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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의 자유와 사회의 본질

예술은 각자의 고유한 우주인 ‘작품(作品)’에 날개를 달아 날고자 하는 ‘작가(作家)’에게 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장(場)’이다. 그들의 생각을 존중하고 그들에게 훨훨 날 수 있도록 창공을 넓게 확보해주는 사회가 성숙한 사회이고, 그러한 사회의 가치가 더욱 빛난다. 그 반대로, 때로는 예술가들이 자신의 온 인격과 삶 전체를 걸어 평생 날개를 만들어 놓았더니 그 날개를 꺾어버리는 사회는 단언컨대 떼쓰는 어린아이처럼 미숙한 사회일 수밖에 없다. 나는 우리 사회가 예술가가 날아다니는 빛나는 창공이 되기를 바란다. 또한, 이 사회가 예술의 범위를 넘어서서도 모두가 지향하는 한 방향을 향해 다 같이 가는 사회가 되기를 절실히 바란다.

도대체 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구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의 그림 「세상의 기원」(L’Origine du monde, 1866)은 19세기 중반에 그려졌으나 20세기 말 오르세미술관이 소장하면서 일반인에게 처음으로 공개했다. 그럴 정도로 서구에서도 논란을 겪었던 작품이지만, 그 미술사(美術史)적 가치는 바로 여성 성기만을 초점화해서 사실적인 방법으로 표현했다는 점, 거기에서 찾는다. 흥미로운 화젯거리는 더 많으나,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해서 한 번 생각해 보자. 문학작품 속의 문장 표현을 꼬투리 잡는 식이라면, 「세상의 기원」은 여성, 그것도 애인의 성기를 그렇게 크게 그려 넣었으니 훨씬 더 심한 범죄일까? 사진=구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 세상의 기원(Origin-of-the-World, 1866), 위키백과

예술과 자유

창작의 자유와 사회의 본질

박소현(Christine Park) 前 서울 중랑구립중랑아트센터 관장

사람과사회™ 2018 겨울 & 2019 봄 통권8·9호

“문학 작품 속 문장을 미투라고 말하는 사람은 미투 본질을 모른다”

요즘 다소 한가한 틈을 타서 그 동안 사두었던 책들을 몰아서 읽고 있다. 책을 읽을 때면 나 자신에게 몰입할 수 있다. 그럴 때 나는 책속의 세계에서 주인공의 그림자가 되어 그의 발걸음을 따라다닌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엿보며 주인공과 나만이 아는 은밀한 여행을 한다.

얼마 전에는 로제 마르탱 뒤 가르(Roger Martin du Gard)의 『회색 노트』(민음사, 2018)를 읽었다. 가장 예민한 나이인 청소년기에 겪는 성장통에 관한 이야기이다. 두 주인공의 진정한 우정과, 그들이 성숙해가는 과정에서 가톨릭 집안과 개신교 집안의 다른 삶의 방식으로 인해 그들의 우정과 성장이 꺾이고 마는 안타까운 결말을 보았다. 곧 청소년기가 접어들 아들을 준 엄마로서, 나는 어떻게 아이를 대해야 할지 고민하고 아이의 입장을 한 번 더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 다음으로 지금 읽고 있는 책이 바로 내가 좋아하던 최인호의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여백미디어, 2011)다. 그는 2013년 안타깝게도 암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나는 그의 소설 속 문체를 보며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상상해보기도 한다. 『길 없는 길』이나 『별들의 고향』 혹은 『인연』과 같은 소설 속에서도 그는 인간의 감수성과 사랑이라는 주제를 많이 다루었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읽으며, 요즘 사회적으로 살짝 지나친 것 같은 ‘미투’(#Me Too)에 관한 이야기와 예술의 관계에 대한 생각이 살짝 스쳤다. 물론 운동선수를 코치가 폭력으로 제압하고 그 속에 또 성폭력이 개재하는 등의 악마적인 행동은 반드시 뿌리를 뽑아야 마땅하고, 그에 대한 폭로 또한 당연히 필요하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문학작품 속에 나오는 문장들도 엄밀히 따지면 ‘미투’의 대상이 아니냐는 식의 기사들에서 보는 과도한 주장에 대해서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읽어 내려가다 보면 작가의 표현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이렇게 섬세한 부분까지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이런 문학 작품 속 문장들이 미투의 대상이라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미투의 본질이 무엇인지조차도 모르고 있음에 틀림없다. 작품 속에서 사랑 이야기를 하며 그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동원한 언어들을 아무렇게나 미투니 뭐니 하며 갖다 붙이며 앞으로는 그런 문장을 사용하면 안 된다고 하다니! 그야말로 무식하기 짝이 없다. 21세기의 성숙한 사회에서 있을 수 있는 이야기인가.

