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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구학 개론

제아무리 잘난 톱에게도 두려운 존재가 있다. 줄이다.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 나무의 거친 면을 다듬는 샌드페이퍼처럼, 줄은 무디거나 거친 쇠를 다듬는다.

한 몸에 서로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는 톱. 한쪽은 나무를 켜고, 다른 쪽은 자른다. 끌어당김과 밀어 보냄을 반복하는 톱질은 강약조절은 물론 일정한 리듬을 타야만 한다. 어릴 적 할아버지의 톱질은 신비로웠다. 마치 온몸이 끌려갔다가 끌려오는 운동회의 줄다리기처럼 흥겨워서 그처럼 쉬운 노동이 있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톱을 잡아보고서야 알게 되었다. 리듬을 탄다는 것은 톱을 요령 있게 다룬다는 것, 적당히 잡아당겼다가 놓아주는 그것은 내 것을 알맞게 취하고 내주어야 하는 삶의 기술이었다.

끌은 섬세한 손을 가진 세공사, 혹은 예술가다. 못을 쓰지 않는 전통가옥을 지을 때, 기둥과 대들보와 중보를 접합하거나 조립하여 짜 맞추려면 끌이 필수적인 연장이다. 파고 쪼고 맞물리는 일을 잘해야 건축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다. 또한 끌의 정교함으로 짜 맞춘 고가구는 못을 쓸 필요가 없고, 그 이유로 가치가 높다. 어떤 일을 마무리함에 있어 끝까지 세밀하게 살피고 검토하는 작업은 끌이 하는 일과 같다. 대충 빨리 끝내려는 이에게 정교함과 섬세함을 자랑으로 삼는 끌은 엄한 꾸중을 내릴지도 모른다.

사람과사회™
2019 여름·가을 제3권 제2·3호 통권 제10·11호
ISSN 2635-876X 92·93

기고

공구학 개론

최장순 수필가

공구함을 연다. 손때 묻은 공구들이 일제히 내게 눈을 맞춘다. 드라이버, 리퍼, 펜치, 망치, 드릴, 그리고 끌과 대패까지, 쓰임새는 다르지만 홀로 제 기능을 하거나 서로 도와주며 존재가치를 높여주는 것들. 그것들을 하나하나 살펴 기름칠 하는 것은 세월에 녹슬지 말라는 당부이자 나에 대한 보살핌이기도 하다.

톱과 줄

한 몸에 서로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는 톱. 한쪽은 나무를 켜고, 다른 쪽은 자른다. 끌어당김과 밀어 보냄을 반복하는 톱질은 강약조절은 물론 일정한 리듬을 타야만 한다. 어릴 적 할아버지의 톱질은 신비로웠다. 마치 온몸이 끌려갔다가 끌려오는 운동회의 줄다리기처럼 흥겨워서 그처럼 쉬운 노동이 있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톱을 잡아보고서야 알게 되었다. 리듬을 탄다는 것은 톱을 요령 있게 다룬다는 것, 적당히 잡아당겼다가 놓아주는 그것은 내 것을 알맞게 취하고 내주어야 하는 삶의 기술이었다.

나무를 땔감으로 쓰던 시절, 집집마다 톱 몇 개씩은 있었다. 여름내 이빨을 갈며 먹잇감을 기다린 톱이 사냥을 하기에는 겨울이 적기. 잎들 비워진 휑한 숲에서 나무는 알몸을 드러낸 채 톱의 심판을 받는다. 톱은 오랜 감각으로 체득한 사냥기술이 노련해서 나무의 급소는 밑동이라는 것을 안다. 나무의 무게중심을 살피고 쓰러질 방향을 예측하면 드디어 나무의 목에 사나운 이빨을 댄다. 사냥의 묘미는 공포감이 엄청난 쾌감으로 돌변할 때 극대화되는지 나무가 진저리를 칠수록 톱은 쓱싹쓱싹 신이 난다. 그러나 그 소리는 나무의 비명, 톱밥은 나무의 살점이다. 톱날에는 찐득한 나무의 피가 묻어있다.

공격하는 자와 당하는 자가 늘 정해져있다면 이처럼 불합리한 일이 있을까. 순순히 목을 내놓았다고 해서 나무를 얕잡아 봤다가는 낭패를 본다. 나무는 입을 앙다물고 톱에 저항한다. 톱날이 윙, 소리를 내며 더 이상 움직이지 않을 때는 재빨리 나무의 반대편 목으로 자리를 옮겨야 한다. 이때부터 톱질은 신중해야 한다. 자칫 방심하면 나무가 톱을 부리는 자의 등짝이나 허리를 순식간에 후려치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잘난 톱에게도 두려운 존재가 있다. 이다.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 나무의 거친 면을 다듬는 샌드페이퍼처럼, 줄은 무디거나 거친 쇠를 다듬는다. 작지만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줄은 수십 수백 번의 반복으로 굵은 철사나 쇠파이프도 잘라낼 수 있다. 당기는 톱질과 달리 밀어내야하는 줄질은 악기의 현을 다루듯 쇠의 결을 따라가야 한다. 아무 때나 힘을 주는 줄질은 불협화음을 내다가 멈추어 설지도 모른다.

