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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선언의 역사적 의의

카이로선언에서 열강 간 국제공동 신탁통치 합의 대신 한국의 독립이 보장된 것은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의 외교 활동이 쟁취한 성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이러한 카이로선언상의 즉시독립 유보조항에 대한 반대가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한 한반도 신탁통치 실시 발표에 대한 반탁운동으로 연결되었으며, 1947년 미국이 신탁통치안을 파기함으로써 신탁통치가 배제된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독도 주권에 대해 일본이 제기하는 독도영유권 주장은 카이로선언에서 천명한 폭력과 탐욕의 본질로서 일제식민주의와 일치하는 것이다. 일제식민주의에 입각하여 정당하고 적법한 국제법적 권원(權原)이 결여된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은 한국의 영토주권에 대한 중대한 침해라는 점에서 일본의 진정한 역사적·국제법적 책무의 수행을 촉구하고자 한다. 그것은 오늘 동아시아평화공동체를 향한 카이로선언 80주년을 맞이한 우리에게 역사가 되묻는 질문이자, 우리가 역사적 성찰로 응답해야 할 역사 정의의 과제이다. 사진=정일화, 『카이로 선언 : 대한민국 독립의 문』(선한약속, 2010) 표지

국제법적 관점에서 본 카이로선언과 한국 독립 문제

❙독도침탈 등 일본 약취 한국 영토 반환을 선언
❙신탁통치 아닌 한국 독립 보장은 김구·임시정부 외교활동 성과

도시환 동북아역사재단 책임연구위원

카이로선언의 역사적 의의

올해는 제2차세계대전이 진행되던 1943년 최초이자 유일하게 한국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약속한 카이로선언(Cairo Declaration)이 발표된 지 80주년이 되는 해이다. 카이로선언은 1943년 11월 미국의 루즈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영국의 처칠(Winston Churchill), 중국의 장제스(藏介石) 등 세 지도자간 카이로 회담(1943. 11. 22~27)에 이어, 테헤란 회담(1943. 11. 27~30) 종결 후인 1943년 12월 1일 발표되었다. 테헤란회담은 앞의 미국․영국 지도자 및 소련의 스탈린(Joseph Stalin)이 참가하여 카이로선언을 승인하였는데, 전후 일본에 대한 처리 및 동북아질서 구축에 관한 최초의 국제적 합의였다.

태평양전쟁 이후 일본의 침략을 응징하고 일본이 탈취한 영토에 대해 중국과 한국의 영토주권 회복 및 한국의 독립이라는 아시아 국가의 탈식민지화에 비중을 두고 있는 점은 주목할 부분이다. 이러한 카이로선언은 연합국의 대일 영토정책에 있어 기본원칙으로, 이를 승계하여 대일 항복 요구를 비롯한 대(對)일본 종전 합의의 기본원칙이 된 포츠담 선언 제8조에 인용됨으로써 연합국의 공식적인 대일 영토정책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카이로선언의 배경과 내용

카이로선언은 루즈벨트의 특별보좌관인 해리 홉킨스(Harry Lioyd Hopkins)가 초안을 작성하였다. 이러한 홉킨스 초안은 루즈벨트의 교정을 거쳐 미국안으로 확정되었고 영국과 중국의 수정과 검토를 거쳐 발표되었다. 홉킨스 초안에서 수정된 내용 중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한국의 영토주권 회복 및 독립과 관련한 문항이다.

첫째, 홉킨스 초안은 제1차세계대전 및 청일전쟁이라는 시간적 범주에 더하여 ‘폭력과 탐욕(violence and greed)’이라는 영토 약탈의 본질적 개념으로, “일본이 폭력과 탐욕으로 정복한 모든 점령지는 그들의 손아귀에서 자유롭게 될 것이다(all the conquered territories taken by violence and greed by the Japanese will be freed from their clutches.)”를 제시하였는데, 영국에 의해 “일본은 그들이 폭력과 탐욕으로 점령한 모든 영토에서 추방될 것이다(Japan will also be expelled from all her territories which she had taken by violence and greed.)”로 수정되었다.

둘째, 한국의 독립시기와 관련하여 홉킨스 초안에서 ‘가능한 한 빠른 시기(at the possible earliest moment)’에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내용을 루즈벨트가 ‘적절한 시기(at proper moment)’로 교정하였고, 영국이 이를 다시 ‘적절한 과정을 거쳐(in due course)’로 수정하였다.

