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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이철규, 그는 누구인가?

"이철규 선생은 대한제국 시절에는 농공상부 금광국 기수(技手)로 근무했다. 해외 열강이 조선을 잠식하기 시작하던 혼란기에 조선의 금광 등을 관리하는 중책을 맡고 있었던 터라 노심초사했고,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에는 국권 회복을 위해 동료들과 결사(決死)를 다짐했다"

이철규 선생은 대한제국 시절에는 농공상부 금광국 기수(技手)로 근무했다. 해외 열강이 조선을 잠식하기 시작하던 혼란기에 조선의 금광 등을 관리하는 중책을 맡고 있었던 터라 노심초사했고,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에는 국권 회복을 위해 동료들과 결사(決死)를 다짐했다.

애국지사 이철규, 그는 누구인가?

이상원 미국 연방에너지규제위원회(FERC) 검사관

수자원에너지 전문가이자 미국 연방에너지규제위원회(FERC) 검사관으로 재직하고 있는 이상원 박사가 증조부인 애국지사 이철규(李喆珪) 선생의 이야기를 담아 ‘애국지사 이철규(李喆珪), 그는 누구인가’를 보내왔습니다. 이철규 선생은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의 후손입니다. 이철규 선생은 일제강점기 때 기수(技手)로 근무했습니다. 기수는 과거 기술직 8급 공무원 직급인 기원(技員)의 옛 표현입니다. 사람과사회™는 이철규 선생의 증손인 이상원 박사가 글에 담은 선생의 삶을 보면서 어려운 시기에 우리 선조가 어떤 삶을 어떻게 살았는지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편집자 말

사람과사회™ 2018 겨울 & 2019 봄 통권8·9호

대한제국(大韓帝國)과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까지 농공상부 금광국(農商工部 金鑛局)에 근무하던 애국지사 이철규(李喆珪) 선생은 1887년 11월 22일 경기도 수원군 동탄면 돌머루(석우리)에서 성우(性祐) 이명직(李命稙) 선생과 전주 최씨(全州 崔氏) 사이에서 3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철규 선생은 대한제국 시절에는 농공상부 금광국 기수(技手)로 근무했다. 해외 열강이 조선을 잠식하기 시작하던 혼란기에 조선의 금광 등을 관리하는 중책을 맡고 있었던 터라 노심초사했고,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에는 국권 회복을 위해 동료들과 결사(決死)를 다짐했다. 1919년 1월 21일, 덕수궁에서 사망한 고종 황제는 일제가 독살했다는 한진창(韓鎭昌, 1858~1935)고종독살설(高宗毒殺說)이 전국으로 퍼졌다. 주요 증언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이상적이라 할 만큼 건강하던 고종 황제가 식혜를 마신 지 30분도 안 돼 심한 경련을 일으키다가 죽어갔다.
  2. 고종 황제의 팔다리가 1~2일 만에 엄청나게 부어올라서 사람들이 황제의 통 넓은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바지를 찢어야만 했다.
  3. 민영달(閔泳達, 1859~1924, 조선 후기 문신, 명성황후 13촌 조카)과 몇몇 인사는 약용 솜으로 고종 황제 입안을 닦아내다가 황제의 이가 모두 구강 안에 빠져 있고, 혀는 닳아 없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4. 30cm 가량 되는 검은 줄이 목 부위에서부터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다.
  5. 고종 황제가 승하한 직후에 두 명의 궁녀가 의문사했다.

이 같은 증언은 일기를 잘 쓰기로 유명한 윤치호(尹致昊, 1865~1945)가 한진창에게 직접 듣고 1920년 10월 13일 자 일기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고종독살설은 1919년 3월 3일 고종 황제 인산일(因山日)에 맞춰 한반도 전역에서 봉기한 독립운동인 3·1만세운동(三一萬歲運動)의 기폭제가 됐다. 이에 결사를 다짐한 이철규 선생과 동료 관원들은 국권 회복을 위해 고종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하고 진실을 규명할 것을 줄기차게 제기했다. 하지만 1919년 10월 6일, 용산에 주둔했던 일제 헌병대 군사들이 참살하고 말았다.

