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절이 됐으면 좋겠다”
법정과 가장 가까운 사람, 지광(智光) 변택주 작가가 전해주는 법정(法頂) 스님 이야기
“가난한 절이 됐으면 좋겠다”
법정(法頂)과 가장 가까운 사람, 지광(智光) 변택주 작가와 법정 이야기
지광(智光). 변택주 작가 법명이다. 변 작가는 『법정(法頂) 스님 숨결』(큰나무, 2010)에 있는 저자 소개 글에 ‘불교를 하는 까닭’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불교를 하는 까닭은 ‘스스로 그러하다’는 데에 두고 귀동냥하기를 여러 십 해를 넘기고야 겨우 마음 놓음 밑절미가 ‘살림’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살림에 맞서는 말은 ‘죽임’으로 ‘가정경영, 기업경영, 나라경영’ 모두 너를 살려야 내가 살 수 있다는 바탕에서 피어오른다고 생각한다.”
이 글에 나오는 ‘살림’과 ‘죽임’은 ‘살리는 것’과 ‘죽이는 것’을 말한다. 변 작가는 『붓다로 살자』 발행인이면서 ‘부처님이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어떻게 말씀하셨을까?’라는 물음을 말머리로 삼아 불경을 우리말로 풀어쓰고 있다.
아울러 ‘백두에서 사는 아이도 한라에서 사는 아이도 우리나라 사람이다, 우리는 우리나라 사람’이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꼬마평화도서관을여는사람들’와 ‘으라차차영세중립코리아’에서 바라지(밑받침)를 하고 있다. 특히 나라곳곳에 꼬마평화도서관을 세워 평화로운 누리를 빚는데 힘을 보태겠다며 누비고 다닌다. 꼬마평화도서관은 평화 책이 서른 권 남짓 들어가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평화도서관이다. 또한 ‘2030년 우리 아이 어떤 세상에서 살게 하고 싶으냐?’는 말머리를 붙들고 평화살림얘기마당을 거듭 펼치고 있다.
법정과 가장 가까운 사람
변택주 작가는 ‘무소유’로 유명한 법정(法頂) 스님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사람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그가 출간한 『법정 스님 숨결』, 『법정, 나를 물들이다』, 『달 같은 해, 법정 스님을 그리다』 등 책 제목에 법정을 넣은 것도 이 때문이다.
법정을 생각할 때 가장 많이 떠오르는 낱말은 ‘무소유’다. 길상사(吉祥寺) 홈페이지에 있는 내용을 보면, 법정이 말하는 무소유는 단순히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을 뜻한다. 이처럼 법정은 생명을 중심으로 나누는 삶을 강조했다. 세속 명리와 번잡함을 싫어했던 스님은 홀로 땔감을 구하고 밭을 일구며 맑은 가난을 몸소 드러냈다.
법정은 폐암이 깊어진 뒤에도 침상에서 예불을 거르지 않았으며 “금생에 저지른 허물은 생사를 넘어 참회할 것이며, 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려야겠다”며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사)맑고향기롭게’에 주어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토록 하며,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 달라”는 말씀을 남긴 뒤 2010년 3월 11일(음력 1월 26일)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에서 입적(세수 78세, 법랍 55세)했다.
법정은 입적 직전 남긴 유언에서 “내 이름으로 번거롭고 부질없는 검은 의식을 행하지 말고, 사리를 찾으려고 하지도 말며, 관과 수의를 마련하지 말고, 편리하고 이웃에 방해되지 않는 곳에서 지체 없이 평소 승복을 입은 상태로 다비하여 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마지막까지 무소유를 드러냈으며 입적 후에도 남은 이들에게 맑고 향기로운 가르침을 심어주고 있다.
“필요 없는 것 갖지 말고 나눠라”
변 작가는 12년 동안 법정의 길상사 법회 사회를 맡으며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누구보다 가까운 곳에서 법정의 말씀을 듣고 발자취를 묵묵히 지키고 따른 인물이다. 그가 『법정, 나를 물들이다』 출간 후인 2012년 3월 예스24 인터뷰에서 한 두 마디는 법정을 설명하는 좋은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법정 스님께서는 당신이 덕을 갖추지 못해서 절을 받는 게 부끄럽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10여 년 간 대중들과 맞절로 법회를 시작하셨어요. 법정 스님께서는 어려운 일이 닥칠 때면 ‘지광아, 염려 마라. 다 잘 될 거야’란 말로 위안을 주셨어요. 아직도 그 음성이 귓가에 맴돌아요.”
