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일동, 윤동주, 후쿠오카형무소
"양일동 선생의 일생은 누가 뭐라고 해도 '파란만장' 그것이었다."
양일동(梁一東, 1912.12.30~1980.04.01,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선생의 일생은 누가 뭐라고 해도 ‘파란만장’ 그것이었다.
일찍이 서울 중동중학교에 재학 중일 때 때마침 광주에서 항일학생운동이 터졌다. 처음에는 광주와 나주를 오고가는 통학기차 속에서 여학생을 희롱한 일본 학생을 혼냈던 사건이 나중에 항일만세운동으로 커졌다는 얘기가 있지만 그것은 본질을 희석한 일본 경찰의 발표에 불과하다.
당시 조선인 학생들은 3.1만세운동 이후 일본에 대한 적개심으로 가득 차있었으며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처지였다. 한·일 간 학생들의 싸움은 항일운동의 빌미가 되어 본격적인 만세운동으로 커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 소식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 유수한 학교들이 모두 만세운동의 선봉에 섰다. 광주와 가까운 전주를 비롯하여 대구 부산 마산 청주 인천 수원 충주 춘천 제주 평양 사리원 원산 함흥 등지의 모든 학교들이 들고 일어났다. 특히 여학생들의 참여율이 유난히 높았다.
서울에서는 작은 도시들의 움직임보다 훨씬 큰 규모로 학생운동이 터졌다. 그 중에서도 유난히 민족운동 정신이 강했던 중동중학교 학생들은 전교생이 교정에 모여 일대 시위를 시작했다.
그 선봉에 양일동 선생이 섰다. 양일동 선생은 학생시절부터 뛰어난 리더십으로 학생들을 이끌었다. 선생께서 정계에 투신한 이후 경력을 살펴보더라도 지도자로서의 판단력과 추진력은 아무도 따를 자가 없었던 것을 보면 학생시절의 정경이 저절로 떠오른다.
양일동 선생은 광주학생운동 관련 시위 주동자로 지목되어 잔학한 일제 경찰에 끌려가 모진 매를 맞고 퇴학 처분을 받았다. 지방에서 서울까지 유학했던 양일동 선생의 면학의 꿈은 여기서 끝났다. 그러나 조국 해방의 큰 꿈을 가진 그는 곧바로 일본으로 건너가 지하조직인 흑색동맹에 가입하게 된다.
여기서 지하신문을 발행하며 일본의 군국주의를 반대하는 저항운동에 앞장선다. 그러다가 경찰에게 체포되어 3년 6월의 징역형을 받고 후쿠오카형무소에서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후쿠오카 형무소는 나중에 민족시인 윤동주가 옥사한 곳이다.
형무소에서 나온 다음 더 이상 일본에서는 활동하기 어려워 몰래 중국 상해로 도망친다. 상해에는 김구선생이 주석으로 있는 임시정부가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분들을 만나게 되었고 거기에서 정화암선생과의 인연을 맺게 된다.
화암(華岩) 선생은 임시정부에서 김구 선생과 중국 장개석 총통을 연결하는 비밀조직에 관여해 큰 역할을 하신 분이다.
양일동 선생은 화암 선생을 평생 아버지처럼 모시면서 존경했다. 선생은 민주사회주의 운동에도 많은 도움을 주는 등 선진사고 방식을 가진 어른이었다.
나중에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첨병으로 자라난 4.19와 6.3세대들이 주도하는 민주청년협의회를 적극 지원하여 계동에 있는 민주사회주의연구회 사무실을 무상으로 빌려줄 정도였다.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마산 시위에서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자 선생은 여야로 구성된 조사단장을 맡아 “김주열이 죽은 것은 경찰이 쏜 최루탄 때문”이라고 명백히 밝혀 4.19혁명을 촉발하는 계기를 조성했다.
김주열 열사의 사인을 둘러싼 공방(攻防)을 한마디로 날린 것이었다. 선생의 쾌도난마와 같은 결단력의 진수를 보여준 것이다. 이승만 독재정권의 칼날이 시퍼렇던 그 당시에 자유당 경찰을 살인자로 규정한다는 것은 선생의 용기 아니면 감히 생각하지도 못할 일이었다.
선생은 5.16 쿠데타가 일어나자 일본에 망명했다. 8대 국회에 복귀한 선생은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반대의 기치를 높이 들고 민주통일당을 창당해 장준하 선생 등과 함께 피어린 투쟁에 나선다.
개헌 청원 서명 운동으로 긴급조치 1호가 발동되기 시작하면서 긴급조치 9호에 이르기까지 7년 동안 통일당원들은 연인원 300여 명이 구속되거나 연행되어 중앙정보부의 모진 고문을 받아야 했다.
10.26 시해 사건이 터지며 긴급조치가 해제되었을 때 국민들은 민주 세상이 되었다고 환호성을 내질렀지만 신군부의 날카로운 발톱은 민주운동세력을 짓밟고 있었다.
게다가 제 세상을 만난 것처럼 각광을 받는 3김 씨는 금방이라도 집권자가 될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평생을 조국광복과 민주화운동에 몸 바쳤던 선생께서는 누구보다도 이러한 세상의 흐름에 걱정을 금치 못했다.
3김 씨의 분열은 신군부의 쿠데타 명분을 도와주는 촉매였다는 사실을 선생께서는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가슴 조이고 마음 아파하던 현실을 개선하기 어려운 입장에 계셨던 선생께서 아직 고희도 안 된 연세에 세상을 하직한 것은 우리 국민 모두를 슬프게 만들었다.
선생의 높은 뜻이 빛을 보지 못하고 아쉽게 묻혀야 하는 한스러움이 우리를 통곡하게 했다. 1980년 4월 1일 선생께서는 차마 눈을 감지 못하고 나라를 걱정하며, 민족을 염려하면서 하늘나라로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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