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교양은 기본적 질문과 시민성을 갖추는 것”…“인문학은 사람·사회·역사·문명으로 파고들어야 한다”…“교양교육 부실하면 사람도 사회도 부실해진다”…“아픔 향한 독법 전환이 이 시대 문학교육의 일”…“한국은 냉전과 대결에서 평화와 공존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인터뷰] 도정일 책읽는사회문화재단 이사장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사람과사회 2018년 여름·가을 통권6·7호
읽기 위해 읽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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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는 밤의 아름다움을 말할 수 없고 비 오는 날의 서정을 말할 수 없게 된 시대에 눈과 나무, 비와 숲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시 작품들을 쓰고 읽고 가르친다는 것은 적절한 일인가? 아니, 그것은 도대체 가능한 일이기나 한가? 산성비와 산성눈이 내리는 시대의 독자가 그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예전처럼 행복하게, 딸꾹질 한번 하지 않고 이를테면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의 시 「눈 오는 밤 숲에 머물러」를 읽으며 즐거워할 수 있을까?
프로스트의 시는 아름답다. 시의 화자는 동짓달 그믐밤 말을 몰아 눈 내리는 숲을 지나다가 문득 발길을 멈춘다. 눈발 속의 숲이 너무 아름다워 그냥 지나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삶의 가장 신성한 순간처럼 “숲은 아름답고 어둡고 깊다.” 그러나 화자는 그 아름다움에 매혹되면서도 세상과의 약속을 상기하고 “잠들기 전 갈 길이 멀다. 잠들기 전 갈 길이 멀다”며 다시 말머리를 돌린다. 화자는 그렇게 떠나지만 그가 떠남으로써 남기는 미련의 공간, 그 눈 내리는 숲은 독자를 유혹해 그곳으로 달려가게 한다. 그러나 프로스트의 이 평이하고도 아름다운 시는 오늘날 서정적 텍스트로서의 적절성을 거의 ‘완전히’ 상실하고 있다. 지금의 독자는 눈 내리는 숲으로 달려가지 않는다. 눈 내리는 숲은 독자를 ‘배제’한다.
-도정일,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민음사, 1994, 348~3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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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오늘날 프로스트처럼 눈 오는 밤 숲의 유혹을 노래할 수 있는가? 모더니스트의 시대까지도 작가, 시인들은 버지니아 울프처럼 “별의 언어를 옮겨 쓰는 세계의 은자”에게서 자신들을 발견하고, 나무를 돛 삼아 항해하는 한 척의 배라는 서정으로 이 행성을 그려볼 수 있었다. 나무들은 아름답고 나무가 있는 세계의 강물은 푸르러 그 강에 들어갔다 나오는 백조의 날개가 푸른 잉크빛으로 물들지 모른다는 행복한 서정을 그들은 펼칠 수 있었다. 모더니스트의 시대까지 갈 것 없이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 시인들은 “풀잎 하나가 우주를 들어올린다”(정현종)는 빛나는 상상력을 풀잎의 감성에 실어 세상으로 띄워보내지 않았던가. 그러나 나무들이 질식하고 숲이 죽어가는 지금 이 시대의 시인에게 그런 상상력은 가능하지 않다. 우주를 들어올리기는커녕 제 무게 하나도 추스르지 못하는 병든 풀잎을 시인은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 풀잎 자라는 소리를 듣기 위해 시인은 풀밭으로 가지 못한다. 농약 끈적한 풀밭에 앉아 풀잎의 숨소리를 들어야 하는 왜곡과 변태를, 그 비참을, 그가 무슨 수로 견딜 수 있으랴.
-도정일,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민음사, 1994, 350쪽)
3
어떤 사람들은 문학과 문학교육이 생태계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문학의 본질 영역을 떠난 일이라 생각할지 모른다. 이런 사고의 밑바닥에는 ‘환경문제란 언젠가 해결될 일시적인 문제다. 그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문학은 무얼 할 것인가’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이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비디우스의 운문신화집 등 세계문학의 고전들은 예외 없이 역사적 순간에 사람이 대면해야 했던 당대적 모순들을 다룬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 때문에 그 작품들이 훼손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작품들은 당대적 모순에 대한 문학적 대응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살아 있다. 우리 시대의 당대적 모순들 중의 하나는 사람과 자연 사이의 적대관계다. 문학이 문학의 방법으로 이 모순에 대응하는 것은 문학의 비본질적인 작업이 아니다.
이 시대의 시인들은 숲으로 가지 못하고 아이들은 눈을 겁내고 문학 교사는 텍스트의 부적절성 앞에 고민한다. 별빛 사라진 밤하늘은 아이들에게 가장 ‘흐리멍덩한 것’의 경험적 표본이다. 그러나 사람의 삶과 자연 사이에 일어난 이 모순과 괴리를 직시하게 하고 아름다움이 박탈된 세계의 궁핍을 보게 하는 일이야말로 문학교육의 과제다. 오늘날의 문학교육은 불가피하게 궁핍과 박탈, 괴리와 모순에 대한 교육이 돼야 하고, 자연의 고통이 어떻게 사람 자신의 고통이 되는가를 가슴으로 ‘느끼게’ 하는 교육이 돼야 한다. 이 관점에 설 때, 프로스트의 시 「눈 오는 밤 숲에 머물러」도 다시 그 적절성을 회복한다. 그것은 이 시대의 독자에게 그가 잃어버린 세계의 아름다움을 환기시키는 시, 그 상실의 아픔을 느끼게 하는 시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아픔을 향한 독법의 전환, 이것이 이 시대 문학교육의 일이다.
-도정일,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민음사, 1994, 363~364쪽)
“아픔 향한 독법 전환이 이 시대 문학교육의 일”
산문집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일부분(민음사, 1994, 1판 1쇄, 348~350쪽, 363~364쪽)이다. 이 글은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에 있다. 경희대 명예교수,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Humanitas College) 대학장(大學長)을 지낸 문학평론가 도정일(都正一) 책읽는사회문화재단 이사장이 24년 전인 1994년에 출간한 책이다.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는 1994년 당시 도정일 교수가 ‘늦깎이 신예 비평가’로 평가를 받던 때에 나왔다. 하지만 출간 후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 ‘평론집’으로서는 이례적으로 10쇄 10,000부를 판매하는 ‘보기 드문 기록’을 세웠다. 또한 ‘전문가 100인이 선정한 1990년대의 책 100선’(교보문고, 2007), ‘우리 시대의 명저 50선’(한국일보, 2007)으로 꼽혔다.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는 평론집이지만 글이 갖고 있는 독특한 모양새로 큰 주목을 끌었다. 더구나 절판된 평론집이 ‘시대의 명저(名著)’로 선정된 일은 이변(異變)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조금 과장하면,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는 ‘평론집의 교과서’, ‘평론집의 참고서’, ‘평론집의 고전’으로 선정해도 좋을 만한 수작(秀作)이다.
문학동네가 2016년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재판본에 쓴 책 소개를 보면 “그의 문장은 정확하고 아름다우며 시적인 울림이 풍부한 데다 때로는 해학적이기조차 하다”(한겨레, 1994.12.28), “문학비평 같기도 하고, 시민운동을 위한 굳건한 지지대 같기도 하고, 개성 넘치는 사유에 빚지고 있는 수상록 같기도 한 이 책은 이 강퍅한 시대에 인문학은 어떻게 존재해야 할지를 예시한다”(한국일보 2007.02.08) 등 1994년 출간 당시 언론 보도를 인용하고 있다.
김형균 문학동네 편집자는 ‘사람아, 나무 없이는 너도 없다’(문학동네 네이버 카페, 2014.03.10)에서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를 ‘20년 과거를 들을 수 있는 책’으로 빗대어 소개했다. 또 초판 서문에 저자가 스스로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고 밝힌 것과 달리 저자는 게으름을 피운 적이 없으며, 출간 약속도 지켰다고 썼다. 특히 필자가 “진짜 바빴다”며 ‘그럼에도’ 그 사이에 『시장전체주의와 문명의 야만』(2008.09), 『대담 :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2015.11) 같은 책을 출간했다고 소개했다.
