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귀(倀鬼)와 귀태(鬼胎)
"우리가 서둘러야 할 중요한 일은 호식총에 넣을 또 다른 귀태를 부지런히 찾는 일이다"
창귀(倀鬼)와 귀태(鬼胎)
사람이 호랑이에게 잡아먹히면 창귀(倀鬼)가 된다고 한다. 창탈호권(倀奪虎權)을 다룬 장유승의 글을 읽으며 2013년 7월 홍익표 의원이 말한 귀태(鬼胎)가 떠올랐다.
글쓴이는 이 글에서 이규경(李圭景)의 주장에 맞춰 창귀는 호가호위(狐假虎威)와 달라 창탈호권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창귀의 지시에 따라 해악을 끼친 호랑이는 피해자가 아니라 공범이라며, 이는 호가호위와 창탈호권의 근본적인 차이라고 밝혔다.
결국 창귀와 창탈호권은 ‘두려워하고 걱정함’, ‘나쁜 마음’이라는 귀태의 사전적 의미는 물론 ‘잘못된 탄생’이라는 홍 의원의 지적은 적확(的確)하게 어울린다. 이 맥락에서 창귀는 곧 귀태다. 다행히 창귀가 빠져나오지 못하게 원천봉쇄하는 무덤인 호식총(虎食塚)이 생겼다.
우리가 이제 서둘러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호식총에 넣을 또 다른 여러 귀태를 부지런히 찾는 일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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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전번역원 고전산문 457
2016년 12월 12일(월)
장유승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선임연구원
번역문
우리나라 시골에는 호랑이의 우환이 많아 밤에는 감히 나오지 못하고 산나물도 캐지 못한다. 세속에서는 호랑이가 사람과 가축을 잡아먹어 백성이 살 수 없다고 한다. 백성은 돈을 모아 희생과 술을 마련하여 마을의 진산(鎭山)에서 산군(山君)을 제사 지낸다. 그러면 무당이 어지러이 북치고 춤추며 굿을 하는데, 이를 도당제(都堂祭)라고 한다.
제수가 정결하지 않거나 재계를 깨끗이 하지 않으면 그날 밤 반드시 호랑이가 와서 울부짖으며 개와 돼지를 물어간다고 하는데, 이는 시골의 풍속으로서 고려할 가치도 없는 것이다. 우연히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을 보았는데, 호랑이의 사당을 세우고 신으로 삼는다고 하였으니, 그 풍속은 유래가 오래된 것이다.
그러나 살아 있는 호랑이가 제사를 받을 수 있겠는가? 호랑이가 영물이기는 하다. 덮칠 줄도 알고 영역을 정해놓고 먹이를 구한다. 골짜기에서 포효하면 바람이 일어나고, 달무리가 지면 나타난다. 비록 그렇지만 살아있는 호랑이가 어떻게 제사를 받겠는가?
내가 여러 책을 보니, 호랑이에게는 창귀(倀鬼)라는 것이 있는데, 사람이 호랑이에게 잡아먹히면 창귀가 된다. 항상 호랑이와 함께 다니며 앞길을 인도하므로 호랑이가 그의 명령을 따른다고 한다. 호랑이의 신은 바로 창귀이며, 호랑이의 사당을 세워 신으로 삼는 것도 다름 아닌 창귀다. 제사를 받아먹고 화복을 주는 것도 창귀다. 사람들은 창귀가 시키는 줄도 모르고 호랑이에게 신령이 있어 화를 주기도 하고 복을 주기도 한다고 여긴다.
그렇다면 이것은 여우가 호랑이의 위세를 빌리는 것(狐假虎威)과는 다르다. 창귀가 호랑이의 권세를 빼앗은 것이다[倀奪虎權]. 안방 귀신에게 아첨하는 것보다 부엌 귀신에게 아첨하는 것이 낫다더니, 호랑이에게 제사 지내는 것보다 창귀에게 제사 지내는 것이 나은 것인가?
원문
我東鄕谷, 多虎豹之患, 夜不敢出, 藜藿不採. 俗稱囕食人畜, 民不聊生. 小氓醵錢備牲醴, 祭山君於本里鎭山, 而巫覡紛若, 鼓之舞之以妥之, 名曰都堂祭. 若祭品不潔, 致齋未淸, 則當夜虎必來吼, 齧狗彘而去, 此乃村野俚俗無足采者. 偶閱後漢書濊傳, 祠虎以爲神, 其俗之所由來者, 厥有久矣. 然生虎爲神, 而能受饗者乎? 虎果靈物, 能知衝破, 畫地卜食, 嘯谷風生, 相交月暈. 雖然, 生虎豈能受享哉?
