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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우 연재 06] 떠나는 부서방을 위해 02

[연재] 장인우의 문학 산책 | 역설의 문학, 최명희 『혼불』 006 ‘혼불’을 읽으면서 ‘부서방’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매안을 중심으로 살던 헐벗은 이름 없는 백성 부서방, 일제강점기 멋모르고 만주로 이주해가는 동안 딸내미 한쪽 귀가 떨어져 나간 사실조차 몰랐던 그네들의 고통에 찬 세월을 독자의 입장에서,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고 써 보았습니다. 글쓴이를 둘러싸고 있는 2018년 6월 어느 깊은 밤과 1940년대 우리 민족의 삶을 하나로 묶어보았습니다. ‘그네’는 글쓴이의 시선에서 작중 인물 ‘부서방’을 위로하고픈 마음을 담았습니다.

멀리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희붐하게 밝아오는 하늘’을 제대로 체감해내지 못하면서도 하늘을 바라보는 그네는 어쩐지 허전하다는 생각을 감추지 못한다. 매월 보름날을 기다리며 이러진데 없이 꽉 차게 여문 달빛을 바라고 소망하는 그네의 가슴에 보름이 지나고 스무날이 지난, 눈에 띄게 야윈 달빛은 언제나 일렁이는 물빛으로 새겨진다.

[연재] 장인우의 문학 산책 | 역설의 문학, 최명희 『혼불』 006

사람과사회™는 한국 고전을 중심으로 글을 쓰는 장인우 선생의 글을 연재합니다. 장 선생은 ‘장인우의 고전 읽기’ 등 고전문학을 뼈대로 삼아 글을 쓰고 있습니다. 장 선생 연재는 ‘장인우의 문학 산책’으로 진행합니다. 이번 호 주요 내용은 부서방이 만주로 떠나는 모습을 평순네와 옹구네가 주고받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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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첫 새(鳥) 울음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정확히 네 시 오십 분이면 그네의 이층 낡은 기왓장 아래 둥지를 틀고, 한 해를 나고, 두 해를 나며 정착해버린, 74번지 이층 기왓장 아래 참새네 1번지, 어엿한 주소를 가지게 된 참새 가족들은 잠자리의 포근함과 아늑함에 취해 희부윰하게 밝아오려는 새벽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떠나는 부서방을 위하여 02

장인우 독서논술지도사
사람과사회™ 통권8·9호

‘혼불’을 읽으면서 ‘부서방’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매안을 중심으로 살던 헐벗은 이름 없는 백성 부서방, 일제강점기 멋모르고 만주로 이주해가는 동안 딸내미 한쪽 귀가 떨어져 나간 사실조차 몰랐던 그네들의 고통에 찬 세월을 독자의 입장에서,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고 써 보았습니다. 글쓴이를 둘러싸고 있는 2018년 6월 어느 깊은 밤과 1940년대 우리 민족의 삶을 하나로 묶어보았습니다. ‘그네’는 글쓴이의 시선에서 작중 인물 ‘부서방’을 위로하고픈 마음을 담았습니다.
-필자 주(註)

멀리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희붐하게 밝아오는 하늘’을 제대로 체감해내지 못하면서도 하늘을 바라보는 그네는 어쩐지 허전하다는 생각을 감추지 못한다. 매월 보름날을 기다리며 이러진데 없이 꽉 차게 여문 달빛을 바라고 소망하는 그네의 가슴에 보름이 지나고 스무날이 지난, 눈에 띄게 야윈 달빛은 언제나 일렁이는 물빛으로 새겨진다.

그믐이 어둡게 지나가고 초하루가 밝아오는, 영송(迎送), 교차의 시간에는 달이 보이지 않는다. 보내는 마음과 맞이하는 마음이 한자리에 마주 서서 손을 내밀고 따스한 온기를 나누어 가지며 다음을 기약해야 하는 시각이기에 머뭇거림과 다가섬이 길어지는 까닭일지도 모른다. 매번 이별과 만남을 거스르지 못하면서도 그믐밤 자리에 들어선 초하루는 매정하게 달을 띄우지 못한다. 매정함으로 비쳐졌을지도 모르는 찰나와 찰나, 서운함, 섭섭함을 느꼈을지도 모르는 그 찰나와 찰나가 가슴에 여운처럼 남아 간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떠나는 부서방네에겐 달빛이 있어야 한다. 이지러진데 하나 없이 꽉 차게 여문 달빛이 그들이 만주의 봉천역 근처 서탑거리에 들어설 때까지 있어 주어야 한다. 밤하늘 어느 곳이든 빠짐없이 꽃으로 피어 은하수 강물을 이루는 별들이 쉼 없이 속삭이는 시간에도 보름날 그 달빛은 앞산에 높다랗게 뒷산에 높다랗게 떠올라 멀리멀리 비추어 주어야만 한다. 매안의 도둑놈이 되어 회술레를 돌게 될 지, 덕석말이를 당하게 될 지 모르던, 그 부끄럽던 시간에 별도 달도 거두어들인 그믐밤 하늘이 눈물겹게 고맙던 순간들이 있었지만, 그 부끄럽던 순간들은 부서방 가슴에 온정으로 남아 고국에 대한, 고향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이 될 것이니 지금, 부서방에겐 행상 나간 남편 무사히 돌아오기를 염원하던 여인의 달빛으로 떠올라야 한다.

