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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생각보다 좋은 행동을 사랑한다”

"네팔은 다양성을 인정한다. 그래서 힌두교 외에 소수 종교인 불교가 있고 이슬람교와 기독교도 공존한다. 네팔 수도 카트만두에는 2500여 개의 사원과 신전이 있다. 1년에 50여 개의 힌두교 관련 축제도 개최하는 등 종교성이 상당한 나라다. 부족이든 종교든 서로 허용하고 수용하는 나라기 때문에 이로 인한 큰 갈등은 없는 편이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고 미루는 것은 죄악입니다.” “좋은 생각이나 좋은 마음으로 사는 것보다 좋은 행동을 사랑합니다.” 네팔한국문화센터 후견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김형효(52) 시인이 좋아하는 말이다. 무엇인가를 최대한 서둘러 하려는 실천, 그리고 좋은 마음보다 좋은 행동을 사랑한다는 말이 정겹다.

2016년 12월 28일, ‘샹그릴라(Shangri-La)’에서 그를 만났다. 샹그릴라는 수원 아주대 옆에 있는 네팔 음식 전문 식당이다. 그런데 샹그릴라는 흥미로운 이름을 갖고 있다. 샹그릴라는 제임스 힐튼이 쓴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 1933)에서 ‘이상향’을 이르는 표현에서 나온 말이다.

인터뷰

사람과사회 2017년 봄

네팔을 사랑하는 남자 김형효 시인을 만나다

“좋은 생각과 마음보다 좋은 행동을 사랑한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고 미루는 것은 죄악입니다.”

“좋은 생각이나 좋은 마음으로 사는 것보다 좋은 행동을 사랑합니다.”

네팔한국문화센터 후견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김형효(52) 시인이 좋아하는 말이다. 무엇인가를 최대한 서둘러 하려는 실천, 그리고 좋은 마음보다 좋은 행동을 사랑한다는 말이 정겹다. 김 시인은 네팔(Nepal)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네팔을 사랑한 까닭에 사랑하는 아내도 네팔 사람이자 기자 출신인 먼주 구릉(Manju Gurung, 45, 1972) 씨다.

김 시인은 2012년 네팔한국문화센터 문을 여는 등 네팔 관련 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다. 네팔에 문화센터를 열면서 “나는 오늘 네팔에 자랑스럽게 한민족문화센터를 열지는 못했지만, 한국문화센터를 열었다”며 “다양한 종족이 하나의 나라를 이루고 사는 네팔에서 한국문화센터가 민족 문화의 형태로 그들에게 다가설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다”고 밝혔다.

김 시인은 우리 문화에 대한 인식과 알림은 통일운동의 연장선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네팔에서 우리의 전통문화와 현재 모습을 올바르게 알리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강제로 주입하는 게 아니라 부담 없이 서로 어깨를 걸고 함께 어울리면서 우리의 소박한 전통 정서도 함께 나누는 방식이다.

이를 위해 문화센터는 한국어 교육, 한국 음식 체험, 한복 입어보기, 우리의 민속놀이와 전통문화 알리기, 드라마, 영화 상연 등을 계획하고 있다. 물론 네팔인과 한국인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교류하는 활동도 포함하고 있다. 그 중에는 문학 번역 작업과 화가들의 교류 활동도 포함돼 있다.

김 시인은 어떻게 네팔을 사랑하는 사람이 됐을까. 2016년 12월 28일, ‘샹그릴라(Shangri-La)’에서 그를 만났다. 샹그릴라는 수원 아주대 옆에 있는 네팔 음식 전문 식당이다. 그런데 샹그릴라는 흥미로운 이름을 갖고 있다. 샹그릴라는 제임스 힐튼이 쓴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 1933)에서 ‘이상향’을 이르는 표현에서 나온 말이다.

위키백과를 찾아보니 샹그릴라는 히말라야의 유토피아다. 쿤룬(Kunlun) 산맥 서쪽 끝자락에 있는 숨어 있는 곳이다. 신비롭고 평화로운 계곡,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고, 외부로부터 단절돼 있는 곳이다. 소설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 말은 지상의 어딘가에 존재하는 ‘천국’을 가리키는 보통명사가 됐다.

샹그릴라 이야기는 티베트 불교에 전승되는 신비의 도시 샹바라(Shambhala, 香巴拉)에 기초하고 있다. 중국 정부도 관심이 많았다. 중국은 1997년 ‘샹그릴라’를 찾았다고 공식 발표했다. 윈난 서북부(옛 티베트 땅이었던 중덴) 지역인데, 2001년 명칭을 ‘샹그릴라(香格里拉, Xiānggélǐlā)’로 바꾸고 국제적인 관광도시로 개발하고 있다.

