批評, 그리고 페이스북
“비평은 문학 산업의 선전 분야로 전락했거나 학계의 내적인 문제가 돼버렸다”
비평·SNS·페북
비평적 공론 장과 SNS
-페이스북 이용에 관한 단상
오길영 충남대 교수
계간 <문학선> 2016년 겨울호에 발표한 글이다. 이 잡지의 봄호가 출간되었기에, 지난 글을 올려둔다. SNS 시대 비평의 위상을 생각해봤다. 달라진 매체환경과 비평가의 관계는 앞으로도 계속 고민해볼 주제다.
-필자 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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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비평가인 테리 이글턴이 지적하듯이, 현대 비평의 역사는 그 비평이 작동하는 ‘공적 영역’(the Public Sphere)의 발전과 연결되어 있다(이글턴, 『비평의 기능』). 이런 공적 영역이 시민사회(Civil Society)의 기반이다.
‘공적 영역’의 다른 이름이 ‘공론의 장’이다. 여기서 공론이란 허구적인 객관성이나 중립성을 가장한 담론이 아니다. 그런 중립성과 객관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찍이 평론가 김현이 예리하게 지적했듯이, 주어진 객관성은 없으며 객관성을 향한 지속적인 객관화의 과정이 있을 뿐이다.
비평은 현상학적인 의미에서 기본적으로 주관적이다. 어떤 비평가도 작품과 세계 해석에서 초월적인 객관성의 위치를 자임할 수 없다. 비평가는 자신의 시각에서 하나의 비평적 발언을 비평의 공론 장에 던진다. 그렇게 던져진 발언에 대해 다른 비평가나 독자들이 반응하고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 좀 더 설득력 있는 논의를 생산한다. 이것이 비평공론 장에서 객관화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발전 속에서 시민사회의 공론 장은 시장경제의 물신화, 상품화의 힘에 종속되는 경향을 보인다.
문학제도와 출판계로 좁혀서 말하자면, 근대문학의 핵심 쟁점이었던, 작품의 자율성과 예술성은 상품화의 논리에 정복당한다. 공론의 장은 사라져간다. 비평의 위상도 마찬가지다. 작년(2015)의 ‘표절논란’에서 또렷하게 드러났듯이, 비평은 실질적인 사회적 기능을 잃어버렸다. “비평은 문학 산업의 선전 분야의 한 부분으로 전락했거나 아니면 순전히 학계의 내적인 문제가 돼버렸다.”(이글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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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적인 차원에서 공론 장은 시민사회의 구성원들이 이성과 합리성에 따른 의견을 자유롭고 평등하게 개진하고 그런 소통을 통해 상대적으로 가장 설득력 있는 시민적 공론을 도출하는 것이다. 자율성, 합리성, 이성, 그리고 궁극적으로 진리의 가치가 시민적 공론장의 원리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화되기 쉽지 않다.
자본주의 시민경제를 지배하는 다른 가치들인 이익, 이해관계, 권력, 힘, 세력은 시민적 원리들을 압도한다. 그 결과 시민적 공적 영역은 시장가치가 지배하는 문화산업으로 전락한다. 문화산업은 시민적 가치가 아니라 이윤 추구를 핵심으로 한다. 예술작품은 상품이 된다.
비평적 공론장의 작동은 비평 매체의 문제와 관련된다. 이글턴이 지적하듯이, 근대비평의 역사는 시장경제와 문화산업에 맞서 저항하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았는데, 그런 저항의 정신은 현대비평에서 사라졌다. 비평 매체는 이런 저항의 역사와 관련된다.
근대비평의 핵심적 매체였던, 그리고 지금도 그런 역할을 해온 신문과 문예 잡지는 한때 그런 저항의 거점역할을 했다. 한국의 경우만 보더라도, 범박하게 말해 196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문예 잡지는 비평적 공론장의 역할을 감당했다. 그 당시 한국문학비평은 단지 문학비평이 아니나 사회비평이고 현실비평이었다. 나는 그런 비평들을 읽으면서 작품을 읽는 안목만이 아니라 사회와 현실을 조망하는 훈련도 받았다. 이것은 단지 당시 발표된 비평들의 질적 수준의 문제로만 설명될 수 없다.
