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병합조약은 원천무효”
인터뷰
사람과사회™ 2021년 제4권 제1호 통권 제14·15호
도시환 동북아역사재단 책임연구위원
“한일지식인, ‘한일병합조약은 원천무효’ 최초 인정”
2010년 5월 10일, 한일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한국 지식인 109명과 일본 지식인 105명은 ‘1910년 한일병합조약은 불법적으로 체결됐으므로 원천무효’라는 내용을 담아 「한국 병합 100년에 즈음한 한일지식인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후 65주년 광복절을 앞둔 7월 28일, 한일 양국 지식인 1,139명이 역사적 정의에 따라 ‘1910년 한일병합조약은 원천무효’임을 재천명하는 공동성명으로 이어졌다.
한국에서는 고은 시인, 김영호 유한대학 총장, 이태진 서울대학 명예교수 등이 한국프레스센터(서울)에서, 일본 측은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대학 명예교수, 나카무라 마사노리(中村正軌) 히토쓰바시대학 명예교수 등이 일본교육회관(도쿄)에서 각각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기자회견은 한국과 일본 양국의 지식인이 동시에 한일병합조약의 불법성을 인정한 최초의 공동성명이다.
와다 하루키 교수는 “한일병합조약의 불법·무효 논란에 대해 일본 측 지식인 사이에서는 이를 받아들이면 병합 사실 자체가 무효가 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었다”면서 “그러나 조약이 처음부터 원천적으로 불법·무효라는 한국 측 주장을 수용하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져 성명이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유효부당론’을 인정하지 않고 ‘원천적으로 무효’라는 주장에 동의한 것이다. 유효부당론은 일본 학자들이 한일병합조약은 부당한 체결이지만 국제법으로 볼 때 문제가 없는 만큼 조약 자체는 유효하다는 논리다.
김영호 유한대학 총장은 “논쟁은 있었지만 열린 입장에서 한국과 일본이 역사적 화해를 이루자는 의미에서 추진했고 그 결실을 맺었다는 데 의미가 있다”며 “실제 이번 성명의 표현에 부담을 느껴 서명을 했다가 취소한 일본 측 인사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2020년 8월 4일, 강훈식 더불어민주당 수석대변인은 현안 브리핑에서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을 위한 일본 전범기업의 국내 자산에 대한 압류 명령이 가능해진 날”이라고 밝혔다. 2018년 10월, 대법원 배상 확정 판결에 근거해 대구지법 포항지원이 전범기업 자산 압류를 결정한 결과다. 강제징용과 위안부는 한일 관계에서 오랫동안 밀고 당기기를 지속한 문제다. 한국은 최근 몇 년 동안 이전과는 달리 일본의 과오와 피해를 위법으로 판단하고 그 결과를 적극적으로 내세우고 있다. 사회적 분위기와 여론도 이 같은 변화와 큰 차이가 없다. 이 때문에 한일 관계, 특히 ‘역사’ 차원에서 이뤄지고 있는 일련의 변화는 앞으로 지속적으로 관심과 눈길을 끌어들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2010년 한일지식인공동성명, 2018년 대법원 판결 등을 볼 때 한일 간 역사 논쟁에서 주목할 점은 시간이 지날수록 일본의 잘못을 더욱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와 일본 지식인이 반성과 사죄를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일본 지식인이 참여해 일본의 입장에 잘못이 있다는 내용을 담은 성명을 공식적으로 밝힌 만큼 새로운 역사 인식을 이끌어내는 데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기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역사적 시선에서 한일과 동북아시아 관계를 바라보는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도시환 동북아역사재단 책임연구위원은 한일 관계와 독도, 위안부 문제 등을 중심으로 꾸준한 연구 활동을 해왔다. △청와대 동북아평화를위한바른역사정립기획단(바른역사기획단) 선임연구관 △동북아역사재단 일본군위안부연구센터 센터장 △여성가족부 일본군위안부피해자지원및기념사업심의위원회(위안부피해자법) 심의위원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서훈공적심사위원회 심사위원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외래교수 △대한국제법학회 이사 △세계국제법협회(International Law Association) 한국본부 기획이사 및 ILA 한국국제법연감(Korean Yearbook of International Law) 편집위원 등으로 활동하면서 독도, 위안부, 독립유공자를 중심으로 동북아 역사와 국제법의 시각에서 연구하고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도 책임연구위원은 또한 일본의 국가주의를 연구해 비판했다. 을사늑약, 한일강제병합 관련 분야의 일본의 대표적인 연구자인 아리가 나가오(有賀長雄)의 ‘합법론’, 운노 후쿠쥬(海野福寿)의 ‘유효부당론’, 사카모토 시게키(坂元茂樹)의 ‘합법론’에 대해 국제법 양대 원칙인 주권국가 상호 간 ‘평등’과 ‘합의’를 위반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1910년 한일강제병합과 남겨진 후속과제인 1965년 한일협정에 대한 국제학술회의 개최를 통해 미국 역사학자 알렉시스 더든(Alexis Dudden)의 ‘식민지배불법론’, 일본 역사학자 나가하라 요코(Nagahara Yoko)의 ‘식민주의종식론’, 영국 인권변호사 캐비타 모우디(Kavita Moudi)의 ‘식민피해배상론’ 등 식민주의 종식의 더반선언과 피해자의 인권중심주의에 입각하여 일본 국가주의를 비판하기 위한 국제공동연구를 주도해 왔다.
