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하고 깎으니 작품이 됐다”
색을 칠하고 깎아 작품을 짓는 ‘독특한 화법’을 만들다...생각하지 못했던 경험으로부터 ‘독특한 기법’을 만나다
“칠하고 깎으니 작품이 됐다”
생각하지 못했던 경험으로부터 ‘독특한 기법’을 만나다
색을 칠하고 깎아 작품을 짓는 ‘독특한 화법’을 만들다
2018년 11월 24일(토) 오전 11시, 전북 익산시에 있는 W미술관(어양동 65-42, 063-835-3033)에서 만난 김상태 작가는 “서울에서 익산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다”, “비가 오는 날이라 안전하게 도착해 다행”이라는 인사를 건네며 반갑게 맞아줬다. 김춘수 시인이 「꽃」에서 이름을 불러주어서 꽃이 되었고,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고 읊은 것처럼 김 작가의 작품은 ‘칠하고 깎으니 작품이 되었다’는 표현으로 설명하는 게 자연스러운 화법(畫法)이 특징이다. 김 작가는 생각하지 못했던 경험을 통해 새롭고 독특한 기법을 만들어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김 작가와 색을 깎아 작품을 만드는 기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김종영 weeklypeople@gmail.com
사람과사회™ 통권8·9호
“나는 생각이 흐를 때 그 흐름을 단절하지 않으려 한다. 그것이 황당하고 현실감이 없더라도 그것들은 다 까닭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본다는 것도 그것을 다 안다는 것과 연결하지도 않으려 한다. 그저 일렁이는 생각들을 놓아둔 채로 무한으로 열어 놓으려 한다. 그래야 비슷하게나마 대상에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 삶의 서술, 주변에 관한 이야기에 대한 존재감, 경험, 상상, 꿈과 현실을 흰색의 색채와 반복되는 다양한 모티브로 자신의 개성과 아이덴티티(Identity)를 강조하는 한편 회화적인 과정으로 아크릴 칼라(Acrylic Color)를 캔버스(Canvas)에 쌓아 올려 마르는 타이밍에 의한 무수한 덧칠과 커팅(Cutting)으로 아이콘(Icon)을 생성해나간다.”
김상태 작가가 2018년 11월 21일 W미술관에서 진행한 W토크콘서트 강연 주제인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삶의 서술, 주변에 관한 이야기」에 있는 ‘작가 노트’다. 작가 노트에 들어 있듯이 김 작가는 색을 여러 번 덧칠한 후 칼로 깎는 방법으로 작품을 만든다. 이 같은 기법은 그의 삶에서 만난 아픔에서 나왔다.
김 작가는 대학생 시절 국전(國展)에 참가해 비구상 부문 특선을 할 만큼 손재주가 뛰어났다. 그러나 전업 작가로 지내던 어느 날, 안타까운 일이 생긴다. 2010년, 뇌출혈로 쓰러졌다. 몇 년 동안 입원과 치료, 또 입원과 치료를 반복하며 재활(再活)의 시간을 보냈다. 다행히 몸을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을 만큼 회복했다. 물론 완전히 회복한 것은 아니다. 다리가 불편해 제대로 걷기 어렵다.
김 작가는 뇌출혈 재활 치료를 받는 동안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많이 힘들었다. 특히 몸이 자유롭지 않은 까닭에 기존 방식으로 작품 활동을 하는 것은 무리가 많았다. 작가의 삶과 작품을 포기할 수는 없었기에 뭔가 새로운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하반신은 불편하고 상반신은 움직일 수 있었던 터라 제한적인 활동으로 작품 활동을 할 방법이 필요했다.
김 작가가 찾은 것은 색을 여러 번 칠하는 방식인 ‘덧칠’이었다. 바탕칠을 한 후 그 위에 다시 색을 여러 번 칠하는 방식이다. 단순히 색을 덧칠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색을 칠한 후 칼로 색을 깎아내는 방법이다. 덧칠과 깎기로 작품을 만든 것이다. 얇은 부조를 만들어서 깎아내는 방식이다. 이 같은 작품 활동은 ‘작가의 삶’을 이어갈 수 있게 해준 아주 귀중한 것이 됐다. 작품 활동이 중요한 이유는 또 있다. 그에게 있어 작품 활동은 그 자체로 치유와 재활을 이어가는 한 방법이었다.
‘깎기’ 기법으로 완성한 작품은 2015년 열네 번째 개인전에서 첫 모습을 보여줬다. 김 작가는 전북 전주에 있는 교동미술관(완산구 풍남동 경기전길 89, 063-287-1245)에서 개인전을 열어 「추억」, 「기억여행」, 「우연의 숲」 등의 주제(시리즈 포함)를 선보였다. ‘깎기’ 작품의 첫 무대였던 이 개인전은 그의 작품과 작품 활동이 ‘치유로서의 미술’(Art as Therapy)임을 명료하게 보여준 전시다. 최근에는 파랑색, 빨강색, 노랑색, 흰색, 검정색 등 오방색(五方色)을 작품에 많이 사용하고 있다.
