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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선암사 비로암 찻잔에 모란꽃빛 어리고

전생을 지나 달빛에 젖은 채 묻혀 있는 찻잔 하나 먼 훗날 밝은 눈동자 오시면 모란꽃 곁에서 차 한 잔 하고 가시게

선암사 비로암 찻잔에 모란꽃빛 어리고

석연경

아도화상의 바다는
피고 지고 피고 지는
조계산 팔부 능선 은밀한 숲 속의
일렁이는 모란꽃

오고 가지 않는 것을 기다리다
타버린 마음 안에서
사리 꺼내 찻잔을 빚네
천도 넘는 불가마 견뎌 푸른 잔

한잔은 숨죽인 울음
한잔은 염화미소
부어도 채워지지 않고
마셔도 줄지 않는
주인 없는 빈자리에 놓인 차 한 잔

오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모란꽃 피어 달빛 더욱 그윽한 밤
무덤을 파네
꽃잎과 꽃잎 켜켜이
삭아 익은 검은 흙
밀물과 썰물의 기도들

달빛이 깊숙한 묘혈에 스미니
오랜 한 마음 붉게 피어나네

모란꽃 아래
깨지지 않는 청잣빛 찻잔을 묻네
식지 않는 뜨거운 차 한 잔
사라진 간절한 마음도

전생을 지나 달빛에 젖은 채 묻혀 있는 찻잔 하나
먼 훗날 밝은 눈동자 오시면
모란꽃 곁에서 차 한 잔 하고 가시게

석연경 경남 밀양 출생. 2013년 『시와 문화』에서 시, 2015년 『시와 세계』에서 문학평론으로 등단했다. 시집 『독수리의 날들』, 『섬광, 쇄빙선』, 『푸른 벽을 세우다』가 있다. 송수권시문학상 젊은시인상을 수상했다. 현재 연경인문문화예술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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