다른 요인들이 작용한다. 당대의 잡지는 ‘글’의 영향력이 여전히 살아있던 시대의 산물이었다. 당시 어느 계간지의 영인본이 대학가에서 불티나게 팔린 것은 하나의 사례이다. 비평은 좋은 의미에서 당대 시민적 공론장의 최선두에 섰으며, 시민적 공론 장을 억압하는 정치, 경제적 힘들에 강력하게 맞서는 역할을 했다. 여기에는 아직 시민적 공론 장을 완전히 ‘영토화’(들뢰즈)하지 못한 한국 자본주의의 수준도 배경으로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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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의 사실이지만, 이제 문예 잡지가 그런 역할을 감당하는 시대는 끝났다. 물론 지금도 많은 문예 잡지들이 발간된다. 그러나 내가 알기에, 주요 문예지의 경우에도, 발간부수는 계속 줄고 있으며, 독자층은 급격히 노쇠화 되고 있다.
이런 양적 측면만이 아니라, 문예지의 사회문화적 영향력도 왜소해졌다. 물론 아직도 어떤 문예지들은 “저항과 창조의 거점”을 자임하지만, 그런 자임은 시대착오적이고 일종의 자족주의다. 현실에서 힘을 행사하는 것은 관념적 자임이 아니라 말과 글이 행사하는 물질적 힘이다.
지금 문예지의 담론적 영향력은 거의 사라졌다. 두 가지 예를 들겠다.
“사회자 : 성폭력은 문단 내에선 수십 년간 계속돼왔는데 공론화되지 못했다. 어떤 계기로 터져 나왔다고 보나. 김민정 시인 : 강남역 살인사건도 있었지만, 올해 들어서 유독 페미니즘을 다룬 책들이 많이 읽혔다. 우리 삶을 해석해낼 ‘텍스트’가 생긴 것이다. 내가 데뷔했을 때만 해도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리 자체가 없었다. 지금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가 그 역할을 한다.”
-경향신문 좌담 중에서
작년(2015)의 표절 논란과 지금 제기되는 문화계의 성추문 논란이 확산되고 커다란 쟁점이 된 이유 중 하나는 SNS 때문이다. 문예 잡지가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던 시대에는 상상할 수 없는 변화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표절과 성추문은 한국문학공간에 이미 인지된 문제였는데도 불구하고 전에는 표면화되지 못했다. 그러나 대중화된 SNS의 시대가 된 지금, 동시간적으로 정보가 확산되고 공유되는 SNS의 특성에 의해 문화계의 특정한 세력이나 권력이 제기되는 쟁점을 억압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확산된 정보는 다시 신문과 방송 등의 기존 언론 매체에 의해 수용되고 더 확산된다. SNS와 언론매체 사이에 상호 정보교류와 확산의 시스템이 작동한다. 그러나 이런 경향이 비평의 위상과 관련해 반드시 긍정적인 기능만을 한 것은 아니다. 대중문화평론가 강헌의 말이다. 그는 ‘네이버’ 별점이 문화산업을 지배하는 현실을 비판한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문화비평을 하면서 먹고 살았어요. 지금은 불가능합니다. (글을 발표할 수 있는) 매체가 다 죽었어요. 네이버가 모든 걸 통제합니다. 네이버를 파괴시켜야 합니다.”
조금 극단적인 주장이긴 하다. 문화비평의 죽음은 특정 포털 사이트의 폭력 때문이 아니라, 비평이 작동하는 담론의 공간이 변화한 현실이 배경으로 작용한다. 앞서 지적했듯이, 종이매체에 발표되는 비평, 그래서 그걸 통해 “먹고 살았”던 시대는 끝났다. 그런 시대를 그리워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소설가 이인성의 말에 기대면, “돌이킬 수 없는 것은 그래야 한다.”
