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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

‘예술가는 가난하다’는 명제와 아이의 꿈에 대한 이야기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을 인생의 첫 번째 소원으로 꼽는다. 짧게는 20년, 길게는 40년 이상을 지속해야 하는 ‘일’이 적성에 맞지 않다면 참으로 낭패이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부모가 되어 가장 크게 고민해온 것은 아이가 ‘하고 싶은 일’을 찾도록 돕는 것이었다.

‘예술가는 가난하다’는 명제는 여전히 아이에게 두려운 명제이다. 그러나 바뀐 것이 있다면 ‘그러할지라도’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는 의지와 결심이 단단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일생을 나무에 비교한다면, 이제 겨우 뿌리를 내린 정도에 해당하겠다. 무엇이 돼도 좋고, 무엇이 되지 않아도 좋다. 그저 주먹으로 색연필을 쥐고 진지하게 ‘낙서’를 하던 그 때의 열의를 평생 가져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지난 시간이 찰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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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여름·가을 제3권 제2·3호 통권 제10·11호
ISSN 2635-876X 92·93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

‘예술가는 가난하다’는 명제와 아이의 꿈에 대한 이야기

구경희 압구정세실영어전문학원 원장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을 인생의 첫 번째 소원으로 꼽는다. 짧게는 20년, 길게는 40년 이상을 지속해야 하는 ‘일’이 적성에 맞지 않다면 참으로 낭패이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부모가 되어 가장 크게 고민해온 것은 아이가 ‘하고 싶은 일’을 찾도록 돕는 것이었다.

아이는 3살 무렵 손가락에 힘이 없어 주먹으로 색연필 또는 크레파스를 쥐고 그림을 그렸다. 엄밀히 말하자면 낙서였으나, 누구나 그렇듯 우리애가 천재인가 하는 믿음이 생길 정도로 아이의 그림은 형태와 색채가 다채로웠다. 필기구가 보이는 대로 그리고 색칠을 하기에, 4살 무렵엔 온 방을 흰 전지로 도배를 하고, 파버카스텔이나 신한 전문가용 물감을 구입해 함께 낙서를 하기 시작했다. 온 방이 난장판이었다. 당시 중단한 학업을 다시 시작한 남편과 세상 물정에 어두웠던 나는 안정된 벌이가 없었지만, 어릴 때 처음으로 체득한 색채 감각이나 음감은 돌이킬 수 없다는 생각에 동의했고, 돈이 생기는 대로 제법 값비싼 크레파스와 물감, 스케치북을 사다 날랐다. 칸딘스키 말에 따르면 색채는 심성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데 화구가 아무리 비싸도 심성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화가-작가’는 그녀의 꿈이자 현실

그림책도 꽤 큰 지출 목록이었다. 당시 교원이나 유명 출판사에서 발간한 ‘세트’가 많았지만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 가격이었기에 일요일마다 교보문고나 어린이 동화책을 전문으로 파는 서점을 찾곤 했다. 책을 고르는 기준은 내용뿐 아니라 그림도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는데, 요르크 뮐러나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 작가의 작품들이 기억에 남는다. 보리출판사의 세밀화나 달팽이, 과학동아도 무척 아꼈던 책들이었다. 마음에 드는 그림은 따라 그리기도 했었는데, 물론 ‘형태를 알아 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 즈음 아이는 ‘화가’라는 단어를 알게 됐고 오늘날까지 ‘화가-작가’는 그녀의 꿈이자 현실로 자리를 잡고 있다.

일하는 엄마는 아이를 어딘가에 맡겨야 했고, 아이는 방과 후에 미술 학원을 다녔다. 액자도 만들고, 그림도 그리고, 만들기도 하고, 무엇보다 친구들이 있었다. 아이를 맡기며 될 수 있는 한 어른 손이 가지 않기를 바란다는 부탁을 했다. 완벽한 그림보다는 본인의 감정이 들어간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해주기를 바란다고 부탁했는데, 이유는 맞벌이를 하는 부모 탓에 혹시나 감정 표현에 소홀할까 걱정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선으로나마, 또는 색으로나마 자신의 감정을 털어버리기를 바랬다. 검정색이 많은 그림을 그려올 때는 은근 걱정도 됐으나 ‘이건 안 예쁜 색’이라고 구분 지은 적은 없다. 모든 색은 저마다의 가치로 아름다울 자격이 있으니까…….