2020년 8월 3일 오전 10시, 서울시 서대문구 미근동에 있는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도 책임연구위원을 만나 한일지식인공동성명, 독도 영토주권과 국제법적 권원, 한일 역사와 한일 관계 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도 책임연구위원은 2010년 5월 10일 지식인공동성명 제1차 서명자를 포함해 7월 28일 한국 측 599명, 일본 측 540명이 참여한 제2차 공동성명 서명에 참여한 바 있다.
도 책임연구위원은 인터뷰에서 일본이 국제법 전문가를 대거 양성해 국제사회에서 역사 관련 사안을 유리한 입장으로 전환하기 위해 오랫동안 전략적으로 추진해온 반면 한국은 매우 미비한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지적은 한일 간 역사 문제를 감정보다 법과 논리, 사실에 입각해 대응해야 한다는 주장과 맥락을 같이 한다.
“역사 화해와 동북아 평화 공동체 건설 모색이 계기”
▲2010년 5월 10일, 한일 지식인이 모여 ‘한일지식인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됐나?
한일 관계가 좋아질 수 있다는 기대감과 달리 2005년 ‘다케시마의 날’을 선포하는 등 일본은 100년 전 한국의 독도 주권에 대한 침탈의 역사를 기념하고 이를 계승하겠다는 역사 인식을 극명하게 표출했다. 을사늑약 100년의 시점에서 그와 같은 모습을 보인 것은 한일 양국이 역사적 화해보다는 갈등을 지속할 것이라는 점을 확인해준 것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환기할 게 있다. 2009년 2월과 7월 일제강제동원 피해 배상 항소심에서 한국 고등법원이 일본 내 손해배상소송에서 원고 패소를 확정한 2007년 일본 최고재판소 판결을 그대로 승인해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는 점이다. ‘기판력(旣判力) 존중’이라는 법리에 따라 한국 고등법원이 수용한 일본 최고재판소의 판결은 일본 정부가 주장하는 식민지배합법론과 한일협정완결론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대법원이 원심을 확정하면 한일강제병합 100년 만에 한국 사법부 판결로 일제의 식민지배가 합법으로 승인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일본은 한일협정으로 완결되었다거나 소멸시효가 완성되었다는 이유 등을 들어가면서 일제식민피해자에 대한 책임을 회피했다. 고등법원이 그 같은 논리를 그대로 인정한 셈이다. 한일강제병합의 합법화를 막지 못한다면 일제식민피해자의 구제를 비롯해 모든 게 끝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한일강제병합 100년 학술회의를 대규모로 개최했다. 2009년 국제학술회의에 참석했던 학자를 비롯해 전 세계에서 학자 33명을 초청했는데,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명을 고려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2010년은 한일 간 역사 갈등의 본질적 원인 규명과 그에 대한 해소 방안을 모색하는 일을 역사적 과제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또 한일강제병합 100년을 맞이하는 시점에서 올바른 역사 정립을 통한 기반 위에서 진정한 역사 화해와 동북아 평화 공동체 건설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일지식인공동성명(한국 병합 100년에 즈음한 한일 지식인 공동 성명)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10년 일본의 한국강제병합에 대한 역사적 진실 규명과 국제법적 정의 구현에 뜻을 갖고 있는 한일 양국 학자들은 2009년 6월 22일 ‘한일강제병합의 국제법적 무효·불법성’을 규명했다. 이를 바탕으로 2010년 5월 10일 214명으로 시작해 65주년 광복절을 앞둔 7월 28일에는 1,139명의 한일 양국 지식인이 역사적 정의에 입각해 ‘1910년 한일병합조약은 원천무효’임을 천명한 공동성명으로 이어졌다.