우리 時代의 名著,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도정일 교수는 정말 바빴다. 김형균 편집자가 쓴 또 다른 글, ‘당신은 이 지구에 왜 왔나요? : 도정일 산문집 1, 2권 출간’(문학동네 네이버 카페, 2016.03.06)에 따르면, 그는 1993년부터 지금(2016년 3월)까지 월 평균 두 편 이상의 칼럼을 신문이나 잡지에 발표했다. 대략 1년 24편, 10년 240편, 20년이면 500편에 달한다. 편당 평균 원고 분량을 10매로 계산하면 5,000매다. 이는 단행본 대여섯 권 분량이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김 편집자가 밝혔듯이 문학, 인문학, 교육 관련 비평 에세이, 각종 인터뷰, 좌담, 강연 원고를 모두 합치면 ‘초대형 용량’이다. 소작(小作)이 아니라 다작(多作)이다. 단지 책으로 나오지 않았을 뿐이다.
이와 함께 책읽는사회문화재단, 기적의도서관, 후마니타스칼리지 등 중요하고 굵직한 일을 동시에 진행하면서 그는 더욱 바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그 와중에 세 권의 책이 문학동네에서 탄생했다. 2014년 2월 산문집 『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와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이 나왔다. 이어 2016년 2월에는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재판)가 다시 나왔다. 이 책은, 앞에서 언급했지만, 민음사에서 1994년 12월 처음 출간했다. 문학동네가 새 옷을 입혀 개정판을 냈으니 22년 만에 세상에 다시 나온 셈이다.
도정일 교수는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맨 끝에 수록한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의 끝 문장을 “아픔을 향한 독법의 전환, 이것이 이 시대 문학교육의 일”이라는 표현으로 마무리했다. 아픔을 향해 읽기를 바꾸는 것, 그것이 문학교육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읽기’는 생각하기, 판단하기, 묻기, 만들기, 포용하기, 배려하기 등 여러 뜻으로 확장하고 활용해서 읽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 時代의 인문학자, 都正一
도정일 교수는 1941년 1월 10일 경남 고성에서 출생했다. 2018년 현재 77세다. 경희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후 하와이대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시사영어사, 동양통신 등 언론계를 거쳐 경희대에서 오랫동안 영문학을 연구하고 가르쳤다. 그는 문학, 문화, 철학 등 인문학 영역에서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인문학을 꾸준히 실천하는 인문학자이자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손꼽는 인물이다. 문득 N. 촘스키(Avram Noam Chomsky)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도정일 교수는 2011년 설립된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설립을 위한 실질적 기획자와 운용자로 참여했고, 2015년 봄까지도 대학장을 맡았다. ‘후마니타스’(Humanitas)는 ‘사람다움’을 이르는 말인데,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가 웅변가 양성 과정에서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정일 교수는 ‘사람, 사회, 역사, 문명에 대한 인문학의 책임을 강조하고 인문학적 가치의 사회적 실천에 주력해온 한국 시대의 대표적 인문학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도정일 교수는 ‘사람다움’이라는 가치를 위해 바쁘게, 그리고 오랫동안 노력과 실천을 수행해온 인문학자다. 이 같은 그의 모습을 가장 잘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적절한 낱말은 ‘책읽는사회문화재단’, ‘기적의도서관’, ‘후마니타스칼리지’, ‘책’, ‘강연’, ‘글쓰기’ 등 여섯 가지를 손꼽을 수 있다. 이런 말들은 그의 활동과 생각을 오롯이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여섯 가지는 ‘인문학’과 ‘교양’이라는 낱말로 뼈대를 나타낼 수 있다.
인문학과 교양은 도정일 교수를 잘 표현하고 이해하는 낱말이지만 ‘도서관’과 ‘책’도 그를 설명하는 최고의 낱말이다. 그는 “삶의 가치와 의미를 회복하는 사회를 만드는 데 있어 책 읽기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없다”고 말한다. 삶의 가치와 의미를 ‘회복하는 사회’는 곧 ‘좋은 사회’를 뜻한다. 인문학, 교양, 도서관, 책은 모두 ‘좋은 사회 만들기’의 핵심 가치들이다. 좋은 사회 만들기는 인식의 변화와 변환이 있을 때 더 빠르게, 더 좋게 실현할 수 있다. 인식의 변화와 변환은 곧 ‘인문학’과 ‘교양’, ‘도서관’과 ‘책’과 뗄 수 없는 관계다.
2018년 7월 11일(수) 오후 2시,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자택(自宅) 근처에 있는 홈스홈커피앤푸드에서 도정일 교수를 만났다. 불곡산(佛谷山) 자락 아래에 있어서 조용하다. 옆에 골안사(骨安寺)도 있어 산책하기도 좋다. 이번 인터뷰는 책과 글과 강연, 그리고 기적의도서관을 비롯해 책읽는사회문화재단이 지향하는 꿈을 확인하고 그 꿈의 필요성을 다시 한 번 절실히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특히 나와 타인의 관계를 생각하며 함께 하는 삶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는 ‘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한편 이 글에서는 인용한 글을 포함해 ‘인간’으로 쓴 낱말은 모두 ‘사람’으로 바꿔서 썼음을 밝혀둔다.
▲인터뷰를 하게 돼 진심으로 기쁘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다. 강연, 책, 글이 아닌 얼굴을 보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무척 좋다.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오마이뉴스 문화 담당 편집위원을 맡고 있는 정윤수 사단법인 풀로엮은집 사무국장이 쓴 ‘세 영문학자의 아름다운 외도 : 백낙청·도정일·김종철’을 읽었다. 1월 10일은 백낙청(1938) 전(前) 서울대 교수, 도정일(1941) 전(前) 경희대 교수, 김종철(1947) 전(前) 영남대 교수(녹색평론 발행인) 등 세 영문학자의 생신(生辰)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우선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하다. 대학 강의도 하지 않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다.
완전히 은퇴했다. 대학에서 직책을 모두 내려놓았다. 지금은 책읽는사회문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데, 이게 유일하게 맡고 있는 ‘자리’다. 2015년 허리를 다쳐서 몸이 불편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속은 상당히 안 좋다. 그래서 지난 3년 동안 몸을 추스르며 지냈다. 앞으로는, 얼마를 더 살지 모르겠지만, 남은 시간 동안 내가 하고 싶은 일, 책을 정리하고 쓰는 일을 하고 싶은데, 그 일을 마저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하는 데까지 해보자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교양교육은 ‘나쁜 인상’ 지배받았다”
▲경희대가 2011년 3월 시작한 후마니타스칼리지는 시작할 때부터 주목을 받았다. 경희대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관심을 가졌다. 인문, 인문학 차원에서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학장을 맡았던 만큼 여러 가지 많은 역할을 했다고 본다. 벌써 1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인문학과 후마니타스칼리지를 묶어도 좋겠는데, 어떻게 평가하는가?
우선 ‘학장’이란 용어는 조금 설명이 필요한 것 같다. 후마니타스칼리지는 경희대 서울과 용인 캠퍼스에 학장이 각각 한 명씩 있다. 두 캠퍼스를 총괄하는 자리가 ‘대학장’이고 내가 맡았던 직책이 대학장이다. 후마니타스칼리지는 대학에서 교양교육, 특히 인문학을 염두에 둔 교양교육을 본격적으로, 제대로 시행해보자는 취지로 시작했다. 대학 교양교육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대학에서 교양교육은 제대로 실현하지 못한 상태다. 대학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기초는 1·2학년 때의 교양교육이다. 그런데 교양교육은 ‘나쁜 인상’의 지배를 받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교양교육이 ‘나쁜 인상의 지배를 받았다’, 무슨 뜻인가?
