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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는 의병장 아내였다”

논개를 보는 새로운 시선과 역사의 진실...“의로운 죽음 공인 147년, 의병장 아내 확인 400년”

우리 역사의 왜곡이 곳곳에서 이뤄졌다는 것은 익숙한 이야기다. 참 슬픈 일이다. 얼마 전 페이스북에서 허정균 선생의 페이스북 글을 읽었다. 허 선생의 글을 읽는 순간 놀라움과 안타까운 마음이 한꺼번에 머리와 가슴을 파고들었다. 논개에 대한 ‘인식’과 ‘사실’을 새롭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사진=위키백과, 윤여환
논개는 관비(官婢)가 아니었으며 의병장 최경회의 부인이었다는 점이 뼈대다. 역사에 대해, 특히 역사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현실이 사람에 대해 잘못 알고 있거나 심각한 왜곡으로 가득 찬 역사라는 점, 그리고 그 같은 역사를 구경만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개탄을 참을 수 없었다. 사진은 1907년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무장한 의병 모습. 위키백과.

논개는 관비(官婢)가 아니었으며 의병장 최경회의 부인이었다는 점이 뼈대다. 역사에 대해, 특히 역사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현실이 사람에 대해 잘못 알고 있거나 심각한 왜곡으로 가득 찬 역사라는 점, 그리고 그 같은 역사를 구경만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개탄을 참을 수 없었다. 사진은 1907년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무장한 의병 모습. 위키백과.

논개를 보는 새로운 시선과 역사의 진실

“논개는 의병장 최경회의 아내”

안정필 시인 wjddk1124@hanmail.net

사람과사회 2017년 봄

우리 역사의 왜곡이 곳곳에서 이뤄졌다는 것은 익숙한 이야기다. 참 슬픈 일이다. 얼마 전 페이스북에서 허정균 선생의 페이스북 글을 읽었다. 허 선생의 글을 읽는 순간 놀라움과 안타까운 마음이 한꺼번에 머리와 가슴을 파고들었다. 논개에 대한 ‘인식’과 ‘사실’을 새롭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허 선생은 김규원 한겨레 기자가 20여 년 전에 『한겨레21』(제237호, 1998.12.17)에 쓴 논개 관련 글(일본을 떠도는 논개의 혼령)을 언급하며 우리가 논개에 대해 많은 것을 잘못 알고 있다고 지적했다. 여기서 언급한 논개는 ‘논개(論介)’, 즉 ‘주논개(朱論介)’를 말한다.

허 선생이 인용한 김 기자의 글은 논개는 관비(官婢)가 아니었으며 의병장 최경회의 부인이었다는 점이 뼈대다. 역사에 대해, 특히 역사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현실이 사람에 대해 잘못 알고 있거나 심각한 왜곡으로 가득 찬 역사라는 점, 그리고 그 같은 역사를 구경만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개탄을 참을 수 없었다.

김 기자는 이 글에서 논개에 대한 새로운 사실과 진실을 정리하면서 역사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정부의 역할을 비판적으로 접근했다. 그는 ▲논개는 기생이 아니라 의병장의 아내였다는 점 ▲역사적 화해 명분에 자존심 팽개쳤다는 점 ▲역사의 능멸, 정부 차원서 바로잡아야 한다는 점 등 세 가지를 강조했다.

“논개는 기생 아니라 의병장 아내였다”

김규원 기자가 『한겨레21』에 쓴 글을 찾아 당장 읽었다. 김 기자는 글의 첫머리를 희재(希齋) 안종창(安鍾彰)이 쓴 ‘의기암에서’라는 시(詩)로 시작했다.

한 여인이 의롭게 죽었다
곰 과 물고기의 덕이라 하겠네
밝게 빛나는 청정한 자태여!
늠름하고 결백한 지조여!