일본에 대한 영국·미국·중국 3국 선언으로 1943년 12월 1일 발표된 카이로선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루스벨트 대통령, 장제스 총통, 처칠 수상은 각자의 군사·외교 고문과 함께 북아프리카에서 회의를 마치고 아래의 일반적 성명을 발표한다. 각 군사 사절은 일본에 대한 장래의 군사 행동을 협정하였다. 삼대 동맹국은 해로, 육로, 공로로써 야만적 적국에 대하여 가차 없는 압력을 가할 결의를 표명하였다. 이 압력은 이에 증대되어가고 있다. 삼대 동맹국은 일본의 침략을 제지하고 다만 이를 징벌하기 위하여 지금의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바이다. 연합국은 자국을 위하여서는 아무런 이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영토 확장에 여하한의 생각도 가진 것이 없다.
  • 연합국의 목적은 일본으로부터 1914년 제1차 세계전쟁의 개시 이후에 있어 일본이 탈취 또는 점령한 태평양에 있어서의 모든 도서를 일본으로부터 박탈할 것과 아울러 만주·타이완·펑후제도(澎湖諸島) 등 일본이 청국으로부터 도취(盜取)한 일체의 지역을 중화민국에 반환함에 있다. 일본은 또한 폭력 및 탐욕에 의하여 일본이 약취(略取)한 다른 일체의 지역으로부터도 구축될 것이다. 전기 삼대국은 조선 인민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절한 과정을 거쳐 조선을 자유롭게 독립시킬 것을 결정한다.
  • 이 목적으로써 삼대 연합국은 일본과 교전 중인 동맹 제국과 협조하여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확보하기에 필요한 중대하고 장기적인 작전을 계속 견인한다.

카이로선언과 한국 영토주권의 회복

한국의 영토주권 회복과 관련하여 카이로선언에는 일본으로부터 반환 및 일본이 축출되어야 지역으로 3개의 범주를 설정하고 있다.

첫째, 1914년 제1차세계대전의 개시 이후에 있어 일본이 탈취 또는 점령한 태평양에 있어서의 모든 도서, 둘째, 1894~1895년 청일전쟁 이후 만주·타이완·펑후제도(澎湖諸島) 등 일본이 중국으로부터 도취(盜取)한 일체의 지역, 셋째, 일본이 폭력 및 탐욕에 의하여 약취(略取)한 다른 일체의 지역 등이다.

카이로선언상 한국의 영토는 세 번째 범주인 “일본이 폭력 및 탐욕에 의하여 약취(略取)한 다른 일체의 지역”에 해당한다.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주목하게 되는 것은 일본이 주장하는 독도영유권과 관련하여, 첫째, 일본국제법학계의 히로세 요시오(広瀬善男)의 국제법사관이 제기하는 1914년 제1차세계대전 이전인 1905년 일본의 독도 침탈과 을사늑약 강제는 모두 국제법상 합법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일본의 독도침탈 당시의 국제법도 침략적 국가실행과 유착된 일본형 법실증주의가 아닌 보편적 국제규범에 입각한 규범성이 제고되고 있는 시점이다. 또한 1905년 을사늑약은 1963년 UN의 조약법협약 법전화 과정에서 1935년 ‘하버드법대 초안’의 국가대표에 대한 강박에 따른 무효조약의 전형으로 제시된 문제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둘째, 청일전쟁 후 청일 간에 체결된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에서 일본에 할양된 랴오둥반도, 타이완, 펑후제도와 관련하여, 1943년 카이로선언에서는 도취(盜取)하여 반환해야 하는 지역으로, 1951년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제2조 (b)항에서는 일본이 포기해야 할 영역으로 명시하고 있는 점에서, 청일전쟁은 일본의 침략전쟁과 영토팽창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출발점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셋째, 한국은 제1차세계대전 및 청일전쟁이라는 시간적 범주에 더하여 ‘폭력과 탐욕(violence and greed)’이라는 영토 약탈의 본질적 개념에 입각하여,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제2조 (a)항 상의 일본이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는 기점으로서 1910년 ‘한일강제병합’이후가 아니라 그 이전인 1905년 독도침탈을 비롯하여 일본이 약취한 한국 영토가 있다면 모두 독립된 한국에 반환하여야 함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카이로선언과 한국 독립의 시기

카이로선언은 한국 인민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절한 과정을 거쳐 한국을 자유롭게 독립시킬 것을 결정하였다. 그런데 한국의 독립시기와 관련하여 홉킨스 초안에서는 일제 패망과 더불어‘가능한 한 빠른 시기’의 독립을 의미했으나, 다국적 신탁통치안을 구상하고 있던 루즈벨트에 의해 ‘적절한 시기’로 교정되었다. 처칠 수상은 이러한 미국안에 대해 ‘적절한 과정을 거쳐’로 수정하였는데, 자국의 인도 식민지 및 홍콩 문제들을 감안하여 식민지 독립 및 독립시기에 대해 가급적 모호하고 불명확한 용어 사용을 통한 소극적 접근으로 볼 수 있다.

결국 한국의 독립시기와 관련하여 ‘적절한 과정을 거쳐(in due course)’라는 표현은 시간적으로는 독립의 유예를 의미하며, 과정적으로는 신탁통치라는 절차를 거친 뒤에야 한국의 독립이 달성될 것이라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루즈벨트의 신탁통치안은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면 식민지에서 독립될 지역에 실시할 새로운 제도로서 1940년대 초에 구상한 것이었다.

