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분 레슨이 60년 같았다”
"외국에 살면서 ‘정’이 참 그리웠다. 그런데 ‘정’이라는 것은 내가 기다리면 상대방 쪽에서 오는 게 아니었다. 내가 문을 열면 정이 생길 수 있는 싹이 트는 것 같다. 이걸 늦게야 깨달았다."
바이올린 연주자 Korea Lee 인터뷰
“60분 레슨이 60년 같았다”
“한 번이라도 더 ‘대한민국’ 가르쳐 주고 싶어”
2014년 12월 29일 월요일, 바이올린 연주자인 코리아 리(Korea Lee)에게 인터뷰 답변서를 받았다. 한국 이름은 이선옥이지만 2010년 독일의 오디션 프로그램에 참가했을 때 ‘코리아 리’를 사용했다. 오디션에서 그는 첫째 곡은 음을 틀리게 연주해 일부러 야유를 유도한 후 둘째 곡으로 기립박수를 받았다. 뿐만 아니라 심사평에서 심사위원들의 야유에 대해 사과를 받기도 했다. 코리아 리의 연주 활동은 현재 페이스북과 홈페이지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인터뷰를 하게 된 것도 우연히 유튜브 동영상을 본 게 인연이 됐다. 리카르도 무티(Riccardo Muti)는 “코리아 리의 연주는 힘이 있으며 감성적이다. 오케스트라와 하나가 된 연주를 하며, 솔로 연주의 기교도 뛰어나다. 그녀의 연주는 감성과 강렬함 사이의 균형을 맞출 줄 알며, 아름답다”고 평가했다. 무티의 논평처럼 코리아 리는 독일 오디션에서 보여줬듯이 바이올린 연주에 감정과 기교를 가득 담아 이야기를 전하고 관객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뛰어난 스승에게 배우고 함께 연주하면서 다양하고 깊고 강렬한 기교를 바이올린에 담아낸다. 또한 폭넓은 해석과 감정을 표현하는 힘이 뛰어나다. 바이올린 연주자 코리아 리(Korea Lee)를 편지와 페이스북 메신저로 인터뷰했다.
▲코리아 리(Korea Lee)라고 이름을 지은 특별한 이유나 배경이 있었나?
그렇다. 유별난 애국자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만나면 항상 하는 질문이 있다.
‘당신은 일본 사람인가?’
그런데 아니라고 답을 하기 전에 다시 묻는다.
‘그럼 중국인가?’
이런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왜 한국, 그러니까 ‘South Korea’가 제일 먼저 나오지 않는지 답답했다.
믿기지 않겠지만 88년 올림픽을 치렀고 우리나라 축구 실력이 무서운 수준이라는 것은 다 알 것이라고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 사람’이라고 답하면 ‘Korea? 그곳은 일본의 도시인가?’라고 되묻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그래서 이름을 아예 ‘코리아 리’로 지었다. 나의 연주에 오는 사람, 거리에 붙어 있는 팸플릿을 보는 사람이 한 번이라도 더 ‘대한민국’이라는 단어를 가르쳐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2010년 독일의 오디션(Germany got Talent)에 참가했는데, 독일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유럽에서 활동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나?
클래식 공부를 비엔나 국립음대에서 연주 석사과정까지 하고 나서 많은 아티스트와 연주도 하고 활동하면서 클래식 외에 다른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됐다.
주로 클래식 락과 재즈 연주를 하는 연주자들, 그러니까 나이즐 케네디, 로비 라카토스, 데이빗 가렛 등과 친해지면서 여러 가지 연주 테크닉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많은 곡을 편집하고 믹스 하면서 방송 오디션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처음엔 보는 눈이 많아서 참 많이 망설였다. 하지만 잘 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한국에 계신 여러분이 나를 알게 된 결과만 봐도 참 잘했다 싶다.
▲독일 오디션에서 데이빗 가렛(David Garrett)의 ‘Smooth Criminal’을 선택했다. 이 곡을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마이클 잭슨의 곡이기 때문이다. 이유가 더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
※ 가렛이 연주한 ‘Smooth Criminal’은 마이클 잭슨의 앨범 ‘Bad’에 수록된 히트싱글이다. 1988년 10월 24일에 공개됐으며, 전 세계 차트에서 1위를 기록했다. 이 곡은 범죄의 위험성을 주제로 다뤘다. 특히 린이라는 춤 동작과 사이드 문워크라는 새로운 동작을 만들어 큰 인기를 끌었다.
▲바이올리니스트는 바이올린으로 얘기를 한다. 바이올린으로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가?
바이올린 음률은 내 목소리를 대신해준다. 그래서 많은 이야기를 청중에게 들려주고 싶다.
때론 로맨틱한 로맨스, 또 어느 날은 아주 슬픈 이별 이야기, 화가 나서 폭발하고 싶은 이야기, 억누른 감정 이야기, 벅차오르고 마음을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더듬는 이야기, 또 어느 땐 엄마가 자주 들려주시던 아름다운 동화 이야기….
