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수치·혐오, 당신의 기억은?”
“위안부로 끌려갔다 현지에서 돌아가신 수많은 영령들에게 이 연극을 바칩니다”
불행의 기억, 수치의 기억 그리고 혐오사회
‘위안부’를 위한 헌정 연극 ‘봉선화’를 위한 물음표
연극 ‘봉선화’는 잘 빚은 항아리처럼 우수한 작품이며, 그래서 좋은 연극이다.
개인적으로는 1988년 6월 오태석의 ‘태(台)’를 본 이후 가장 마음에 와 닿은 명품 연극이다. ‘태’가 역사에 등장하는 단종을 다뤘는데, ‘봉선화’도 아픈 과거의 역사를 다루고 있어 주제도 마음에 든다.
서울시극단이 지난해 말 하반기 정기공연(12월 6일부터 25일)으로 막을 올린 이 작품은 일제 치하의 위안부 문제를 다루고 있다. 과거 80년대에 주목을 끌었던 윤정모의 소설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가 원작이다.
서울시극단이 밝힌 줄거리는 아래와 같다.
“대학 이사장인 장인에 의해 대학 총장으로 추천된 배문하는 문화인류학 대학원생인 딸 수나가 <식민지 속의 여성>을 주제로 석사 논문을 쓴다는 말을 듣고 그 논문 주제에 반대하며 자신이 묻어두었던 과거에 대해 회상하기 시작한다. 그는 젊은 시절 어머니를 ‘갈보’라고 욕하며 학대하는 아버지를 죽이고 싶어 했다. 배문하의 어머니 순이는 일제시대 위안부로 끌려갔다가 당시 강제징집되었던 학병 배광수를 살리고 귀국해 배문하를 낳았다. 수나는 남자 친구와 함께 일제시대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다큐멘터리를 준비하며 우연히 80년대 익명의 작가 김산해가 쓴 소설 <조센삐>를 발견하고, 그 내용이 나눔의 집에서 기자회견을 한 김순이 할머니의 증언과 일치한다는 것을 발견하는데…….”
이번 작품은 윤정모 작가가 직접 각색(재창작)해 애정과 관심을 표현했다. 연출은 구태환 인천대 공연예술학과 교수가 맡고, 예술감독은 김혜련 서울시극단장이 맡았다.
당신은 ‘불행의 기억과 수치의 기억’ 중 어느 편인가?
이 작품은 주인공인 어머니 ‘순이’, 순이의 아들 ‘배문하’, 배문하의 딸 ‘수나’를 중심으로 한 관계와 갈등이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순이에게 위안부의 삶은 ‘불행’이다. 하지만 배문하에게는 오로지 ‘수치’일 뿐이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자 외면하고 싶은 기억이다.
하지만 딸 수나의 석사 논문을 통해 기억은 다시 떠오른다. 수나가 남자 친구와 논문을 쓰기 위해 위안부를 계속 연구할수록 배문하는 괴로움과 수나와의 갈등이 커진다. 그에게는 ‘수치의 기억’으로 묻어 뒀던 기억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불행의 기억’이기 때문이다.
연극 ‘봉선화’는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 하나의 물음표를 던진다. 수나의 석사 논문 연구를 통해 ‘과거의 기억 찾기’에 대한 관객의 판단을 요구한다. 이는 ‘불행의 기억’과 ‘수치의 기억’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이 물음은 궁극적으로 ‘어두운 과거’에 대한 물음이다. 묻어둬야 하고 기억해서는 안 된다는 ‘배문화의 수치’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당할 수밖에 없었던 ‘순이의 불행’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근원적 물음이다.
“혐오를 강권하는 사회가 수치이자 불행”
물음에 대한 상황과 구조는 ‘나’의 입장을 순이로 볼 수 있고 ‘너’의 입장은 배문하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입장은 수나를 통해 묻는 형태로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위안부는 ‘너’의 입장을 가족 구성원들에게 강제로 권하는 구조였다. ‘나’는 남편에게도 수치였으며 아들에게도 수치였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가족이지만 수치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일 뿐 아내나 어머니의 불행을 감싸안아주지 않는다.
감싸 안기가 없는 수치는 결국 혐오만 낳는다. 문제는 혐오가 불러오는 부작용이다. 기억하지 않기라는 단순한 문제로만 생각하는 배문하는 어머니 순이를 새로 포장하는 데만 급급하다.
불행의 기억보다 수치의 기억은 버려야 한다는 인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이는 포장을 바꾸고 기억하지 않으면 불행도 수치도 없다고 생각하는 데서 나온 행동이다.
혼자가 아닌 함께 나눈 기억은 살아 있는 생명체와 다를 바 없다. 어디서든 누군가를 통해 드러나기 마련이다.
기억하기 싫은 과거의 문제하고 해서 덮어둔다고 감춰지지 않는다. 배문하의 기억 지우기도 불행과 수치의 기억을 지우는 데 실패한다.
혐오의 강권도 수명을 다했고 또 그것은 생명 연장의 꿈을 꿔서도 안 된다. 혐오를 강제로 권하는 사회가 수치이자 불행한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혐오의 대상이다.
순이와 수나의 이름을 닮은꼴로 설정한 것은 의미 있는 설정이다. 그리고 공연의 끝에 등장하는 영상 자막은 ‘기억해야 할 기억’이다.
“위안부로 끌려갔다 현지에서 돌아가신 수많은 영령들에게 이 연극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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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과 고뇌, 시련과 고통, 죽음과 배반의 시대는 있었으되 그 시대의 경험은 우리의 천박한 기억력, 그 심오한 망각의 늪에 빠져 흔적도 없이 사라져가고 있다. 서사란 종족의 기억이고 그 기억의 보존을 위한 첫 번째 장치이다. 서사를 통해 역사적 기억을 보존하지 않은 민족치고 자랑할 만한 문화를 일군 민족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어찌 된 일인가. 우리는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역사를 기록해 온 민족이면서 기억과 반성의 능력은 천박하기 짝이 없고, 서사에서 역사를 증발시키고 기억을 잡아 빼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유행 논리에 휘둘리기까지 한다. 외솔 최현배가 ‘천박한 낙천성’이라고 부른 어떤 특성이 우리에게 있는 것인가.
이처럼 정신대 문제는 일본을 향해, 야만의 역사를 향해 제기되는 문제이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에게 제기되는 문제이다. 이 부분을 망각한다면 정신대 문제는 그 정신적 차원을 잃은 채 고작해야 일본을 상대로 한 한풀이 굿으로 끝나고 말지 모른다.
-도정일, ‘정신대, 역사, 문학’,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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