교양교육이 나쁜 인상의 지배를 받았다는 말은, 교양이라는 말 자체에 대한 것인데,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교양교육이라는 식의 오해, 착각, 틀린 태도를 말한다. 교양이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고 많은 이들이 생각한다. 하지만 대학의 교양교육은 백화점 등에서 하는 강좌와는 다르다. 교양교육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서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 젊은이에게 정신적, 지적, 도덕적 준비를 갖추도록 집중적으로 단련하는 교육이다.
그리고 교양교육의 주요 부분으로 ‘시민교육’이라는 게 있다. 대학이, 고등학교 교육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데, 우리 사회가 입으로는 민주주의를 말하고 있지만 ‘민주주의를 위한 교육‘에는 극히 태만(怠慢)하다. 민주주의를 만들고 지킬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 시민교육이다. 그런데, ‘시민이 어떻게 길러지는가’, ‘시민의 역할은 무엇이고, 책임은 무엇인가’, 이런 문제들을 생각하고 토론하는 교육은 지극히 부실하다. 민주주의 원칙과 가치에 충실한 시민을 지속적으로 기르지 못하는 사회는 민주주의가 늘 불안하고 위태로운 ‘위기의 사회’다. 오늘날 세계의 주요 국가들 중에 이런 위기를 겪지 않는 나라는 없다.
▲후마니타스칼리지를 교양교육과 시민교육을 위한 곳으로 만든 셈이다.
후마니타스칼리지는 본격적인 교양교육과 시민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설립했다고 말할 수 있다. 시민교육을 본격적으로 실시했고, 대학이 소홀히 하는 일반 예술교육에도 공을 들였다. 대학에서 비전공자를 위한 예술교육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미술교육은 미술 전공자만, 음악교육은 음악 전공자만을 위한 교육인 것으로 오해하고 있어서 비전공자를 위한 예술교육은 자리를 잡을 수 없는 없게 돼 있는 곳이 우리나라 대학들이다.
후마니타스는 최초로 교양교육의 체계화를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특히 대학 1, 2학년 때 볼 수 있는 본격적인 교재가 없었다. 무엇을 읽고,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토론할 것인가를 다룬 책이 없었다. 담당자가 적당히 땜질해서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좀 나쁘게 표현하면, 아무 것이나 가져다가 교양교육이라 불렀다. 그래서 교양교육의 체계화를 시도하고 싶었다. 이것이 후마니타스칼리지가 갖고 있는 가장 의미 있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재를 살펴봤는데, 좋은 글이 참 많았다.
교재는 교양교육의 체계화를 위한 것이다. 후마니타스에는 두 권의 본격 교재가 있지만, 사실은 총 세 가지다. 교재 두 권은 읽기용이고, 다른 하나는 토론용이다. 교재는 토론의 바탕이 되는 것이다. 1, 2학년 때 교양교육을 통한 토론교육은 대단히 중요하다. 대학에서 학점을 따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기 일생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기초교육을 시키는 게 교양교육인데, 그 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토론교육이다.
“교양교육 부실하면 사람도 사회도 부실해진다”
▲대학에서 교양교육이 무관심과 부실의 대상이 된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보다 교양교육에 대한 개념이 없다.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무엇을 교양교육이라 부르고, 내용을 어떻게 짤 것이며, 누가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대학이 갖고 있지 않다. 선진국을 바라보는 또는 선진국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나라의 대학 교양교육이 이 정도로 부실한 곳은 없다. 물론 전공은 부실 정도가 교양과는 다르겠지만, 한국의 대학 교양교육은 매우 부실하다.
대학의 교양교육이 부실하다는 것은 청년을 부실하게 길러낸다는 이야기와 똑같다. 또 청년을 부실하게 길러낸다는 것은 사회가 대학 재학 동안 또는 대학을 졸업한 후 한국 사회를 이끌어갈 젊은 세대를 제대로 키우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불안한 사회, 기초가 흔들리는 사회를 항구(恒久)하게 재생산할 수밖에 없다. 교육계에서도 4차산업혁명을 이야기한다. 거기에 맞춰 기술교육을 한다고 한다. 하지만, 더 본질적이고 더 중요한 것은 제대로 된 교양교육이다.
▲그동안 진행한 후마니타스 교양교육을 어떻게 평가하나?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면, ‘혁명’ 비슷하게 시작된 것이 후마니타스 교양교육이다. 하지만 현재 상황을 평가하라면 대략 50점 정도라고 본다. 아직도 갈 길이 멀다. 교양교육을 시행하는 것만으로도 높은 점수를 받을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시도하는 것 자체는 80점쯤 줘도 될 것 같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시행하면서 어떤 성과를 거두고 있느냐다. 이 시각에서 보면 50점 정도다.
“늘 새로운 질문 던지고 답변 찾는 것이 인문학”
▲교양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는데, 이제 교양과 인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다. 교양과 인문학이라는 낱말은 자주 쓰고 자주 들어서 쉬운 것 같지만, 사실 쉬운 게 아니다. 사회적 현상이나 다른 학문과 연결했을 때는 더 어려워진다. 두 낱말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풀어서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겠다.
인문학을 다룬 논의나 책은 상당히 많다. 그런데 ‘인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제대로 된 각도에서 본격적으로 다룬 책은 찾아보기 대단히 힘들다. 학문으로서의 인문학에는 갈래가 많다. 크게 세 가지가 있는데, 역사, 철학, 문학이다. 그러나 대학에서 배우는 학문으로서의 근대 인문학만이 인문학의 전부가 아니다.
사람에 대한 사유, 예들 들면,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사람의 사회를 지탱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어떻게 같이 살아야 할 것인가’, 이런 생각과 질문이 인문학의 시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인문학 역사는 오래 됐다. 인문학적 질문들이 본격적으로 던져지기 시작한 것은 그리스 시대다. 아테네철학, 이 철학의 대표적인 철학자인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이 했던 사유(思惟)가 인문학의 출발점이라 말할 수 있다. 동양에서는 공자(孔子)다. 공자가 동양 인문학의 시초다.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서양 인문학과 유가 사상(담론)의 동양 인문학, 그리고 히브리 인문학을 포함하면 인문학의 큰 줄기와 갈래를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보통 학문으로서의 인문학, 구체적으로 역사, 문학, 철학, 서지학 등이 학문으로 분화하기 시작한 후의 근대 인문학을 인문학이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인문학은 근대 학문에 국한되지 않는다. 사람의 삶과 가치, 진리 같은 문제들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기 시작한 이후 2,500년 이상 지속된 것이 인문학 전통이다. 그리고 여기에 학문으로서의 인문학인 근대인문학이 가미됐다.
인문학은 매우 넓고 상호관계도 복잡하다. 이런 인문학을 간단하게 정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아무리 복잡한 문제라 할지라도 근본에 해당하는 물음을 던져놓고 이를 중심으로 생각을 풀어나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인문학은 새로운 질문, 새로운 답변을 늘 시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책을 소개하는 글에서 ‘사람, 사회, 역사, 문명에 대한 인문학의 책임을 강조하고 인문학적 가치의 사회적 실천에 주력해온 우리 시대의 대표적 인문학자’라는 소개를 읽었다. 과분한 평가다. 국내에서는 사람과 사회와 역사와 문명을 연결해서 인문학의 미래를 고민하려는 시도가 별로 없었다. 내 생각에 인문학은 사유와 동시에 실천의 영역이다. 사람이 생각하고 책임져야 할 영역을 역사, 사회, 문명, 사람 등 인문학적 사유와 실천의 대상 영역으로 잡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렇게 폭을 넓히고 파고 들어가는 것, 이런 게 내가 생각하는 인문학 접근법이다.
이렇게 요약하고 싶다.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사람에 대한 사람의 책임, 사회에 대한 사람의 책임, 역사에 대한 사람의 책임, 문명에 대한 사람의 책임, 이런 책임을 끊임없이 환기하고, 생각하게 하고, 질문을 던지고, 응답하게 하는 것이 인문학이다.