“법정 스님하면 ‘무소유’만을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법정 스님 핵심 사상은 ‘함께 하는 삶’입니다. 불이(不二)라고도 하지요. 둘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우리는 둘이 아니면 하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불이(不二)는 둘이 아니라고 해서 하나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무소유’는 법정과 뗄 수 없는 표현이다. 법정이 말하는 무소유는 ‘갖지 않는 삶’이 아니라 ‘나누는 삶’이다. 모든 만물은 높낮이가 없어서 누가 누구를 갖거나 지배할 수 없다. 그러기에 베푼다는 말은 바른 말이 아니며, ‘베푸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것’이라고 해야 맞는다는 것이다.
변 작가는 법정을 기억해야 하는 까닭을 세 가지로 꼽았다. 하나는 ‘나누며 살아야 한다’, 둘은 ‘함께 살아야 한다’, 셋은 ‘제 빛깔과 향기를 내뿜어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를 간추려 한 문장으로 바꾸면 ‘함께 나누는 빛과 향기를 가져야 한다’는 것으로 쓸 수 있을 것이다
변 작가와 나눈 인터뷰는 2017년 8월 30일 오후 서울시 종로구 조계사에서 했던 것을 이번 호에 게재하는 것이다. 9개월이 지났지만, 법정을 담은 이야기라는 점에서 의미가 퇴색하지는 않는다고 믿는다.
▲류현미 식문화세계교류협회 회장을 인터뷰(2017년 5월)한 후 좋은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분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더니 ‘법정 스님과 가장 가까운 분’이라며 인연을 놓아 주셔서 인터뷰를 부탁하게 됐다. 법정은 많은 사람에게 좋은 말씀을 하신 분이다. 법정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법정 스님 이야기를 하면 책 절판 유언이 많이 나온다. 입적하기 전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겠다’며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주기를 간곡히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법정 스님은 지병인 폐암으로 입적하셨다. 입적한 날이 2010년 음력 1월 26일(양력 3월 11일)이다. 폐암과 천식으로 고생을 하셨는데, 병원에 계실 때 곡기(穀氣)를 끊겠다고 하셨다. 제자들이 간곡히 막아서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입적하는 날 스님은 강원도로 가자고 말씀했다. 그러나 눈이 많이 왔던 때여서 강원도는 들어가는 게 쉽지 않아 길상사 행지실(行持室)에 모셨다.
스님은 장례를 하지 말라며, ‘떠나면 바로 태우라’고 하셨다. ‘널(관)도 짜지 말라, 대나무 평상에 입던 옷을 그대로 입고 가겠다’고 하셨다. 만장(輓章)은 말할 것도 없었고, 어떤 장례 절차를 치르지 말고, 사리도 수습하지 말라 하셨다. 조계종과 송광사, 길상사는 스님 유지를 받들어 장례위원회를 따로 구성하지 않기로 했고, 다비식 외에 다른 장례의식을 치르지 않기로 했다.
입적 순간에는 돌개바람이 세 차례나 몰아쳤다. 사무실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서 밖으로 나올 만큼 바람이 셌다. 위패도 ‘비구 법정’이라고 네 글자만 표시했다. 위패는 종단에 계신 조계종 원로의원인 법흥(法興) 스님이 안 되겠다 싶어 ‘비구 법정 대선사 강녕’이라고 다시 써서 올린 것으로 안다.
죽음조차도 무소유를 실천하다
▲법정과 맺은 인연이 궁금하다. 12년 동안 법정 스님 법회 사회를 맡았고, ‘맑고향기롭게’ 이사를 했던 만큼 누구보다 가까운 곳에서 스님을 볼 수 있었는데, 어떻게 인연을 맺었나?