줄은 톱의 무딘 이빨을 갈아댄다. 마치 치과의사가 환자의 입을 들여다보며 치료를 하는 것처럼. 귀로 온통 쏟아져 들어오는 그 소름끼치는 소리를 참아내야 하듯 톱은 아픔을 견뎌내야만 한다. 톱이 나무의 천적이라면, 톱의 천적은 줄일까? 톱과 줄이 천적으로 보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줄은 톱을 연마하기위한 조력자인 셈, 생각해보니 나를 엄하게 꾸짖거나 힘들게 훈련시킨 이는 나를 숙성시키기 위한 스승이었다. 그것을 깨닫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가.

망치와 드라이버

누구는 때려야 하고 누구는 맞아야하는 이치. 여기에는 악의도 없고 피해의식도 없다. 망치질만큼 남성적인 노동도 드물 것이다. 집안에서 부인이 망치질을 한다고 상상해보라. 그것은 가장이 유고중이거나, 게으르거나, 장애를 가진 경우처럼, 부자연스럽다. 육중한 대작의 그림을 거실 벽에 걸 수 있는 것은 가장의 손아귀에 들려있던 망치 때문이고 기꺼이 몰매를 버티며 벽을 파고든 의 덕분이다. 걸개를 위해 버텨주는 과 제 머리통을 순순히 망치에게 내어주는 못, 이들 3중주의 화음으로 집을 꾸미고 질서를 만들어간다.

망치질에서 든든한 가부장의 권위를 느낀다. 균형 잡힌 망치질은 한 가정의 중심축, 아무리 남녀평등을 넘어 여성 상위시대라고 해도 그것은 가장의 몫이다. 망치질에는 기술이 필요하다. 너무 센 망치질도, 허술한 망치질도 문제가 있다. 제대로 박히지 않은 못에 걸린 액자는 와장창 떨어지고, 힘의 방향조절을 못해 벽을 파고들지 못한 못은 구부러지거나 튕겨나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가정파탄이 이와 다르지 않다. 구실을 못하는 못은 장도리의 이빨로 아예 빼버리지 않는가.

대장장이였던 당숙은 시골집 마당 한 켠에 차려놓은 대장간에서 망치질로 늙었다. 시뻘겋게 달궈진 쇠는 당숙이 두들기는 망치질 장단과 담금질에 호미며 낫, 칼과 도끼로 태어났다. 대장간 허름한 틈으로 내려다보던 하늘은 그 장단에 흥이 났는지 기분 좋은 쪽빛이었다. 나는 경쾌하면서도 정직한 망치소리로 당숙의 땀과 노동을 읽었다.

수평과 수직의 각이 정확히 90도여야만 하는 공격적인 망치질은 외곬의 군인과 닮았다. 또한 한 우물만 깊게 판 끝에 달인이 되는 장인의 경지와도 같다. 망치는 잘못된 것을 두들겨 바로 펴는데도 쓰인다. 법관의 망치질이 그렇다. 혼돈의 세상을 바로잡는 그 행위의식처럼 나도 세상을 쾅쾅 두드려 평정해 보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쓸 일이 없어 잠을 자도 좋을 망치도 있다. 화재나 교통사고가 났을 때 유리창을 깨고 탈출하도록 비치해둔 지하철 객실의 망치가 그렇고, 남의 가슴에 대못질하는 설화(舌禍)의 망치가 그렇다.

부드러운 망치도 있다. 몇 해 전 독일에서 수제과자 ‘슈니발렌’을 나무망치로 두드려 부숴먹은 기억이 있다. 어린아이 주먹만 한 크기로 휴지를 뭉쳐놓은 듯한 딱딱한 과자는 두들기는 재미와 약간의 노동이 곁들어진 놀이가 미감을 자극했는지 고소한 맛이 유별났다.

망치처럼 두드리지 않고도 구멍을 뚫는 공구가 드라이버이다. 망치가 타격으로 못을 박아 넣는다면 드라이버는 악력으로 상대를 살살 달래면서 밀어 넣는다. 남자가 관심 있는 여인에게 접근하는 방식은 망치처럼 직접적인 방법보다 드라이버와 같은 정교한 우회기술이 더 효과적이다. 그러나 자칫 정교함이 노련함이나 능수능란함으로 비쳐져서 바람둥이로 오인 받을 소지도 있으니 유념할 일이다.