왜잔 한 놈 죽였다고 말하지 마라
모든 왜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네
한 작은 여인이라 말하지 마라
만 장부의 팔뚝처럼 떨쳤다네

흐르는 강물도 바위를 갈지 못하니
천년의 의암은 언제나 남아 있네

김 기자가 밝힌 바와 같이 ‘의기암(義巖)에서’라는 시에 등장하는 ‘한 작은 여인’과 ‘의암’은 논개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제 김 기자가 ‘일본을 떠도는 논개의 혼령’에서 정리한 바를 바탕으로 논개 이야기를 정리해보자.

“논개에게 죽은 게 부끄러워 영혼 위로?”

1970년 은퇴한 일본인 건축설계사 우에쓰카 하쿠유(上塚博甬)후쿠오카현(福岡県)에 있는 자신 소유의 밭을 갈다가 한 묘비를 발견한다. 그 비석은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선봉장으로 승승장구한 전설적인 사무라이였던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였다. 그는 ‘기다 마고베(貴田孫兵衛)’라고 부르기도 한다.

진주성 싸움의 승리를 기념하는 잔치에서 술을 마시다 조선의 여인 ‘논개’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 부끄럽고 억울해 영혼을 달래준다는 이유를 만들어 조선 여인의 영혼을 함께 모시는 일을 추진하기 위해 1973년 처음 한국에 와 진주시와 관계자들을 설득했다.

한일 간의 역사적 화해와 교류, 영혼들의 원풀이라는 의미로 논개와 게야무라의 넋을 건져 일본으로 옮기는 의식을 치렀다. 또 진주 촉성루 옆 ‘의기사(義妓祠)’에 있는 논개의 영정과 똑같은 것을 만들어 그의 아내와 처제 옆에 나란히 놓았다. 이는 게야무라의 첩으로 오해할 수 있을 만한 정황이다. 더구나 1976년 게야무라와 논개를 모신 사당 보수 공사 겸 합동 진혼식(鎭魂式) 때는 여러 진주 유지가 부부 동반으로 참석했다. 또 진주시장은 이 자리에서 우에쓰카에게 감사장을 주었다고 한다.

논개 관련 기록은 기존에는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譚)』에 따라 논개를 진주 관기(官妓)라는 기록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최경회 장군의 후손인 해주최씨전남화순군종회(海州崔氏全南和順郡宗會)는 민순지(閔順之)의 『임진록(壬辰錄)』 등의 기록을 들어 논개가 1574년 전북 장수에서 태어나 어릴 때의 인연으로 나중에 최경회(崔慶會)의 부실이 된 주논개 부인이라고 확인했다.

“논개·최경회는 물론 민족의 역사 모욕하고 능멸하는 일”

이와 관련 김 기자는 “1593년 경상도병마절도사였던 최경회 장군은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패배한 뒤 자결했다”며 “최 장군과 함께 이 싸움에 참가했던 주논개 부인은 슬픔과 의분을 참지 못하고 왜적들의 승전 잔치에 ‘기생으로 가장해’ 숨어든 뒤 술에 취한 적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안고 진주 남강으로 뛰어들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따라서 남편과 조국의 원수를 처단한 그의 영정과 무덤을 적장과 함께 모신 일은 어떤 이유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고 “논개 부인과 최경회 장군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역사 자체를 모욕하고 능멸하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따라 종회는 지난 4월부터 진주시와 중앙 정부 등에 이런 진상을 철저히 조사해 논개의 영정과 진주에서 불려간 논개 부인 영혼, 지방의 돌로 만든 논개 비석 등을 정부 차원에서 찾아올 것을 요구해왔다. 그러나 진주시와 정부의 회신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진주시는 이 일에 나서기가 어렵다는 입장이었다. 정부(문화관광부)도 ‘조처하겠다’는 답만 했고, 외무부는 보수원에서 열린 논개·게야무라 합동위령제에 후쿠오카 한국 총영사가 참석한 것에 대해 아무런 해명을 하지 않았다.