불교를 모르는 사람도 법정의 책 『무소유』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나 또한 그 이들과 다를 바 없이 『무소유』를 비롯해 스님 책을 찾아서 읽었다. 그러나 스님은 많은 사람이 찾는 분이다. 서울 봉은사 다래헌에 사실 때도, 조계산에 불일암(佛日庵)을 짓고 내려가신 뒤에도 사람들 발걸음은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까지 번거로움을 끼치지 않겠다는 생각에 스님을 찾아뵈려고 하지 않았다.
아내는 불자가 아니었지만, 스님을 우러르는 마음은 나보다 더 깊었다. 길상사 창건 소식을 내게 알려준 사람도 아내였을 정도였다. 그래도 가지 않았다.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이듬해 신문을 보던 아내가 법정 스님이 봄 법회를 하신다면서 가보자고 했다.
아내 손을 잡고 찾아간 길상사는 단청도 하지 않아 세수를 막 끝낸 민낯처럼 말갛게 다가왔다. 스님 말씀을 듣고 돌아서던 아내가 이 절에 다니고 싶다고 했다. 나는 아주 오래도록 아침마다 조계사에 들러 참배를 하고 30분쯤 마음을 가라앉히고 출근을 했다. 불자가 아닌 아내가 불자가 되고 싶다는 뜻을 밝힌 마당에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싶어 선뜻 조계사를 떠났다. 아내는 이렇게 스님과 인연을 직접 맺도록 한 도두보고 우러러야 할 인연이다.
길상사는 본디 ‘대원각’이라는 부르던 고급 요정이었다. 요정 주인이던 김영한(1916~1999)이 법정에게 대원각을 시주해 절로 탈바꿈했다. 이런 소중한 인연을 맺은 절에 나가면서 뜻하지 않게 일요법회 사회를 맞게 된다. 이것이 12년 동안 법정 스님 법회 사회를 맡아 깊은 인연을 맺은 계기다. 법회 사회를 보는 자리는 스님과 1m도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숨소리, 동작 하나까지도 그대로 들을 수 있다. 12년 시간은 스님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시간이기도 하다.
▲법정 스님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일화가 있다면 얘기해 달라.
스님 법회는 적어도 1,500명, 많을 때는 3,000명 남짓한 분들이 오셨다. 2003년 봄 법회 때 일이다. 청법가(법사 스님에게 법문(法文)을 부탁드리며 부르는 찬불가)를 마쳤는데 스님이 법상에 오르지 않으셨다. ‘어쩐 일이지?’ 싶어 스님을 돌아봤더니 눈을 감으신 채로 꼼짝도 하지 않으셨다.
당혹스러웠다.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지난 법회 때 “절을 받을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 청법가를 듣고 절을 받기가 민망하다”고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다. 쩔쩔매다가 하는 수 없이 대중을 모두 자리에 앉도록 하고 입정을 마쳤다.
스님은 그제야 법상에 오르셨다. 스님은 절을 받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신 것이지만 대중은 절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옹색하게 튀어나온 말은 “대중이 많으니 앉은 자리에서 ‘합장 반배’로 삼배를 올리겠다”는 말이었다. 대중은 앉은 채로 합장 반배로 삼배를 했다. 스님은 선 채로 합장 반배로 맞절을 하셨다. 그 뒤로 스님 법회에서는 대중과 스님이 합장 반배로 삼배를 주고받아왔다.
“가난한 절이 됐으면 좋겠다”
▲법정의 무소유는 물질은 물론 사람을 만나는 인식과 태도에서도 빛이 나는 것 같다. 무소유를 늘 말씀하신 만큼 기억에 남는 일화도 있을 것 같다.
1997년 길상사 창건 당시에도 했던 말씀인데, ‘길상사가 가난한 절이 됐으면 좋겠다’는 법문이 떠오른다. 2009년 2월 극락전에서 이 말씀을 꺼내셨다. 절을 처음 만들고 창건법회를 할 때 ‘가난한 절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스님은 ‘이제 길상사는 누가 봐도 가난한 절은 아니다, 넘치기 직전에 이르렀다, 자칫하면 넘치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스님은 ‘절에 와서 쌓인 짐을 부리고 가고 싶은데 도리어 짐을 지고 가는 결과가 생기면 안 된다’며 ‘법회는 말 그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법다운 모임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법문 끝에 돈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법회와 법문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했다. 또 “이는 절이든 교회든 상식과 일상이 도리만큼 찌들어있어 반드시 고쳐야 한다‘는 말씀이다.