‘한국병합’ 100년에 즈음한 한일지식인공동성명
1910년 8월 29일, 일본제국은 대한제국을 이 지상에서 말살하여 한반도를 일본의 영토에 병합할 것을 선언하였다. 그로부터 100년이 되는 2010년을 맞이하여 우리들은 그 병합이 어떻게 이루어졌던가, ‘한국병합조약’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한국, 일본 양국의 정부와 국민이 공감하는 인식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야말로 두 민족 간의 역사문제의 핵심이며, 서로의 화해와 협력을 위한 기본이다. 그간 두 나라의 역사학자들은 일본에 의한 ‘한국병합’이 일본 정부의 장기적인 침략정책, 일본군의 거듭된 점령 행위, 명성왕후 살해와 국왕과 정부요인에 대한 협박, 그리고 이에 대한 한국인들의 항거를 짓누르면서 실현시킨 결과란 것을 명백히 밝히었다. 근대 일본 국가는 1875년 강화도에 군함을 보내 포대를 공격, 점령하는 군사작전을 벌였다. 이듬해 일본 측은 특사를 파견, 불평등조약을 강요하고 개항시켰다. 1894년 조선에 대규모의 농민봉기가 일어나 청국 군이 출병하자 일본은 대군을 파견하여 서울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왕궁을 점령하여 국왕, 왕후를 가두고 이어 청국 군을 공격하여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한편으로 이에 대항하는 한국의 농민군을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청일 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청국세력을 한국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지만 삼국간섭(三國干涉)으로 승전의 대가로 획득한 요동반도를 되돌려 놓게 되었다. 이런 결과에 부딪혀, 일본은 그간 한국에서 확보한 지위마저 잃게 될 것을 우려하여 국왕에게 공포감을 주고자 왕비 민 씨를 살해하였다. 국왕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보호를 구하게 되자 일본은 러시아와 협상을 통해 사태를 수습하려 들게 되었다. 그러나 의화단(義和團) 사건으로 러시아가 만주를 점령하게 된 후, 1903년에 일본은 그 대신 한국 전토를 일본의 보호국으로 하는 것을 인정할 것을 러시아에 요구하였다. 러시아가 이를 거절하자, 일본은 전쟁을 결심하고 1904년 전시(戰時) 중립을 선언한 대한제국에 대규모의 군대를 진입시켜 서울을 점령하였다. 그 점령군의 압력 하에 2월 23일 한국 보호국화의 제1보가 된 ‘의정서’의 조인을 강요하였다. 러일전쟁은 일본의 우세승으로 결말이 나고, 일본은 포츠머드강화조약에서 러시아로 하여금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인정하게 하였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곧바로 천황의 특사로 서울로 와서 일본군의 힘을 배경으로 위협과 회유를 번갈아 1905년 11월 18일에 외교권을 박탈하는 ‘제2차 한일협약’을 체결시켰다. 의병운동이 각지에서 일어나는 가운데 고종(高宗) 황제는 이 협약은 강제된 것으로 효력이 없다는 친서를 각국 원수(元首)들에게 보내었다. 1907년 헤이그평화회의에 특사를 보낸 일로,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이에 대한 고종 황제의 책임을 물어 그의 퇴위를 강요하고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와 동시에 7월 24일에 ‘제3차 한일협정’을 강요하여 한국의 내정에 대한 감독권도 장악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침략에 대하여 의병운동이 크게 일어났지만, 일본은 군대, 헌병, 경찰의 힘으로 탄압하다가 1910년에 ‘한국병합’을 단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한국병합’은 대한제국의 황제로부터 민중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의 격렬한 항의를 군대의 힘으로 짓누르고 실현시킨, 문자 그대로 제국주의 행위이며, 불의부정(不義不正)한 행위였다. 일본 국가의 ‘한국병합’ 선언은 1910년 8월 22일의 병합조약에 근거하여 설명되고 있다. 이 조약의 전문(前文)에는 일본과 한국의 황제가 두 나라의 친밀한 관계를 바라고, 상호의 행복과 동양 평화의 영구 확보를 위해서는 ‘한국을 일본 제국에 병합하는 것 만한 것이 없다’고 하여 병합이 최선이라고 확신하고, 본 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고 서술되어 있다. 그리고 제1조에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부(全部)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하고 또 영구히 일본국 황제 폐하에게 양여(讓與)한다’고 기술하고, 제2조에 ‘일본국 황제 폐하는 전조(前條)에 서술되어 있는 양여를 수락하고 또 전적으로 한국을 일본 제국에 병합하는 일을 승낙한다’고 적고 있다. 여기서 힘으로 민족의 의지를 짓밟은 병합의 역사적 진실은, 평등한 양자의 자발적 합의로, 한국 황제가 일본에 국권 양여를 신청하여 일본 천황이 그것을 받아들여, ‘한국병합’에 동의했다고 하는 신화로 덮어 숨기고 있다. 조약의 전문(前文)도 거짓이고 본문도 거짓이다. 조약 체결의 절차와 형식에도 중대한 결점과 결함이 보이고 있다. ‘한국병합’에 이른 과정이 불의부당하듯이 ‘한국병합조약’도 불의부당하다. 일본 제국이 침략 전쟁 끝에 패망함으로써 한국은 1945년에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벗어났다. 해방된 한반도의 남쪽에 수립된 대한민국과 일본은 1965년에 국교를 수립하였다. 이 때 체결된 양국 관계의 ‘기본에 관한 조약’(기본조약으로 약칭) 제2조에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은 이미 원천무효(Already Null and Void)라고 선언되었다. 그러나 이 조항의 해석이 한·일 양국 정부 간에 서로 달랐다. 일본 정부는 병합조약 등은 ‘대등한 입장에서 또 자유의지로 맺어졌다’는 것으로 체결 시부터 효력을 발생하여 유효였지만, 1948년의 대한민국 성립으로 무효가 되었다고 해석하였다. 이에 대하여 한국 정부는 ‘과거 일본의 침략주의의 소산’이었던 불의부당한 조약은 당초부터 불법 무효이라고 해석하였던 것이다. 