“우리 사회가 예술가가 날아다니는 빛나는 창공이 되기를 바란다”

예술은 어떤 경계로부터도 자유롭고자 한다. 그러므로 예술가들의 표현은 자유로워야 한다. 문학 작품 속에서 언어의 무한한 표현 가능성이 그처럼 작가의 표현력을 통해 물질화한다는 것은 얼마나 경이로운 일이던가? 혹은, 감히 입 밖으로 내지 못하던 이야기들을 과감하게 화폭에 옮겨 놓는 일도 그러하다. 그러한 일들은 인간의 가장 섬세한 감수성들을 깨우기도 하고, 영혼의 심연까지 자극해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도록 또 다른 스토리를 선사하기도 한다. 그런데 어이없게 예술 작품을 성적으로 굳이 몰아붙여서 글로도 쓰지 말라니, 어린아이 떼쓰기도 아닌데, 답답하고 유치하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담은 신문기사까지 올라온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만큼 각자의 생각을 존중하는 세상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좋지만, 그런 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이미 타인의 생각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점이 문제다. 결과적으로 넘지 말아야 할 경계까지 과하게 넘어버린 것이다. 결국 각각의 장르에서 제각기 빛을 발할뿐더러 그 모두 수렴했을 때 또 하나의 고유한 세계가 탄생할 수 있는 원동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도대체 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구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의 그림 「세상의 기원」(L’Origine du monde, 1866)은 19세기 중반에 그려졌으나 20세기 말 오르세미술관이 소장하면서 일반인에게 처음으로 공개했다. 그럴 정도로 서구에서도 논란을 겪었던 작품이지만, 그 미술사(美術史)적 가치는 바로 여성 성기만을 초점화해서 사실적인 방법으로 표현했다는 점, 거기에서 찾는다. 흥미로운 화젯거리는 더 많으나,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해서 한 번 생각해 보자. 문학작품 속의 문장 표현을 꼬투리 잡는 식이라면, 「세상의 기원」은 여성, 그것도 애인의 성기를 그렇게 크게 그려 넣었으니 훨씬 더 심한 범죄일까?

예술은 각자의 고유한 우주인 ‘작품(作品)’에 날개를 달아 날고자 하는 ‘작가(作家)’에게 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장(場)’이다. 그들의 생각을 존중하고 그들에게 훨훨 날 수 있도록 창공을 넓게 확보해주는 사회가 성숙한 사회이고, 그러한 사회의 가치가 더욱 빛난다. 그 반대로, 때로는 예술가들이 자신의 온 인격과 삶 전체를 걸어 평생 날개를 만들어 놓았더니 그 날개를 꺾어버리는 사회는 단언컨대 떼쓰는 어린아이처럼 미숙한 사회일 수밖에 없다. 나는 우리 사회가 예술가가 날아다니는 빛나는 창공이 되기를 바란다. 또한, 이 사회가 예술의 범위를 넘어서서도 모두가 지향하는 한 방향을 향해 다 같이 가는 사회가 되기를 절실히 바란다.

박소현(Christine Park)
서울 중랑구립중랑아트센터 관장을 지냈다. 프랑스 파리8대학(Université Paris 8 Vincennes-Saint-Denis)에서 조형예술학(박사 수료, 2001)을 공부했다. 2006년부터 2014년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갤러리 크리스틴박’(Galerie Christine PARK)을 운영했다. 현재 문화예술정책을 비롯해 각 지역에 문화예술의 옷을 입히는 일을 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나의 성공을 위해 움직여준다’는 문구를 좋아한다. 페이스북(facebook.com/galeriechristinepark)과 밴드(band.us/band/69480673) 등 온라인에서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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