김 작가가 새로 만든 기법과 작품을 그가 겪었던 상황을 생각할 때 재활(再活)과 치유(治癒)에서 찾은 새로운 기법(技法)이고, 치유(治癒)로서의 미술(美術)이며, ‘밑칠’과 ‘덧칠’과 ‘깎음’이 만든 수작(秀作)으로 평가할 수 있다. 또한 ‘달팽이의 하루’가 만든 영원한 예술이라는 표현도 잘 어울린다. ‘달팽이의 하루’는 김 작가가 작업실에 붙여놓은 문구다. 느리게 걷는 걸음은 작은 아름다움을 볼 수 있듯이 김 작가는 일상에 있는 것에서 찾은 것을 작품에 담는다. 달팽이처럼 시나브로 걷는 걸음이지만 그 걸음은 생활의 발견이고, 삶의 발견이며, 아름다움의 발견이고, 사람의 발견이다. 사람의 삶은 짧지만 예술은 길다는 말을 적용하면, 김 작가의 작품은 ‘달팽이의 하루가 만든 영원한 작품’인 셈이다.
“작품은 이야기처럼, 시처럼 만든다”
▲색을 깎는 기법으로 작품을 만든다고 했는데, 어떤 방식인가?
칼로 색을 긁거나 깎아서 작품을 완성한다. 긁기와 깎기를 하기 때문에 물감이 상당히 많이 들어간다. (웃음) 돌덩이처럼 굳은 덩어리를 그라인딩(grinding)을 하거나 칼로 깎는다. 그러면 보석처럼 빛나는 색깔이 나온다. 색은 계속 확장하고 있다.
▲작품 제목을 보면 특별한 대상보다는 일상을 다룬 게 많은 것 같다.
위대한 것에서 대상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내 주변에 있는 것, 작고 세밀한 것을 찾아 작품은 이야기처럼, 시처럼 만든다. 앞으로는 입체 작업도 할 생각이다. 덩어리와 연계해서 3D 프린트 작업을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도예 기법, 그러니까 도자기처럼 유약을 활용해 색을 내고 굽는 것인데, 이 기법을 고민하고 있는 중이다. 이 작품은 입체이면서 설치 미술 형태이기 때문에 벽이나 공간에 설치할 수 있는 작품이다. 대형 미술관은 설치 작품도 필요하다. 예전에는 그림이 중심이었지만, 요즘에는 영역을 확장하는 추세다.
▲작품 활동은 어떻게 하나?
일기를 쓰는 것처럼 한다. 사소한 게 전달력이 더 크다. 그것은 언어고 시다. 내가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작품에 담는다. 옻칠 기법을 이용하듯 여러 번 덧칠을 반복한 후 색을 자르고 깎아서 선을 만든다. 그러면 숲, 나무, 새가 나온다. 숲은 내가 보는 숲이고, 작품으로 나온 게 「가공(加工)의 숲」 시리즈다. 동물이 등장하는 「무한의 숲」은 국제평론가상을 받은 작품이다. 주사기로 만든 작품도 있고 작품 속에는 만다라, 사람 등이 들어 있다. 이런 것은 모두, 조금 전 말한 것처럼, 확장 개념으로 생각할 수 있다.
“확장은 ‘이야기’다”
▲확장에 대한 설명을 더 들었으면 좋겠다.
확장은 이야기(Story)로 이해할 수 있다. 기존의 질서에는 배타적 분위기가 아직도 많다. 그러나 자기가 필요해서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 이게 확장이라 할 수 있는데,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은 더 나은 작가이고 더 나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뇌출혈로 고생했는데, 그로 인해 겪은 아픔은 자유를 줬다. 내가 필요한, 내가 원하는 작품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기 때문이다. 제도권에 있을 때는 학교, 교수, 파벌 등 일정한 제약에서 자유롭지 않다. 하지만 지금은 내 마음대로 눈치 안 보고 할 수 있다.
▲덧칠하기, 긁기, 깎기는 독특한 기법과 독특한 화법의 핵심인데,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게 ‘독특하다는 것’이라고 한다면, 독특함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나?