병합의 역사에 관하여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과 왜곡 없는 인식에 입각하여 뒤돌아보면 이미 일본 측의 해석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병합조약 등은 원래 불의부당한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당초부터 원천무효(Null and Void)였다고 하는 한국 측의 해석이 공통된 견해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본에서도 완만하나마 식민지 지배에 관한 인식은 전진해왔다. 새로운 인식은 1990년대에 들어서 고노(河野) 관방장관 담화(1993), 무라야마(村山) 총리 담화(1995), 한일공동선언(1998), 조일(朝日) 평양선언(2002) 등으로 나타났다. 특히 1995년 8월 15일 무라야마 총리담화에서 일본 정부는 ‘식민지 지배’가 초래한 ‘막대한 손해와 고통’에 대하여 ‘통절한 반성의 뜻’과 ‘마음속으로부터의 사과’를 표명하였다. 또한 무라야마 수상은 1995년 10월 13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한국병합조약’에 관해 ‘쌍방의 입장이 평등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변하고 노사까(野坂) 관방장관도 같은 날 기자회견에서 ‘한일병합조약은 (…) 극히 강제적인 것이었다’고 인정하였다. 무라야마 수상은 11월 14일,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에서 병합조약과 이에 앞선 한일 간의 협약들에 대하여 ‘민족의 자결과 존엄을 인정하지 않은 제국주의 시대의 조약이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강조하였다. 여기서 마련된 토대가, 그 후에 여러 가지의 시련과 검증을 거치면서, 지금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병합과 병합조약에 대해 판단을 내리고 ‘기본조약’ 제2조의 해석을 수정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미국 의회도 하와이 병합의 전제가 된 한 하와이 왕국 전복의 행위를 100년째에 해당하는 1993년에 ‘불법한(illegal) 행위’였다고 인정하고 사죄하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근년에 ‘인도(人道)에 반하는 죄’와 ‘식민지 범죄’에 관하여 국제법 학계에서 다양한 노력이 기울여지고 있다. 이제 일본에서도 새로운 정의감의 바람을 받아들여 침략과 병합, 식민지 지배의 역사를 근본적으로 반성하는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이다. ‘한국병합’ 100년을 맞아 우리는 이러한 공통의 역사인식을 가진다. 이 공통의 역사인식에 입각하여, 한국과 일본 사이에 놓여 있는, 역사에서 유래하는 많은 문제들을 바루어 공동의 노력으로 풀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화해를 위해 필요한 과정이 한층 더 자각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공통의 역사 인식을 더 튼튼히 하기 위해서는 과거 100년 이상에 걸친 일본과 한반도의 역사적 관계에 관한 자료는 숨김없이 공개되어야 한다. 특히 식민지 지배의 시기에 기록문서 작성을 독점한 일본 정부 당국은 역사 자료를 적극적으로 모아서 공개할 의무가 있다. 죄는 용서를 빌지 않으면 안 되고, 용서는 베풀어져야 한다. 고통은 치유되어야 하고, 손해는 갚지 않으면 안 된다. 관동대지진 중에 일어난 한국인 주민의 대량 살해를 비롯한 모든 무도한 행위는 거듭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는 상태이다. 한국 정부가 조처를 취하기 시작한 강제동원 노동자, 군인 및 군속에 대한 위로와 의료 지원 조치에 일본 정부와 기업, 국민은 적극적인 노력으로 대응하기 바란다. 대립하는 문제는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응시하면서, 뒤로 미루지 말고 해결해나가야만 한다. 한반도의 북쪽에 있는 또 하나의 나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도 이 병합 100년이라는 해에 진전되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한국과 일본 사이에 진정한 화해와 우호에 기초한 새로운 100년을 열어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은 이 취지를 한국, 일본 양국의 정부와 국민에게 널리 알리고, 이를 엄숙히 받아들여주기를 호소한다. 2010년 5월 10일 한국 측 109인 일본 측 105인 |
“일제 식민지 책임을 전면적으로 확인해줬다”
▲한일공동성명이 한국 사법부의 판결에 미친 영향을 어떻게 봐야 하나?
공동성명은 △2006년에 시작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헌법소원에 대해 헌법재판소의 2011년 부작위 위헌 결정 △2000년에 시작한 강제동원 피해자의 소송에 대한 대법원의 2012년 파기 환송 △2018년 강제동원 피해 배상 판결의 기점이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2011년 헌법재판소는 “일제강점기에 강제로 동원한 일본군위안부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가 말살된 상태에서 장기간 비극적인 삶을 영위했던 피해자들의 훼손된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회복시켜야 할 국가의 작위(作爲, 의식적으로 행한 적극적인 행위) 의무는 헌법상의 의무”라고 판시했다. 또 2012년 대법원은 “일본의 국가 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 행위를 비롯해 식민지배와 직결된 불법 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이 한일청구권협정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는 일제의 식민지책임을 전면적으로 확인한 것이며,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서 인권을 보장해 적극적 평화와 역사 정의를 추구한 판결이다.
이에 2018년 대법원은 “일본 정부의 불법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 수행과 직결된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 불법 행위에 대한 위자료 청구권이 한일청구권협정의 적용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강제동원 피해자의 일본 기업에 대한 위자료 청구권은 존재한다”고 최종 판결했다.
“한일강제병합은 ‘불의부당·원천무효·불법’으로 규명”
▲한일지식인공동성명은 어떤 의미가 있다고 보나?