스님은 ‘금융 위기로 경제가 어려운 만큼 절이나 교회가 세상이 겪는 어려움을 나눠져야 한다’고 하셨다. 특히 ‘도량 공사도 그만두어야 하고 종이 좀 깨졌더라도 소리를 낼 수 있으면 된다, 종소리에 간절한 염원이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하다’고 했다.
간절함보다 더 깊은 염원은 없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이대로 땅이 꺼져 내가 사라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귀한 스님 말씀 끝에 돈 얘기를 해온 사람은 다름 아닌 나였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식은땀이 난다. (웃음)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을 펼치고 있는 ‘맑고향기롭게’는 법정과 뗄 수 없는데, 어떤 곳인가?
법정 스님은 시주 은혜로 살아온 출가사문(出家沙門)으로 ‘생전 밥값은 하고 가야겠기에 이 일 한 가지만은 꼭 하고 싶다’면서 1994년 시민모임인 맑고향기롭게(이사장 덕일 스님)를 만들었다. 깨달음을 사회에 되돌리는 곳이다. 처음 빚은 이들은 윤청광, 정채봉 작가처럼 스님 뜻에 공감하는 시민들이다. ‘마음’, ‘세상’, ‘자연’ 등 세 덕목을 내세워 우리 마음과 세상, 자연을 보존해 누리 살림을 맑고 향기롭게 만들어가는 순수 시민 모임이다.
1994년 3월 26일 구룡사에서 첫 출발 모임을 가졌다. 이후 전국 대중 강연회를 시작으로 연꽃 스티커를 나누며 서울, 부산, 대구, 경남, 광주, 대전에서 뜻을 함께 하는 이들이 어울렸다. 현재에도 많은 회원들이 소리도, 소문도 내지 않고 은근하게 누리 결을 살리려 땀을 흘리고 있다.
“매화는 반만 피었을 때 운치가 있고, 벚꽃은 남김없이 활짝 피어나야 여한이 없다. 복사꽃은 멀리서 봐야 제대로 누릴 수 있고, 배꽃은 가까이서 볼 때 그 맑음과 뚜렷함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스님은 좋은 말씀을 무척 많이 하셨다. 기억에 남는 말씀 중 알려주고 싶은 게 있나?
꽃 이야기가 떠오른다. 매화, 벚꽃, 복사꽃, 배꽃 이야기인데, ‘매화는 반만 피었을 때 운치가 있고, 벚꽃은 남김없이 활짝 피어나야 여한이 없다’, ‘복사꽃은 멀리서 봐야 제대로 누릴 수 있고, 배꽃은 가까이서 볼 때 그 맑음과 뚜렷함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는 말씀이다.
말씀 그 자체가 시(詩)이고 법문이다. 스님은 우리 나무와 꽃에 관심이 많았다. 꽃을 보며 하신 말씀이 마음에 다가오듯이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것이 아니고, 꽃이 피니까 봄이 온다’는 말씀도 하셨다. 꽃을 보는 눈길이 남달랐다.
▲법정은 우리 사회에 있는 세상살이에도 관심을 많이 기울인 분으로 기억한다.
장준하(張俊河), 함석헌(咸錫憲) 등 여러 선생들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해 민주화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1970년대 초 민주수호국민협의회 시절, 재야 민주화 운동 대열에 참여했다. 당시 불교계의 현실 참여는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그렇지만 법정 스님은 『씨알의소리』(정치·시사평론 잡지) 편집위원으로 참여해 씨알의소리가 사회에 반향을 일으키는 데 큰 몫을 했다.
1975년 4월 9일 박정희 정권은 민청학련 사건 관련 가담자를 군법정 판결에 따라 24시간 안에 사형을 집행했다. 이를 보며 스님은 서슬이 퍼런 군부 독재자에게 이들이 ‘조작이다!’고 드잡이를 하자 보란 듯이 죽인 것이라며 ‘우리가 죽였다’고 가슴을 쳤다. 그리고 수행자 본분으로 돌아가겠다면서 불일암을 짓고 내려갔다.