“인문학은 사람·사회·역사·문명으로 파고들어야 한다”
▲생각하고 응답하게 한다는 부분은 많은 사람이 인정하는 것 같다. 생각과 응답은 첫 산문집이자 가장 유명한 책인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에 거의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 대한 생각을 좀 말씀드리고 싶다. 책을 읽으면서 생각과 응답에 계속 매달려야 했다. 인터뷰를 부탁한 계기도 이 책 때문이다. 설명을 하기 위한 도구로 문학을 사용했을 뿐 역사, 철학, 정치, 사회 등 다양한 것이 들어 있다. 물론 제대로 읽지 못하면 문학과 인문학이라는 표면적인 것만 읽고, 보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고슴여우지’를 비롯해 제목인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등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는 의미는 무척 넓고 깊다. 그래서 겉과 속에 들어 있는 의미를 함께 읽으면 생각과 질문을 끊임없이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책이다. 앞에서 교양이나 인문학에 대한 기초교육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 책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매우 필요한 요건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울러 이해를 제대로 못하거나 잘못 이해하면 엉뚱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갖게 한다. 개인적으로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는 이해와 기억을 동시에 갖게 해주는 매우 좋은 책이라 생각한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중고를 구입해 주변에 있는 지인에게 선물로 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아쉽지만, 책을 제대로 이해하는 경우는 15~20% 수준이었던 것 같다.
책을 잘, 제대로 이해해줘서 고맙다. 지금까지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를 제대로 읽은 독자는 처음 만나는 것 같다. 그리고 제대로 책을 이해한 사람은 20% 수준이라고 했는데, 그게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비율인 것 같다. 그 책은 문학만 이야기한 게 아니다. 문학을 포함해 많은 것을 생각해보려고 했다.
▲교양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으면 좋겠다.
교양, 답변하기 상당히 어렵다. 교양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어 교양을 오해하고 있고, 또 교양이라는 말의 의미도 협소하다. 그래서 ‘교양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한국 사회가 다시 던지고 생각하고 논의도 새로 해야 한다. 이를 위한 시도의 하나로 제시하고 싶은 게 있다. 질문의 발견과 응답의 추구, 이것을 바탕으로 해서 사람이 반드시 물어봐야 할 질문과 사람이 반드시 추구해봐야 할 가치를 생각하고 실천하는 게 교양의 영역이라 생각한다. 흔히 말하는 의미의 교양과는 다르게, 또 ‘교양이 필요하다’고 말할 때의 피상적인 지식으로서의 교양과 달리 교양은 상당히 본질적인 질문에 대한 응답을 탐색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필요한 기본적인 질문들이 있다. ‘사회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타인은 나에게 누구인가’, 예컨대 이런 물음이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고 응답해야 할 중요하고 기본적인 질문이다. 이런 질문을 포기하지 않고 늘 대면하는 자세가 교양인의 자세고, 이런 질문에 응답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교양의 힘이다.
“교양은 기본적 질문과 시민성을 갖추는 것”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교양과 달리 새로운 개념의 교양을 생각해야 할 것 같다.
맞다. 그런 의미에서 교양을 새로 정의할 필요가 있다. 시민성을 중심부에 놓고 생각하면, 요즘 같은 시대의 에는 자기중심주의나 이기주의를 제어할 힘의 유무가 교양의 척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이익이 무엇이고, 그래서 이득은 무엇인가를 늘 판단의 중심에 두는 것이 자기중심주의다. 자기중심성은 가장 낮은, 가장 본능적인 차원에서 우리의 판단과 행동을 좌우하는 힘이다.
예수 시대의 이스라엘 현자 힐랄은 ‘내가 나를 생각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생각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그 본능적인 힘의 위력을 표현한 적이 있다. 맞는 말이다. 모든 경우에, 매사(每事)에 자기를 중심에 두고 나에게 ‘이득이 되는가, 아닌가’를 기준으로 살아가는 방식은 ‘맞다, 그르다’의 도덕적 판단을 벗어나는 것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다른 또 하나의 질문이 제기되는데, ‘내가 나만을 생각한다면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이 두 번째 질문과 함께 시작되는 것이 말하자면 ‘교양’이다. ‘내가 나를 생각하지 않으면 누가 날 생각해줄 것인가?’, ‘내가 나만을 생각한다면 나는 무엇인가?’, 이 두 가지 질문을 던진 것이 힐랄인데, 그의 그 두 가지 질문은 우리가 두고두고 생각해야 할 화두를 던진다. 나는 중요하지만 내가 오직 나만을 생각하는 존재라면 그 존재의 크기는 초라하지 않겠는가? 남, 타인, 나 아닌 다른 존재들이 모두 빠져버린 공간은 사실은 내가 살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어떻게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들이 중요해진다. 그 중요성에 대한 인식, 그것이 시민성이다. ※ 시민성은 일반적으로 ‘시민이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다른 시민과의 관계에서 갖춰야 할 바람직한 자질’로 정의한다.
교양은 시민성의 가치와 덕목을 어떻게 지키고 어떻게 만들면서 살아갈 것인가, 이런 것을 예습하고 공존의 능력을 키워주는 힘이다. 셰익스피어를 알고 모네를 아는 것도 교양이지만, 교양은 그것으로만 끝나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교양은 시민성의 가치에 대한 민감성이다. 이게 교양에 대한 내 생각이다.
후마니타스칼리지에서 시민교육을 실시한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인문학 교육도 중요하지만, 시민은 무엇이고 시민은 왜 필요한가, 이런 것을 생각하고 시민의 예의를 갖추는 것, 말하자면 시민성의 가치에 대한 민감성을 갖는 것, 그것이 교양이다.
▲책은 물론 다른 데서도 ‘시민’, ‘세계시민’을 많이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시민은 개인이나 소규모 집단으로, 세계시민은 전 세계 등 광범위한 의미로 볼 수 있는데, 시민성의 가치에 대한 민감성을 제대로 갖춘 사람이 시민이고, 이들이 모이면 시민사회, 나아가 세계시민이라고 보면 되나?
그렇다. 제주도 난민 문제를 보자. 세계화 시대인 21세기는 이방인, 다른 나라 사람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필요한 시대다. 난민에 대한 불편감과 두려움이 있을 수 있지만, 한국 사람은 난민이 될 가능성은 없을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한 다리를 넘어서면 세계시민이라는 관점이 생긴다. 또 난민은 도움이 필요해서 건너온 사람이다. 기피하고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품고 함께 살아가야 할 대상이다. 이런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하고 또 갖도록 시도하는 게 세계화 과정이다.
우리는 포용의 빈곤을 겪는 사회다. 난민을 포용할 수 있는 게 세계화 시대에 맞는 시민성의 가치이자 덕목이다. 이 지점까지 가면 ‘인류애’라는 추상적 의미까지 나오게 되는데, 추상화하지 않더라도 환경과 문화가 다르지만 결국 우리가 포용하고 함께 살아가야 할 이웃으로 난민을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가 필요하다. 물론 이런 태도는 대단히 어렵다. 특히 한국은 외국인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뿐만 아니라 다양성과 포용성이 크게 부족한 사회다. 나와 다른 것, 다양한 것에 대한 공포가 상당하다.
다양성과 포용성의 결핍은 편협성을 낳는다. 이는 반드시 극복해야 할 문제다. 그러면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결국 교육이 맡아야 할 문제다. 선진 사회에서는 초등학교 때부터 외국인에 대한 태도, 나와 다른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함께 지내고 같이 살 것인가를 교육하고 훈련하도록 한다. 하지만 한국은 이런 교육이 사실상 거의 없다. 그래서 시민과 시민사회에 대한 몰지각성이 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다.