글을 발표할 수 있는 매체가 다 죽은 것이 아니라, 그 매체의 성격과 위상이 달라졌다. 문예지들의 영향력이 예전 같지 않다고 해서, 잡지에 발표되어 영향력을 행사했던 비평을 지금은 거의 아무도 읽지 않는다고 해서, 비평의 공간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여기서 비평과 SNS의 관계가 문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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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에 대해 나는 총괄적이고 객관성을 담보한 설명을 할 역량이 없다. 개인적 소회 정도를 적는다. 문예 잡지의 영향력이 예전에 비해 줄어들었지만, 그것은 전사회적 지평에서 하는 말이고, 아직도 한국문학의 제도적 공간 혹은 ‘문단’에서 몇몇 유력한 문예 잡지들의 영향력은 크다.
한국문학의 독자층은 현격히 줄고 있지만, 여전히 작가나 비평가들은 이런 잡지를 내는 출판사에서 책을 내고 비평을 발표하길 원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문단에서의 ‘상징자본’(부르디외)을 획득하는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창작(작가나 시인)의 사례는 언급하지 않겠다. 이런 질문만 살펴보고 싶다. SNS 시대에 비평의 위상은 무엇인가?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문예지에 발표되는 비평을 읽는 이는 거의 없다. 하물며 비평집을 읽는 독자는 거의 사라졌다.
그렇다면 지금 비평은 무엇을,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기본적으로 외국문학 연구자로서의 정체성을 먼저 생각하는, 그래서 한국문학 장에서 발표되는 작품들을 그때그때 따라 읽으면서 비평을 하는 ‘현장비평가’가 못되는 게으른 비평가의 주관적 소회이지만, 작년(2015)의 표절논란을 겪으며 나는 비평의 위상과 역할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구체적으로는 비평 공간과 매체의 의미를 고민하게 되었다. 한국문학 공간에서 나름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유력 잡지에 편집자나 고정 필자로 활동하는 것은, 비유가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안정된 성곽으로 보호받는 진지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 성이 얼마나 견고하게 축조된 것인지와 상관없이, 잡지라는 매체는 그와 관련을 맺은 이들, 예컨대 편집위원 혹은 여러 인간적 관계에 따른 비평가나 작가들이 글을 발표하고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튼튼한 터전이다.
유력 잡지의 힘은 여기서 나온다. 문학의 힘이 예전 같지 못하다지만, 적어도 한국문학 공간에서 활동하는 이들에게 이런 진지의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여부는 활동력의 진폭을 강하게 규정한다. 문학 제도의 힘이다. 그 힘이 부정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사례가 작가나 평론가의 등단과정에서 작동하는 스캔들이다. 최근의 성추문 논란은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유력문예지를 중심으로 편성된 문학제도는 제도 안에서 허용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날카롭게 구분한다.
“문학제도와 단절하는 것은 단순히 베케트에 대한 다른 설명을 제시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문학, 문학비평 그러고 그것을 지탱하는 사회가치들이 정의되는 방식들과의 단절을 뜻한다. 어떤 독서방법들이 일반적으로 허용되는가를 강력히 결정하는 학술제도가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고 ‘문학제도’는 학계(아카데미)뿐만 아니라 발행인들, 문학편집자들, 평론가들을 포함한다. 휠덜린에 대한 이런 해석과 저런 해석 간의 단순한 싸움이 아니라 해석 자체의 전략들, 관습들 그리고 전략들을 둘러싸고 행해지는 싸움이 존재한다. 휠덜린이나 베케트에 대한 어떤 설명이 자기의 것과 다르다고 해서 처벌할 교사들이나 평자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 중 대다수는 어떤 설명이 그들에게 ‘비문학적’으로 보인다는 이유로, ‘문학비평’에서 인정되고 있는 경계나 절차들을 넘어서고 어겼다는 이유로 처벌할 것이다. 문학비평은 보통 ‘문학비평적’인 것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한에서는 어떤 특별한 해석을 명령하지 않으며, 무엇이 문학비평으로 합당한가 하는 것은 문학제도가 결정한다.”