물론이다. 젊은 층이 시도하는 독특한 화법을 좋아하고 존중한다. 그런 젊은이를 보면 돕고 싶은 마음이 든다. 젊은이와 제도권은 같이 가야 한다. 특정한 방식이나 조건에 맞춰 재단하는 것, 그것으로 제한하고 제약하려고 하면 안 된다. 자꾸 가두려고 하는 것은 안 좋아한다. 지금은 가능한, 아니 거의 분석하려 하지 않는다. 책, 논문, 화법 등을 따라서 하는 것은 창의성을 제한하는 게 된다. 지금을 크게 눈을 뜨면 보인다. 대상과 사물의 본질에 갈 수 있다는 뜻이다. 시간이 지나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제는 대상이 스스로 다가오는 것처럼 느낀다. 귀신이 씻나락 까먹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붓을 들고, 망치를 들고 그런 것을 깨치는 게 필요하다. 그게 인생이고 작업이고 작품이다. 작품에는 파생(派生)이 생기는데, 그것을 취사선택하는 삶이 좋다.
▲지방에서 활동을 주로 하는데, 불편하거나 아쉬운 점은 없나?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때가 있었다. 지역을 많이 따지던 시대에 살았기 때문에 당시에는 알게 모르게 지방을 무시하는 인식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지방이 더 좋다. 그런데 지금도 서울과 지방을 따지는 현상이 많다. 하지만 의식하지 않는다. 눈치 안 보고 할 이야기를 하면서 살았다. 이 정도면 만족할 만한 것 아닌가?
“새로운 것은 기회다”
▲긁기와 깎기로 만드는 작품이나 기법에 관심은 많은 편인가?
긁기와 깎기로 작품을 만드는 기법은 전혀 새로운 것도, 획기적인 것도 아니다. 기법이나 방법은 이미 나온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기화’(自己化)다. 특별하고 새로운 것이 아니라 기교(奇巧)의 차이다. 기존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것이 나오게 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새로운 것은 기회다. 특히 나에게는 작품이 확장과 재활의 언어다.
지방은 새로운 것으로 바꾸는 게 쉽지 않다. 서울은 비교적 잘 바꾸는 편이다. 이는 젊은이도 닮았다. 최근에는 작품을 가득 채우지 않고 비우는 것, 여백 만들기를 시작하고 있다. 기존 작품과 다른 작품을 만들기 위해 변화를 주는 것이다.
▲그림을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많이 봐야 한다. 그림을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하는 조언 중 하나는 그림을 많이 보라는 것이다. 그래야 성공할 수 있다. 그림 작업 후 손을 떼야 할 때 아쉬움이 클수록, 많을수록 성장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게 없다면 회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완벽하게 마음에 드는 작품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로운 실험을 할 경우 ‘실험적인 것일수록 대중적인 것이 돼야 한다’는 말도 해주고 싶다.
▲어떤 작품을 좋다고 평가하나?
기교나 눈속임을 강조하는 작가도 있다. 물론 필요하다. 그렇지만 삶이 녹아 있고 눈길을 끌어당길 만큼 절박성이 있는 작품이 좋다. 요즘에는 사람들이 좋은 그림을 잘 안다. 큐레이터도 수집가도 이를 잘 알고 있다. 화려함이나 기교를 중심으로 하지 않아도 좋은 그림은 알아보기 마련이다. 평론가가 한국 화단의 문제점으로 자주 지적하는 것 중 하나는 ‘한국 미술은 껍데기가 많다’는 것이다. 이는 진정성 없는 작품이 의외로 많다는 뜻이다.
▲몸이 불편해서 작업을 오래 하는 건 어려울 것 같다.
그림을 그릴 때는 소위 ‘노가다’로 한다. 놀면서 그림을 그리는 것은 어렵다. 어렵다는 말은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미다. 그렇게, 노가다처럼 열심히 하지 않으면 결국 그만 두게 된다.
▲미술가, 화가의 길을 어떻게 생각하나?
말리지 않는다. 각자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전시 일정 등 계획을 듣고 싶다.
작품 활동 자체에 대한 계획은 세우지 않는 편이다. 뇌출혈을 겪고 난 후에는 무리한 계획을 생각하지 않는다. 할 수 있는 만큼 하되 열심히 한다. 전시의 경우 4월에 전주에서 약 한 달 동안 진행하는 일정이 있다. 초대전, 그룹전, 아트페어 등은 늘 있는 만큼 꾸준히 작업한다.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 참여한다.
김상태
원광대학교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대학생 시절 국전에 참가해 특선을 받는 등 일찍부터 전업 작가로 활동했다. 2010년 뇌출혈로 쓰러진 후 재활을 받는 동안 작품 제작 방식에 대해 고민하다고 덧칠을 한 후 색을 깎는 새로운 기법으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서울, 전주, 대전, 익산 등에서 개인전 15회를 비롯해 국내외 기획·초대·그룹 전시회와 아트페어에 400여 회 참여했다. 한 해 평균 5~7회 전시에 참여하고 있다. 최근 전시는 △ART MARKET STAMP(2018) △ 갤러리 ‘인’ 개관기념전(2017) △전북지역작가 재조명전(2016) △익산예술의전당 개관기념전(2015)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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