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과 일본, 그리고 한국
"우리가 흔히 쓰는 ‘빵’이라는 말은 포르투갈어의 ‘pao’에서 나온 말이다. 오늘날 빵은 우리 한국인들의 삶에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는 물건이 되어버렸다."
김주홍의 포르투갈 이야기 01
포르투갈은 유럽대륙 최서단에 위치한 이베리아반도의 작은 나라이다.
땅 크기는 우리나라보다 약간 작으며 인구는 2014년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5분의 1 정도인 1천 80만 명, 1인당 GDP는 2만 1,700불 정도로 세계 38위이므로 세계 29위인 우리보다 약 7000불정도 적다.
그러나 7000불이 더 많다고 해서 우리가 꼭 그들보다 더 잘 산다고 말할 수 있는지는 생각해볼 문제다.
세계 지도를 펴놓고 보면 포르투갈은 우리나라와 같은 유라시아 대륙에 붙어 있지만, 가장 서쪽에 포르투갈이 있다면 가장 동쪽에는 대한민국이 붙어 있다.
두 나라는 이렇게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아무 관련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포르투갈은 좋게 든 나쁘게 든, 옆에 있는 스페인(에스파냐의 영어 명칭)보다는 우리 역사에 더 큰 영향을 끼친 나라이다.
포르투갈의 문화가 우리의 생활에 알게 모르게 스며들어와 자리 잡은 지 오래되어서 그 영향을 모르고 살아 갈 뿐이다.
일례로 우리가 흔히 쓰는 ‘빵’이라는 말은 포르투갈어의 ‘pao’에서 나온 말이다. 오늘날 빵은 우리 한국인들의 삶에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는 물건이 되어버렸다.
포르투갈인들에 의해 동양에 전파된 가톨릭의 종교의식에서는 성찬식용 빵인 호스티아와 포도주가 필요하다고 한다.
호스티아는 라틴어로 제단에 바치는 희생동물, 미사 때 쓰는 빵의 뜻이다. 1500년대 중반, 포르투갈인들이 일본에 가톨릭 선교를 위해 처음으로 호스티아를 가져갔는데, ‘빵’이란 말은 그 후 언제인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서 조선으로 들어왔다.
결국 아득히 멀리 있는 나라 포르투갈의 말이 수백 년 전 극동에 전해져서 사용되어 왔고, 빵은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여 지금 우리 한국인들의 먹을거리로도 애용되고 있다.
알고 보면 포르투갈 문화의 영향은 그뿐이 아니다.
포르투갈은 대항해시대에 리스본에서 일본 나가사키로 이어지는 항해 루트인 ‘별사탕로드’를 이용하여 기독교와 서양 문물을 전파했다.
이때 별사탕로드를 통해 일본으로 전해진 문물은 조총제조법, 서양의 대포 등의 무기류부터 의복과 음식 등 생필품들도 있었다.
하다못해 한국인들이 셋 이상 모이면 손에 잡는다는 화투의 원형도 포르투갈인들로부터 일본에 전해진 서양의 트럼프인 ‘카르타’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일본에 남긴 가장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토인비의 말 속에 들어있다.
토인비는 일본인들이 서양에서 들어온 기독교라는 종교를 거부하는 대신 서양의 사상 및 문화와 직접 교섭함으로써 세계를 보는 시야를 넓히고 서양의 생활양식을 도입해 ’남만문화‘를 형성하였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남만문화’에서 ‘남만’은 남쪽 오랑캐라는 뜻으로 일본인들이 포르투갈인과 스페인인들을 비하해서 붙인 이름이다.
그들은 일본의 남쪽인 규슈 쪽을 통해 일본에 드나들었는데 일본인들은 처음에 그들이 남쪽에서 온 줄로만 알았던 모양이다.
‘남만’이라는 호칭은 마치 중국이 베트남 등 남쪽에 있는 나라를 그렇게 부르던 것과 같다.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같은 당시 일본의 지도자들은 스페인과 포르투갈 등으로부터 유일신을 믿는다는 기독교라는 종교는 무역을 하기 위해 잠시 수용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금교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들이 가져온 천문학·의학·항해술·지리학 등 실용적인 지식과 음악·회화·의료 등의 문화적인 면의 지식은 계속 받아들이고 자신들의 것으로 소화시켜 나갔다. 그 결과 일본에 ’남만문화‘가 형성되었다.
포르투갈인들의 일본 선교 초기에는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일본어 사전이나 지도가 제작되었고, 그 선교사들이 본국으로 가서 일본에 대한 지식을 유럽에 알렸다.
즉, 임진왜란 이전에 일본은 이미 서양에 알려져 있었다. 그로부터 세월이 흐른 후 유럽에는 일본풍의 도자기나 그림 등을 수집하는 일본열기가 잠시 일기도 했었다.
K-POP 등의 ‘한류’가 21세기에 유럽에 들어간 것과 비슷한 현상이라고 봐야 하지만 한류보다 훨씬 오래 전에 ‘일본류’가 유럽에 갔었다.
일본의 ‘남만문화’는 19세기 중반 일본이 미국에 의해 강제로 개국할 때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이 ’남만문화‘와 그 뒤에 네덜란드인들에 의해 전해진 서양문화를 배워 일본인들이 정립한 ’난학‘은 일본이 동양에서 최초로 서양을 따라잡는 원동력을 제공했다.
포르투갈 친구가 일본의 감사합니다가 자기네 말에서 따온거라 우겨서 무슨 소린가 했는데 이런 역사가 있었네요 .. ㅎㅎ 좋은 정보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