일제 헌병대 참살로 1919년 별세

이때는 이철규 선생의 큰아들 이성구의 나이 11세, 작은아들 이용구의 나이가 3세도 안 된 때였다. 또 고종 황제 퇴위를 함께 했던 이철규 선생의 부친 이명직 선생이 독살(1915년 9월 7일)을 당한 지 4년 만이었다. 이철규 선생의 첫째 부인인 영일정씨(英日鄭氏)는 아들 이성구가 태어나고 1년 뒤 산고로 작고했다. 이후 밀양박씨(密陽朴氏)와 재혼했다. 하지만 어린 두 아들과 젊은 부인을 남기고 억울하게 죽임을 맞은 것이다.

이철규 선생의 증손 이창원 선생은 주변 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라며 “만약 이철규 선생이 조금 더 오래 살아계셨다면, 망한 나라이지만, 나라 상황도 그렇고 해서, 가문에서 보관하고 있던 많은 문화재 등을 보전하고 관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이철규 선생은 사진에서 보듯 인물이 출중하고 날씬하다. 장손부(長孫)婦)는 젊은 시절 이철규 선생의 모습은 나(증손 이상원)와 많이 닮았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나의 어머니는 심장이 약했다. 어린 시절, 모친이 호흡 곤란으로 위급한 상황을 맞았을 때, 보이스카우트에서 배운 인공호흡법으로 모친의 목숨을 구한 적이 있다. 장손부 등은 이 일을 보고 어느 스님이 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스님은 ‘증조부 이철규 선생이 증손(이상원)으로 환생해 손자며느리의 목숨을 악귀로부터 구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손자며느리는 나(증손 이상원)의 모친이다.

광상조사기수교습소 제1기 출신

농상공부 금광국 기수였던 이철규 선생은 31세 때인 1919년 고종의 죽음을 감추고 있던 진실을 밝히라고 진언하다가 일본 헌병의 참살로 목숨을 잃었다. 이철규 선생이 기수였다는 사실은 19세 때인 1907년(광무 10년) 10월 11일, 농상공부 기술직 연수원 수업증서로 확인할 수 있다. 증서는 내(이상원) 누님이 아버지인 이방원 선생의 유품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찾아냈다. 누님은 증서를 사진으로 찍어 보내줬다.

증서를 보면, 농상공부는 광상조사기수교습소를 만든 후 광무 10년(1907년 10월 11일)에 최초로 제1기 기수를 배출했다. 19세였던 이철규 선생에게 수여한 수업증서는 40호다. 40번째 기수라는 뜻이다. 이 증서를 발행한 사람은 농상공부대신 권중현(1854~1934)이다. 광상조사기수교습소 최고책임자인 광무기감(鑛務技監)은 이학박사 거지부충승(巨智部忠承)이고 교관으로는 화학 담임에 공학사 산내정, 채광 담임 목전우오랑, 지질광물 담임 전촌영태랑, 시금술 담임 중천호태랑, 측량수학제도 담임 복전천심 등이다. 이들은 모두 일본인이다.

일제, 이명직·이철규 부자 참살

1907년은 고종 황제를 강제 퇴임시키고 이철규 선생의 부친인 궁내부(宮內府) 특진관(特進官) 1등 칙임관(勅任官) 이명직 선생을 축출한 때이니 광상조사기수교습소에서 기수 교육을 받던 증조부 이철규 선생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어 가슴이 먹먹해진다. 더군다나 19세면 내가 대학 1학년 때 나이였으니 비분강개(悲憤慷慨)이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8년 뒤인 1915년엔 부친 이명직 대감이 독살당하고 4년 뒤인 1919년엔 고종이 독살됐으니 마땅히 고종 죽음의 진실을 밝히라고 요구한 것이다. 이로 인해 1919년 31세의 젊은 나이에 일본 기마 헌병의 칼날에 참살을 당했다.

이명직 대감은 1895년 탁지아문 주사로 대궐에 들어가 1906년 규장각직학사(종2품), 1907년 궁내부특진관 칙임관 1등(종1품)으로 근무했다. 하지만 1907년 고종 강제 퇴위와 함께 궁에서 쫓겨났고 수원 동탄 돌머루에 칩거하며 젊은이들에게 해외유학을 독려하며 사회계몽 활동을 벌였다. 일제는 1915년 ‘호랑이 사냥꾼’으로 위장한 일본 헌병이 이명직 대감을 독살하기 1년 전인 1914년, 농상공부 금광국 기수인 아들 이철규 선생을 평안북도 희천군 동면장으로 보내 부친과 떨어져 있도록 했다. 그 후 1915년, 부친 성우 이명직 대감을 독살했다. 고종 주위에 있던 충신을 암살하거나 살해하는 일제 악행은 고종이 승하한 1919년까지 이어졌다. 1919년에는 고종 승하에 의문을 제기하던 이명직 대감의 아들이자 농공상부 금광국 기수와 평안북도 희천군 동면장을 지냈던 이철규 선생까지 참살했다.

