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열세 살
“가냘픈 여인의 허리 같은 연필심은 자끈동 부러지기 일쑤여서 어느덧 연필은 천덕꾸러기가 되고 다시 볼펜이 총애를 받게 됐습니다.” “혹독한 사실의 역사에서 상상력의 굴레에 갇히는 어머니들의 13살은 잔인했습니다.”
사람과사회™
2019 여름·가을 제3권 제2·3호 통권 제10·11호
ISSN 2635-876X 92·93
어머니의 열세 살
김미옥
하나
어머니는 가끔 제가 읽고 있는 책표지 위에 전기세나 수도세 요금의 복잡한 공식을 볼펜으로 써 내리십니다. 덕분에 나는 2019년 4월 달 전기세 148,200원을 크게 쓴 『덩샤오핑 평전』을 갖게 됐습니다. 아, 기형도는 2017년도 가스요금 92,500원을 목차에 품고 삽니다. 옐리네크는 ‘피아노 치는 여자’가 아니라 ‘관리비 12만원’으로 남았습니다. 저는 한 번도 어머니와의 말싸움에서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요양원으로 갈란다!”
게임 끝.
가능하면 볼펜을 연필이나 샤프로 바꿔 달라 비굴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든가 연필 계산서가 발견되면 기쁜 얼굴로 어머니를 칭송하며 지우개 작업을 합니다. 그럴 때 어머니의 표정이란……. 치매 예방을 위해 초등학교 수학 문제집을 어머니께 사다드렸더니 덧셈과 뺄셈을 마스터하시고 곱셈으로 들어가면서 제 책의 본격적인 수난 시대가 시작됐습니다. 2×10=20이 된다는 걸 아신 어머니는 2+2+2+2+2+2+2+2+2+2=20으로 곱셈을 덧셈으로 해체해 버렸습니다!
연필을 집안 군데군데 어머니의 동선을 따라 흩뿌려 놓았는데 워낙 힘을 주어 꾹꾹 눌러쓰시는 통에 가냘픈 여인의 허리 같은 연필심은 자끈동 부러지기 일쑤여서 어느덧 연필은 천덕꾸러기가 되고 다시 볼펜이 총애를 받게 됐습니다.
아직 읽지도 않은 봄 『창작과 비평』 위에 무수한 3이 볼펜의 힘으로 행진하는 모습에 흥분한 나는 문방구로 길길이 뛰어가서 두 다스의 연필과 연필깍기를 사고 집안의 볼펜이란 볼펜은 모두 치워 버렸습니다. 어머니는 연필깍기에 비상한 관심을 보이시더니 로마 군인의 창처럼 뾰족하게 깍은 연필로 맹렬하게 수학 공부에 정진하셨는데 연필깍기의 수고로움은 지대했습니다.
이미 절판된 ‘20세기 일문학의 발견 시리즈’ 문고 책 위에 4와 5의 연필로 맺은 우정을 지우개로 지우면서 서재에는 들어가지 마시라 언성을 높였더니 당장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헌 책 갖고 더럽고 치사하게시리!”
오늘도 나는 치사한 딸년이 되었습니다.
둘
어머니 옆에 누우면 옛이야기를 얼마나 잘 하시는지, 나는 유년으로 돌아간 듯 풍경화를 그립니다. 엄마 어릴 적(엄마의 고향은 오오사까입니다) 옆집에 찢어지게 가난한 조센징 가족이 있었답니다. 엄마 또래 가시내는 맏딸로 떼구정물이 졸졸 흐르는 못생긴 아이였답니다. 그런데 이 가시내가 말을 얼마나 재미나게 잘하던지 엄마 자매들과 동네 아이들은 아침 댓바람부터 가시내 집으로 달려 가 이름을 불렀답니다. 모두들 학교를 다니는데 가시내는 어린 동생을 업고 아침부터 부모에게 야단을 맞고 있거나 담 밑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답니다. 그 가시내는 엄마를 참 부러워했답니다.
“너희들은 좋겠다. 학교도 보내 주고…….”
어느 날 부터는 다른 이야기를 해 주더래요.
