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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극단주의의 테러와 역사적 배경

사우디 아라비아 리야드의 국립박물관에 전시된 쿠란. 사진=위키백과
사우디 아라비아 리야드의 국립박물관에 전시된 쿠란. 사진=위키백과

사우디 아라비아 리야드의 국립박물관에 전시된 쿠란. 사진=위키백과

코리아연구원 현안진단 제261호(2015년 02월 17일자)는 서정민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중동아프리카학과 교수의 ‘이슬람 극단주의의 테러와 역사적 배경’이라는 주제의 기고를 담고 있다.
서 교수는 이 글에서 ‘프랑스 테러에 이은 덴마크 테러로 충격에 빠진 유럽’이라는 주제를 덧붙이고 있다.
서 교수는 표현의 자유를 놓고 이슬람권과 서방이 대립하는 이번 사태의 뿌리에는 나름 종교적인 배경이 있다고 진단했다.
서 교수는 특히 위기에 처한 이슬람권을 구하기 위한 사상적 조류가 등장한다며 ‘이슬람 부흥주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서 테러를 감행하지는 않았지만 현재의 반서방 이슬람주의의 근간이 되는 정치적 사조가 등장한 것으로 평가했다.
서 교수의 글을 게재한다.

차례

Ⅰ. 이슬람 vs. 기독교 문명의 충돌?
Ⅱ.‘나는 샤를리다’vs.‘나는 샤를 리가 아니다’
Ⅲ. 갈등의 근원 ‘라 일라하 일랄라’
Ⅳ. 위기 때 마다 등장하는 종교적 반감
Ⅴ. 문명의 충돌?

 

Ⅰ. 이슬람 vs. 기독교 문명의 충돌?

예멘 출신 알-카에다 세력이 프랑스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를 공격했다.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에 대한 만평을 게재한 것이 공격의 명분이었다.

이후 표현의 자유를 어디까지 허용해야 하느냐를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테러 피해를 본 프랑스 정치권과 언론은 표현의 자유에는 성역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반면 교황과 이슬람권에서는 표현의 자유에도 한계가 있다고 맞서고 있다.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여러 차례 표현의 자유를 강조했다. 그는 1월 19일 AFP 통신에 “우리가 생각과 자유를 주장한다고 해서 누구를 모욕하는 것은 아니다”면서 표현의 자유에 제한을 둘 수 없다는 견해를 밝혔다.

한편, 프란치스코 교황은 1월 15일 필리핀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취재진에 “표현의 자유에도 한계가 있고 타인의 믿음을 모욕하거나 조롱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 아울러 신의 이름을 내세운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최고 종교기관인 이슬람학자위원회도 샤를리 에브도의 만평이 종교적 모욕이며 표현의 자유와 관계없다는 공식적 해석을 내놓았다.

Ⅱ. ‘나는 샤를리다’ vs. ‘나는 샤를 리가 아니다’

57개 이슬람 국가의 정부, 종교기관, 그리고 지식인 및 학계는 일제히 1월 초 프랑스 주간지 테러를 일제히 규탄했다.

아랍연맹 사무총장 등 역내 기구들은 희생자 가족에게 위로 서한도 보냈다. 이집트 최고 종교기관인 알-아즈하르(al-Azhar)는 1월 7일 성명을 통해 “샤를리 엡도 공격은 범죄”라며 “이슬람은 어떠한 폭력에도 반대한다”고 밝혔다.

이런 테러 규탄 분위기 속에 ‘아나 샤를리(나는 샤를리다)’라는 아랍어 구호도 등장했다. 유럽인들과 더불어 일부 세속적 무슬림들도 표현의 자유가 더 중요하다는 시각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1월 14일 샤를리 에브도가 이슬람의 사도 무함마드를 만평에 다시 등장시키면서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이슬람권은 이를 강력히 비난하면서 대규모 시위가 이어졌다. ‘나는 샤를리가 아니다’는 구호와 현수막이 시위에 주로 등장했다.

파키스탄, 이집트 등 중동국가는 물론이고 니제르 등 아프리카 국가에서도 반프랑스 그리고 반표현의 자유 시위가 이어지고 폭력사태도 발생했다.

이슬람권 정부, 종교기관, 그리고 시민의 절대다수는 테러를 비난한다. 사실 이슬람권이 테러의 가장 큰 피해자다. 일부 테러가 유럽 등 서방세계에서도 발생하지만 대부분의 테러공격은 중동을 무대로 한다.

그러나 적지 않은 중동인들은 이 같은 테러와 ‘나는 샤를 리가 아니다’라는 담론이 등장하는 것에는 서방의 책임도 있다고 주장한다.

카타르의 유력 일간지 알-아랍의 압둘라 알-아트바 편집장은 1월 8일 트위터에 “왜 이슬람권이 이번 테러에 사과해야 하나.