드라이버는 쓰임새에 따라 십자나 일자 육각 등 다양하다. 그것은 구멍을 뚫고 파고들기도 하지만 조여진 나사를 푸는데도 요긴하다. 들숨과 날숨을 적절히 안배하는 노련한 마라톤 선수처럼, 조임과 풀어냄도 이와 같다. 너무 조였다 싶으면 풀어주고, 너무 풀었다 싶으면 눈치 채지 못하게 조이는 아량과 요령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법. 이 또한 가장으로, 부모로, 스승으로, 직장상사로서 알아야할 삶의 기술이 아닌가 싶다.

끌과 대패

끌이 파고드는 재주를 가졌다면, 대패는 깎아내는 재주를 가졌다. 끌은 붓이 생겨나기 전부터 사용된 도구다. 끌로 나무의 면에 금을 긋거나 모양을 새긴 것이 글자 구실을 하였다. 본격적인 건축도구가 되면서부터 끌은 구멍을 팔 때 주로 쓰이게 되었다. 끌은 저 혼자 임무를 수행할 수가 없다. 망치가 있어야 힘을 쓸 수 있고, 숫돌이 있어야 무딘 날을 예리하게 만들 수 있다.

끌은 섬세한 손을 가진 세공사, 혹은 예술가다. 못을 쓰지 않는 전통가옥을 지을 때, 기둥과 대들보와 중보를 접합하거나 조립하여 짜 맞추려면 끌이 필수적인 연장이다. 파고 쪼고 맞물리는 일을 잘해야 건축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다. 또한 끌의 정교함으로 짜 맞춘 고가구는 못을 쓸 필요가 없고, 그 이유로 가치가 높다. 어떤 일을 마무리함에 있어 끝까지 세밀하게 살피고 검토하는 작업은 끌이 하는 일과 같다. 대충 빨리 끝내려는 이에게 정교함과 섬세함을 자랑으로 삼는 끌은 엄한 꾸중을 내릴지도 모른다.

대패가 나무의 속살을 한 켜 한 켜 벗겨낼 때마다 향긋한 냄새가 난다. 나무의 결을 거스르지 않는 대패질은 섬세해서 끌의 정교함과 맞먹는다. 미농지처럼 일어나는 나무의 살결. 한때 유행했던 대패삼겹살을 떠올리고 입 안 가득 식감을 돋게 한다. 목수와 대패가 한 호흡으로 이루어내는 규칙적인 마름질에 세속의 욕망도 벗겨지지 않을까. 유능한 목수는 나무의 결을 잘 읽는다. 아름다운 무늬는 오랜 시간 속에서 이루어낸 나무의 역사이자 영혼이라는 걸 몸소 터득한 목수는 절대 나무의 결을 거스르지 않는다. 삶의 흐름을 따라 잘 흘러가는 사람은 그래서 유능한 목수와 같다.

공구는 노동의 도구이자 놀이도구이다. 무엇인가 손에 잡고 땀을 쏟고 싶은 욕구는 공구를 만들고 그것을 통해 노동 혹은 놀이를 하는 것이다. 인간존재의 밑바탕에 놀이와 재미가 본질로 깔려 있다는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 1872~1945년)의 말은 그런 의미에서 유효하다. 그래서 집을 지은 목수는 다시 연장을 챙겨 새로운 놀이를 찾아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것이리라. 그러니까 어쩌면 공구학은 인간학이 아닐까.

최장순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육군에서 오랜 세월 몸담고 대령으로 전역한 후 ‘쓰지 않을 수 없는 절실함’에 글을 쓰게 됐다. 수필 전문지 『에세이스트』와 『에세이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수필집 『이별연습』(2009)과 『유리새』(2013)를 출간했다. 경기도문학상(2009), 현대수필문학상, 한국산문문학상, 대한민국 환경문화대상(2007, 문예 부문)을 수상했다. 한국문인협회, 국제펜(International PEN) 회원, 한국수필문학진흥회 부회장을 지냈으며, 계간 『에세이피아』 주간 및 발행인을 역임했다. “일상을 떠난 삶이 없듯, 일상을 벗어난 문학도 없다”, “작가는 일상의 반복성에서 오는 지루함과 싸우는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글을 쓴다.

※ 수필 「공구학 개론」은 최장순 에세이 『유쾌한 사물들 : 보고 읽고 쓰다』(북인, 2018) 제1부 첫 글(11~17쪽)이며, 2014 에세이문학 작품상 수상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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