한일병합조약이 원천무효라는 것을 밝혔다는 데 의의가 있다. 전문(前文)은 물론 본문(本文)도 거짓이며, 조약 체결 절차와 형식에도 중대한 결점과 결함이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 병합에 이른 과정이 불의부당(不義不當)하듯이 ‘한국병합조약’도 불의부당한 것임을 천명했다. 그리고 1965년 한일기본관계조약 제2조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은 이미 원천무효(Already Null and Void)’라는 내용과 관련해서는 일본 침략주의의 소산이었던 불의부당한 병합 조약이 당초부터 불법·무효라는 한국 측 해석을 공통 견해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국제법 학계에서 ‘반反인도적 범죄’와 ‘식민지 범죄’와 관련해 침략과 병합, 식민지배의 역사를 근본적으로 반성해야 함도 제창했다. 그리고 조약의 무효 시점과 관련하여 일본은 대한민국 성립을 기점으로 하지만 한국은 강제병합조약을 체결한 1910년부터라고 보고 있다. 이 문제에서도 한국의 주장이 옳다고 선언한 것이다.
일본 학자 500명이 참여했다는 것은 대단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선대先代인 일본 제국주의 시대 아버지 세대가 일본 정부의 주장과 동일한 입장을 갖고 있는 것과 달리 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혔기 때문이다. 이들의 동참은 역사적 진실에 대한 일종의 양심선언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 것이기에 상당히 놀라운 일이다. 앞으로 큰 변화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한일지식인공동성명은 더반선언의 동아시아 버전”
▲하지만 일본은 여전히 식민 지배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더반선언(Durban Declaration)이라는 게 있다. 식민주의종결선언이라고 한다. 2001년에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Durban)에서 개최한 반인종차별 국제회의에서 채택한 것이다. 식민지 지배에 대한 법적 책임을 묻는 선언이다. “식민지주의에 의해 야기된 고통을 인정하고, 언제 어디서든 식민지주의는 비난받아야 하며 재발이 방지되어야 한다”라고 밝혔다. 이는 국제사회에서 식민주의가 중요한 법적 이슈로 등장했다는 의미다.
그리고 2005년에 중요한 선언이 나왔다. UN총회에서 피해자권리기본원칙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핵심은 ‘피해자중심주의’다. 문제의 해결에 있어 피해자 중심으로 접근하라는 의미다. 이것은 국제인권법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이다. 국제인권법도 2차대전의 피해 때문에 나왔다. 독일과 일본의 침략과 잔학행위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극단적인 경시에 기초한 국가주의에 대한 반성에 기인한다. 그래서 국제인권법은 국가 간 합의를 견제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일본은 인권을 침해당한 개인의 청구권을 무시한다. 하지만 개인청구권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인권이 침해당했을 때 구제할 수 있는 권리가 개인청구권으로 인권의 한 축이자 버팀목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청구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인권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개인의 인권을 보존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가 개인청구권이다. 국가 간 합의하에 개인청구권을 배제한다는 있을 수 없다.
2차대전의 중대하고 심각한 인권침해로 인해 등장한 국제인권법의 핵심은 국가 간의 우호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한일 간에는 일본군위안부, 강제노역 등 희생을 강요한 경우가 많았다. 피해자권리기본원칙이 중요한 이유다. 이러한 상황을 반영해 한일지식인공동성명에서도 ‘인도(人道)에 반하는 죄’와 ‘식민지 범죄’에 언급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한일지식인공동성명은 더반선언의 동아시아 버전’이라는 이름을 지어 논문에서 명기해왔다.
▲더반선언, 피해자권리기본원칙이 한국 법원에도 영향을 많이 줬을 것 같다.
앞에서 한 이야기지만, 한국 헌법재판소는 2011년 국민의 기본권인 인권 보호를 위한 헌법상의 작위 의무를 위반한 ‘부작위 위헌’이라는 전향적 판결을 내렸고, 한국 대법원은 ‘일본의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 행위, 식민지배와 직결된 불법 행위’에 대한 책임을 전제로 2012년 파기 환송에 이어 2018년 10월 역사적 진실에 대한 법규범적 정의에 입각한 판결로 화답했다. 2018년 대법원 판결은 한일청구권협정 적용 대상과 범위에 대한 최종적인 유권해석이다. 위자료 배상 책임이 일본 기업에게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이 같은 판결을 계기로 일본이 ‘식민지배합법론’ 이래 합법으로 주장해온 역사 왜곡 프레임이 불법으로 전환되는 반전이 생기게 됐다. 일본은 국제법을 앞세워 역사를 왜곡해왔고, 자의적인 국제법 해석으로 일본에 유리한 국제법은 강조하고 내세우지만 불리한 것은 무시하고 회피했다. 그런 부분이 앞으로는 바뀔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일본은 국제법의 기본을 놓치고 있다”
▲일본이 국제법 전문가를 양성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일본은 오래 전부터 국제법 전문가를 양성했다. 예를 들면, 한일병합이나 한일협정 등의 문제에 있어 역사적인 왜곡만으로는 안 되고 국제법상의 형식으로 포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식민지배합법론’과 ‘한일협정완결론’ 등 역사 왜곡을 위한 국제법 프레임을 제시한 일본의 아리가 나가오(有賀長雄), 운노 후쿠쥬(海野福壽) 등은 국제법으로 합법적인 조약을 체결했다는 주장을 내세우면서 침략전쟁과 식민지배의 합법성의 논거를 주장해온 학자들이다.