런던의 모스크가 박해받을 때 그 누구도 기독교인이나 영국인에게 사과를 요구하지 않았다.”는 글을 올려 주목을 받았다.

1월 19일 체첸에서 열린 집회에서는 람잔 카디로프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서방 언론인과 정치인들이 언론의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거짓 구호 아래 무슬림의 믿음을 모욕하고 있다”고 서방의 표현의 자유 남용을 꼬집었다.

Ⅲ. 갈등의 근원 ‘라 일라하 일랄라’

표현의 자유를 놓고 이슬람권과 서방이 대립하는 이번 사태의 뿌리에는 나름 종교적인 배경이 있다.

기독교세계와 이슬람권 간 갈등의 종교적 시발점은 ‘라 일라하 일랄라(알라 외에 다른 신은 절대 없다)’다. 이슬람의 가장 중요한 믿음이다. 창조주 알라 외에 다른 신성한 존재는 절대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을 부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신성도 부인하는 것이다. 유대교와 기독교에 뿌리를 두고 있고 구약을 인정하는 이슬람교이지만 사도들에 대한 시각은 크게 다르다. 모든 사도는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알라의 계시를 인류에 전한 인간이다.

이슬람을 창시한 무함마드도 알라의 계시를 이 땅에 전한 사도일 뿐 신적인 존재가 아니다. 100% 인간일 뿐이다. 알라의 계시에 의거해 이슬람공동체를 건설하고 평화와 정의를 추구한 종교 및 정치지도자일 뿐이다. 때문에 무함마드가 혹시나 신격화될 것을 우려해 성화조차 그리지 않았다.

이슬람이 이처럼 강력한 유일신사상 체계를 구축한 배경에는 이슬람 공동체 건설이라는 정치적 목적이 내재되어 있다. 무함마드가 7세기 이슬람을 설파할 당시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와 메디나에는 이미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 살고 있었다.

첫 계시를 받은 무함마드가 두려움에 떨며 계시 내용을 상담한 대상이 기독교인이었다. 메카와 메디나를 통일해 이슬람공동체 구축에 성공한 이후 예언자 무함마드가 창조주 알라의 최종 완결판 계시를 받았다는 신학체계가 마련된다.

구약에 등장하는 사도들은 부분적인 계시들을 받아왔고, 이들 계시를 종합해 완결된 최종본이 무함마드에게 내려졌고, 바로 그것이 쿠란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이슬람은 기독교와 유대교를 형제종교로 인정한다. 하지만 이슬람이 알라의 최종 계시를 받은 완벽한 종교이며 무함마드가 마지막 사도라고 믿는다. 뿌리를 공유하지만 유대교와 기독교와는 차별성을 두어 이슬람이 ‘완벽한’ 종교라는 신학체계를 구축한 것이다.

무슬림들은 그 신학체계 하에서 알라의 계시에 따른 가장 이상적인 이슬람 국가와 사회가 건설되었다고 믿는다. 무함마드와 그의 뒤를 이은 4명의 정통 칼리파(후계자) 시대다.

Ⅳ. 위기 때 마다 등장하는 종교적 반감

‘완벽하고 이상적인’ 이슬람 국가는 급속도로 성장했다. 100년도 안 돼 스페인 남부까지 장악했다. 예루살렘을 포함한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기존 기독교 사회도 이슬람의 통치 하에 들어갔다.

이슬람은 기독교 공동체를 인정했다. 지즈야(jizya)라는 인두세만 내면 유대교와 기독교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상당기간 세 종교는 평화적 공존을 이어갔다.

이집트에는 현재도 1,000만 이상의 기독교 정교도들이 남아 있다.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하고 아랍과 전쟁을 벌이기 이전에는 유대인들도 중동의 곳곳에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왔다.

따라서 이슬람과 기독교 간의 충돌은 종교적 갈등이라기보다는 정치경제적 이해로 기인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그 본격적 시작은 십자군 전쟁이다.

서유럽의 기독교인들은 성지 팔레스티나와 성도 예루살렘을 무슬림들로부터 탈환하기 위해 8차례에 걸쳐 원정을 감행했다. 전쟁에 참가한 기사들은 가슴과 어깨에 십자가 표시를 했다. 때문에 이 원정대는 십자군으로 불렸다. 종교적 상징이 전쟁에 동원된 것이다.

이로 인해 아직도 십자군 전쟁이 기독교와 이슬람의 싸움이라는 종교적 해석이 강하게 남아있다. 그러나 종교적 배경이 전쟁을 전적으로 좌우한 것은 아니었다.

봉건영주와 하급 기사들은 새로운 영토지배의 야망에서, 상인들은 경제적 이익에 대한 욕망에서, 또한 농민들은 봉건사회의 중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희망에서 저마다 원정에 가담했다.