-이글턴, <문학이론입문>
본인들이 의식하든 않든, 글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표현, 전달하는 작가나 비평가에게 그런 안정된 공간을 갖고 있다는 것은 강력한 보호의 성곽이 된다. 그리고 그 진지는 그 진지 안에 자리 잡은 이들을 보호해 주지만, 동시에 그들로 하여금 진지를 보호할 것을 요구한다. 진지의 양면성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한국비평공간의 ‘경계인’으로서 그럴 생각도 별로 없지만, 나는 그런 성곽 안에 있지 않다. 의도하지 않게, 표절 논란에 참여하게 되면서, 소위 ‘문단권력’에 찍힌 비평가로서 그런 잡지와 출판사에서 비평을 발표하거나 책을 낼 기회는 거의 봉쇄되었다. ‘현장비평’과는 거리를 두고 있는 비평가로서 나는 그런 봉쇄에 대해 별 유감이 없다.
다만 두 가지는 지적해두고 싶다. 첫째, 성곽 안의 비평가들은 그 밖에 있는 비평가들을 이렇게 힐난한다. 평소에 실제 작품 비평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문단에 무슨 문제만 생기면 나서는 비평가들, 이른바 문단권력을 비판하는 비평가들이 ‘실제 작품 비평’을 정말로 제대로 안 하고 혹은 못하고 있는지는 구체적으로 살펴볼 일이다. 다만, ‘찍혔다’는 이유로 자신들이 운영하는 주류 문예지와 출판사에서 발표의 기회를 박탈해놓고 이런 힐난을 하는 태도는 생각해봐야 할 일이다. 정실주의는 문학계 밖에서만 일어나는 추문이 아니다.
둘째, 비평가들의 개별적 상황을 섬세하게 고려해야 한다. 예컨대 문예창작과에서 일을 하고 있는 비평가들의 경우는, 쏟아지는 작품들을 따라 읽고 비평 작업을 하는 것이 제도권 학계에서의 ‘생존’ 메커니즘과 충돌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비평을 해야 하는, 다시 말해 아무리 비평을 많이 써도 제도권 학계의 ‘업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비평가들의 상황은 다르다. 비평 활동의 물적 조건이 다르다. 맥락을 섬세하게 파악해야 한다는 조언은 단지 작품 읽기에만 적용되는 말이 아니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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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작년(2015)의 표절 논란 과정에서 문단권력을 비판하는 발언들이 성곽 안에 자리 잡지 못한 데 대한 ‘사적 원한’이나 ‘피해의식’의 소산이라고 몰아붙이는 발언도 나왔다. 이런 시각은 모든 비판을 ‘인정투쟁의 욕망’으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원한론’ 혹은 ‘인정투쟁’론은 달을 가리키는데 달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그 손가락이 누구의 것인가를 묻는 태도 혹은 진영주의와 뿌리를 같이 한다.
작년(2015)의 표절 논란 와중에 내가 동의할 수 없는 비판 혹은 비난의 포탄들이 주류문예지의 진지에서 날아오는 경험을 했다. 그런 성곽과 진지를 갖지 못한 성곽 밖의 비평가는 어떤 경로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개진하고 반론을 펼 수 있을까.
성곽의 주인들에게 구차하지만 나에게도 발언권을 달라고 요청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내가 다른 진지 안에 자리를 잡고 있다면 그 진지를 통해 해명 혹은 반격의 포탄을 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그런 안정된 발언의 진지가 없다.