김 시인을 만난 자리에는 아내인 먼주 구릉 씨도 함께 했다.

네팔은 그 말 자체가 ‘신이 보살핀다’는 뜻을 갖고 있다. 힌두교 성자를 칭하는 ‘리시무니(Risimuni)’의 한 사람인 ‘네(Ne)’라는 사람의 이름과 ‘보살핀다’는 뜻의 ‘빨뽀선(Palposun)’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팔(Pal)’이 합쳐서 생겼다. 네팔을 생각할 때 가장 많이 떠올리는 게 히말라야(Himalayas)일 것이다. 히말라야의 뜻은 산스크리트어로 ‘눈이 사는 곳’이다. ‘눈’의 뜻인 ‘히마(hima)’와 ‘사는 곳, 거처’의 뜻인 ‘alaya’를 묶어 ‘눈이 사는 곳’이라는 뜻의 ‘히말라야(himalaya)라 부른다.

▲네팔 이야기를 듣고 싶어 인터뷰를 요청했다. 네팔은 거리가 먼 나라다. 개인적으로는 2011년 1월, 히말라야로 걷기 여행(Trekking)을 다녀와서 친근한 편이다. 네팔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네팔에 대해 간단한 이야기를 들으며 인터뷰를 시작하고 싶다. 샹그릴라에 들어와 앉아서 기다리는 동안 네팔 전통 차(茶)를 마셨다. 몇 년 전 네팔에서 마셨던 향과 맛을 느낄 수 있었다.

네팔은 차를 많이 마신다. 마살라 차이(Masala Chai) 또는 짜이(Chai)라고 부르는 차다. 인도에서 유래했는데, 홍차와 우유, 인도식 향신료를 함께 넣고 끓인다. 차는 뿌리가 같기 때문에 동서양을 구별하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한다.

“히말라야·에베레스트·나푸르나 뜻은 흥미롭다”

▲우선 네팔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 달라.

아는 것, 생각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게 좋겠다. 네팔은 한국 면적의 1.5배 정도인데, 처음 찾았을 때 강한 인상을 심어준 것은 히말라야도 네팔 사람도 아니었다. 비행기 창문 밖으로 보이는 네팔의 국토였다. 그 아름다움은 거대한 조형물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수많은 네팔 사람들이 공동 작업을 통해 얻어낸 거대한 조각품과 같은 것이었다. 네팔 사람의 희로애락이 신표(信標)처럼 웅장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네팔은 그 말 자체가 ‘신이 보살핀다’는 뜻을 갖고 있다. 힌두교 성자를 칭하는 ‘리시무니(Risimuni)’의 한 사람인 ‘네(Ne)’라는 사람의 이름과 ‘보살핀다’는 뜻의 ‘빨뽀선(Palposun)’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팔(Pal)’이 합쳐서 생겼다.

▲인디언이나 아프리카 부족, 몽고, 티베트 등에서는 이름이나 지명에 여러 뜻을 담아서 부른다. 네팔도 이와 비슷한 형태로 이름을 짓는다고 들었는데, 소개할 이름이 있나?

네팔을 생각할 때 가장 많이 떠올리는 게 히말라야(Himalayas)일 것이다. 히말라야의 뜻은 산스크리트어로 ‘눈이 사는 곳’이다. ‘눈’의 뜻인 ‘히마(hima)’와 ‘사는 곳, 거처’의 뜻인 ‘alaya’를 묶어 ‘눈이 사는 곳’이라는 뜻의 ‘히말라야(himalaya)라 부른다.

네팔에서는 산은 물론 사람도 신성과 관련이 있는 이름이 많다. 또 눈이 없으면 산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높이가 5000m 가량 되더라도 눈이 없으면 산(Mountain)이 아니라 그냥 언덕(Hill)이라고 생각한다. 보통 산들은 뻐하드(Pahad, 산간지역), 떠라이(Tarai, 평야) 등으로 구분한다.

반면 히말(Himal)은 고산지대, 즉 눈이 있는 곳을 이르는 말이다. 그래서 히말(Himal)은 ‘눈의 거처’ 혹은 ‘신의 거처’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래서 눈을 덮어쓴 만년설의 산줄기들을 ‘히말라야’라고 부른다.

▲에베레스트, 그리고 안나푸르나도 흥미로운 뜻이 있을 것 같다.