모든 색은 저마다의 가치로 아름다울 자격이 있다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미술 선생님은 예술중학교(예중)에 진학한 것을 권했는데, 한 마디로 ‘그럴 계획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무엇보다 중학교부터 진로를 미리 결정짓는다는 사실이 부담이 됐고, 예체능 과정을 뒷받침할 자신도 없었다. 그런 학교는 돈 걱정이 없는 사람들의 자녀들만 갈 수 있다고 생각했고, 나의 노동의 대가는 철저히 시간을 담보로 하고 있었기에 우아하게 아이를 학교까지 데려다주고 데려오는 것 등등의 ‘뒷바라지’는 꿈도 꾸지 못할 상황이었다.

아이는 조금 서운하다는 눈치였지만 말을 아꼈다. 그때는 나도 철이 없어서, 예중 입시에 들이는 화실비 대신 그 돈으로 아이랑 둘이 배낭여행을 가자고 꼬드겼다. 실은 비교적 일찍 아이를 낳고 친구들이 자유로울 때 이 아이가 제 배낭을 질 나이가 되면 유럽 여행을 가겠노라 단단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어려운 살림에도 10년이 넘게 푼돈을 모아 여행 자금을 마련했다. 여행 계획 기간은 50 일 정도였고, 이탈리아부터 영국까지 대략 6개국을 일주일에서 열흘간 머무르기로 했는데 서른일곱의 나는 신혼여행을 제외하곤 외국에 가 본 적이 없었으며, 더욱이 홀로 여행을 떠난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다들 난리가 났었다.

“어디를 간다고?!”

“애를 데리고?!”

“연락은 어떻게?”

“어디서 자고?”

“길은 어떻게 찾고?”

“몇 나라는 영어도 안 통하는데!”

언제나 그렇듯 ‘하면 된다’는 정신으로 무장한 나는 주변의 걱정을 대충 안심시키고-사실 나도 방법이 없었다. 그저 가고 싶은 마음이 그 위험보다 컸을 뿐……, 유럽 배낭여행을 가기로 결심을 했다. 그때가 2007년. 아이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복병은 학교였다. 일주일 외에는 모두 결석 처리한다고 했다. 가족회의 결과(거의 나의 주장) 혹시 졸업 일수가 부족하면 검정고시로 중학교를 가기로 결론을 내렸다. 예중 진학은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눈이 짓무르도록 보고 또 보다

구글맵이나 스마트폰도 없었고, 오로지 ‘론리 플래닛’에 의존하며 50일 간의 계획을 세웠다. 다빈치, 미켈란젤로를 비롯해 현대 미술의 거장 작품까지 눈이 짓무르도록 보고 또 보았다. 당시 아이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었고, 카라바지오나 렘브란트 그림 등에 무척 흥미를 보였다. 대충 선만 그려진 종이 지도를 들고, 배낭을 메고 끌면서 그림을 보고, 조각을 느끼고, 자연을 품은 시간이었다. 오베르쉬르 우아즈에서 고흐가 숨을 거둔 방에 둘만 있을 때의 고요가 생각난다. 침대는 말할 수 없이 초라했고 방금이라도 고흐의 고통스러운 숨소리가 들릴 듯 했다. 돌이켜 생각하니, 예중 진학 준비 비용으로 여행을 갔었지만, 오히려 예술에 대한 열망을 절절히 키워준 여행이 아니었나 싶다.

여행도 공부라는 신념을 가진 선생님 덕분에 다행히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었고 아이는 5월부터 예중 진학 준비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다들 이미 늦었다고 했고, 미술 학원에서도 가능성이 없다고 얘기했다. 나는 13살 아이에게 ‘늦거나 가능성 없는’ 일이 뭐가 있겠냐고 반문했고, 부담 가지시지 말고 5개월 동안 입시 준비를 해달라고 부탁드렸다. 또한 학교 학업과 영어 공부는 지속할 수 있도록 시간표를 짜달라는 부탁도 함께 드렸다. 한마디로 ‘엄청 말 안 듣는 학부모’였다. 아직 아이는 13살이었으니까. 나는 아직도 그 결정이 옳다고 믿는다.