이후 1941년에는 전후 한반도에 ‘국제보호’라는 제도가 적용될 것이라는 소문이 중국에 확산되어 망명한국인들이 강하게 반대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더욱이 1942년 4월부터 Fortune, Life, Time 등의 매거진에서 한반도국제공동관리안이 보도되자, 임시정부의 김구, 조소앙 등을 비롯하여 미국의 이승만은 한국의 절대적 독립을 요구하면서 즉각 반발하였다. 당시 신탁통치 구상과 관련하여 한국의 즉각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면 반대한다는 태도를 명확히 한 것이다. 카이로선언에서 열강 간 국제공동 신탁통치 합의 대신 한국의 독립이 보장된 것은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의 외교 활동이 쟁취한 성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이러한 카이로선언상의 즉시독립 유보조항에 대한 반대가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한 한반도 신탁통치 실시 발표에 대한 반탁운동으로 연결되었으며, 1947년 미국이 신탁통치안을 파기함으로써 신탁통치가 배제된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평화공동체의 과제

카이로선언은 제2차세계대전 중 한국의 독립에 대한 국제적인 보장을 비롯하여 일제의 침략으로 유린되었던 동아시아에서의 역사정의 구현의 출발점이었다. 카이로선언의 배경과 내용, 한국 영토주권의 회복, 한국 독립의 시기 등을 검토해 보았다.

먼저, 카이로선언에서 한국의 독립시기와 관련하여 ‘in due course’라는 표현이 갖는 시간적 유예와, 과정상의 열강간 신탁통치가 아닌 한국의 독립이 보장될 수 있었던 것은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의 외교활동이 쟁취한 성과로 높이 평가하고자 한다.

남겨진 과제로서 한국의 독립과 영토주권의 회복 문제와 관련하여, 일본은 1905년의 독도침탈이 카이로선언상의 제1차세계대전 이전일 뿐만 아니라,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제2조 (a)항 상의 일본이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는 기점으로서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전이므로 국제법상 합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냉전체제의 대두라는 역사적 변곡점을 활용한 일본의 국제법 법리의 왜곡에 대한 검토가 긴요한 과제라 할 것이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에 즈음한 연합국의 대일영토정책과 관련하여, 카이로선언(1943. 12. 1)을 기점으로, 포츠담선언(1945. 7. 26), 항복문서(1945. 9. 2) 및 연합국 최고사령부의 SCAPIN 677호(1946. 1. 29), SCAPIN 1033호(1946. 6. 22)를 경유하여,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제5차 초안까지 독도는 한국령으로 표기되었다.

그러나 주일 미국정치고문 W. 시볼드(William J. Sebald)를 동원한 일본의 로비를 통해 제6차 초안에서 유일하게 일본령으로 변경된 이후, 최종 조약문까지 독도는 구체적으로 특정되지 않은 채 생략되었다. 더욱이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에 대한 일본 의회의 비준 동의를 요청하는 과정에서 1951년 8월 일본 해상보안청이 제작한 「일본영역참고도」에는 일본 스스로 독도를 한국령으로 표기하고 있다.

한국의 독도 주권에 대해 일본이 제기하는 독도영유권 주장은 카이로선언에서 천명한 폭력과 탐욕의 본질로서 일제식민주의와 일치하는 것이다. 일제식민주의에 입각하여 정당하고 적법한 국제법적 권원(權原)이 결여된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은 한국의 영토주권에 대한 중대한 침해라는 점에서 일본의 진정한 역사적·국제법적 책무의 수행을 촉구하고자 한다. 그것은 오늘 동아시아평화공동체를 향한 카이로선언 80주년을 맞이한 우리에게 역사가 되묻는 질문이자, 우리가 역사적 성찰로 응답해야 할 역사 정의의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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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환 동북아역사재단 책임연구위원이며, 『영토해양연구』 편집위원장을 맡고 있다. 청와대 바른역사정립기획단 선임연구관, 통일부 통일교육전문위원, 국가보훈처 독립유공 공적심사위원, 여성가족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지원 심의위원, 일본경제침략대책특별위원회 위원을 역임하였다. 저서로 『한일강제병합 100년의 역사와 과제』(한·영·일), 『한일협정 50년사의 재조명 I~V』,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과제 Ⅰ~Ⅲ』, 『독도 영토주권과 국제법적 권원 I~III』,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70년의 역사와 과제』 , 『한국의 독도주권과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등 다수가 있다.

※ 이 글은 『월간 순국』과 함께 사람과사회™에 함께 게재하는 것입니다.

About 김종영™ (915 Articles)
사람과사회 발행인이자 편집장이다. ‘글은 사람과 사회며, 좋은 비판은 세상을 바꾼다’는 말을 좋아한다. weeklypeopl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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