법정은 1997년 10월부터 1998년 11월까지 동아일보에 ‘법정칼럼’을 썼다. ‘산에는 꽃이 피네’로 주제로 쓴 칼럼인데, 이 칼럼에서 척박함과 독재 속에서 아름다움과 화해를 담은 글을 주로 썼다. 보살핌과 구원, 수용하는 자세, 가을, 재난, 신뢰, 순리, 얽매임, 근검정신, 일자리, 두려움, 가난의 덕(德), 가을 등 일상의 삶을 소재로 삼았다.
꽃 이야기, 자연 이야기를 글에 담아 숨통을 틔우고자 했다. 엄혹한 가운데서도 삶은 누려야 한다고 강조하시며 사람들 가슴에 희망을 잃지 않도록 애쓰셨다. 아울러 교회 관계자와 교류했고 김수환 추기경을 길상사에 초대하는 등 종파를 가리지 않고 깊은 교분을 나눴다.
“법정 스님은 가장 좋은 길라잡이”
▲ 법정 스님과 인연이 있는 분들과 만났는데, 스님을 만나고 무엇이 바뀌었나?
다른 이들 얘기를 꺼낼 것이 없이 ‘내’가 바뀌었다. 스님은 늘 ‘마음을 먹었으면 곧바로 할 일을 해라, 머뭇거리지 말라’고 말씀했다. 이 말씀을 듣고 수십 년 피어오던 담배를 바로 끊었고 지금까지 피우지 않고 있다. 한 해에 500일을 넘게 마시던 술도 십년 동안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다. 요새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가벼운 자리에서 한두 잔씩 한다. 그랬더니 밤 시간이 고스란히 살아났다. 식구들과 두런두런 얘기꽃을 피우는 일이 잦아졌다.
아울러 ‘시작할 때 그 마음을 놓치지 말라’는 말씀도 하셨다. 출가자는 출가 당시에 견줬을 때 몸무게가 더 나간다면 잘못 살아왔다고 볼 수 있다고 말씀했다. 우스갯소리지만, 내 몸무게는 스님을 처음 뵈었을 때보다 10kg 가까이 줄었다. (웃음)
▲윤구병 선생과 도법 스님은 각별한 인연인 것 같다.
윤구병(尹九炳) 선생과 도법 스님 두 분은 스님과 인연이 있는 분인데, 인터뷰로 인연을 맺은 후, 그 인연으로 지금도 함께 좋은 일을 하고 있다. 두 분은 법정 스님이 맺어준 더 할 나위 없는 인연이라고 여기며 모자라지만 힘껏 살고 있다.
농부철학자’(서울대학교 철학과 대학원 졸업)라는 애칭이 있는 윤구병 선생은 보리 그늘인 변산공동체를 만들어 대안 활동을 하고 민족의학연구원을 비롯한 여러 단체들을 만들어 누리결을 다사롭게 하면서 서로 살리는 길을 열고 있다. 윤 선생과는 한반도를 영세중립국으로 만들어야 이 땅에 평화가 깃들 것이라는 바탕에서 누리평화살림을 펼치는 일을 하고 있다.
도법 스님과는 불경을 우리말로 푸는 일을 했으며, 사람이 붓다이니 ’붓다로 살자‘는 일을 하고 있다. 잡지 『붓다로 살자』는 부처님이 태어나면서 ‘땅 위와 땅 속을 두루 아우른 누리를 돌아보니 온통, 도두보며 우러를 나뿐이구나!’ 하고 외쳤다는 바탕에서 빚는다. 모든 목숨붙이가 마음 놓고 어울려 살아가야 한다는 뜻을 담아 펴낸다.
▲법정으로 해서 불교와 깊은 인연이 있는 만큼 불교를 바라보는 것 또는 생각하는 것도 궁금하다.
불교는 ‘오늘’, ‘바로 이때’를 말한다. 그러니 ‘바로 하라’는 것이다. 과거에 얽매지 말고, 미래를 가불해다 써도 안 된다. 오늘에 살아야 한다. 부처님은 돌아가시면서 참다운 바탕에서 스스로 말미암아 누리를 바꿔야 한다는 말씀을 남기셨다. 이 바탕에서 법정 스님은 거듭해서 ‘나답게 살라’고 말씀했다. 스님을 길라잡이로 삼아 여리고 서툰 발걸음을 한발 한발 내디디고 있다.
