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가 작사가, ‘안창호’로 선포해야
"안창호설 주장하는 안용환 반박 논리는 증거물 제시와 함께 단연 백미(白眉)"
노래는 음악의 영역이지만 노랫말은 문학의 영역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노래를 부를 때에는 반드시 악보를 보고 그에 따라 부르지 않으면 전혀 다른 노래가 되어버린다. 멜로디가 틀린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음치(音癡)라고 놀림감이 되는 수도 있다.
물론 예술의 영역에 속하는 음악을 모든 사람이 다 잘 할 수는 없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똑같이 그림을 잘 그릴 수 없는 것과 같으며 모든 사람이 똑같이 글을 잘 쓸 수 없는 이치와 같다.
사람은 타고난 재주에 따라서 그림을 잘 그리면 유명한 화가가 되고, 노래를 잘 부르면 저명한 성악가나 가수가 된다. 우리나라는 오랜 옛날부터 가야금과 거문고 같은 품격 높은 악기를 만들어 많은 이들이 음악을 즐겨왔다. 해금이나 아쟁 같은 특이한 소리를 내는 악기들도 개발했다.
이와 함께 춤을 추며 노래를 하게 되는데 이들을 소리꾼 또는 명창으로 대우했다. 신분제도 사회에서는 이들은 하천(下賤)계급에 속했지만 오늘날에는 전문음악인으로서 사회적 선망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우리는 때와 장소에 따라 매일처럼 노래를 부르며 살아간다. 쓸쓸하게 혼자 있을 때에는 슬픈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하고 기쁜 일이 생기면 흥에 겨운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길가에 노래방이 흔해 빠진 요즘에는 한잔 거나해지면 친구끼리 어울려 귀를 찢는 노래방에서 마이크를 쥔다. 노래는 누구에게나 즐거움을 준다. 못하는 노래라도 친구의 강권에 따라 떠밀려 마이크를 잡아야 한다. 웃고 떠들며 즐거워하는 모습이 마치 어린아이로 돌아간 느낌이다.
공식적으로 큰 행사가 있을 때에는 사회자의 인도에 따라 국민의례가 진행된다. 이 때 부르는 노래는 애국가다.
애국가는 4절까지 있지만 대부분 1절로 생략하는 수가 많다. 광복절이나 삼일절 등 국경일 행사에서는 어김없이 4절까지 부르지만 가사를 잘 몰라 입안으로만 웅얼거린다.
아예 가사를 새로 지어 1절만 부르게 하자는 볼멘소리도 있다. 애국가 가사를 누가 지었느냐 하는 문제는 오랫동안 시비가 계속되고 있어 안타깝다. 안창호냐, 윤치호냐다. 그 외에도 다른 연구가 있지만 이 두 분의 작사설이 가장 유력하다.
흥사단에서는 3월31일 국회도서관에서 애국가 작사자연구논문 발표회를 개최했다. 흥사단 애국가 작사자 규명위원장 오동춘이 좌장을 맡아 진행된 이 날의 주제발표는 윤치호설을 앞세운 아리랑 연구가 김연갑과 안창호설을 주장하는 명지대 안용환 그리고 한신대 김준혁, 애국가연구가인 윤정경 등이 순서에 따라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박화만, 박연철, 김영규, 이영일 등이 지정토론자로 나왔는데 모두 연구를 충실하게 해왔기 때문에 무게가 있는 토론장이 되었다.
필자 역시 오래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나름대로 작사자에 대한 문제를 신문 칼럼을 통해서 피력해 왔다. 다만 선입견은 금물이기 때문에 주제 발표자의 연구논문에서 자기가 주장하는 바를 일방적으로 강변하는 것은 설득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전제하고 경청하려고 노력했다.
윤치호설을 내세운 김연갑은 여러 가지 증거와 증언을 명쾌한 논리로 풀어냈다. 윤치호의 화려한 미국 유학을 강조하고 그의 수재성을 평가했으며 미국 에모리대에 보관 중인 애국가 가사지를 증거물로 제시했다.
그동안 계속 주장했던 바를 재연한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윤치호의 친일행적과 죽음의 의문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윤치호가 독립협회 운동을 전개하고 105인 사건에 연루하여 징역을 살았던 저명인사의 하나였다는 사실은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그 후 일제 총독부와 결탁하여 조선민족의 자주성을 훼손한 민족 배신자가 되었던 것도 또한 역사의 기록이다. 확인할 수는 없지만 광복이후 그가 스스로의 친일행위에 대한 죄책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결했다는 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아무리 부끄러운 과거라 할지라도 애국가를 작사할 정도의 인사였다면 그를 내세우는 발표자는 이런 점도 확실하게 밝혀야만 그의 주장이 설득력이 생긴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수치스러운 과거는 빼버리고 자랑만 하면 나중에라도 과거를 알게 된 이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준다. 감춘다고 없어지나.
이에 반하여 안창호설을 주장하는 안용환의 반박 논리는 증거물 제시와 함께 단연 백미(白眉)였다. 그는 당시 발간된 신문기사를 낱낱이 발췌하여 증거로 내놨으며 윤치호설의 모순점을 적나라하게 지적했다.
특히 윤치호가 1907년에 썼다는 애국가 가사지를 보면 당시의 철자법이 아닌 광복 후의 표준 철자법으로 쓰였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가사지의 위작설을 밑받침하기도 했다.
안용환은 안창호의 애국가 작사를 확신하는 논거로 수많은 저명인사들의 증언을 생방송하듯 제시했다.
이광수의 부인 허영숙, 방지일목사, 송주방목사, 구익균, 최일봉, 이명화, 장리욱, 주요한, 안택국, 안춘근, 강재환 등 내로라했던 인사들이 때와 장소를 달리하여 직접 들었던 귀중한 증언을 망라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는 오래 끌어야 할 이유가 이제는 없다. 독립운동으로 일제 경찰의 모진 고문을 받고 사실상 옥사한 안창호냐, 아니면 일제에 협력하여 평생을 살아온 윤치호냐 하는 문제는 너무나 뻔하다.
이는 연구자들의 논리를 종합하여 가장 민족적 논리에서 차질이 없게끔 정부에서 결단할 일이다. “애국가 작사자는 안창호다”라고 명백히 밝혀야 하는 이유다.
Leave a comment
You must be logged in to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