“다양성과 포용성의 결여는 편협을 낳는다”
▲다양성과 포용성의 결핍은 소통에서도 부작용을 낳는 것 같다. 소통의 어려움은 내부는 물론 외부에서도 함께 일어나는 부작용이다. 소통을 잘 하는 방법을 찾는다면, 어떤 것을 생각할 수 있나? 이야기 주제의 특성상 추상적 내용이 많으니 설명을 조금 더 쉽게 풀 수 있다면 좋겠다.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에 있는 「풀잎, 갱생, 역사」를 보면, 1970년대 도시의 삶을 ‘온실 환경’과 ‘온실 문화’로 언급하면서 ‘순환’과 ‘부활’과 ‘약속’이라는 낱말로 ‘온수의 문화’와 ‘풍요의 문화’를 설명하고 있다.
좋은 예는 많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포용성과 관용의 능력이 잘 발달한 시민을 길러내는 것, 이것이 한국 사회에 시급한 문제라는 것이다. 누가 어디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가정, 사회 등 어느 한 영역에서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가정과 초등학교가 아주 중요한다. 초등학교는 사람이 일생동안 유지하는 능력과 태도가 자라는 시기다. 장애인 학교 문제는 우리 사회가 아이들을 어떻게 잘못 길러내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사례다.
나와 다른 존재를 차별하고 멸시하고 배제하는 한국 사회의 특성, 그 대상이 장애인이든 외국인이든, 이런 문제를 교육 과정을 통해 극복해나가야 한다. 부모의 역할이 중요하다. 부모는 ‘너와 다른 이상한 아이’라는 식의 편협한 말이나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또한 아이가 장애인을 손가락질을 하거나 잘못된 행동을 할 경우 부모가 그 자리에서 분명하게 주의를 줘야 한다.
▲아이가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못하거나 잘못을 했을 때 올바른 길로 가도록 하는 것은 부모가 해야 할 역할일 텐데, 요즘에는 이런 모습을 보는 게 어려운 것 같다. 결국 이런 현상은 결핍의 문화, 교양의 부실이 원인이라고 봐야 자연스러울 것 같다.
맞다. 사람에 대한 예의가 없는 것이다. 초등, 중등, 대학에 이르기까지 ‘무교양(無敎養)’ 상태의 정도가 아주 심각하다.
“언어의 타락을 부추기는 정치 언어”
▲인문학과 교양을 다뤘는데, 이제 ‘시대, 시대정신, 언어’ 문제 등을 다뤘으면 한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요즘에는 남자가 푸대접을 받는 게 일상이자 상식, 아니 당위라고 말해야 할 만큼 이상하고 부적절한 인식이 사회에 만연하고 있다. ‘간이 배 밖으로 나왔다’는 말을 속담처럼, 관용어처럼 쓴다. 매우 불행하고 매우 이상한 표현이다. 특히, 중장년이나 정년퇴직 등 직장을 그만둔 경우 소위 ‘찬밥’ 신세다. 가족에게, 특히 아내에게 ‘무시’를 받기 일쑤다. 이 경우 거의 대부분 돈을 벌지 않고 집에서 쉬면서 밥만 먹고 지낸다는 이유 때문이다. ‘무능하다’고 탓하는 것은 애교 수준에 가깝다. 수십 년 동안 가정을 위해 일하다 퇴직한 가장인 남자가 겪는 슬픈 현실이다. 이는 사회적으로 대단히 ‘불행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비슷한 현상은 많다. 낱말, 즉 언어 사용에서도 찾을 수 있다. 흔히 쓰는 ‘조폭’, ‘빨갱이’, ‘종북’ 등 특정 낱말은 인식을 바꾸려는 순수하지 않은 의도를 갖고 있다. 이 낱말을 쓰는 사람은 낱말에 의도를 넣은 후 그 의도를 전체적으로, 그리고 순식간에 퍼뜨려서 ‘사회적 인식’을 바꾸려고 한다. 성 평등 관련 낱말도 마찬가지다. 언어를 왜곡하거나 부정적 의도를 담는 경우는 대부분 좋은 것보다는 나쁜 것을 퍼뜨려서 사회적으로 악용하려는 의도를 숨기고 있다. 요즘에는 낱말(언어) 악용 현상이 어느 때보다 심각한 것 같다. ‘언어농단(言語壟斷)’이라고 말해야 할 정도다. 이런 맥락에서 시대와 시대정신을 이야기하는 것은 매유 유익할 것이라 생각한다. 좋은 말씀을 부탁드린다.
한국 사회에서 언어의 타락, 언어적 추악성이 이 정도로 깊었던 때가 있었을까 싶다. 이런 현상을 부추기는 것은 정치가 주원인인 것 같다. 정치 언어가 한국인의 언어생활을 격렬하게 타락하게 만들었고 또 만들고 있는 상황이다. 또 대결과 대립의 언어가 오래 돼 생긴 부작용이 크다. 민주 세력과 비민주적 세력, 노동자와 자본 등 사회적 세력을 반목과 적대 관계로 편 가르기 하는 일이 매우 지나치다. 반목과 갈등이 반드시 적대성으로 치달을 필요는 없다.
그런데 한국은 언어의 적대성이 너무 깊고 광범위해서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 웬만큼 독한 언어를 쓰지 않으면 말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 온라인에서 보는 글을 보면 욕설이 심각하다. 어쩌면 병적인 수준이라 말해야 할 정도다. 사회적 병리(病理)다. 좋게 말하면, 언어의 정화가 필요한데, 언어 정화로 될 일인가 싶다. 언어의 타락은 사람의 타락, 인간성의 파괴를 불러온다. 언어 문제는 교육만으로 안 된다. 욕을 자주 쓰면 사람은 타락한다. 이는 심각한 사회적 병폐이자 병리인데, 어떻게 할 것인지 앞이 캄캄하다.
▲변화, 글쓰기, 책읽는사회문화재단 이야기도 나눴으면 한다. 우선 ‘변화(變化)’ 이야기다. 정치, 경제, 문화 등을 보면 최근에는 변화가 상당히 많이, 그리고 빠르게 이뤄졌다고 생각한다. 1970~80년대는 산업의 시대, 1990년대는 문화의 시대, 2000년대 이후, 특히 2010년대는 정보의 시대로 볼 수 있다. 과거에는 정보를 접하는 게 일방적이었고 접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무관심도 많았다. 물론 알려주려고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정보의 시대는 과거와 다르다. 정보를 쉽게 접하고 전달할 수 있는 시대다. 이는, 2018년 6.13지방선거에서 볼 수 있듯이, 대단히 ‘큰 변화’다. 앞에서 이야기한 ‘교양’과 ‘인문학’의 영향도 컸다고 본다. 일상과 가까워지고 자주 접하면서 변화를 만들었다고 믿는 까닭이다. 이는 또한 ‘이해하는 힘’, ‘판단하는 힘’, ‘분석하는 힘’을 키워줬다. 이 같은 ‘큰 변화’는 정신(인식)이나 문화를 비롯해 여러 가지 면에서 여러 변화를 낳았다고 본다. 이미 많이 변했고, 변하고 있고, 더 많이 변할 것으로 믿고 있다.
사람들은 2016년 촛불을 혁명이라고 말한다. 촛불이 혁명적 요소를 갖고 있는 것도 맞다. 그런데 ‘촛불이 한국 사회를 어떻게 바꾸고 바꿀 것인가’, 이 물음은 당장 단언하기가 어렵지만, 촛불 이후 생긴 변화만 갖고 이야기를 해도 이전 사회와 비교하면 굉장히 다르다. 민주주의 가치를 어떻게 확산할 것인가,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정신 자세는 무엇인가, 이런 물음을 시민 사회에 많이 퍼졌다. 이는 굉장한 발전이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70년대부터 끊임이 없었다. (촛불은) 오랜 민주화운동의 성과이기도 하지만, 그런 성과의 집약적 결과라고 말하기보다는 민주화 과정으로서의 촛불이고, 이것이 한국 사회를 결정적으로 바꾸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이런 변화가 앞으로 얼마나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6.13선거는, 문재인 정부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은 아닌데, 한국 사회에서 민주화 역량이 한 단계 성숙했다고 판단할 수 있게 해줬다. 하지만 더 기다려봐야 한다.