그런데 일본을 대표하는 100년 전, 50년 전 국제법 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 국제법의 기본을 놓치고 있다. 국제법의 출발은 대등한 주권국가를 전제로 한다. 이 전제에 따라 정당하고 적법한 합의에 의한 것이라야 한다. 그런데 일본이, 특히 당시 국제법을 대표하던 학자들이 이를 완전히 무시해버린 것이다. 오로지 ‘일본제일주의’라는 일제식민주의에 입각한 국가주의만 내세운 것밖에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국제법상 내용, 형식, 절차 등이 모두 하자가 없는 조약으로 체결해야 국제법상 합법적인 조약으로 정상적으로 출발할 수 있는데, 이를 모두 무시했다. 단순히 양국 간 합의했다는 전제로 합법조약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강제병합은 ‘한국민의 뜻에 반한 강박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정당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합의했다는 주장만 앞세우고 있는 것이다.
▲조금 전 100년 전과 50년 전 논리를 언급했는데, 어떤 차이나 변화가 있나?
전후 50년, 그러니까 1945년 이후 50년 후인 1995년 즈음에 일본은 자민당이 분열하고 사회당을 중심으로 하는 연립정권이 들어서면서 변화를 맞게 된다. 당시 총리가 된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 富市)는 정상외교를 하자면서 ‘무라야마담화’(전후 50주년의 종전기념일을 맞아, 1995.08.15)가 나왔다. 이에 앞서 ‘고노담화’(위안부 관계 조사 결과 발표에 관한 고노 내각관방장관 담화, 1993.08.03)가 있다. 고노담화는 20개월에 걸친 일본 정부의 일본군위안부 관련 조사 후 실체를 인정하고 사과를 발표한 담화다.
90년대는 ‘철의 장막’(Iron Curtain)으로 상징되던 냉전이 종식되고 국제 사회에서 민주화 바람이 불었다. 그러면서 일본에 의한 식민지 지배와 전쟁 피해자들이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은 모든 것이 종결되었다며 이를 철저히 거부했다. 그런데 한 가지 언급하고 싶은 게 있다. 경제사학자인 운노 후쿠쥬가 제시하는 대일 배상 요구액과 관련한 분석이다.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한일기본조약,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의 부속협정인 청구권협정상의 경제협력자금으로 지급된 무상 3억 달러와 관련해 당시 미군정청 보험후생부에 신청한 피해자 규모가 1/10밖에 안 되는 점 등을 감안하더라도 지급해야 할 금액이 24억 달러라는 것이다.
경제사학자로서 한일협정 관련 수만 장에 이르는 자료를 분석하고 나름 양심적인 데이터(자료)를 제시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노 후쿠쥬가 한일강제병합과 관련해 내린 결론은 ‘유효부당론’이다. 도덕적으로는 부당하지만 법적으로는 유효하다는 논리다. 아리가 나가오가 주장하는 ‘합법론’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결국 운노 후쿠쥬의 배상액 분석도 일본 국가주의적 한계에 매몰돼버린 주장인 것이다.
“데이터 만들수록 일본 잘못 확인할 수 있다”
▲아전인수(我田引水) 차원의 논리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과 같다.
중요한 것은 모든 문제를 원칙적으로 밝힐 경우 향후 일본에게 주는 타격이 너무 크다는 점을 인식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데이터를 만들수록 일본이 잘못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연구를 했지만, 일본의 기존 논리나 입장에 매몰돼 ‘잘못이 있지만 유효하다’는 논리만 주장한다. 도덕적으로는 부당해서 피해의 범주를 고민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국제법상 유효하다는 귀결이기에 의미가 없다.
식민지배가 잘못됐다는 게 무라야마담화의 본질인데, 무라야마 총리는 담화 발표 후 일본 국회에 참석해 대정부 질의에 답변하게 된다. 야당 의원들과 기자들이 식민지배에 대해 사과했는데, 그 출발인 1910년 ‘한일병합조약’의 의미에 대해 질문했다. 그러자 무라야마 총리는 외무성이 제시한 대로 1910년 ‘한일병합조약’은 당시 국제법상 유효한 조약이라고 답변한다. 결국 합법이라는 것이고, 지금까지 입장이나 태도는 변한 게 없다.
사카모토 시게키(坂元茂樹)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学) 국제법 교수는 일제식민주의 당시의 국제법도 일본의 국가 실행과 유착된 일본형 법실증주의가 퇴조하고 보편적 국제규범에 입각한 규범성이 제고되고 있는 지점을 외면하면서 현재적 시점에서 일본의 국가주의적 논거를 제공하고 있다.
▲역사 왜곡을 보면서 동아시아 역사, 특히 한일 관계를 연구하게 된 배경이 됐을 것 같다.
100년, 50년,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즉 아리가 나가오(有賀長雄), 운노 후쿠쥬(海野福壽), 사카모토 시게키(坂元茂樹) 등 세 명이 주장하는 논리가 일본의 역사 왜곡을 위한 국제법적 프레임의 맥을 형성하고 있는데, 이들의 논거를 분석하면 일본이 국제법적 차원에서 제기하는 불법적 주장의 토대를 붕괴시킬 수 있겠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이는 식민지배합법론, 한일협정완결론의 프레임을 봉쇄하는 것이다. 오늘날 일본이 ‘전후 체제로부터의 탈각’과 ‘역사수정주의’를 기치로 국제법을 앞세운 합법화 시도의 원점을 타격해 와해시키는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일본은 ‘가해 재생산하는 횡포’ 반복하고 있다”
▲아베담화나 나오토담화는 어떻게 봐야 하나?
