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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 불법·무효 입증의 중요성

19세기 말 이래 일본은 탈아입구(脫亞入歐)를 표방하며 일제식민지배의 토대인 제국주의 침략노선을 미화하고 합법화하기 위한 장치로서 국제법적 근거의 확보에 진력해 왔다. 그것은 바로 한국에 대한 강제병합 과정에서 일본이 한국의 국권 탈취에 착수하여 강요한 일련의 조약들로 구체화되었으며 국제법적 합법성을 확보하기 위해 ‘한일의정서-제1차 한일협약-제2차 한일협약(을사늑약)-제3차 한일협약(정미조약)-한국병합조약(병합늑약)’ 5단계를 거쳤다. 그러한 한일강제병합의 과정에서 1905년 을사늑약의 국제법적 효력에 대해 중요한 법적 문제로 논의하게 되는 것은 일본 정부가 이를 토대로 하여 체결한 1910년 강제병합조약까지 국제법상 합법이라는 전제로 불법적인 일제식민지배에 대한 책임 자체를 부정하는 데에 있다. 따라서 일제식민지배의 불법성은 일본이 합법을 전제로 하고 있는 을사늑약을 비롯한 한일강제병합 관련 조약의 불법·무효성에 대한 입증이 본질적 과제이자 긴요한 문제인 것이다. 사진=위키백과

을사늑약의 국제법적 문제점과 역사적 과제

을사늑약의 불법·무효성 입증이 긴요한 이유

• 국제법 앞세워 역사 왜곡
• 제국주의 침략 합법화 주장
• 현재도 법리 왜곡 이어져

글 | 도시환(동북아역사재단 독도연구소 책임연구위원)

19세기 말 이래 일본은 탈아입구(脫亞入歐)를 표방하며 일제식민지배의 토대인 제국주의 침략노선을 미화하고 합법화하기 위한 장치로서 국제법적 근거의 확보에 진력해 왔다. 그것은 바로 한국에 대한 강제병합 과정에서 일본이 한국의 국권 탈취에 착수하여 강요한 일련의 조약들로 구체화되었으며 국제법적 합법성을 확보하기 위해 ‘한일의정서-제1차 한일협약-제2차 한일협약(을사늑약)-제3차 한일협약(정미조약)-한국병합조약(병합늑약)’ 5단계를 거쳤다. 그러한 한일강제병합의 과정에서 1905년 을사늑약의 국제법적 효력에 대해 중요한 법적 문제로 논의하게 되는 것은 일본 정부가 이를 토대로 하여 체결한 1910년 강제병합조약까지 국제법상 합법이라는 전제로 불법적인 일제식민지배에 대한 책임 자체를 부정하는 데에 있다. 따라서 일제식민지배의 불법성은 일본이 합법을 전제로 하고 있는 을사늑약을 비롯한 한일강제병합 관련 조약의 불법·무효성에 대한 입증이 본질적 과제이자 긴요한 문제인 것이다.

을사늑약과 역사적 파편

한일 역사 갈등의 본질적 원인인 일제식민지배를 견인하고 당시의 국제법상 합법으로 미화한 일제불법강점의 기점으로서 을사늑약이 체결된 지 117년이 되는 해를 맞이했다. 앞서 을사늑약 체결 100년이던 지난 2005년 일본은 시마네현을 통해 ‘다케시마의 날’을 선포함으로써 1905년 독도 침탈의 역사를 기념하고 이를 계승하겠다는 극단적인 행태를 표출했다. 그것은 한일 간 역사화해의 전기(轉機)가 향후 표류할 수밖에 없다는 시사였을 뿐만 아니라 역설적으로 한일 역사갈등의 본질적 원인규명과 그에 대한 극복방안을 모색하는 일이 우리 시대에 부여된 역사적 과제이자 정의의 소명으로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되었다.