予覽諸書, 則虎有倀鬼, 卽人爲虎飤而爲倀, 常隨虎導行, 故虎聽其行止云. 虎之神, 乃倀鬼也, 其祠虎而爲神者, 卽倀也, 其受祭而施威福者, 亦倀也. 人不知倀之所使, 而認作虎之有神, 而爲禍爲福也. 然則此異於狐假虎威, 卽倀奪虎權者也. 與其媚奧, 不若媚竈者, 祠虎反不若祠倀者歟?
-이규경(李圭景, 1788~1856),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호랑이에게 제사 지내는 풍속의 유래(祠虎辨證說)’
해설
요즘 시골의 제일 큰 골칫거리는 멧돼지이다. 멧돼지가 농작물에 피해를 주는 일이 빈번하기 때문이다. 먹을 것을 찾아 산에서 내려온 멧돼지가 도시에 나타났다는 소식도 더 이상 신기하지 않다. 멧돼지의 공격을 받고 죽은 사람도 있다고 하니, 보통 걱정거리가 아니다.
요즘 사람들이 멧돼지를 걱정하듯 옛날 사람들은 호랑이를 걱정했다. 물론 멧돼지보다는 호랑이가 훨씬 위협적이다. 멧돼지를 만난다고 반드시 죽는 것은 아니지만, 호랑이를 만나고서 살아남기는 어렵다. 한 마리도 무서운데 떼 지어 다니며 마을을 습격하기도 하였다. 호랑이 때문에 길이 끊어지거나 마을이 없어지는 일도 다반사였다. 호랑이는 한양 한복판에도 나타났고, 심지어 대궐까지 드나들었다.
사람들은 호랑이를 잡으려고 함정을 파거나 덫을 놓았다. 때로는 나라에서 포수들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사냥에 나서기도 하였다. 하지만 별 효과는 없었던 모양이다. 이러한 상황은 근대까지 이어졌다. “조선 사람은 1년의 절반을 호랑이를 쫓는 데 보내고 나머지 절반은 호랑이에게 죽은 사람의 문상을 가는 데 보낸다.”라는 비숍(I. B. Bishop, 1831~1904)의 증언에서, 호환(虎患)이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결국 힘없는 백성이 기댈 곳은 미신뿐이었다. 그들은 호랑이를 산의 임금, 산군(山君)이라고 부르며 사당을 세워 제사 지냈다. 이렇게나마 호랑이를 달래서 호환을 면하려는 것이었다. 호랑이를 제사 지내는 산군사(山君祠) 또는 산군당(山君堂)은 전국 각지에 있었다. 사찰마다 산신당(山神堂) 또는 산신각(山神閣)이 있는 것도 유난히 호환이 잦았던 우리나라의 특징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제사라는 것은 귀신에게 지내는 것이다. 호랑이가 아무리 신령하다지만, 멀쩡히 살아있는 호랑이가 어떻게 제사를 받아먹겠는가? 사람들은 호랑이에게 제사를 지낸다고 하지만, 그 제사를 받아먹는 것은 창귀(倀鬼)이다.
전설에 따르면 사람이 호랑이에게 물려 죽으면 귀신이 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 귀신은 호랑이에게 복수하기는커녕 호랑이의 앞잡이가 되어 다른 사람을 잡아먹게 한다. 이 귀신이 바로 창귀이다. 창귀는 흔히 악인의 앞잡이를 비유한다.
호환을 막으려면 창귀부터 막아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갖가지 방법으로 창귀를 막으려 하였다.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사람이 있으면 화장하여 땅에 묻은 뒤 돌무더기를 쌓는다. 그것도 모자라 돌무더기 위에 무거운 시루를 엎어놓는다. 창귀가 빠져나오지 못하게 원천봉쇄하는 것이다. 이 무덤을 호식총(虎食塚)이라고 한다.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창귀가 호랑이를 이용해 해악을 끼치는 행위는 얼핏 보기에 호가호위(狐假虎威)를 연상케 한다. 하지만 이규경은 창귀의 행위가 호가호위와는 분명히 다르다고 하였다. 이규경은 이를 ‘창탈호권(倀奪虎權)’으로 규정한다. 창귀가 호랑이의 권세를 빼앗아 제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호가호위라면 호랑이에게는 죄가 없다. 여우의 농간을 간파하지 못한 호랑이를 어리석다고 비난할 수는 있겠지만, 호랑이 역시 피해자이다. 그렇지만 창탈호권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창귀의 지시에 따라 해악을 끼친 호랑이는 피해자가 아니라 공범이다. 이것이 호가호위와 창탈호권의 차이다. 지금 나라가 떠들썩한 것도 호가호위가 아니라 창탈호권 때문이다.
장유승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선임연구원
주요 저·역서
『현고기』, 수원화성박물관, 2016
『일일공부』, 민음사, 2014
『동아시아의 문헌교류-16~18세기 한중일 서적의 전파와 수용』, 소명출판, 2014(공저)
『쓰레기 고서들의 반란』, 글항아리, 2013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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