2015년 8월 14일, ‘전후 70년 아베담화’는, 일본역사학연구회가 비판한 바와 같이, 식민지배와 침략의 역사를 직시하고 반성한 것이 아니다. 2020년 8월 10일, 간 나오토(菅直人) 일본 총리가 한일강제병합 100년에 즈음한 담화(일한병합 100년에 즈음한 총리 담화)를 발표했다. 일부에서는 진일보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여전히 한일 지식인들이 요구하고 있는 병합조약의 불법성과 무효를 인정하지 않았고 과거사 갈등의 핵심인 강제징용 및 위안부 피해자 문제 등 실질적인 조치를 취하는 측면을 외면했다는 점에서 한계를 드러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는 담화다.
결국 일본은 지금까지 1910년 일본이 했던 한국강제병합에 대해 국제법상 하자가 없다거나 도덕적으로 일부 문제가 있더라도 병합 자체는 유효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이 시도하는 국제법 법리의 왜곡에 바탕을 두고 정책 프레임을 구축하고 강화하는 것은 결국 진정한 사죄를 하는 범주가 아니다. 여전히 역사 자체를 왜곡하고 미화할 뿐만 아니라 피해자에게 이중의 가해를 하는 것이다. 독선적인 역사 인식의 표출일 뿐이고 가해를 재생산하는 횡포일 뿐이다.
▲2005년에는 ‘한일우정의 원년’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2002년 월드컵 공동 개최 때 일본이 한국을, 한국이 일본을 응원하는 경우가 생기면서 한일 사이에 우호적인 신호가 나타나기도 했다. 이런 정서가 2005년 ‘한일우정의 원년’으로 나오기도 했다. 그래서 당시 국제법상으로 한일 관계에 긍정적인 결과가 나올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을 갖기도 했다. 하지만 2005년 3월에 ‘다케시마의 날’(일본 시마네현이 1905년 2월 22일 독도를 일본 제국 시마네현으로 편입 고시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2005년 3월 16일에 지정한 날)을 선포했다. 이는 100년 전 한국 독도 주권을 침탈한 인식을 극명하게 드러낸 것이다. 21세기에 한국의 독도에 대한 일본의 다케시마 날 선포는 한국의 영토주권에 대한 침탈 도발이다. 이는 또한 일본이 역사적 과오에 대해 스스로 반성하거나 사죄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반증인 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장기·종합·체계’ 갖춘 대응책 마련”
▲노무현 대통령은 2006년 담화문에서 ‘독도 문제도 더 이상 조용한 대응으로 관리할 수 없는 문제가 되었다’고 강조했는데, 당시 이 같은 사회적 분위기 등을 감안할 때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한 적극적인 대처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커졌다. 이런 여건이 동북아역사재단 설립에 영향을 줬을 것 같다.
당시는 노무현 정부 시절이었다. 일회성에 불과한 임기응변식 대응으로는 안 되겠다는 국민적 여론이 형성되었다. 그러한 국민적 여망에 부응하고자 국제법 전문가로 참여하게 되었다. 당시 대통령의 지시로 2005년 4월, 청와대 소속으로 동북아평화를위한바른역사정립기획단(바른역사기획단)이 출범했다. 노무현 대통령 생각은 국가 차원에서 ‘장기적·종합적·체계적’ 요건을 갖춘 역사 정립 담당 기관(TF)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 역사와 독도에 관한 한 역사적·국제법적 왜곡에 대응해 우리의 역사와 영토 주권에 대한 확고한 정립이 필요하다는 취지를 반영해서 나온 것이 바른역사기획단이다. 단장은 김병준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이, 부단장은 조중표 외교통상부 재외국민영사담당대사가 맡았다. 이를 바탕으로 동북아역사재단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동북아역사재단법, 법률 제14151호, 2016.05.29)을 만들었고 국회에서 통과돼 2006년 10월(9월 28일) 현재의 동북아역사재단을 설립했다.
▲재단 설립 당시를 기준으로 볼 때 한일 관계 문제에 대한 양국의 수준은 어느 정도였다고 보나?
재단 설립 초기, 이 때는 대략 15년 전인데, 일본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과 일본 극우의 조직화된 연구 수준에 대비해 우리 수준은 상당히 낮은 상태였다고 본다. 일본이 조직적으로 조작해놓은 연구에 대해 한국의 개별 연구자가 진행한 한정된 연구로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사실상 우리는 연구할 수 있는 여건 자체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한일협정, 일본군위안부 등에 대한 연구 자체를 반일주의로 터부시하고 매도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문제를 우리가 연구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돼 있지 않았던 셈이다. 반면 일본은 국가 차원에서 역사적 과오에 대한 반성은커녕 역사 자체를 왜곡하고 수정하는 연구 과제를 양산했다. 특히 ‘국제사회 공용어’라 할 수 있는 ‘국제법’에 집중해 ‘전문가’를 꾸준히 양성해왔다. 그러한 상황과 전제가 동북아역사재단의 설립을 추동한 근거가 작용했다고 본다.