주지하다시피 19세기 말 이래 일본은 탈아입구(脫亞入歐)를 표방하며 일제식민지배의 토대인 제국주의 침략노선을 미화하고 합법화하기 위한 장치로서 국제법적 근거의 확보에 진력해 왔다. 그것은 바로 한국에 대한 강제병합 과정에서 일본이 한국의 국권 탈취에 착수하여 강요한 일련의 조약들로 구체화되었으며 국제법적 합법성을 확보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5단계를 거쳤다. (1) 1904년 2월 23일자의 <한일의정서>; 영토사용권 탈취, (2) 1904년 8월 22일자의 <제1차 한일협약>; 외교권 탈취, (3) 1905년 11월 17일자의 <제2차 한일협약: 을사늑약>; 대외주권 박탈, (4) 1907년 7월 24일자의 <제3차 한일협약: 정미조약>; 군사내정권 탈취, (5) 1910년 8월 22일자의 <한국병합조약: 병합늑약>; 강제병합 순이다.

그러한 한일강제병합의 과정에서 1905년 을사늑약의 국제법적 효력에 대해 중요한 법적 문제로 논의하게 되는 것은 일본 정부가 이를 토대로 하여 체결한 1910년 강제병합조약까지 국제법상 합법이라는 전제로 불법적인 일제식민지배에 대한 책임 자체를 부정하는 데에 있다. 따라서 일제식민지배의 불법성은 일본이 합법을 전제로 하고 있는 을사늑약을 비롯한 한일강제병합 관련 조약의 불법·무효성에 대한 입증이 본질적 과제이자 긴요한 문제인 것이다.

그것은 이미 제국주의 침략노선의 일본군국주의에 맞서 동양평화를 설파한 선각자 안중근 의사가 1905년 을사늑약을 국제법상 불법으로 규정하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15가지 죄상 중 가장 중대한 것으로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1910년 안중근 의사에 대해 일제형법상 살인죄로 사형을 언도한 일제의 재판이 을사늑약 제1조에 근거하고 있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더욱이, 1992년 2월 UN 인권위원회에서는 을사늑약에 기인한 일제식민지배 피해자인 한반도의 여성을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동원한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에 대해 묻고 있으며, 대한제국이 칙령 제41호로 독도에 대한 영토주권을 선포한 지 120주년이던 지난 2020년 재개관한 일본 영토주권전시관에서는 1905년의 독도 침탈과 을사늑약 모두 국제법상 합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존재한다. 환언하면, 우리의 주권·인권·영토에 대한 일제식민주의의 뿌리 깊은 침탈 도발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며, 동아시아평화공동체를 향한 선결과제로서의 공통분모에는 1905년 을사늑약이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을사늑약의 불법적 성립

일본의 한반도 불법강점과 을사늑약을 통한 보호국화는 러일전쟁의 발발점인 조선전쟁으로 시작되었다. 1904년 1월 21일 전시 중립을 선언한 대한제국에 대해, 1904년 2월 6일 일본 해군이 진해만과 마산시의 전신국을 강제 점령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일본군의 한반도 강점에 대해 일본은 자국이 의도한 1905년 11월 17일의 을사늑약을 통해 정당·합법화하고 있다.

그러한 일본의 한반도 보호국화 기도의 과정을 보게 되면 대내적으로는 이미 1904년 5월 31일 일본 각의의 대한방침(對韓方針) 등의 결의로 실체화하였고, 대외적으로는 1905년 7월 27일 가쓰라(桂太郞)-태프트(William Howard Taft) 각서에 이어, 동년 8월 12일의 제2차 영일동맹조약과 9월 5일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중재로 러일전쟁을 종결하는 포츠머스(Portsmouth) 강화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동 조약 제2조에 의거하여 일본은 한국에서의 우월권을 인정받았다.

포츠머스 강화조약 체결 후 1905년 11월 9일 오후 6시 20분 서울에 도착한 일본 특명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주한일본전권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와 한국주차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를 대동하여 시위케 하였다. 일본은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기 위해 외교권을 박탈하는 제2차 한일협약을 내놓았는데,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주차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와 함께 전후 3차례나 궐내로 황제를 알현하였다. 11월 10일 오후 12시 30분 이토 히로부미는 경운궁의 수옥헌에서 고종황제를 알현하고 친서를 봉정하였다. 11월 15일 오후 3시 30분 이토 히로부미는 황제를 알현하고, 6시 45분 하세가와 요시미치 한국주차군사령관저에 갔다. 11월 16일 오후 4시 그들의 숙소인 정동 손탁호텔에서 회담하였는데 참정대신 한규설 이하 8명 대신에게 위협과 공갈을 감행하였다.