“냉전 구조가 한국 사회 병들게 했다”
▲지난 6.13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압승했는데, 이와 비슷한 선거 결과는 과거에도 있었다. 그때는 ‘몰아주기’, 대기업이나 그룹사가 계열사에 일감을 몰아주는 것처럼, 몰아주기였다. 현상만 놓고 보면 과거와 이번 6.13은 몰아주기라는 점에서는 똑같다. 하지만 과거에는 좋은 것을 위해 몰아준 게 아니라 나쁜 것에 몰아준 것이라고 본다. 반면 이번 6.13은 좋은 것을 위해 몰아줬다는 점에서 차이와 다름이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소위 ‘중도’라고 부르는 지점을 기준으로 볼 때, 중도에 가까이 있었던 사람 또는 조금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이 몰아주기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점도 주목할 점이다. ‘해도 너무 한다’, ‘금을 넘었다’는 인식과 함께 ‘몰아주기’에서 ‘버리기’로 변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미워도 다시 한 번’이 있어 몰아주기가 가능했지만, 지금은 이를 허용하지 않는 경향이 뚜렷하다. 작은 차이지만 아주 큰 차이다. 이 작은 차이 때문에 앞으로 한국 사회는 단순히 좌우보혁(左右保革)에 의존하는 형태에서 조금씩 벗어날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느릴지라도, 메트로놈(Metronome)이나 시소처럼, 균형을 잡을 것이고, 무게 추를 잡아가면서 움직일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변화의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이해다. 전에는 이해를 잘 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이해를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앞에서 정보의 시대라고 표현했는데, 지금은 정보를 쉽고 빠르게 주고받을 수 있는 시대와 환경이 마련돼 있다. 그런 만큼 사람들의 인식은 상당한 변화가 이뤄졌고, 이는 사회적 현상이나 어떤 문제를 구조적으로 이해하고 인식하는 힘을 갖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해하는 힘’을 ‘교양’이라는 말로 바꿔도 좋을 것 같다. 이는 결국 ‘거대한 변화’이자 ‘큰 변화’다. 또 비교적 오래 갈 수 있는, 10~15년은 갈 수 있는 변화일 것으로 예상한다.
굉장한 변화다. 그 변화가 오래 가기를 바란다. 이 변화가 지속적인 힘이 돼서 한국 사회를 바꿀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예단하기는 어렵지만, 이런 변화가 15년 동안 지속된다면 전체적 변화는 상당할 것이다. 여하튼 조금 더 기다려봐야 할 것 같다.
한국은 한국 사회를 병들게 했던 ‘이념적 구조’가 있다. ‘냉전 구조’다. 아직 예단하기 힘들지만, 최근 극적인 변화가 이뤄지고 있다. 이는 문재인 정부 들어와서 이룬 성과다. 북한을 변화하도록 하고 남북이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상호 약속과 태도, 그리고 국민의 호응, 남북이 무찔러야 한다는 대상에서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태도로 변했다. 이런 상황과 변화는 한국 사회의 심리적인 구조를 크게 바꾸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냉전과 대결의 시대에서 평화와 공존의 시대로 옮겨가는 길목에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변화가) 자리를 잘 잡을 수 있을지 불안한 마음이 아직 남아 있다.
“한국은 냉전과 대결에서 평화와 공존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김정은 국방위원장의 인식이 변했다고 본다. 들은 이야기인데, 김정은은 어렸을 때 접한 환경과 의식이 김일성, 김정일과 다르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변화를 낳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어렸을 때 교양과 인문학을 접하는 게 중요하듯이, 김정은의 변화는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중재자’ 역할을 하려 해도 김정은 위원장이 나서지 않으면 의미도 성과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인식이 변하고 바뀌려면 오랜 시간이 걸린다. 아무리 짧아도 20~30년, 30~50년을 노력하면서 기다려야 한다. 지금은 거의 의미가 없지만, 한국은 동서로 갈등이 심했다. 마찬가지로 통일 후에는 남북으로 인한 갈등과 대립이 클 것 같아 걱정스럽다. 남북 갈등은 동서 갈등에 비하면 매우 클 것으로 본다. 그렇지만 초·중·고등학교는 물론 대학에서도 가까운 미래나 조금 먼 미래에 맞아야 할 사회·문화적 갈등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갈등 때문에 잃는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비용은 막대하다. 더구나 이런 문제는 한두 세대를 거치며 오랜 시간이 지나야 풀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가 클 수밖에 없다.
남북 관계는 정치적 영역만으로 변화를 가져올 수 없고 경제적 영역만으로도 가져올 수 없다. 남북한 주민의 심리 구조 변화가 대결에서 비대결로 바뀌고 공존의 심리로 바뀌어야 가능하다. 그런데 심리가 바뀌는 데에는 교육, 사회 분위기 등 여러 가지 필요한 준비 단계가 있을 것이다. 70년 동안 대결의 시대를 겪으면서 비용을 많이 치렀다. 남북한 모두 갈등 비용을 알고 있다. 그래서 과거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70년을 이어온 대결 구도가 한꺼번에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비용은 많이 들 것이다. 그러기에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노력이 꼭 필요하다. 여러 방면으로부터의 공존과 화해를 위한 노력이 있어야 통일이 가능하다고 본다. 이런 노력은 체제 통일이 아니더라도 필요하다. 평창올림픽 이후 지금까지 일어난 대결 구조의 변화, 이것은 매우 충격적이다. 일찍이 꿈도 꾸지 못했던, 꿈에서도 꾸지 못했던 변화가 일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쓰기 이야기를 할 때 같다.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를 비롯해 책이나 칼럼을 읽으면 참 좋다는 생각을 예외 없이 한다. 어렵거나 까다로운 것을 쉽고 평범한 글로 표현해서 읽기와 이해하기를 좋게 해주기 때문이다. 글에 담은 낱말, 비유, 상징 등은 일상에서 봤던 글과 조금 다른 글로 다가온다. 그래서 읽을 때마다 배우고 싶은 마음이 늘 들게 한다. 어떤 사람은 책과 글을 읽고 나서 글쓰기를 다시 배우겠다고 말했고, 또 다른 어떤 사람은 글을 읽고 한 방 맞은 것처럼 머리와 가슴에 충격을 받았다는 이도 있다. 어떻게 해야 글을 잘 쓸 수 있나?
사실 내가 묻고 싶은 물음이다. 글쓰기는 특별한 비책이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남이 갖고 있지 않은 나만의 기술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른 사람의 글과 많이 다르다는 말은 자주 들었다. 평론을 쓸 때도 한국 평론가가 갖고 있는 고질적인 문체, 그 문체를 버리고 새로운 문체, 새로운 시각, 새로운 언어를 구사해봤으면 좋겠다는 희망이 있었고 그런 형식으로 글을 썼는데, 그런 게 도움이 됐을 것 같다.
“기적의도서관은 ‘좋은 사회 만들기’에서 출발”
▲책읽는사회문화재단 이야기다. 2003년 8월 19일 재단을 설립했고, 재단 설립 이전인 2001년 초부터 ‘책 읽기’ 운동과 함께 ‘기적의도서관’ 설립 활동을 시작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싶다. 도서관에 ‘기적’이라는 낱말을 넣은 이유도 궁금하다.
2001년부터 ‘기적의도서관’ 설립을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도서관을 지어야 하는데, 지자체와 협력을 하려 해도 개인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재단을 만들기로 했고, 2003년 책읽는사회문화재단을 설립했다. 기적의도서관은 기존에 설립한 게 12개, 최근에 설립한 게 6개, 그래서 총 18개다.