“피해자 중심의 문제 해결에 노력하고 있다”
▲8월은 강제병합, 일본군위안부, 광복 등 의미 있는 날이 많이 들어 있는 것 같다. 재단은 위안부와 관련해 어떤 활동을 해왔나?
2020년 8월 15일은 광복 75주년이다. 그리고 8월 14일은 29년 전인 1991년 김학순 할머니가 피해 사실을 최초로 증언한 날이자 우리 정부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국가기림의 날로 제정한 날이다. 더하여 8월 22일은 일본 제국주의가 불법과 강제로 한국을 병합한 지 110주년이다. 이 날은 주권 침탈과 인권 침해의 역사적인 원인이자 출발이기도 하다. 재단은 2018년 9월 17일부터 ‘일본군위안부연구센터’를 설치해 운영하고 있다.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역사적 진실 규명’과 ‘피해자 중심의 문제 해결’을 위해 일본이 부인할 수 없는 일본군위안부 자료를 집대성하고 나아가 자료를 공유하기 위한 자료센터 구축 및 학술연구 중심축 역할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끝으로 더 하고 싶은 말씀은?
역사의 수레바퀴는 끊임없이 전진해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역사에 내재된 정의의 기제가 작동하지 못할 때 인류는 참혹한 희생을 반복했다. 현재도 여전히 20세기 유산인 암울한 과거에서 기인한 역사 갈등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그것은 2015년 ‘전후 70년 아베 담화’가 식민 지배와 침략의 역사를 직시하고 반성한 것이 아니라 독선적인 역사 인식의 표출에 더하여 가해를 재생산하는 횡포를 거듭 추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역사학자 카(E. H. Carr)가 설파한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로서의 역사가 우리 시대에 던지는 질문이자, 토인비(A. J. Toynbee)가 주창한 ‘도전과 응전’의 역사적 성찰을 통한 응답으로 역사 정의의 차원에서 조명해야 할 과제란 점에서, 오늘 우리에게 부여된 역사적 과제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가해자는 가해자의 논리를 끊임없이 확대하고 재생산한다. 그렇다면 피해자는 ‘한일지식인공동성명’의 역사 인식을 바탕으로 인권, 정의, 평화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국제인권법과 UN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채택한 피해자 중심주의에 따른 법리로 문제를 제기해 나가야 한다.
우리는 일제 식민주의의 피해국이자 동북아 평화 공동체의 중심축으로서 우리의 문제를 국제인권법적 정의에 입각해 해결해야 한다. 서구 제국이 자행한 ‘식민주의’의 역사적 종식을 선언한 2001년 ‘더반선언’, 그리고 동아시아 식민주의의 청산을 평화와 협력의 출발점으로 삼은 2010년 ‘한일지식인공동성명’의 의미와 역사적 진실을 규명해 나가야 한다. 그것은 75주년 광복절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역사가 되묻는 질문이자 우리가 역사적 성찰로 응답해야 할 역사 정의의 과제다.
도시환
동북아역사재단 책임연구위원이다. 청와대 바른역사정립기획단 선임연구관을 역임했다.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외래교수, 세계국제법협회 한국본부 기획이사, 대한국제법학회 이사를 맡고 있으며 통일부 통일교육전문위원,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적 심사위원, 여성가족부 일본군위안부피해자지원및기념사업심의위원, 동북아역사재단 일본군위안부연구센터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동북아역사재단
2006년 09월 22일 동북아역사재단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라 설립했다. 현재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통일로 81(미근동 267) NH농협생명빌딩에 사무실을 두고 있다. 동북아시아 역사 문제 및 독도 관련 사항에 대한 장기적·지속적·종합적 연구 및 분석을 실시하고, 체계적·전략적 정책을 개발하며, 홍보·교육활동과 교류·지원 분야 사업을 시행함으로써 바른 역사 인식을 공유하고 동북아시아 지역의 평화 및 번영의 기반을 마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주무기관은 교육부며, 홈페이지(https://www.nahf.or.kr/)를 운영하고 있다. ▲주요 기능 및 역할(동북아역사재단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 제5조(사업) 제1항) △동북아시아의 역사정립을 위한 조사·연구 △독도 관련 사항에 대한 조사·연구 △동북아시아 역사 및 독도 관련 전략·정책대안의 개발 및 대정부 정책 건의 △동북아시아 역사 및 독도 관련 시민사회단체에 대한 지원·교류 △동북아시아 역사 및 독도 관련 홍보·교육·출판 및 보급 △동해·독도의 표기 관련 체계적 오류 시정 활동 등이다. ▲연혁 △2006.05.19 동북아역사재단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 제정 공포 △2006.08.17 동북아역사재단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제정 공포 △2006.09.01 제1대 김용덕 이사장 취임 △2006.09.22 동북아역사재단 설립 등기 △2006.09.28 동북아역사재단 출범식 △2008.01.17 동북아역사자료센터 개소 △2008.08.14 독도연구소 개소 △2009.09.18 제2대 정재정 이사장 취임 △2012.09.14 독도체험관 개관 △2012.09.17 제3대 김학준 이사장 취임 △2015.09.17 제4대 김호섭 이사장 취임 △2017.11.06 제5대 김도형 이사장 취임 △2020.12.28 이영호 제6대 이사장 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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