“글씨 하나 없지만, 언제나 환히 빛난다”
▲좋아하는 말씀이 있나?
임진왜란 때 승병을 모아 싸웠던 휴정(休靜) 서산 스님의 게송(偈頌, 부처의 공덕을 찬미하는 노래) 『운수단가사』(雲水壇歌詞)를 좋아한다. 널리 알려진 이 말씀은 ‘아유일권경(我有一卷經) 내게 경전 한 권이 있으니, 불인지묵성(不因紙墨成) 종이에 먹으로 쓴 게 아니라, 전개무일자(展開無一字) 펼치면 글씨 하나 없지만, 상방대광명(常放大光明) 언제나 환히 빛난다’로 돼 있다. 이 게송은 『운수단가사』에 나오는 구절인데, 얼마 전 대원사 현장 스님이 귀한 책을 얻어 기쁘다는 소식을 들었다.
운수단은 제불보살부터 돌아가신 영가에 이르기까지 공양을 올리는 의식이다. 이 시는 중국 당나라 명주 봉화현 사람인 계차(契此) 포대화상(布袋和尙)이 읊은 시와 닮았다. 우리말로 풀면, ‘아유일포대(我有一布袋) 내게 포대 하나 있으니, 허공무가애(虛空無罣碍) 텅 비어 걸림이 없다, 전개변우주(展開邊宇宙) 펼치면 온 누리를 덮고, 입시관자재(入時觀自在) 거두면 거둔 그대로 넉넉하다’는 뜻이다.
▲마무리를 해야 할 때다. 좋은 말씀을 부탁드린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무엇이든 이분법, 흑백논리에 따라 빛은 좋고 어둠은 나쁘다고들 한다. 참으로 그럴까? 아니다. 빛 못지않게 어둠도 소중하다. 어둠이 없이는 미생물이나 씨앗이 뿌리 내리고 싹을 틔울 수 없다. 씨앗이 싹 틔우지 못하면 사람을 비롯한 동물이나 곤충이 살아갈 수 없다. 빛만 아니라 어둠도 이야기할 수 있는 종교가 불교다.
밤에서 낮이 오거나 낮에서 밤으로 갈 때 바로 빛이 오고 어둠이 깔리는 것이 아니다. 뿌연 잿빛이 깔리는 시간이 많다. 잿빛은 어울림(融和)이다. 현상과 본질을 이야기 해줄 수 있는 것이 불교다. 소욕지족(少欲知足), 작은 것이 기꺼워해야 한다. 아울러 무엇이든지 작은 것에서 비롯한다는 것을 깨달아 뜻을 세우면 먼저 한발이라도 떼어 해보는 것도 중요하다.
세상을 바꾸는 힘은 서툴고 여린 것이 누리(세상)를 살리는 것이다. 딱딱하고 두꺼운 게 아니다. 나무를 살리는 힘은 줄기에 있는 것 같지만, 나무는 잎새와 실뿌리가 살린다. 무소유는 살림, 살리는 것이다. 죽이는 게 아니다. 살리는 것은 살림살이다. 삶결, 물결, 살결, 숨결을 보아 알 수 있듯이 여럿이 힘을 모아야 ‘결’을 이룰 수 있다. 살린다는 것은 더불어 바뀌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 살림 결을 가리켜 누리 살림이라고 한다.
변택주
법명 지광(智光). 현재 ‘평화는 살림’ 연구가이며, 잡지 『붓다로 살자』 발행인이다. ‘으라차차영세중립코리아’와 ‘꼬마평화도서관을여는사람들’에서 바라지(밑받침)를 하고 있다. 시민모임 「맑고향기롭게」 이사, 국군고양병원 자견사 법사, 서울산업진흥원 장년창업센터 코치를 지냈다. 지은 책으로는 『법정 스님 숨결』, 『법정, 나를 물들이다』, 『가슴이 부르는 만남』, 『달 같은 해, 법정 스님을 그리다』,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부처님 말씀 108가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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