네팔 사가르마타국립공원(Sagarmatha National Park)에 있는 에베레스트(Everest)는 지구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네팔에서 에베레스트는 오래 전부터 ‘사가르마타(Sagarmāthā)’라고 불렀다. ‘바다’라는 뜻의 ‘사가르’와 어머니, 머리, 최고란 뜻의 ‘마타’가 합쳐진 말이다. 산스크리트어로 ‘하늘의 바다’라는 뜻이다. 티베트에서는 ‘초모랑마(Chomolungma)’라고 하는데, ‘세상의 어머니, 산의 여신’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안나푸르나(Annapurna)’는 ‘버펄로 머리 위에 많은 눈이 쌓인 모습을 하고 있는 산’이라는 뜻 외에도 ‘풍요의 여신’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눈은 네팔에서 풍요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또한 가네쉬(Ganesh)는 ‘코끼리 모양을 한 산’, 마나까마나(Manakamana) 사원(Temple)은 ‘마음으로부터의 기원’이라는 의미다.

▲네팔은 부족(部族, tribe)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네팔은 네와르족(Newari), 아리안족(Aryans) 등의 왕족이 있는 나라다. 이 중 아리안족(Aryans)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소수 인종은 구룽족(Gurung), 머가르족(Magars), 셀파족(Sherpa), 타루족(Tharu), 키라티족(Kiratis) 등이 있다.

카트만두 지역은 대략 2000년 전부터 소수민족인 네와르족이 살고 있었다. 네와르족은 카트만두 계곡을 중심으로 왕국을 이뤘고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다. 카트만두 계곡은 네팔 중앙에 위치한 곳으로 힌두교, 불교의 성지를 비롯해 적어도 130개 이상의 주요 문화재가 있는 고대 아시아의 문명지(文明地)로 유명하다. 이 지역에는 카트만두(Kathmandu), 파탄(Patan), 박타푸르(Bhaktapur) 등의 도시가 있다. 파탄은 파탄 왕국을 말하는데, 예전에 ‘랄릿푸르(Lalitpur)’라고 불렀던 곳이다.

“네팔은 부족·종교 허용하고 수용하는 다양성 인정하는 나라”

▲부족이 많지만 종교도 여러 가지를 인정하고 있는데, 문제는 없나?

네팔은 힌두교를 국교로 인정하고 있어 인도와 함께 대표적인 힌두교 국가다. 아울러 네팔은 다신교(多神敎) 국가다. 부모, 아들, 딸의 종교가 모두 다른 경우도 있다. 현재 대부분의 국민, 대략 80% 이상이 힌두교를 믿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네팔은 다양성을 인정한다. 그래서 힌두교 외에 소수 종교인 불교가 있고 이슬람교와 기독교도 공존한다. 네팔 수도 카트만두에는 2500여 개의 사원과 신전이 있다. 1년에 50여 개의 힌두교 관련 축제도 개최하는 등 종교성이 상당한 나라다. 부족이든 종교든 서로 허용하고 수용하는 나라기 때문에 이로 인한 큰 갈등은 없는 편이다.

▲네팔과 어떻게 인연을 맺었나?

새정치국민회의 대변인실에 7개월쯤 재직하고 있던 시절, 1998년 즈음인데, 외부에서 보는 것과 내부에서 보는 것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그만 두고 나왔다. 그런데 독일이 통일 이후 동독 사람들 입에서 ‘이럴 바에야 왜 통일을 했느냐’는 뉴스를 접했다. 이 말을 듣고 나서 문화적 통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계기로 주변 지인의 도움을 받아 도서출판 문화발전소를 설립해 『시와 혁명』이라는 격월간 잡지를 만들었다. 전 세계에서 한국어를 쓰는 사람들이, 우리 민족이 책으로 통일할 수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창간 후 일본, 중국, 캐나다 등에 있는 교포들이 관심을 보여줬다. 하지만 1년이 지날 즈음 교통사고 때문에 발간을 하지 못했다.

이후 뚜렷한 직업을 갖지 못한 상태였다. 당시 네팔인이던 물리치료사와 사무실을 같이 사용했다. 그러는 도중 물리치료사 소개로 22살의 네팔 이주 노동자를 만났다. 그는 네팔 사람들이 한국말을 배울 수 있는 책을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했다.

제안을 듣고 한국어와 네팔어, 영어를 함께 배울 수 있는 교재용 원고를 만들었지만, 출간이 쉽지 않았다. 옛날 매킨토시 시스템은 네팔어를 지원할 수 있었으나 최신 시스템은 되지 않았다. 비용도 옛날 시스템이 더 많이 들어가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네팔에 가서 출판한 후 국내로 들여오는 방법을 사용했다. 국내에서는 수백만 원이 필요했지만 네팔에서는 이보다 훨씬 저렴했기 때문이다.

