다. 신석정 시인이 쓴 「임께서 부르시면」이란 시가 있다. “가을날 노랗게 물들인 은행잎이 / 바람에 흔들려 휘날리듯이 / 그렇게 가오리다 / 임께서 부르시면.” 자연 질서(임)에 순응하겠다는 의지를 노래하고 있다. 비워야 채워지고 흔들려야 강해져 원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다.
흔들림은 도전하는 힘이다. 서정주 시인은 「자화상」이란 시에서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8할(八割)이 바람이다”고 했다. 가난이라는 시련을 통해 오히려 더 단단해진 자화상을 고백하고 있다. 굴욕적인 현실에 주저앉지 않고 더 나은 세계를 향해 도전하는 모습을 보인다. 고통 가운데서도 평온을 유지하거나 충동을 통제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시련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더욱 어렵다.
“흔들림은 도전하는 힘”
하나님은 우리에게 바람의 세기로 흔들리다 제자리로 돌아오는 회복탄력성을 주셨다. 회복탄력성은 위험이나 심각한 역경·충격적인 상황에 직면하여, 잘 적응하고 극복하는 힘이다. 심리학에서는 다시 튀어 오르거나 원래 상태로 되돌아온다 하여 ‘정신적 저항력’이라고 한다. 어떤 심리학자가 그랬다. 우리가 강한 회복탄력성을 유지하려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원인을 분석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고.
회복탄력성이 가장 강한 게 풀이다. 풀은 밟힐수록 더 세게 일어서고 잘릴수록 더 무성하게 자란다. 밟히면 잠시 돌아누웠다가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살다 보면 우리 삶에 태풍이 간간이 분다. 이런 날 앉지도 굽히지도 못하고 풀처럼 서서 바람을 맞는다. 태풍이 지나간 자리는 숭숭하게 구멍이 뚫린다. 이때마다 자작시 「너는 풀이야」를 떠올린다.
바람 앞에서도
꺾이지 않고
굴복할 줄 몰라
풀풀 살아있는
너는 풀이야
누군가에게
짓밟히고 차여도
흙 한 번 털고
풀풀 일어서는
너는 풀이야
모진 소낙비에
흠뻑 젖을지라도
빗방울 다스려
풀풀 푸르러지는
너는 풀이야
“흔들림에 기대어 꽃처럼 피고 싶다”
세상엔 말라서 더 빛난 게 있다. 마른 것은 흔들릴 준비를 하는 것이다. 자작시 「마른풀잎」이 있다.
말라서 더 빛난 게 있다
눈 속에 파묻힌 풀잎들
푸른 봄보다 더 꼿꼿하잖는가
차가울수록 더 빛난 게 있다
눈 속에 눈뜨고 있는 풀잎들
따스한 날보다 당당하잖는가
우리 살다 보면 아파서 여위고
차디찬 고통에 마른 날 있다
아프고 힘들다고 그저 그렇게
메말라 바람에 날릴 수 없다
그렇게 하고 말기엔 우리들
타고난 이름이 부끄럽잖는가
마른풀잎처럼 꼿꼿이 서서
푸른 하늘 바라봐야 한다
마른 풀잎처럼 당당히 서서
싱싱한 날 기다려야 한다
그저 빼빼 마르고 말기엔
우리 삶 너무 장장하잖는가
누구든 삶의 곡선로를 만나 아픔의 원심력으로 흔들리기 마련이다. 사는 것은 흔들리는 것과 화목하게 손잡는 것이다. 우리가 기대고 사는 것치고 흔들리지 않는 것은 거의 없다. 요지부동할 것 같은 땅도 지진에 흔들리고 운다. 믿음의 제방도 큰물에 제 몸을 흐물흐물 흔들며 무너진다. 폭염 속에서도 패랭이꽃이 다정스런 눈빛으로 웃고 있다. 남실바람에 꽃이 미세하게 흔들린다. 패랭이꽃 그림자가 흔들리며 제 복사뼈까지 내려왔다. 이 흔들림에 기대어 꽃처럼 피고 싶다.
최재선
시인, 수필가, 아동문학가다. 시집 『잠의 뿌리』, 『마름풀잎』, 『내 맘 어딘가의 그대에게』, 『첫눈의 끝말』 등을 출간했으며, 수필집 『이 눈과 이 다리 이제 제 것이 아닙니다』, 『무릎에 새기다』, 『아픔을 경영하다』 등이 있다. 현재 한일장신대학교 교양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Leave a comment
You must be logged in to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