11월 17일에는 그들의 강요에 의하여 궐내 어전에서 각의를 개최한 바 4~5시간을 계속하였으나, 황제가 “이 협약의 인허(認許)는 곧 망국이다. 짐은 사직에 순(殉)할지언정 결코 인허(認許)하지 않겠다”고 단호히 거부하자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군대를 동원하여 직접 회담에 간섭하였다. 그리고 대신들에게 협박을 자행하였다. 마침내 이토 히로부미가 각 대신들을 위협하면서 개별 심문을 하자, 5명이 강압에 못 이겨 찬성함으로써 황제의 의사를 무시한 채 체결된 을사늑약은 11월 17일이 아닌 익일 오전 2시경에 조인되었다.

을사늑약의 내용과 대한제국의 대응

을사늑약의 내용은 제1조 일본국 정부는 재동경외무성을 경유하여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를 감리·지휘하며, 일본국의 외교 대표자 및 영사가 외국에 재류하는 한국인과 이익을 보호한다. 제2조 일본국 정부는 한국과 타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수하고 한국 정부는 일본국 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 국제적 성질을 가진 조약을 절대로 맺을 수 없다. 제3조 일본국 정부는 한국 황제의 궐하에 1명의 통감을 두어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고 한국 황제를 친히 만날 권리를 갖고, 일본국 정부는 한국의 각 개항장과 필요한 지역에 이사관을 둘 권리를 갖는다. 이사관은 통감의 지휘 하에 종래 재한국일본영사에게 속하던 일체의 직권을 집행하고 협약의 실행에 필요한 일체의 사무를 맡는다. 제4조 일본국과 한국 사이의 조약 및 약속은 본 협약에 저촉되지 않는 한 그 효력이 계속된다. 제5조 일본국 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의 유지를 보증한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이 을사늑약으로 인해서 한국은 일본에 외교권을 박탈당했으며, 이 을사늑약은 조약체결대표자에게 물리적인 폭력을 사용함으로써 조약의 무효를 가져온 대표적 사례가 된다. 이 을사늑약은 완전히 무력과 강박에 의하여 강제당한 조약이다. 고종황제는 이 조약이 불법 조인된 지 10일 만인 11월 26일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하여 비밀리에 전문으로 미국에 체제중인 황제고문 헐버트(Hulbert)에게 통보하여 그것이 무효임을 명백히 하고 이 사실을 만방에 선포할 것을 지령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에 대한 대한제국의 공식 입장은 고종황제가 주권수호 차원에서 수교국의 원수들에게 보낸 수통의 친서에서 잘 표명되어 있다. 고종황제는 1905년 11월 18일부터 독일황제에게 보낸 친서를 비롯하여 1906년 1월 영국 스토리(Douglas Story) 기자를 통한 수교국 원수를 상대로 한 메시지, 6월 헐버트를 통해 전달하고자 한 9개 수교국 원수들에게 보내려고 한 친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즉 (i) 일본 측이 한국 외부대신이 조인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위협을 받아 강제로 이루어진 것이며, (ii) 황제 자신은 정부에 대해 조인을 하게 한 적이 없으며, (iii) 일본 측이 거론하는 정부회의는 국법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 일본인들이 대신을 강제로 감금한 채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조약이 성립되었다고 하는 것은 공법에 위반하는 것으로 당연히 무효다. 이 견해는 1907년 6월 27일 제2차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보낸 3인의 밀사들이 공개한 ‘공소사’(控訴詞)와 부속문서에서도 거듭 밝혀졌다.

을사늑약의 성립 요건 상 하자

을사늑약이 국제법상 조약으로서 유효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성립요건을 구비하고 효력요건을 충족하여야 한다. 성립요건의 구비는 효력요건의 충족의 전단계로서 선결사항인 것이다. 조약의 성립요건이란 조약이 성립하기 위해 구비해야 하는 최소한의 형식적 요건으로서 일반적으로 ① 당사자, ② 목적, ③ 의사표시의 존재, ④ 조약성립절차의 완료의 4가지를 들고 있다. 조약의 성립요건상의 불비와 관련하여 조약성립절차는 구체적으로 ① 교섭, ② 조약본문의 채택, ③ 조약본문의 인증, ④ 조약에의 비준, ⑤ 비준서 교환 등으로 진행되고, 조약에의 비준은 그 조약에 구속을 받겠다는 동의의 의사표시로서 조약체결권자의 비준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을사늑약은 성립요건으로서의 조약체결 형식, 절차, 명칭을 모두 구비하지 못한 것이다. 구비요건을 검토하면, 당시 대한제국의 헌법에 해당하는 1899년 「대한국 국제」 제9조에 의하면 조약체결권자는 고종황제로서, 고종황제의 비준이 필요하고, 비준한 후 양국의 전권위임대표에 의해 비준서가 상호 교환되어야 양국 간 조약으로서 성립하는데, 고종황제는 이에 비준하지 않았다. 즉 한국 황제의 비준이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구비하지 못했던 을사늑약은 성립조차 되지 않은 조약, 환언하면 조약으로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 불과한 것이다.