때와 장소에 따라 그리고 어떤 곡을 연주하느냐에 따라 나의 이야기는 달라질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프로필을 보니 13세부터 바이올린을 시작했다. 본인이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나?
나는 늦게 바이올린을 시작했다. 주위에서는 천부적인 재능이라고 말을 많이 한다. 하지만 천부적인 것보다는 내가 처음부터 악착같이 노력한 보답이라 생각한다.
▲독일 오디션에서 연주를 시작하기 전 심사위원들과 주고받은 얘기를 들으면서 자심감과 재치가 넘치는 연주자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이런 성향은 사업을 한 아버지와 화가였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부모님의 덕이 정말 크다. 그 어느 누구 앞이라도 할 말이 있으면 당당하게 정확하게 또렷하게 하는 습관을 부모님이 가르쳐 주셨다.
▲연주를 들어보면 다른 사람들의 논평처럼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동시에 갖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연주자가 청중과 호흡을 같이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데, 어떤 방식으로 청중과 함께 호흡하는지 궁금하다.
나는 청중을 가까이 하면서 연주하는 것을 좋아하고 즐긴다. 그래서 첫 곡은 청중이 있는 곳에서 연주하는 일이 많다.
또한 나도 누구를 위해 연주하고 있는지 알고 싶다. 청중이 나를 볼 수 있는 곳에서 연주를 시작하는 것이 예의인 것 같기 때문이다.
청중이 가까이 있는 곳에서 연주를 하고 무대 위로 올라가면 청중과 나 사이에 처음으로 정이 싹트는 것을 느끼곤 한다.
외국에 살면서 ‘정’이 참 그리웠다. 그런데 ‘정’이라는 것은 내가 기다리면 상대방 쪽에서 오는 게 아니었다. 내가 문을 열면 정이 생길 수 있는 싹이 트는 것 같다. 이걸 늦게야 깨달았다.
▲유럽에서 ‘데이트 하고 싶은 연예인’ 리스트에 든 후로 광고나 문화 관련 잡지, 그리고 신문들이 인터뷰 기사를 많이 올린다고 했다. 만나서 데이트를 하고 싶은 사람이 있나?
아직은 없다.
▲어머니는 꼭 한국 사람이랑 결혼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주변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이 외국인인데 괜찮나? 바이올린에 집중하고 있고 바이올린과 연애를 한다고 밝힌 적이 있지만, 결혼은 국적이 중요한가?
사랑에 국적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어머니는 ‘문화 차이’를 걱정하는 마음 때문에 한 말씀이다.
▲비엔나(Wien) 지역에서 바이올린과 음대 입시를 준비하는 입시생 레슨을 해준다고 했는데 레슨은 잘 되고 있나?
연주여행으로 바쁜 시기에도 제자는 자식처럼 거두었다. 그래서인지 비엔나 국립음대에 합격한 후에도 레슨 받는 제자가 많다.
유럽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있는 단원이 유럽 국립음대 교수이기도 하다. 협연 그리고 연주생활을 하면서 많은 교수들과 친분이 있다.
입시생 레슨은 이런 관계로 자연스럽게 그분들의 부탁으로 입시생들에게 입시시험 준비레슨을 해주면서 시작했다.
▲다른 레슨과 다른 점이나 장점은 무엇인가?
입시 위주로 레슨을 시키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무대에 자주 세워 담력을 쌓아서 무대 위에서 어느덧 관중석을 신경 쓰는 것보다 자기 연주에 최선을 다하는, 연주자다운 바이올리스트를 만드는 데에 최선을 다하는 게 장점이라고 본다.
세계적인 교수들을 통해 연주자 세계로 들어올 때까지 그리고 연주 활동을 하며 배운 모든 것을 다음 세대에게 줄 수 있다는 게 큰 기쁨이다.
▲‘세계적 교수’는 주로 어떤 분들인가?
몇 분만 얘기하자면, 자크하르 브론(Zakhar Bron), 블라디미르 스피바코프(Vladimir Spivakov), 이고르 오이스트라흐(Igor Oistrach), 파벨 베르니코프(Pavel Vernikov), 바딤 레핀(Vadim Repin) 등이다.
▲2007년 브뤼셀에서 자크하르 브론(Zakhar Bron) 교수에게 레슨을 받던 시절에 눈물을 뚝뚝 흘리기도 했다고 밝힌 바 있는데, 레슨을 받을 때 가장 힘들었던 것은 무엇이었나?
아시는지 모르겠다. 달리기를 할 때 몸보다 마음이 더 먼저인 기분…. 다리는 뒤처지는데 생각으로는 ‘더 빨리 더 빨리!’라고 외치는 안타까움…. 그런 느낌이다.
브론 교수는 성격이 엄청나다. ‘욱’ 하는 성질이 있는, 무서운 호랑이 교수다. 그만큼 제자 실력 발전에 욕심이 많아 많은 아티스트를 키우신 분이다.
브뤼셀에서 하는 레슨은 ‘관중석’ 이 꽉 차 있는 무대에서 받는 레슨이다. 비디오로 녹화도 한다.