아직 첫 새(鳥) 울음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정확히 네 시 오십 분이면 그네의 이층 낡은 기왓장 아래 둥지를 틀고, 한 해를 나고, 두 해를 나며 정착해버린, 74번지 이층 기왓장 아래 참새네 1번지, 어엿한 주소를 가지게 된 참새 가족들은 잠자리의 포근함과 아늑함에 취해 희부윰하게 밝아오려는 새벽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네는 말갛게 비치는 거울 같은 창에 눈빛을 모은다. 늘어진 감나무 가지 사이를 지나가는 바람을 본다. 짙푸르다 못해 거무스름한 빛깔로 출렁이는 잎사귀 사이사이에 조롱조롱 매달린 어린 감들이 바람에 뒤채지 않기를 바라며, 오이넝쿨 사이로 파고들어 수줍음 많은 노란 꽃잎에 머무는 바람을 쫒는다. 쫓기던 바람이 해산달 앞둔 만삭(滿朔)의 감자넝쿨들에게 등짝을 맞으며 달아날 때 그네는 싸늘하게 식어버린 커피를 마신다.

꿈이 이루어진다면, 상상이 현실이 되어 펼쳐진다면 얼마나 좋으랴. 엄동설한, 칼끝처럼 매운 2월에 한번 살아보겠다고 바가지짝 쪽지게에 매달고서 다 떨어진 이불 봇짐 머리에 인 채, 남부여대(男負女戴) 하고서 떠나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 영하 삼십 도로 치닫기를 멈추지 않는 바람이 ‘구우웅 우와앙’ 짐승같이 울어대는 이역만리(異域萬里) 대륙의 빙판으로 떠나간 순진한 사람들이 매안의 종갓집 도련님들 품 안으로 걸어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네는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만주 봉천이라 하는 곳은 바람막이가 없는 곳이지만 서탑거리엔 조선 사람들이 모여살고, 전라도 사람들이 모여살고 있다. 그래봤자, 하나같이 남부여대한 장삼이사들이겠지만, 그래도 그곳엔 1910년 합방이 되고, 1911년 봄, 아버지를 따라 봉천으로 가서 삶의 근거지를 세운 김 씨가 있다. 건물 귀퉁이에 자그마한 잡화상점을 꾸리고, 가게를 늘려 제일면점을 차려내는 김 씨네 곁에서 어떻게든 비벼들어 살아낼 수 있다면, 우리의 보습 대일 우리의 땅마저 잃고 만주로, 북방으로 쓸려온 하루살이 같은 인생들, 보습 대일 땅 한 뼘을 꿈꾸는 부서방, 그에게도 ‘봄’은 오지 않겠는가.

그렇게만 된다면 청암부인은 삭풍이 불어대는 봉천역 근처 서탑거리에서도 “인력이 지극하면 천재를 면할 수 있다.”던 집념으로 살아나지 않겠는가. “내 뼈를 이곳에서 일으키리라.” 눈매에 서늘한 서리를 뿜어가며 한 세상을 만들어내던 청암부인의 위대한 삶의 여정이 부서방과 같은 수많은 우리 부서방들에게 희망이 되고, 꿈이 되고, 현실이 되지 않겠는가. 금의환향(錦衣還鄕)을 꿈꾸지 못한다 하더라도 “한 생을 내가 잘 살았으니 이제는 너희가……” 물려 줄 가치가 되지 않겠는가.

어느새 다섯 시가 지나가고, 참새 가족들이 기지개를 켜며 포르릉 날아오른다. 늘어진 감나무 가지에 앉았다가 튼실한 윗가지로 날아오르고, 저희들끼리 모여 깃을 다듬으며 콩콩거리고 째째거린다. 장다리 무꽃을 헤적이며 부리를 쪼아대고, 맥없이 누워 늘어진 양파 줄기 사이를 콩콩거리다가 퓨웅 날아 담장 위에 앉는다. 게으른 까치가족들이 동산초등학교 옆 은행나무 둥지에서 뭉그적거릴 때,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새들이 높은 음자리에서 지저귄다. 옥상에서 잠들었던 옆집 민들레가 마당에 나와 앞다리를 쭉 뻗으며 한껏 기지개를 켜는 반달이에게 왕왕거린다. 크고 작음을 가리지 않는 모든 생명들이 제 나름의 빛깔로 아침을 노래한다. 부서방을 위하여! 빈 잔을 들고 일어서는 그네를 위하여!

About 장인우 (8 Articles)
1969년 전북 정읍에서 출생했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했으며, 고전문학에 관심이 많다. 독서논술 지도사로 활동하며 학교 강의와 학원을 운영했다. 순천팔마문학회, 순천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6년 1월부터 2017년 3월까지 『순천교차로』에 ‘장인우의 고전 읽기’를 연재했다. 현재 칼럼 등 기고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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