호기심, 모험심, 약탈욕구 등의 동기가 신앙적 열정과 합쳐진 것이었다. 반면 이슬람 세력은 유럽인들을 ‘무자비한 하얀 악마’들이라고 부르며 지하드(성전)로 맞섰다.

14세기 이후 오스만제국의 유럽 동부 발칸반도 장악은 또 다른 긴장을 불러왔다. 하지만 1683년 제2차 비엔나 포위작전 패배한 오스만제국은 점차 약화하기 시작했다.

산업혁명이후 강성해진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들은 1798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침공을 계기로 이슬람권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유럽의 세력 확대로 수세에 몰린 터키가 1922년 공화국을 선포하면서 이슬람제국은 완전히 사라졌다. 대부분 중동 지역은 서방의 통제 하에 있었고 이 과정에서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한다.

위기에 처한 이슬람권을 구하기 위한 사상적 조류가 등장한다. 이슬람 부흥주의다.

유럽 기독교세력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그리고 서방의 문화적 침탈을 막기 위해 많은 지식인들이 이슬람을 통한 정체성 회복과 정치적 단합을 부르짖는다. 테러를 감행하지는 않았지만 현재의 반서방 이슬람주의의 근간이 되는 정치적 사조가 등장한 것이다.

Ⅴ. 문명의 충돌?

1993년 미국의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은 『문명의 충돌(Clash of Civilizations)』을 세상에 내놓았다. 대히트를 기록한 책이다. 헌팅턴은 소련연방이 해체된 이후 시대의 문명 간 충돌이 국제정치에 큰 영향을 줄 것이라고 설명한다.

문명의 정체성, 특히 종교가 새로운 갈등의 불씨가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중에서도 “피의 국경을 가지고 있는” 이슬람이 가장 큰 위협이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서방과 이슬람문명의 관계는 과거부터 현대 그리고 미래까지 “항상 군사적 충돌”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지적한다. 궁극적으로 소련이라는 위협이 없어진 단극시대에서 미국은 이슬람권에 대한 대응에 주력해야 한다고 그는 조언한다. 실제로 2001년 9.11테러 사태가 발생하면서 그의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는 상황이다.

정보통신이 발달한 현시대에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한 종교적 정체성이 강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로 인해 초국가적 이슬람과격단체들도 등장하고 있다. 공간을 가리지 않고 이들에 의한 테러도 발생하고 있다.

이 점에서 헌팅턴의 시각은 21세기에도 상당히 공감을 얻고 있다. 하지만 헌팅턴의 주장에서 가장큰 오류는 역사적 사실을 왜곡했다는 점이다.

이슬람세계와 서유럽 기독교권이 항상 갈등상태에 있지는 않았다. 1,400여년 이슬람 역사에서 양측이 심각한 갈등관계를 가진 기간은 크게 십자군 전쟁 200년과 19세기 이후 유럽이 중동을 식민지화한 후 현재까지의 200년 정도다.

두 갈등 모두 서방이 시작한 것들이다. 나머지 1,000년 중 대부분은 두 문명이 상당히 긍정적인 교류를 가졌다. 사막 속에서 등장한 이슬람문명은 주변 문명을 융합해 찬란한 꽃을 피웠다.

이때 현재의 터키, 시리아, 팔레스타인, 요르단 등 지역에 있었던 동로마 기독교문명이 이슬람문명의 형성과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유럽의 철학, 과학, 그리고 이성에 관한 많은 책들이 아랍어로 번역되었다.

이슬람 문명도 유럽에 크게 기여한 바가 있다. 14세기 말 이탈리아 남부에서 번역작업으로 시작된 르네상스다. 유럽과 이슬람권 사이에서 중개무역을 하던 상인들이 아랍권에서 가져온 책들이 번역되면서다. 유럽의 중세 암흑시대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철학, 과학 등에 관련된 책들이 많았다.

이슬람권과 기독교세계를 갈등의 역사로만 보는 것은 적절치 않다. 평화적인 교류를 하던 기간이 더 길었다. 양측의 문명 발전을 위해 서로 긍정적인 역할도 했다. 우리가 매일 접하는 영어 용어들 중에도 중동 언어가 많다.

긍정적인 교류를 했다는 증거다. 우리가 매일 마시는 커피(coffee)는 아랍어다. 커피에 넣는 설탕(sugar)도 아랍어 혹은 페르시아어다. 속옷으로 매일 입어야 하는 면(cotton)도 아랍어다.

오늘 저녁 피곤함을 날려 보내기 위해 한 잔 하시겠다면, 알코올(alcohol)도 아랍어라는 점을 한 번쯤은 생각해보시길 바란다.

About 김종영™ (914 Articles)
사람과사회 발행인이자 편집장이다. ‘글은 사람과 사회며, 좋은 비판은 세상을 바꾼다’는 말을 좋아한다. weeklypeopl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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