‘기적의도서관’이라는 말을 내가 지은 게 아니다. MBC가 같이 하자고 해서 개그맨 김용만, 유재석 씨가 『느낌표』 프로그램에 나와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를 함께 진행했다. 당시 (‘쌀집 아저씨’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김영희 PD가 제목을 붙이면 좋겠다며 보내준 게 ‘기적의도서관’이었는데, 모두 좋다고 해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니 말 그대로 ‘기적의 도서관’이 됐다.
▲순천은 ‘교육의 도시’로 유명한데, 순천에 기적의도서관이 처음 생긴 이유는 무엇인가?
당시 방송이 붙으니까 각지에서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도서관 건립 공모를 했다. 초기여서 신청자는 많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지자체 네 곳에서 신청했다. 그래서 서류 심사도 하고 신청자를 방송국으로 모셔 와서 운영 계획 등 도서관이 필요한 이유를 물었다. 당시 조충훈 순천시장(4·7·8대 순천시장)이 운영 계획 등 도서관이 필요한 이유를 잘 설명해서 순천기적의도서관(2003.02.15)이 ‘전국 최초’이자 ‘기적의도서관 1호관’으로 선정됐다. 조충훈 시장은 도서관 설립 이후 자신이 약속했던 운영 계획 약속을 잘 지켰다.
▲기적의도서관은 도서관이란 의미를 새삼 새롭게 생각할 수 있는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기적의도서관은 단순한 도서관이 아니다. 예전에는 어린이도서관이 없었다. 아이를 잘 기르자는 말을 하지만 아이를 위한 전용 도서관이 없었다. 더구나 민간단체에서 도서관을 짓는다는 것은 어려웠다.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자체, 방송국, 시민단체가 힘을 모으면 어린이도서관은 지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다.
책읽는사회문화재단의 원래 취지와 목적은 ‘좋은 사회 만들기’다. 아이를 잘 키울 수 있는 사회도 좋은 사회다. 어린이도서관도 이런 취지에서 시작했다. 아이와 어른이 책을 읽으면서 자기 생각을 키울 수 있는 사회, 마을 사람이 모여 교류할 수 있는 지역 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 사회, 이런 게 모두 좋은 사회 만들기다.
“단행본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쓰고 싶다”
▲경기도 용인 수지에 느티나무도서관재단(이사장 박영숙)에서 만든 느티나무도서관(관장 박영숙)이 있다. 박영숙 관장은 느티나무도서관을 운영하면서 ‘도서관의소리(VOL, Voice Of Library)’를 발행하는 등 ‘도서관 애정’이 많은 사람이다. 그는 2014년 한겨레 인터뷰에서 “도서관 문화는 사람과 세상을 바꿀 근원적인 힘”이라고 말한 바 있다. 박 관장이나 느티나무도서관이 기적의도서관 영향을 받았을 것 같다.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겠다. 제주에는 제주기적의도서관(2004.05.05), 서귀포기적의도서관(2004.05.05) 등 두 곳이 있다. 개관 준비를 할 때 박영숙 관장을 초청해서 서귀포도서관 개관 준비 작업을 맡긴 일이 있었다.
▲어떤 계획이 있는지 궁금하다. 2014년과 2016년에 나온 세 권의 산문집 표지에 ‘근간(近刊)’으로 표시한 책이 있다. 『시대에 맞서서, 시대를 위하여』, 『마음을 잃고도 찾지 않으니』, 『고향을 돌아보라, 천사여』, 『절름발이 대장장이의 귀환』 등이다. 애독자로서 정말 궁금하다. 곧 출간이 되나? 특히 기존에 있던 글을 모아 출간하는 것 외에 생각을 정리한 단행본이 나오는지 알고 싶다.
쓰고 싶은 책이 있다. 인문학을 주제로 『인문학이란 무엇인가』를 꼭 쓰고 싶다. 길고 난삽(難澁)하게 쓸 게 아니라 약 140~150쪽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데, 읽고 나면 ‘인문학이 이런 것이구나’, 이런 생각이 들고 이해할 수 있는 책을 쓰고 싶다. 더 늙고 정신이 혼미해지기 전에 쓰고 싶다.
▲쓰고자 하는 단행본은 고민하지 않고 손이 가는 대로 써도 좋은 책이 나올 것이라 믿는다. 인문학 이야기를 하다 보니 문득 프랑스 고등학생이 치르는 논술 시험인 바깔로레아(Baccalaureat)이 떠오른다. 주제가 인문학에서 다룰 수 있는 참 좋은 게 많다. 특히 답안에 있는 글을 보면, 고등학생이 썼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수준이 높다. 어지간한 대학생, 대학원생보다 나을 정도로 뛰어나다. 정말 대단한 것이라 생각한다.
맞다.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길러야 한다. 한국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이 바깔로레아와 같은 글을 손쉽게 쓸 수 있겠나? 여하튼 책을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조용히 사라질 준비’를 하고 있다. 죽을 준비다. 죽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1941년 1월 10일생이니까 올해 77세다. 생일은 음력 아닌 양력으로 보낸다.
“사람은 질문 속에서 태어난다”
▲인터뷰를 마칠 시간이다. 더 하고 싶은 말씀이 있나?
몸을 치료하기 위해 운동도 하고, 약도 먹는다. 그런데, 약을 먹으니까 정신 작업이 잘 안 되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정신을 다시 되찾는 게 요즘 관심사다. 불면증이 있어 수면제를 먹기도 하는데, 수면제를 먹으니 머리가 멍해지고 기억력도 떨어지는 것 같다. 건강은 정신적 건강 못잖게 육체적 건강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요즘 거듭 느끼고 있다. 그래서 몸을 건강하게 하는 것, 올 여름이 지날 때까지 열심히 몸을 회복하고 그 이후에는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쓰기에 대해 고민할 생각이다.
인문학을 주제로 쓴 글은 많이 있다. 하지만 글을 모아서 출간하기보다는 새로 쓰고 싶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사람, 사회, 역사, 문명에 대한 것, 사람의 책임에 대한 질문을 다루고 싶다. ‘이것이 인문학이다’는 관점에서 인문학을 소개하고자 한다. 프랑스 철학자 중 레비나스(Emmanuel Levinas)가 있다. 그가 한 말 중 “사람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질문 속에서 태어난다”는 게 있다. 내가 좋아하는 말인데, 이를 기본 정신으로 해서 쓰고자 한다.
▲오랜만에 인터뷰를 하시는 것 같다. 책 관련 인터뷰 중 기억하고 있는 것은 2014년이다.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과 『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를 출간했을 때다. 인터넷서점 예스24가 운영하는 문화 웹진 「채널예스」에서 두 번으로 나눠 진행한 것으로 기억한다. 인터뷰 제목은 ‘도정일,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 어떻게 발견할까, 2014.04.15’와 ‘도정일, 우리는 언제 영혼이 병들지 않는가!, 2014.04.10’로 돼 있다. 아쉽지만, 예스24와 채널예스에서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관련 인터뷰는 찾지 못했다. ‘파란자전거’가 별 다섯(만점)을 준 리뷰 한 건을 읽었을 뿐이다. 오늘 인터뷰는 무척 즐거운 시간이었다. 긴 시간 동안 좋은 말씀해 주셔서 감사드린다.