장본인인 우에쓰카의 답변도 같은 맥락이었다. 그는 “사전에 논개가 최경회 장군의 부인임을 몰랐다”며 “해주 최 씨 문중에서 계속 문제를 삼는다면 영정을 반환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영정 외에 영혼과 비석은 돌려줄 수 없으며 위령제는 계속하겠다는 입장이다. 사진은 돌려줄 수 있어도 영혼은 줄 수 없다는 것인데, 이는 사실상 잘못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논개는 보수지배계급 기녀 인식이 만든 희생양”

논개는 신안 주 씨 후손인 조달문과 어머니 밀양 박 씨의 외동딸로 몰락한 반가(班家)의 자식이다. 논개의 성장 과정과 신분에 대해 정확히 아는 사람은 많지 않고 진주 사람들도 그녀의 출생 신분을 알지 못하고 죽었으니 단지 기녀(妓女)로만 알고 있다.

논개에 관한 최초의 문헌에도 기생이라고 적고 있고 당대의 유몽인이나 후대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조차도 “일개 이름 없는 창기도 절개를 지켰는데 사대부들은 무엇을 했느냐”는 논리로 당대 위정자들을 비판하는 사례 정도로 논개 이야기를 인용했다고 한다.

도담 주행연 선생은 그의 블로그 ‘주행연의 세상사는 이야기’에서 논개와 관련해 안타까운 마음을 담고 있다. 도담 선생은 “논개는 의로운 바위라는 뜻의 의암(義巖)이라는 호가 붙여졌고, 그녀의 의로운 행동을 입으로 전해져 진주 시민들은 눈물로 추모했지만, 논개는 언제나 기녀(妓女) 또는 의녀(義女) 또는 최경회 장군의 첩(妾)으로만 평가절하했다”며 “그녀의 신분이 기녀가 아니고 최경회 장군이 사별하고 두 번째로 얻은 부인이라는 그 진실을 알고 있는 자는 그리 많지 않다”고 설명했다.

“의로운 죽음 공인에 147년, 의병장 아내 확인에 400년”

글을 마무리하면서 김 기자가 글의 끝에서 정동주 작가를 인용해 쓴 글을 똑같이 넣고 싶었다. 무엇보다 “의로운 죽음 공인에 147년, 의병장 아내 확인에 400년”이라고 한탄한 정동주 작가의 외침이 지금도 귓가에 생생하게 들어오기 때문이다.

“서사시 ‘논개’와 <논개> 평전을 발표한 문학가 정동주 씨는 ‘논개의 의로운 죽음이 조정으로부터 공인을 받는 데 147년이 걸렸고, 그가 기생이 아니라 의병장의 아내였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 400여 년이 걸렸다. 적장 게야무라와 함께 있는 그의 영정과 영혼이 한국 땅으로 되돌아와 그가 편안히 잠드는 데는 또 얼마나 긴 세월이 필요할지 모르겠다’고 한탄했다.”

논개가 자신과 삶을 제대로 알릴 수 없었다는 상황, 그리고 그가 유교 사상 아래에서 남편의 복수를 위해 기녀라는 신분으로 위장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주목할 점이다. 논개는 보수적인 지배계급이 갖고 있는 기녀에 대한 편견이 구전(口傳)으로 전해오면서 기녀에서 의녀의 신분으로 왜곡돼 지금까지 이어진 셈이다.

이와 같은 편견과 왜곡은 결국 논개가 ‘보수지배계급 기녀 인식이 만든 희생양’이라는 결과를 낳았다고 볼 수도 있다. 이제는 역사의 진실을 제대로 알고 진주시에서도 논개에 관한 잘못된 정보를 바로잡아 제대로 알려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과 진실을 알고 전하는 것, 그래서 제대로 평가를 받을 수 있고 정확한 자리를 찾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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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안정필 (2 Articles)
이화여대 식품영양학과를 졸업하고 삼성항공에서 영양사로 근무했다. 법무사, 세무회계사 시험에 합격했으며, 현재 세무법인에서 근무하고 있다. 2015년 사단법인 문학사랑 시(詩) 부문으로 등단해 문학 관련 협회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시와 일상을 담아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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