13살에게 ‘늦거나 가능성 없는’ 일은 없다

운이 따랐다. 수채화에서 ‘개’가 주제로 나왔었는데 아이는 반려견을 몹시도 키우고 싶어 하던 ‘개 박사’였고 하루에도 몇 마리씩 그리곤 했기에 큰 어려움 없이 원하는 ‘개’를 그렸다. 다들 힘들 것이라던 예중에 합격했다. 초등학교 시절 학업, 독서, 그림을 함께 지속했기에 그림만 하루 10시간씩 그린 친구들보다 수월하게 성적을 얻곤 했지만, 생활수준이 워낙 다른 환경에서 약간의 위축 기간이 있었음은 인정해야겠다. 하지만 타고난 성정이 워낙 ‘남의 눈’을 신경 쓰지 않는 터라 곧 개의치 않았다.

예고를 진학했다. 소묘와 수채화가 주된 수업이었던 예중에 비해 동영상, 자유 매체 작업, 조소 등 다양한 수업과 자유로운 분위기가 숨통을 트여 주었다. 그때부터 유튜브(Youtube)를 끼고 살았던 것 같다. 유튜브는 해방구였다. 물론 선정적인 영상과 ‘부모 마음’에 들지 않는 콘텐츠를 볼 때에는 걱정도 되고 거슬리기도 했었지만, 이미 정신적으로 내 품을 떠난 아이를 하나하나 간섭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대화를 많이 했다. 학업에 대한 부담, 예술관, 예술가의 가난한 삶에 대한 태도 등……. 예술가는 가난하다는 일반적인 명제가 아이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나는 굳이 예술가도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설득하기보다는 ‘가난할 지도 모르지만’ 가고 싶은 길을 가는 것이야말로 인생을 지속할 수 있는 이유라고 위로했다. 그리고는 ‘너무 가난하면 내가 가끔 먹고 싶은 거 정도는 사줄게’ 하며 시시한 농담도 아끼지 않았다. 이미 중학교, 고등학교 입시의 경험이 있었지만 대학 입시의 부담은 또 다른 무게였다. 그러기에 그 당시 우리를 견디게 한 힘은 ‘시시한 농담들’이었다. 아이는 사설 화실을 거의 다니지 않았다. 비용도 문제였고, 학교 실기만으로도 체력이 달렸고, 남는 시간에는 학업도 병행해야 했다.

무엇이 돼도 좋고, 되지 않아도 좋다

아이는 원하는 대학 서양학과에 진학했다. 그녀의 대학생활은 파란만장했다. 억지로 막아 둔 호기심이 폭발하듯 터져 나와, 하고 싶은 것들로 넘쳐났다. 희한한 옷을 입고 다니고, 유튜브로 타투를 배우기도 하고 연극을 하는 등 거칠 것 없이 스물을 누렸다. 대학 3학년이 되고 평면 작업만 하기에는 답답하다며 복수 전공으로 조소를 신청했다. 그림을 그리고 돌을 깎고, 나무를 다듬는 등 원 없이 작업을 하며 모호하게나마 평생 놓치지 않았던 작가의 길에 조금씩 다가가는 시간이었다. 지난 봄. 마침내 아이는 서양화, 조소 두 개의 학위를 받으며 졸업을 했고, 다가오는 9월, 어린 시절부터 꿈꾸어온 학교 ‘전문가(Master)’ 과정에 진학하게 됐다.

‘예술가는 가난하다’는 명제는 여전히 아이에게 두려운 명제이다. 그러나 바뀐 것이 있다면 ‘그러할지라도’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는 의지와 결심이 단단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일생을 나무에 비교한다면, 이제 겨우 뿌리를 내린 정도에 해당하겠다. 무엇이 돼도 좋고, 무엇이 되지 않아도 좋다. 그저 주먹으로 색연필을 쥐고 진지하게 ‘낙서’를 하던 그 때의 열의를 평생 가져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지난 시간이 찰나와 같다.

구경희
부산 출생. 건국대학교에서 불문학을 공부했다. 영어를 가르치며, 대입 전반에 관해 상담하는 입시 및 진학 컨설턴트다. 1997년부터 현재까지 압구정 CESIL영어학원 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페이스북 등 SNS에 글을 올리며 사람들과 어울림을 나누고 있다.

About 김종영 (888 Articles)
사람과사회 발행인이자 편집장이다. ‘글은 사람과 사회며, 좋은 비판은 세상을 바꾼다’는 말을 좋아한다. weeklypeopl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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