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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미워하지 않은 자의 죽음’과 ‘살아남은 자의 슬픔’

민주화와 사람다움을 위해 삶을 바친 노벨평화상 수상자, 시인, 문학평론가, 학자, 민주화 운동가인 류샤오보의 안타까운 죽음과 명복(冥福)을 빌며

류샤오보(劉曉波, Liú Xiǎobō)가 세상을 떠났다. 류샤오보는 2010년 중국인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지만, 노르웨이노벨위원회(Den norske Nobelkomité)가 오슬로시청에서 12월 10일 개최한 노벨평화상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해 그의 자리는 빈 의자로만 남아 있어야 했다. 류샤오보가 주장하고 강조하고 실천한 것은 ‘민주화’보다 한 단계 더 크고 높은 것, 바로 ‘사람다움(인간화)’이라고 생각한다. 인류의 삶을 살펴보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떤 사회든지 나름의 민주화는 있었다고 생각한다. 비율이나 만족도의 차이가 있고, 또 그 차이의 많고 적음에 따라 국가의 특성, 이념의 구별, 그리고 오늘날에는 민주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구별했을 뿐이다. 그러나 항상 남는 것은 ‘사람다움’에 대한 갈망과 도전이었다. 사진=노르웨이노벨위원회(Den norske Nobelkomité)

민주화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람이다. 그래서 이념이나 국가 체제의 문제보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느냐’의 문제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늘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래서일 게다. 류샤오보의 안타까운 죽음으로 중국은 앞으로 ‘민주화’와 ‘사람다움’을 더 잘 갖추려면 오래 시간을 기다려야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옆 나라의 이야기지만, 우리 사회에서도 민주화와 함께 사람다움을 찾기 위한 열망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오랫동안 우리 사회 곳곳에서 크고 작은 또는 높고 낮은 목소리가 쉬지 않고 나오고 있다. 사진=위키백과

우리는 이제 ‘아무도 미워하지 않은 자의 죽음’을 ‘살아남은 자의 슬픔’으로 지켜봐야 한다. 미움 받지 않는 류샤오보의 죽음이 사람을 위해 조만간 살아서 움직이기를 기원한다. 이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은 자의 죽음’과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조금이라도 줄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진=노르웨이노벨위원회(Den norske Nobelkomité)

동북아공동체연구재단

감격사회
2017.07.14

김종영 사람과사회 발행인 weeklypeople@gmail.com

류샤오보(劉曉波, Liú Xiǎobō)가 세상을 떠났다.

중국 지린성 창춘시에서 1955년 12월 28일 태어난 류샤오보는 2017년 7월 13일, 61세를 일기로 안타깝고 슬픈 죽음을 맞았다.

류샤오보는 2010년 중국인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지만, 노르웨이노벨위원회(Den norske Nobelkomité)가 오슬로시청에서 12월 10일 개최한 노벨평화상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해 그의 자리는 빈 의자로만 남아 있어야 했다.

류샤오보가 주장하고 강조하고 실천한 것은 ‘민주화’보다 한 단계 더 크고 높은 것, 바로 ‘사람다움(인간화)’이라고 생각한다. 인류의 삶을 살펴보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떤 사회든지 나름의 민주화는 있었다. 단지 비율이나 만족도의 차이가 있고, 또 그 차이의 많고 적음에 따라 국가의 특성, 이념의 구별, 그리고 오늘날에는 민주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구별했을 뿐이다. 그러나 항상 남는 것은 ‘사람다움’에 대한 갈망과 도전이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은 자의 죽음

박민희 한겨레 기자는 ‘류샤오보, 아무도 미워하지 않은 자의 죽음’이라는 글에서 류샤오보의 죽음을 애도했다. 박 기자의 표현처럼, 류샤오보 죽음은 ‘아무도 미워하지 않은 자의 죽음’이라는 표현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류샤오보 애도 표현을 보면서 우리 사회에서 즐겨 사용하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떠올랐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가 시(詩)에서 제목으로 사용한 표현이다. 비교적 짧은 작품이다. 하지만 친구, 죽음, 살아남음, 강한 자, 미움 등 시어(詩語)가 내뱉는 소리는 부드럽지만 칼처럼 날카롭고, 피와 먹물처럼 진한 충격을 주는 작품이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많은 친구들이 죽었는데,
나만 살아남은 것은 단지 운이 좋았기 때문인 것을….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었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내 자신이 미워졌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표현은 TV 드라마를 비롯해 영화, 소설 등 사회 전체적으로 크게 유행했다. 지금도 이 표현은 자주 만날 수 있다. 어쩌면 우리 사회 현실을 역설적으로 닮고 담은 표현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표현을 생각할수록, 그리고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의 죽음’을 바라볼수록, 다시 한 번 사람과 사회를 생각한다.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느냐?

민주화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람이다. 그래서 이념이나 국가 체제의 문제보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느냐’의 문제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늘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래서일 게다. 류샤오보의 안타까운 죽음으로 중국은 앞으로 ‘민주화’와 ‘사람다움’을 더 잘 갖추려면 오래 시간을 기다려야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옆 나라의 이야기지만, 우리 사회에서도 민주화와 함께 사람다움을 찾기 위한 열망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오랫동안 우리 사회 곳곳에서 크고 작은 또는 높고 낮은 목소리가 쉬지 않고 나오고 있다.

류샤오보의 죽음은 ‘아무도 미워하지 않은 자의 죽음’이다. 그리고 류샤오보는 ‘민주화’와 ‘사람다움’을 위해 자신의 삶과 목숨을 바친 노벨평화상 수상자, 시인, 문학평론가, 학자, 민주화 운동가다. 류샤오보의 죽음은 중국을 떠나 지구, 그리고 지구인이 지구에서 가장 존경해야 할 사람 중 한 명을 잃은 것과 같다.

사람을 위한 ‘정신적 문법’의 중요성

우리는 이제 ‘아무도 미워하지 않은 자의 죽음’을 ‘살아남은 자의 슬픔’으로 지켜봐야 한다. 미움 받지 않는 류샤오보의 죽음이 사람을 위해 조만간 살아서 움직이기를 기원한다. 이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은 자의 죽음’과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조금이라도 줄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김용규 작가가 『생각의 시대』(살림, 2014)에 쓴 글 중 ‘생각의 시대와 정신을 위한 문법’에 대한 부분은 인상적이다. 그는 “아이에게 ‘책 읽어주기’가 그렇듯, 수사학적으로 뛰어난 연설문 낭송과 암송은 문체나 기예를 그대로 복사하거나 모방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그것의 목적은 우리 뇌 안에 ‘정신적 문법’을 구성하고 그것을 만드는 세계를 구축하기 위한 일”이라고 쓰고 있다.

사람의 역사에서 정신이 어떤 것을, 어떻게, 어느 정도 갖추느냐에 따라 사람의 사회는 발전을 향한 진보(進步)와 퇴보(退步)를 반복했다. 김 작가가 강조한 바와 같이 사람을 위한 ‘정신적 문법’을 갖추는 것은 사람의 역사, 특히 사람의 시대에는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고 필요하다.

끝으로, 류샤오보의 명복(冥福)을 빈다.

※ 이 글은 (사)동북아공동체연구재단이 운영하는 ‘감격사회(감사와 격려로 사랑을 회복하는 칼럼공동체)’에 함께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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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사회 발행인이자 편집장이다. ‘글은 사람과 사회며, 좋은 비판은 세상을 바꾼다’는 말을 좋아한다. weeklypeopl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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