“지난 밤 사각모를 쓴 대학생이 밤중에 나를 찾아왔다. 부모님 몰래 나가보니 그가 나를 안아 주더라. 조금만 참아라. 내가 졸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벌어 너를 데려갈 터이니. 안아주고 뽀뽀해주며…….”
여자 아이들은 정신이 아득해지고 가슴이 방맹이질을 했답니다.
동네가 발칵 뒤집혔대요. 밤마다 사각모 대학생이 찾아 와 안아주고 어쩌고 한다니 소문은 동네를 칭칭 감고 가시내의 부모 허파를 뒤집어 놓았죠. 긴상네 딸이 밤마다 사내놈이랑……. 13살이었답니다. 동네 부끄럽다. 13살 어린 딸을 멀리 가난한 조센징 맏며느리로 팔아버렸대요. 시집가서 새벽부터 밤까지 농사일을 하던 그 가시내는 동갑내기 시누이에게 또 그 이야기를 했답니다. 누이는 오라비와 어미에게 고자질을 했고 가시내는 죽으라 두들겨 맞았답니다.
“더러운 것!”
심약한 가시내의 남편은 등을 돌렸고 가시내는 보따리 하나 들고 쫓겨났답니다. 여자 아이들은 돌아온 가시내가 무척 반가웠지만 아비는 술에 취해 저수지에 빠져죽고 어미는 화병으로 세상을 떠나버려 가시내는 어린 동생 둘을 거느린 가장이 되었더랍니다.
엄마 자매가 중국 땅콩이랑 먹을 걸 몰래 치마폭에 싸들고 가면 가마니를 깔고 누운 더러운 가시내는 이제 곧 그 남자가 데리러 올 것이라며 같은 이야기를 했답니다. 하지만 제법 식견이 들기 시작한 여자 아이들을 식상하게 만들었다나요. 동생들을 두들겨 패기도 하고 먹을 것을 구해 먹이기도 하고……. 엄마의 기억 속 가시내는 거짓말 잘 하고 정신이 나간 더러운 여자 아이로 남아 있었던 걸까요?
물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지요? 모른다. 내가 결혼을 17살에 했고 해방되고 20살에 나왔으니 알게 뭐냐. 이야기를 하시던 어머니가 코를 고십니다. 베개를 바로 해드리고 나는 서재로 들어가 창문을 엽니다. 강바람이 창문으로 들어옵니다.
江…….
압록강은 흐른다. 이미륵 작가가 쓴 소설 중에 『무던이』라고 있었어요. 오래 전 미발굴 소설로 문학사상에 실린 적이 있었지요. 어린 여자애가 시집을 갔고 꿈속에 옆집 남자 아이를 보고 흐느껴 웁니다. 울며 잠꼬대하는 어린 신부를 깨워 신랑이 묻습니다. 우물이가 누구냐. 왜 우느냐. 소꿉동무 남자 아이가 보고 싶어 눈물을 흘리는 신부는 그날로 소박을 맞지요. 보고 싶은 남자가 있다니…….
“더러운 것!”
나는 생각합니다. 가난한 13살 여자 아이의 상상력을 받아내지 못했던 어른들의 비좁은 세상. 혹독한 사실의 역사에서 상상력의 굴레에 갇히는 어머니들의 13살은 잔인했습니다. 나의 13살도 그다지 너그럽지는 못했지만요.
상상력을 빼앗긴 여자 아이들이 소녀가 되고, 여인이 되고, 어머니가 되고, 할머니가 되고, 그 딸들이 다시 소녀가 되고, 여인이 되고, 어머니가 되고 ,할머니가 되고……. 여자들의 말하기, 말 걸기가 왜 그토록 치열한 것인지 저는 이해하겠습니다. 당신은 이해하시겠습니까?
김미옥
부산에서 태어나 경기도와 서울에서 자랐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행정학을 전공했고, 정부기관에서 장기간 종사했다. 2019년에는 뜻한 바 있어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사업을 구상하고 있다. 책과 글쓰기를 좋아해서 페북에서 ‘활자 중독자’로 활동하고 있다.
Leave a comment
You must be logged in to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