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진의 숲 이야기] 입춘단상
[조한진의 숲 이야기] 입춘단상
동장군의 시샘이 아무리 첩이 첩꼴보듯 매몰차다 해도 오는 봄은 어찌할 수 없는 모양이다.
오늘이 입춘이니 말이다.
입춘은 한 해를 시작하는 첫 절기로서 예부터 문설주나 대문에 입춘방을 붙이고 그 해의 안녕과 길운을 기원했다.
“입춘대길 건양다경, 즉 새봄이 들어서 크게 좋은 일만 있고 집안에 경사스런 날이 많으라”는 기원문이다.
입춘이 되어 나붙는 입춘방을 보면 잊혀지지 않는 추억이 아스라히 떠오른다.
서당 훈장이셨던 할아버지는 해마다 입춘 무렵에 입춘방을 써서 동네는 물론 이웃마을까지 돌렸는데 어느 핸가 그 심부름을 내가 해야만 했다.
혼자 다니기가 심심해 이웃집에 사는 같은 반 예진이라는 애한테 용기를 내어 의사를 타진했다.
콧대 높아 상대도 해주지 않던 그 애는 왠일인지 그날은 순순히 따라나섯다.
그 애는 우리 반에서 제일 예뻣는데 도시에서 살다 사업이 망해 외갓집에 혼자 맡겨져 살고 있었다.
사실 심심한 것은 핑계이고 이 참에 그 애를 꼬드겨볼 속셈이었다.
온종일 발품 판 덕분에 동전과 지폐가 주머니에 가득했다.
동전은 내가 간직하고 지폐는 그 애한테 맡겼다.
돈을 주면 절대 받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던 할아버지의 근엄한 얼굴이 지폐를 받고 미소를 짓는 그 애의 얼굴에 그만 묻혀버렸던 것이다.
할아버지한테는 비밀로 해야 한다며 그 애와 새끼손가락을 걸고 다짐하고 다짐을 받았다.
내심 소기의 목적을 거두었다는 자부심으로 동네 애들 앞에 당당히 그 애를 데리고 다니며 구멍가게에서 보란듯이 군것질도 했다.
그러나 결국 지폐는 그 애에게 고스란히 떼이고 말았다.
사이좋을 때는 내것 네것 없어도 사이가 나빠지면 원수보듯 하는 것이 인간관계였다.
할아버지한테 일러바친다는 그 애의 매정한 협박에 그만 지폐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벙어리 냉가슴 앓듯 끙끙거리며 담부턴 혼자 다녔지만 그러나 그것도 오래 가지 못했다.
주머니가 듬직하니 씀씀이가 헤퍼지게 되고 그러다 보니 동네애들하고 편가르기가 되고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이 되어 마침내 할아버지 귀에 까지 들어간 것이다.
주는 돈이야 마지 못해 몇 푼 받아썻다고는 하지만 어른을 기망한 죄는 절대 용서할 수없다며 종아리가 시퍼렇게 멍들도록 매를 맞아야만 했다.
한 해의 안녕과 길운을 담은 입춘방으로 인해 어린 가슴과 종아리가 시퍼렇게 멍들기는 했지만 정직하게 벌어 정직하게 써야 한다는 돈의 가치를 깨달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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