언젠가는 피아노 반주자가 반주를 하다가 놀라서 벌떡 일어날 때도 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있어 자존심이 강해 태연한 척 하면서 다시 브론 교수가 원하는 대로 고쳐 연주하고 다시 연하고 또 다시 연주를 하는데도 브론 교수는 ‘더 정확하게, 더 빠른 템포로, 더 빨리!’ 하고 소리를 지른다.
60분 레슨이 한 60년 걸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레슨이 끝나고 화장실에 가서 문 걸어 잠그고 막 울었다. 그러고 나서 밤새도록 연습해 다음날 칭찬을 얻어낸 기억도 있다.
▲바이올린과 바이올리니스트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바이올린은 영원한 나의 동반자, 나만의 세상을 관중에게 읽어주는 또 다른 나의 목소리다. 그리고 바이올리스트는 인생, 운명, 대사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바이올린을 연주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어떤 게 있나?
우리나라 민요 ‘아리랑’을 직접 편집해서 연주를 자주 한다.
반응이 좋아 첫 스타트 곡 아니면 앙코르 곡으로 항상 연주를 한다. 그러다 보니 많은 분들이 우리나라 민요를 찾아본 것 같다.
한번은 체리티 디너 갈라에서 아리랑을 연주하는데 관중석에서 아리랑을 제 바이올린 음률에 따라 ‘아리랑~아리랑’ 하고 노래를 따라 불렀다.
연주할 때 누가 노래 부르면 눈을 흘기게 되지만 아리랑을 외국인들이 (앞부분만이지만) 부르는 게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
앙코르 연주하면서 울었다 웃었다, 정말 폭풍 같이 넘쳐 오르는 벅찬 기분을 어떻게 할 줄 모르면서 아리랑을 연주한 기억이 평생 남을 거 같다.
▲주요 공연 일정에 대해 듣고 싶다.
2014년은 어제(12월 27일) 마지막 연주를 했고, 2015년엔 비엔나에서 1월부터 세계적인 오스트리아 문화 축제 ‘비엔나 볼’ 시즌이 시작된다.
필하모닉 볼(Wiener Philharmonikerball), 오페라 볼(Wiener Opernball)에서 ‘서프라이즈’ 오프닝 연주를 하게 됐다.
발렌타인데이에는 브뤼셀에서 집시 재즈 바이올리스트 로비 라카토스(Roby Lakatos)와 듀엣 연주가 있다.
또 파리, 취리히, 런던, 베를린, 뮌헨에서 3~4일 간격으로 갈라 오프닝, 프라이버트 연주, 페스티발 오프닝 등등 다양한 연주가 있다.
5월에는 라이프 발(Life Ball)이 있는데, 비엔나 시청 앞에서 벌어지는 성대한 ‘에이즈 체리티 볼’이 열리는데 오프닝 부탁을 밭았다,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오프닝이라 ‘아리랑’을 연주하고 싶어 매니지먼트사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 중이다.
▲한국 팬들과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 달라.
항상 열심히 살겠다. 그러고 정말 많이 감사하다. 매일 많은 응원 메시지를 매니지먼트와 페이스북을 통해 받고 있다. 멀리서 지켜봐주는 팬들이 있어서 참 든든하다.
그리고 외국 땅에서 더 당당해지는 것 같다. 연주를 통해 우리나라를 조금이라도 알리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아직은 외국에서만 활동을 하고 있지만, 언젠가 우리나라에서도 연주하는 기회를 만들 예정이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항상 부모님 같은 마음으로, 가족 같은 따듯함으로 지켜봐 달라.
그리고 응원해 달라. 감사하고 또 사랑한다.
Korea Lee
서울에서 사업가 아버님과 화가 어머님 사이에서 차녀로 태어났다. 13살에 바이올린을 시작했다. 2002년 비엔나 국립음대 학사를 마치고 2007 석사 학위를 받았다. 홈페이지와 페이스북에서도 활동을 볼 수 있다.
Riccardo Muti
리카르도 무티(Riccardo Muti, Cavaliere di Gran Croce OMRI, 1941년 7월 28일~)는 이탈리아의 지휘자이다. 1941년 나폴리에서 태어나, 몰페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아버지는 의사였고, 어머니는 가수였다. 산 피에트로 마젤라 음악원에서 빈센초 비탈레(Vincenzo Vitale)의 사사를 받으며 피아노를 공부했고 밀라노의 쥬세페 베르디 음악원(Conservatory “Giuseppe Verdi”)에서 작곡과 지휘를 공부했다. 1967년 귀도 칸텔리 콩쿠르에서 수상한 무티는 이듬해 이탈리아 라디오 심포니오케스트라의 지휘를 맡아 정식 데뷔를 마쳤다. 같은 해 피렌체 5월 음악제의 수석지휘자 겸 음악감독이 되었다. 1972년부터 무티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지휘를 하기 시작했으며 2년 뒤에는 상임지휘자였던 오토 클렘페러의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1980년부터 12년간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을, 1986년부터 2005년까지 라 스칼라 극장의 음악감독을 지냈다. 1971년 이후로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도 정기적으로 지휘를 맡고 있다. 2010년 5월에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음악 감독으로 취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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