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온다
깔묻히고 옹골지고 딩딩하고 귀중중하고 께느른한 이야기
눈이 온다
깔묻히고 옹골지고 딩딩하고 귀중중하고 께느른한 이야기
영화 「기생충」이 얼마 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영화상을 받았다. 이즈음에 읽은 책이 조정래 작가가 쓴 『천년의 질문』이다. 영화와 소설이라는 장르만 다를 뿐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구조적 문제를 다루고 있다. 『천년의 질문』끝 권을 다 읽을 무렵 『90년생이 온다』(임홍택, 웨일북)를 만났다.
겨우내 눈 코빼기도 보지 못하고 봄이 오려나 싶었는데 오늘 눈이 드디어 온다. 모처럼 눈스럽게 내린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물기를 가득 머금고 내리느라 깔묻히지* 않고 금방 형체를 지우고 말았다. 눈은 서로 바싹 다붙어서 붙임성 있게 뭉쳐 내리고 깔묻혀야 눈답다. 눈은 함박눈으로 펑펑 내려야 옹골지고* 푸지다. 눈에 대한 이런 생각이 불쑥 ‘90년생’과 겹치면서 ‘꼰대’란 소리가 딩딩하게* 난다.
90년생은 1990년에서 1999년 사이에 출생한 사람을 일컫는다. 이 세대는 길고 복잡한 것을 좋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피해야 할 악으로 여긴다. 자신이 속한 조직에 충성하기보다 자신을 더 우선으로 삼는다. 직장을 은퇴할 때까지 죽기 아니면 살기로 다니려 하지 않는다. 직장 일보다 자기 삶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이렇다 보니 기성세대 눈으로 보면 그들 세계를 독해하기 어렵다. 아마 2000년생은 90년생보다 더할 것이다.
지난 학기 학생들이 한 강의평가를 어제 보았다. 해마다 반복되는 것이지만 간호학과 학생들이 한 ‘인문 고전 읽기’ 강의평가가 가장 낮다. 오전반과 오후반 가운데 오전반 강의평가가 턱없이 낮다. 모 직원 선생님이 강의평가 우수 교수로 뽑혔다고 전해준 말이 무색할 정도로 기분이 귀중중하다.* 변명 같지만 나름대로 가장 공들여 강의했다. 기대에 미치지 못한 강의평가를 보자 다음 학기부터 가르치려는 마음이 께느른해졌다.*
간호사는 다른 직업과 달리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과 윤리의식이 남달라야 한다. 이런 의식을 강의시간에 심어주려고 무던히 애썼다. 간호사로서 언어 활동 능력이 부족하면 간호 현장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이 능력을 기르려고 매주 책을 읽고 독서 경험을 바탕으로 토론한 후 글을 쓰게 했다. 이뿐만 아니라 몇 주는 ‘3분 스피치’를 통해 논리적으로 말하는 방법을 익혔다.
간호학과 신입생은 간호사가 다른 직업에 비해 취업하기 쉬우므로 간호학과에 대부분 입학했다. 『연어』(안도현)를 읽고 자신이 겪은 삶의 폭포에 대해 이야기하라고 하면,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지 못한 것을 주로 꼽는다. 다른 학과 학생이나 늦깎이로 들어온 학생이 겪은 산전수전 인생사와 차원이 다르다. 『소유냐 존재냐』(에릭 프롬)를 읽고 어떤 간호사가 되고 싶은가라고 물으면, 돈 많이 벌어 여행하고 먹고 싶은 것 먹겠다고 한다. 『목민심서』(정약용)를 읽고 간호현장에서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물었다. 『고령화의 쇼크』(박동석 외, 굿인포메이션) )를 읽고 고령화 시대에 어떤 간호사가 될 것인지 말하게 했다. 『유쾌한 혁명을 작당하는 공동체 가이드북』(세실 앤드류스, 강정임 역, 한빛비즈)을 읽고 간호 현장에서 인간관계를 어떻게 풀 것인지 토론시켰다. 『논어』를 강독하면서 말씀 하나하나를 간호사와 연계하여 묻고 대답하는 형식으로 강의했다.