나는 페이스북(페북)을 비롯한 SNS의 사회적, 문화적 기능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한다. 다만, 적어도 공적이고 안정된 비평적 발언의 진지를 갖고 있지 못한 나에게 페북은 좀 다른 의미를 갖는다. 페북은 그때그때 내가 문학과 문화에 대해서 하고 싶은 발언을 기동성 있게 표현할 수 있는, (아마도 지금으로서는 내게 유일하게 허락된) 공간이자 매체다. 물론 나는 문예지에 비평을 발표할 기회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 영향력이 예전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졌지만, 문예지는 문예지만의 역할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앞서 지적했듯이, 이른바 ‘유력’ 문예지를 포함해서 문예지들의 사회문화적 영향력은 보잘 것 없다. 이런 상황을 냉철하게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유력 문예지에 작품과 비평을 발표하는 것이 갖는 ‘상징권력’의 의미는 여전히 작동한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위축된 한국문학 장안에서만 가치를 지니는 일이다. 그 장을 벗어나면 영향력은 거의 없다.
루카치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맑스주의는 철학적 개념의 히말라야 산맥이지만 히말라야에서 뛰어 노는 꼬마 토끼가 계곡의 코끼리보다 더 크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쪼그라든 문학 지형에서 힘을 행사한다는 이유로 ‘계곡의 코끼리’보다 더 크다고 믿는 ‘꼬마 토끼’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그 토끼들이 매혹된 ‘문단’이라는 히말라야 밖에는 방대한 현실의 세계가 있다. 따라서 주제 파악 못하는 ‘꼬마 토끼’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이 노는 곳의 의미와 한계를 냉철하게 성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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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페북과 비평의 관계를 살펴보겠다.
첫째, 많아야 수백 명의 독자들에게 읽히는 문예지의 비평에 견주어 페북을 비롯한 SNS의 독자층은 수천 명, 수만 명이 될 수 있다. 나는 페북을 사용할 때 문학 작품과 영화 등의 ‘비평 텍스트’를 다룬 글을 쓸 때는 ‘페북 노트’ 기능을 이용한다. 페북 노트는 문예 잡지의 비평란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걸 발견했다. 빨라야 월간 혹은 계간으로 발간되는 문예지에 신속하게 작품 평을 게재할 수는 없으며, 독자와의 피드백을 받을 수도 없다. 페북 노트에 올리는 글들은 그런 시간의 제약에서 자유롭다.
최근에 나는 모(募) 문예지에 정유정 작가의 장편소설 『종의 기원』에 관한 비평을 발표했다. 발표 전에 초고 성격의 단상을 페북에 올렸고, 그에 대한 페북 방문자들의 다양한 논평과 반응을 읽으면서 많은 시사점을 얻었고, 최종 원고를 작성하는데 큰 도움을 받았다. 그 양상이 어떻게 전개될지 앞으로 더 살펴봐야겠지만, SNS는 우리시대의 공적 영역, 비평적 공론의 장의 한 부분을 감당할 수 있다는 판단이 든다.
둘째, 페북에서의 비평적 글쓰기는 언론과 방송과의 긍정적 협업을 통해 한국문화계에 즉각적이며 의미 있는 충격을 줄 수 있다. 문단 안팎의 표절 논란과 성추문 논란이 좋은 예이다. 페북에 올라오는 ‘좋은’ 글들과 비평들에 대해 언론은 예민하게 반응하며, 그런 글들을 거의 실시간으로 신문과 방송에 싣는다. 이런 양상은 종이 잡지에서는 찾기 힘든 모습이다.
물론 여기에는 ‘선정주의’의 위험이 있다. 정확하게 ‘사실’을 검증하지 않은 상태에서 SNS의 특성상 급속하게 전파되고 공유되는 정보들과 의견들은 자칫 그릇된 공론 형성에 악용될 수 있다. 나도 그런 우려의 경험을 몇 차례 한 경험이 있다. 그러므로 SNS와 기존 언론의 관계가 어떻게 전개될지는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겠지만, 어쨌든 SNS와 기존 언론매체와의 협업과 긴장 관계는 비평적 공론장의 역할과 관련하여 눈여겨봐야 할 지점이다. 매체의 문제를 소홀히 하는 비평이 살아남을 도리는 없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비평의 역할에 관해 이런 언급을 했다.