을사늑약의 효력 관련 일본 국제법학계 주장 검토

을사늑약의 효력과 관련하여 국가대표에 대한 강박으로써 정신적·육체적 폭력을 통해 한국에 강제함으로써 무효론을 주장한 프랑스 국제법학자 레이(Francis Rey)의 1906년 논문에 대해 비판한 일본 국제법학계의 아리가 나가오(有賀長雄), 운노 후쿠쥬(海野福寿), 사카모토 시게키(坂元茂樹)의 주장을 검토하면 다음과 같이 평가할 수 있다.

아리가 나가오는 레이로부터 을사늑약 무효론을 제시받았을 때, ‘국가대표 의사의 자유’와 ‘주권국가의 평등성’이라는 국제법적 규범성의 요청을 명확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아울러 전통국제법 시대에는 실증주의·규범주의의 상반된 입장과 무관하게 조약체결권자의 ‘의사의 자유’는 인정되었기 때문에 그가 강제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해석하여 특정의 견해를 표명한 이상 그 또한 ‘의사의 자유’라는 전제의 공유와 을사늑약 체결 당시에 ‘의사의 자유’에 대한 평가를 제시했어야 함에도 침묵함으로써 일본의 국가주의적인 국가실행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운노 후쿠쥬는 레이의 논문이 미국국제법학회로부터 조약법 제정에 관한 법률안 기초의 위탁을 받은 하버드대학교 법학부가 1935년 작성한 하버드법대 초안의 참고문헌으로 인용되었고, UN 국제법위원회의 조약법협약의 법전화 과정에서 하버드법대 초안의 국가대표 개인에 대한 강박에 따른 무효조약의 대표적 사례로서 을사늑약이 예시된 것에 대해 검토 없이 인용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1963년 UN 국제법위원회의 조약법협약 법전화 과정에서 공표된 1935년 하버드법대 초안의 국가대표에 대한 강박으로 인한 무효조약의 대표적 사례와 관련하여 1773년 폴란드 의회 포위, 1905년 을사늑약, 1915년 미국의 하이티 국회의 포위 등 3개 사례를 제시하고 있는 점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다.

사카모토 시게키는 국가에 대한 강제는 무효가 될 수 없다는 전제하에 국가원수나 대신 등 국가기관에게 가하는 강제를 국가 자체에 대한 강제로 인식하면서 을사늑약을 예시하고 있다. 그러나 1945년 이전에도 동의의 자유 원칙을 전제로 국가 자체에 대한 강박 역시 조약의 무효원인으로 간주하는 학설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1905년 을사늑약은 권한 있는 기관이 자신의 기능을 수행할 완전한 자유를 보유하고 있는 상태라는 전제를 충족하지 못한 전형적인 예에 해당한다.

한편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된 상태에서 대한제국이 국가 간 외교행위인 조약체결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이고 논리적인 모순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조약 체결의 성립 요건으로 당사자 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동의를 언급하면서도 강제에 의한 조약이 유효라고 주장하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자, 조약체결의 자유가 강제된 상황은 국가의 합의로 볼 수 없으며, 따라서 강박에 의한 조약은 유효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20세기 초의 법실증주의적 사고 하에서 국제법적 근거조차 없음에도 절대주의가 풍미하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강대국의 일방적 주장을 법적 영역으로 끌어들인 당시 학자들의 법리적 오류에 다름 아닌 것으로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평화공동체의 과제