수강신청을 할 때 오전반보다 오후반이 훨씬 많았다. 30명씩 숫자를 맞춰야 조별 토론이나 평가를 균형 있게 할 수 있어 과대표에게 번호순으로 반을 편성하라고 했다. 그런데 학생들 뜻은 내가 의도한 것과 전혀 달랐다. 반을 선택할 권리를 자기들에게 달라고 했다. 알고 보니 아침 9시 강의를 들으려면 일찍 일어나야 하므로, 아침에 강의 듣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다. 나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9시 강의가 있는 날 8시 20분쯤 연구실에 당도한다.
연구실에서 짧게나마 기도한다. 출석부와 다음 주에 읽어야 할 책, 관심 끌기로 학생들에게 들려줄 말을 챙겨 늦어도 5분 전쯤 강의실에 이른다. 지각하기를 밥 먹듯 하는 학생, 핸드폰에 눈을 박고 있는 학생, 영혼을 잃은 사람처럼 눈빛이 멍한 학생에 이르기까지 맥이 풀리지 않는 날이 별로 없었다. 이때마다 일일이 꼰대 짓을 했다. ‘인문 고전 읽기’는 우리 학교 인성교육과 관련된 교양필수 교과목이다.
머릿속에 가둬둔 지식은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을 바꿀 수 없다. 학기마다 ‘인문 고전 읽기’를 수강하는 학생을 대상으로 두 가지 일을 실천하고 있다. 무감독으로 중간고사를 치르고 종강할 무렵 장기기증 서약을 한다. 무감독 시험은 모두 참여했지만, 장기를 기증하겠다고 서약하는 사람은 점점 줄고 있다. 다른 학과보다 간호학과 학생이 눈에 띌 정도로 확연하다.
이것은 한동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이 수수께끼를 『90년생이 온다』를 읽으면서 어느 정도 깨단하게* 풀었다. 이들은‘2000년생’이다. 공자가 “부모에게 효도하고 윗사람을 공경하며 좋은 사람을 사귀고 어려운 사람을 도우라. 그리고 남은 힘이 있으면 학문에 힘쓰라.”라고 한 말보다 국가시험이 최우선 과제일 수밖에 없는. 그러나 ‘90년생’이든 ‘2000년생’이든 간호사는 사람다운 포대에 전문지식을 담아야 한다. 소명감과 투철한 직업의식을 가져야 한다.
“사랑합니다. 인성·영성·지성을 겸비한 간호사가 되겠습니다. 교수님께서 학생들이 자기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수업시간마다 행복했습니다. 좋은 강의 감사드립니다. 중·고등학교 때는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거나 말하는 게 너무 부끄럽고 두려웠습니다. 인문 고전 강의를 통해 발표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자존감을 높일 수 있게 해준 수업이었습니다. 열정적으로 강의하셨습니다. 모든 학생들이 강의에 참여할 수 있는 수업을 해주셨고 학생들의 언변 향상에 도움이 되는 강의 감사합니다.”
이와 달리 매주 글을 쓰는 것이 힘들었고, 학생들에게 바라는 것이 너무 많았다고 한 말도 있었다. 그랬다. 말하기와 듣기, 읽기와 쓰기 능력을 향상하려고 학생들에게 욕심을 너무 부렸다. 학생들이 쓴 리포트를 첨삭하려고 매주 주말을 잊고 산 지 오래다. ‘2000년생’과 ‘꼰대’, ‘전공’과 ‘교양’, ‘기능’과 ‘전인교육’, ‘강의평가’와 ‘소신’의 갈림길에 눈이 펑펑 온다.
* 깔묻히다: 깔리어 묻히다
* 옹골지다: 실속 있게 꽉 차다
* 딩딩하다: 가늘고 팽팽한 줄 따위가 튕겨 울리는 소리가 나다
* 귀중중하다: 지저분하다
* 께느른하다: 기운이 없어 내키는 마음이 적다
* 깨단하다: 오랫동안 생각지 못하던 것을 어떤 실마리로 인하여 깨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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