“비평가라는 인물이 갖는 확고함은 가능하면 개인적인 확고함이 아니라 사실적이고 전략적인 확고함이어야 한다.”
사람들이 비평가에 대해 아는 것은 그가 무엇을 지지하는가가 돼야 할 것이다. 비평가는 그것을 드러내야 한다. 다시 말해 비평가는 그가 속한 비평공간의 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고 기존의 관습과 제도에 안주하면서 자신의 역할을 자임하는 ‘개인적인 확고함’은 아무 의미가 없다. 벤야민이 문학, 영화, 문화의 내용보다 그 형식과 매체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전략적인 확고함’을 고민한 이유다. 우리시대 SNS는 그런 전략적 확고함을 고민하기 위한 중요한 매체이다.
다시 벤야민의 말이다.
“편견 없는 취미 판단에서 나온 정직한 비평은 흥미롭지 않으며 근본적으로 실체가 없다. 비평 활동에서 결정적인 것은 그 활동에 구체적인 청사진(전략적 계획)이 바탕에 놓여 있고, 그 청사진이 자신의 논리와 자신의 정직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한 청사진을 오늘날 거의 찾아보기 힘들게 됐는데, 그 까닭은 정치적 전략과 비평적 전략이 가장 커다란 경우에만 서로 합치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결국 그 둘이 합치하는 것이 목표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맥락 속에 다음의 비판적 계몽 작업을 배치할 수 있다. 독일의 독자층은 매우 독특한 구조를 띠고 있다. 즉, 독자층은 서로 엇비슷한 두 진영으로 갈라져 있다. 하나는 ‘관객’이고 다른 하나는 ‘서클’이다. 이 두 부분이 겹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관객’은 문학에서 오락의 수단, 친목을 촉진하고 심화하기 위한 수단, 고상한 의미나 저속한 의미에서의 기분 전환을 본다. ‘서클’은 문학에서 삶의 책들, 지혜의 원천, 그들의 작은 단체, 유일하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그런 단체들의 정관 같은 것을 본다. 비평은, 아주 부당하게도 지금껏 거의 오로지 ‘관객’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만 다뤘다.”
벤야민에게 비평이 수행하는 ‘비판적 계몽 작업’은 곧 ‘정치적 전략과 비평적 전략’을 합치시키려는 노력의 표현이다. 벤야민이 대중문학이나 대중문화에 경도된 ”관객“을 향한 비평의 의미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민적 공론의 장이 무너져가는 상황에서 ‘자신의 논리와 자신의 정직성’을 지닌 전략적 비평은 설 자리를 점점 잃어간다. 벤야민이 ‘서클’을 지향하는 비평의 방향을 언급한 이유다. 그러나 당연한 말이지만, 관객과 서클 사이에 만리장성은 없다.
새로운 의미의 시민적 공적 영역, 공론의 장으로서 우리시대의 SNS가 ‘삶의 책들, 지혜의 원천, 그들의 작은 단체, 유일하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그런 단체들’의 역할을 온전하게 감당할지 여부는 미지수다. 그러나 그런 가능성을 애초부터 배제할 이유도 없다. 지난 1년 동안 SNS에서 글쓰기와 비평을 해본 소회다. 더 많은 비평가들이 종이매체만이 아니라 새로운 비평적 공론장인 SNS의 글쓰기작업에 참여해보길 권한다. 잘 활용한다면 배우고 느끼는 것이 많을 것이다.
※ 이 글은 오길영 교수가 페이스북에 2017년 3월 15일(수)에 올린 글과 계간 『문학선』의 동의를 얻어 사람과사회에 게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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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문예지 “평론 부문 당선자 없습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9/01/2017090100156.html
비평은 죽어간다
https://www.facebook.com/ogyjoyce/posts/1219172821559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