1905년 을사늑약의 국제법적 성립요건으로서 비준의 불비와 국가대표에 대한 강박이라는 효력요건상의 하자에 더하여 일본이 강변하는 시제법에 대해 검토하면, 을사늑약 체결 당시의 국제법에서는 합법이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침략을 본질로 하는 무효사유인 국가대표에 대한 강박을 은폐하기 위해 체결형식과 절차에서 국제법적 성립요건을 구비하려 했음에도 당시의 국제법에서도 전권위임장과 국가원수의 비준서 등이 구비되지 못한 조약은 국제법 법리상 무효이다. 일본 정부의 ‘식민지배 합법론’ 주장의 토대를 구축하고 있는 일본 국제법학계의 법리 연구에서 ‘국가대표 의사의 자유’와 ‘주권국가의 평등성’을 기반으로 하는 국제법적 규범성에 대해 침묵함으로써 침략적 국가실행과 유착된 극단적 국가주의로서의 일본형 법실증주의 실행의 논거 제공에 다름 아니었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중근 의거에 대한 절대무효인 을사늑약 제1조 일본의 한국신민에 대한 평등한 보호를 근거로 한 일본형법의 적용, 1992년 UN인권위원회에 을사늑약을 절대적 무효조약의 사례로 제시한 1963년 UN국제법위원회 보고서를 발굴한 일본의 도츠카 에츠로(戶塚悅朗) 변호사가 일제식민지배 피해자인 한반도의 여성을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동원한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 문제의 제기, 2020년 재개관한 일본 영토주권전시관의 1905년 이후 독도에 대한 국제법상 일본의 합법적 지배와 한국의 불법점거의 법리로서, 독도 침탈과 을사늑약 모두 국제법상 합법이라는 일본의 국제법 법리 왜곡의 바탕에 절대무효인 을사늑약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존재하고 있다.

요컨대 동아시아평화공동체의 토대 구축에 역행하는 일본의 평화헌법 개정을 위한 ‘전후 체제로부터의 탈각’과 과거사의 왜곡을 위한 ‘역사수정주의’ 정책기조 하에 국제법을 앞세운 역사왜곡 프레임인 ‘1910년 식민지배 합법론’, ‘1965년 한일협정 완결론’, ‘1905년 독도영유론’ 주장 등은 을사늑약을 기점으로 하는 일제식민주의의 구조화된 반복적인 폭력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러한 전제에서 ‘1910년 한일병합조약의 원천무효’를 천명한 한일지식인 1,139명의 ‘2010년 한일지식인 공동성명’은 ‘식민주의의 역사적 종식’을 담은 2001년 더반선언의 동아시아 버전으로 올바른 역사의 정립을 통한 기반 위에서 진정한 역사화해를 모색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일제식민주의가 침해한 한국의 주권, 인권, 영토에 대해 국제법적 정의의 구현으로 실현되지 않은 한 역사로 이관되는 문제가 아니라, 끊임없이 지속되는 현재진행형의 역사정의와 평화공동체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제식민지배와 침략전쟁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전제로 하는 국제법상의 기본적인 소극적 평화(negative peace)에서 나아가, 을사늑약 117년인 2022년을 기점으로 인간의 존엄성에 기반하고 인류공영을 지향하는 진정한 동아시아평화공동체를 함께 실현해갈 적극적 평화(positive peace) 구현의 출발점이 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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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환
 동북아역사재단 독도연구소 책임연구위원으로, 등재학술지인 『영토해양연구』 편집위원장을 맡고 있다. 대한국제법학회 이사, 세계국제법협회 한국본부 기획이사, 청와대 바른역사정립기획단 선임연구관, 통일부 통일교육전문위원,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서훈 공적심사위원, 여성가족부 일본군 ‘위안부’피해자지원 심의위원, 일본경제침략대책특별위원회 위원, 동북아역사재단 일본군 ‘위안부’연구센터장을 역임하였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의 역사적·국제법적 재조명』, 『한일강제병합 100년의 역사와 과제』(한·영·일), 『한일협정 50년사의 재조명 Ⅰ~Ⅴ』,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과제 Ⅰ~Ⅲ』, 『독도 영토주권과 국제법적 권원 Ⅰ~Ⅲ』,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의 허상』, 『영토해양 국제판례 연구』 등 공·편저 외 다수의 저서가 있다.

※ 이 글은 『월간 순국』과 함께 사람과사회™에 게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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