▲물리치료사와 네팔 청년을 만나 네팔과 인연을 맺은 셈인데, 이후에는 어떻게 됐나?

많은 어려움에 직면했다. 어린 시절, 그러니까 중3이던 16세부터 객지 생활을 했다. 하지만 생활은 쉽지 않았다. 그리고 공부를 더 많이 하고 세상을 알수록 답답하기만 했다.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서 출판사와 서울에서 지내던 집을 정리했다. 보증금을 갖고 충남 금산으로 내려가서 ‘자연인’으로 살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2003년 말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네팔 청년이 네팔에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2004년 3월 처음으로 네팔에 갔다. 경제적 여건 때문에 가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네팔 청년이 (네팔에 가는 데 필요한 경비인) 100만원도 없냐는 말을 듣고 돈이 없어 갈 수 없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네팔에 가겠다는 말을 한 후부터 돈을 벌기 시작했다. 주유소에서 15일 동안 일을 했다. 또 양봉하는 곳과 농약 치는 일도 했다. 우여곡절을 겪은 후 네팔을 방문한 게 인연이자 계기가 돼 네팔을 좋아하게 됐다.

“남편은 많은 도움을 주는 사람”

▲아내인 먼주 구릉 씨는 어떻게 만났는지 궁금하다.

네팔을 2004년에 간 후 2006년 다시 네팔을 가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세종문화회관에서 한국 사람이 네팔 그림 2000여 점을 전시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쉽지 않은 전시였던 까닭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네팔은 우리보다 더 큰 관심을 가졌다.

주목을 받는 전시인 만큼 네팔 현지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는데, 당시 문화부 기자로 취재를 하러 온 아내를 만났다. 인터뷰를 한 후 여러 신문에서 기사를 다뤘다. 핵심을 정확히 짚어 기사를 잘 썼다는 생각에 아는 지인에게 연락을 해보라고 해서 기자회견 다음 날 아내를 만날 수 있었다. 당시 영자지인 ‘네팔뉴스’ 문화부 기자였던 아내를 처음 만났다.

이후 네팔을 네 차례 가량 오가면서 만남을 이어갔다. 2009년 한국국제협력단(KOICA, Korea International Cooperation Agency) 봉사단원이 돼 우크라이나로 봉사 활동을 떠났다. 1년 즈음 지나면서 결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결혼까지 이어졌다.

▲결혼을 언제 하셨나?

네팔과 한국에서 각각 결혼식을 올렸다. 네팔은 2011년 12월 15일에, 한국에서는 2012년 9월 15일이다. 네팔에서는 한국 옷을 입고, 한국에서는 네팔 옷을 입고 결혼식을 했다. 그리고 2014년 9월에는 KBS에서 결혼식을 또 했다. KBS 결혼식은 사연이 채택돼 다문화가족을 위한 행사 차원에서 진행한 결혼식이었다. 결혼식을 세 번 했는데, 앞으로 한 번 더 할 생각이다. 아내는 현재 직장 생활은 하지 않고 있다. 아이를 낳을 때까지 쉬라고 부탁했다.

▲아내인 구릉 씨에게 묻고 싶다. 남편은 어떤 사람이고 한국 생활은 어떤가?

남편은 많은 도움을 주는 사람이다. 잘 도와준다. 집안일을 많이 도와주는 사람이다. 현재 다문화센터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 한국 음식도 조금 배웠는데, 콩나물무침과 김치찌개를 가끔 하는 편이다. 한국은 좋은 곳이다. 어디든지 자유롭고 편리하게 갈 수 있다는 게 참 좋다. 가정에서도 남편이 편하게 해줘서 불편하지 않고 여러 모로 좋다. 조만간 네팔몽골리안기자협회 한국지회를 맡아 일을 할 예정이다. 최근에는 네팔 최대 일간지인 칸티푸르(Kantipur Daily) 한국특파원으로 임명돼 일을 시작했다.

2015년 4월 25일 지진이 난 후 1년 동안 자원 봉사를 하다가 2016년 6월 귀국했다. 지진 직후인 6월 7일 서둘러 네팔로 향했다. 지진 피해를 입은 포카라(Pokhara), 고르카(Gorkha), 라쁘락(Laprak), 다딩(Dhading), 룸자타(Rumjatar), 랑탕(Langtang), 오컬둥가(Okuldungga) 지역 등으로 갔다. 랑탕은 1971년 지정된 네팔 최초의 국립공원이다. 2008년, 2011년에도 방문했던 곳이다. 지진 직후에 비하면 지금은 중장비를 동원하고 있어 상당히 빨리 복구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또 새로 짓는 건물은 돌 대신 철골을 사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네팔이 사라졌다’고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지진 피해가 컸다. 돌집, 옥수수를 매달아놓은 것 등 네팔의 풍경이 사라졌다.