한편 이철규 선생은 1915년, 일제가 부친 성우 이명직 대감을 독살한 후 평안북도 희천군 동면장을 사직하고 돌아와 금광국 기수를 하며 익힌 금광 기술을 사용해 금광업을 했다. 1916년 9월 21일, 용인에 살던 이석영 선생과 함께 충북 충주군 노은면 문성리 금방산 일대 21만3150평에 금광업 면허를 받았다.

조선총독부가 일본 내각에 분기별로 보고한 조선 금광의 일본 반출통계에 의하면, 이철규 선생의 문성금광에서 1917년 총일본 반출량의 24%, 1918년 31%, 1919년 36%로 증가했다. 1918년 일본 내각은 훈령을 통해 조선총독부에 조선인에게는 금광을 허가하지 말고 내주더라도 금맥이 적은 곳 위주로 내주도록 했다. 증손인 나로서는 이 부분에 주목한다. 1919년 고종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했다는 이유로 참살한 이철규 선생의 죽음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측하기 때문이다.

일제는 또 ‘금방산’이라고 부르던 지명을 ‘국망산’으로 바꿔 조선인의 기억 속에서 ‘금방산’을 기억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나 아직도 충북 충주시 노은면이 고향인 사람 중에는 국망산을 ‘금이 많이 나온다’는 유래에 따라 ‘금방산’으로 불렸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향토사학자도 ‘문성리 금방산은 금을 채굴하는 금광이 생겨나면서 나타난 지명’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철규 선생은 금광업 면허를 취득하려면 토지나 산야를 소유해야 한다는 금광면허업법에 따라 소유 내지 공동 소유 형태로 운영했을 것으로 보인다. 금광은 1919년 고종 승하에 의문을 제기하다 일제에 참살당할 때까지 운영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글을 마치며 바라는 게 있다. 이 글을 읽은 독자나 역사학자가 ‘조선총독부 관보’를 연구해 일제의 조선 침탈 역사를 연구하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이는 나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식이 될 것이다.

참고

권중현 안동 권 씨며 충북 영동에서 출생했다. 을사늑약(乙巳勒約)에 찬성한 ‘을사오적’(乙巳五賊, 이완용·이근택·이지용·박제순·권중현)이다. 권중현은 군부대신을 지내며 의병을 토벌한 친일 역적이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 체결 후 10월 16일에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자작 작위를 받았다. 자작 직위는 양자(養子) 권태환(1876~1947)이 세습했다.

이상원
1961년 6월 11일 서울에서 출생했다. 서울 영동고와 전북대를 졸업하고 버지니아 공대 대학원에서 농업공학을 전공했다. 이어 노스이스턴 공대 대학원 토목환경 석사를 마친 후 브라운대 대학원 지구물리학을 공부했다. 로드아일랜드 주립 공대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시뮬레이션·모델링(Simulation/Modeling), 환경공학 전반, 토목공학 댐안전공학 및 대태러예방공학, 수자원에너지 전문가다. 미 국방성 수문조사관 등을 거쳐 현재 미국 연방에너지규제위원회(Federal Energy Regulatory Commission) 수력 발전 담당 검사관으로 근무하고 있다. 2009년 국군간호사관학교 명예 동문으로 위촉됐다. 2006년 이후 현재까지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에너지·수자원 분야 비상임 전문가를 맡고 있으며, 2007년 이후 18개 한국 국책 사업에 참여했다. 2008년 제41회 과학의날 과학기술 유공자 과학기술부장관 표창을 받았다. 미국환경보호청(EPA) 불포화대(Unsaturated Zone) 오염추적표준모델(VLEACHSM 2.0)과 미국공병단 침출수 모델을 개발했다. 1988년 서울 하계 올림픽 공로기장(한국잡지풀기자단 총무 역임), 5.18 민주화 유공자(국적 이탈 이유로 유공자 자격 박탈, 2018년 3월), 2017년 9월 14일 은미희 한국 작가가 미발표한 위안부 소설 『나비, 날다』를 『Flutter, Flutter, Butterfly』(Dorrance Publishing, 2017)’로 번역하는 프로젝트를 맡아 미국 최초로 위안부 관련 소설을 출간해 일본의 부적절한 역사 왜곡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현재 사람과사회™ 편집위원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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