도정일
문학평론가, 문화운동가다. 2003년부터 책읽는사회문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1941년 1월 10일 경남 고성에서 출생했다. 경희대 영문과(61학번)를 졸업했다. 시사영어사 편집장(1965), 동영통신 사장(1972), 경희대 영문과 교수(1983)를 지냈다. 사람, 사회, 역사, 문명에 대한 인문학의 책임을 강조하고 인문학적 가치의 사회적 실천에 주력해온 우리 시대의 대표적 인문학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2006년 대학에서 퇴임했으나 2010년 다시 대학으로 복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대학장으로 학부 교양교육을 쇄신하는 일에 전념했다. 2001년 ‘책읽는사회만들기국민운동’을 일으켜 어린이 전문 도서관인 ‘기적의 도서관’ 설립 활동을 펼쳤다. 2018년 7월 현재 전국 11개 도시에 18개를 건립했고, 2006년 이후 농산어촌 지역 초등학교에 도서관 70개를 설치했으며, 영유아를 위한 ‘북스타트’ 운동, 교사를 위한 독서교육연수 프로그램도 주도해오고 있다. 저서로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시장전체주의와 문명의 야만』, 『대담 :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공저), 『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공저), 『불량사회와 그 적들』(공저) 등이 있다. 역서로는 『순교자』, 『동물농장』 등이 있다. 소천비평문학상, 현대문학 비평상, 일맥문화대상 사회봉사상 등을 수상했다. 2018년 7월부터 사람과사회™ 편집위원회 고문으로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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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도정일 교수가 인터뷰를 마치면서 언급한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를 찾아봤다. 레비나스가 궁금했고 ‘사람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질문 속에서 태어난다’는 말도 궁금했다. 레비나스의 말 한 마디를 기본 바탕으로 삼아 『인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쓰고 싶다는 이야기를 할 만큼 깊은 인상을 줬다면, 그가 갖고 있는 생각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고 싶었다.
‘사람은 질문 속에서 태어난다’는 레비나스의 말은 우선 새로운 것을 찾고, 찾은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다시 말하면, 사람다움을 유지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사람은 질문 속에서 태어난다’는 말은 ‘사람의 조건’으로 바꿔도 좋고 또 자연스럽게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조건, 이 표현은 책 제목인 『사람의 조건』으로도 유명하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앙드레 말로(André Malraux), 에릭 호퍼(Eric Hoffer),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 등 네 명이 대표적인 작가다. 같은 제목, 다른 작가지만 『사람의 조건』은 ‘사람의 조건’을 뛰어난 성찰로 깊이 있게 담은 작품이다.
이와 함께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장석주 작가가 『뉴스메이커』(제732호, 2007.07.10., 현재 제호는 『주간경향』) 「독서일기」 지면에 ‘타인의 얼굴-레비나스의 철학’이라는 제목으로 쓴 글도 찾았다. 장 작가는 이 글에서 레비나스가 쓴 『타인의 얼굴』을 소개하며 “레비나스의 나와 자기성, 타자와 고통을 통한 주체와 윤리학, 신과 종교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친절하게 안내한다”고 썼다. 이는 도정일 교수가 인터뷰에서 말한 ‘타인은 나에게 누구인가’를 그대로 닮고 담았다.
그렇다면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누구인가? 위키백과를 찾아봤다. 리투아니아(Lietuva) 출신 프랑스 철학자다. 그는 독일 철학자 후설(Edmund Husserl)의 현상학(現象學)과 유대교의 전통을 바탕으로 서구 철학의 전통적인 존재론을 비판하며 타자(他者)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강조하는 윤리설을 발전시켰다.
두산세계대백과사전은 “레비나스는 흔히 ‘네 문화(文化)의 철학자(哲學者)’라고 부른다”며 “러시아 변방 리투아니아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나, 독일 철학을 공부했고, 프랑스에서 활동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어 ‘네 문화의 철학자’는 “레비나스가 ‘내부인(內部人)인 동시에 국외자(局外者)’로서 서유럽 철학 전통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도록 해줬다”고 설명했다.
특히 “레비나스가 겪은 제2차 세계대전의 폭력성은 현대 문명이 지닌 전체주의적 속성에 대한 윤리적 성찰을 이끌었으며, 타자에 대한 인격적인 윤리적 책임감을 출발점으로 하는 독창적인 사상을 발전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 레비나스의 책 중 『전체성과 무한』(Totalité et infini : Essai sur l’exteriorité, 1961)과 『존재의 타자인가 아니면 본질의 저편인가』(Aurement que ‘être ou au-delà de l’essence, 1974)는 ‘타자의 윤리학’이라고 일컫는 레비나스의 사상을 가장 체계적으로 표현한 저서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는 설명도 들어 있다.
주목할 점은 레비나스가 생각하는 존재론과 형이상학에 대한 설명이다. 이 설명에 따르면, 레비나스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한 데카르트 유형, 즉 인식 주체를 중심으로 하는 존재론에서 벗어났다. ‘나’ 이외의 모든 ‘타자(他者)’를 ‘나’의 인식 안으로 끌어들이며 ‘타자의 타자성’을 무시했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동일자(同一者)’의 영역으로 환원하고 모든 것을 자기중심 체계 안에서 재정의했다.
이 설명을 보면서 아르키메데스(Ἀρχιμήδης, Αρχιμήδης)의 ‘유레카(Eureka, εὕρηκα)’가 떠올랐다. ‘뜻밖의 발견’, 정말 뜻밖의 발견이었다. 레비나스의 삶과 학문은 도정일 교수가 인터뷰에서 이야기했던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바탕과 아주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레비나스는 철학이 전체성의 이름으로 개인에게 폭력을 가할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다고 본다. 그러면서 ‘존재론’에 대해 자신의 철학을 ‘형이상학’이라고 표현했다.
레비나스는 ‘존재론적 욕구(Besoin)’와 ‘형이상학적 욕망(Desir)’을 구분한다. 그래서 존재론이 ‘나의 세계로 귀환하는 사고(思考)’라면, 형이상학은 ‘나의 세계에서 떠나 나의 바깥’ 또는 ‘나와 절대적으로 다른 사람’을 향한다. 타자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이는 ‘내가 나를 생각하지 않으면 누가 날 생각해줄 것인가?’, ‘내가 나만을 생각한다면 나는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맞아떨어진다.
이 지점에 이르면, 또 하나의 생각이 유레카로 떠오른다. 도정일 교수가 ‘사람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질문 속에서 태어난다’는 레비나스의 말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인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쓰고 싶다고 한 이유를 엿볼 수 있다. 가깝게는 후마니타스칼리지를 통해서 인문학과 교양을 찾아 알리는 역할을 했고, 조금 멀게는 책읽는사회문화재단과 기적의도서관을 통해 ‘좋은 사회 만들기’를 진행했던 꿈과 맞닿아 있다.
레비나스와 도정일 교수가 지향하는 꿈은 ‘나와 너, 우리를 생각하는 더 좋은 사회 만들기’로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생각을 생각하니 가수 김국환이 부른 노래 「타타타」(작사 양인자, 작곡 김희갑, 1991)에 나오는 첫 가사도 유레카처럼 떠올랐다. 첫 가사는 ‘내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다.
에마뉘엘 레비나스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01.12~1995.12.25)는 리투아니아(Lietuva)에서 전통적인 유대교 교육을 받았다. 1923년 프랑스로 유학해 철학을 공부하다가 1928∼1929년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후설과 하이데거의 수업을 들으면서 현상학을 연구한 뒤 1930년 「후설 현상학에서의 직관 이론」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레비나스는 처음에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을 프랑스에 처음 소개한 현상학 연구자로 활동했다. 세계2차대전 이후에 레비나스는 탈무드를 연구했다. 이 연구는 자신의 생애 후반기에 영향을 끼쳤다고 인정한 ‘무슈 슈샤니(Monsieur Chouchani)’의 영향을 받아 이뤄졌다. 1961년 「전체성과 무한」으로 국가 박사 학위를 취득하면서 ‘타자성의 철학’을 주창한 철학자로 명성을 얻었다. 푸아티에대학교(Poitiers University)과 소르본대학교(Université Paris Sorbonne)에서 학생을 가르치며 연구에 매진했다. 레비나스 철학은 서양철학 전통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독특한 윤리적 사유로 각광을 받으며 프랑스 현상학 영역뿐만 아니라 윤리학, 철학, 사회철학, 정치철학까지 확장돼 유럽과 영미권을 중심으로 폭넓은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레비나스 철학은 ‘나, 타인, 삶’의 ‘의미’와 ‘정의’ 등을 다룰 때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철학으로 자리를 잡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자료=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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