▲2015년 4월 네팔 대지진 이후 네팔에 가서 도움을 줬는데, 어떤 활동을 했나?

2015년 4월 25일 지진이 난 후 1년 동안 자원 봉사를 하다가 2016년 6월 귀국했다. 지진 직후인 6월 7일 서둘러 네팔로 향했다. 지진 피해를 입은 포카라(Pokhara), 고르카(Gorkha), 라쁘락(Laprak), 다딩(Dhading), 룸자타(Rumjatar), 랑탕(Langtang), 오컬둥가(Okuldungga) 지역 등으로 갔다. 랑탕은 1971년 지정된 네팔 최초의 국립공원이다. 2008년, 2011년에도 방문했던 곳이다.

지진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돕기 위해 주로 빵을 만들어 전달했다. 이불, 여성 용품, 임산부 용품 종류도 제공했다. 빵과 물품은 대부분 지인들의 후원으로 충당했다. 봉사를 하러 다니면서 3200m 고지에 있는 랑탕 마을 일부는 마을 자체가 사라진 모습을 보기도 했다. 300여 명 중 200여 명이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지진 때문에 대형 눈사태가 생겨 마을을 휩쓸고 간 것이다. 사라져버린 마을을 바라보고 마음이 무척 아팠다.

“지진 피해는 ‘네팔이 사라졌다’고 표현할 만큼 컸다”

▲지진 피해를 직접 겪었는데, 어떤 생각이 드나?

지진 직후에 비하면 지금은 중장비를 동원하고 있어 상당히 빨리 복구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또 새로 짓는 건물은 돌 대신 철골을 사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네팔이 사라졌다’고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지진 피해가 컸다. 돌집, 옥수수를 매달아놓은 것 등 네팔의 풍경이 사라졌다.

▲지진 피해를 도우러 네팔에 간 것처럼, 한국에서도 네팔 사람을 계속 돕고 있다고 들었다.

네팔 사람들을 위해 쉼터를 운영하고 있다. 현재 살고 있는 집 옆에 마련한 쉼터다. 물론 쉼터 옆에 있는 집도 쉼터 역할을 한다. 현재 방 2개를 쉼터로 운영하고 있는데, 후원과 자비로 유지하고 있다. 주말에는 네팔 사람들이 많이 찾아온다. 그래서 주말에는 동네 사랑방처럼 쉼터에는 사람의 내음과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쉼터 운영에 들어가는 비용은 생활비를 아껴서 사용한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은?

한국과 네팔이 문화와 예술 부문에서 앞으로 더 많은 교류를 활발하게 했으면 좋겠다. 한국네팔문화교류협회(NEKOS, Nepal Korea Culture Exchange & Social Organization)를 만들어 활동해왔고 지난 2012년 3월 1일부터는 네팔한국문화센터를 열어 앞으로도 조직적 또는 개인적 열정을 다해서 활동을 이어갈 생각이다.

김형효
1965년 11월 출생. 1997년 , 김규동 시인 추천 시집 <사람의 사막에서>(바리데기)로 문단에 나왔다. 1998년 제2시집 <꽃새벽에 눈 내리고, 북클럽>, 2006년 제3시집  <사막에서 사랑을>, 2011년 제4시집 <어느 겨울밤 이야기>(한·러 번역시집>, 산문집 <히말라야, 안나푸르나를 걷다>를 펴냈다.  2011년 네팔어·한국어·영어 동화인 <무나 마단의 하늘>(네팔옥스포드국제출판사), 2014년 네팔어·영어 동화 <길 위의 순례자>, 2016년 네팔어·한국어 동화 <행복한 사람> 등을 네팔교과서편찬위원회가 간행했다.  2016년에는 네팔어 시집  <하늘에 있는 바다의 노래>(뿌디뿌란 출판사)를 발간했다.  출판사와 잡지 발행, 고려인 한글학교 교사, 네팔이주노동자문학회 자문위원, 네팔문학인협회 한국지부 자문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또 네팔관광청 표창장(2008), 우크라이나 예빠토리야 문화국 표창장(2011), 네팔작가회의 네팔문화부차관 표창장(2012), 네팔문학인협회 표창장(2015) 등을 수상했다.

※ 이 글은 계간 사람과사회(2017년 봄호)에 있는 것을 게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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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사회 발행인이자 편집장이다. ‘글은 사람과 사회며, 좋은 비판은 세상을 바꾼다’는 말을 좋아한다. weeklypeopl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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