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의 왕국에서 사람으로 살아가기
사람으로 산다는 것, 사람답게 산다는 것, 그리고 사람을 좋아하고 아끼는 것,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아이들은 이불을 덮고 누워 초롱초롱 눈을 빛내고, 나는 걔들 침대에 비스듬히 어깨를 기대고 앉아 책을 읽어주곤 했다. 글밥이 많거나 후속편이 있는 책이면 도중에 졸리기도 했고, 목에 이상이 생길까 걱정이 될 때도 있었다.
그런데 이제 막내까지 혼자 책을 읽을 만큼 다 커버리니 잠자리에 들기 전의 그 고행(?)이 문득 그립다. 그때 읽어준 책 중에서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책들이 있는데, 그 하나가 콜린 맥노튼의 ‘거인 사냥꾼을 조심하세요’다. 맥노튼은 유명한 일러스트 겸 작가로, 사람냄새 물씬 나는 모험 이야기들을 썼다.
인디안 소년이 아마존 숲길을 가고 있었다. 저 멀리서 꿈틀대는 거대한 풀더미는 다름 아닌 숲의 거인, 아서왕 때부터 살아온 거인이다.
이 지구에 나쁜 거인 오우거 족과 기타 착한 거인들이 인간들과 공존하던 시절, 어느 날 갑자기 영국 왕은 거인들을 모두 잡아버리기로 했단다. 인간을 잡아먹는 오우거 족은 물론, 사람과 더불어 살며 지구상에서 그저 오래된 나무처럼 자연을 즐기던 거인까지 모두 사냥감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숲의 거인은 어느 날 시작된 거인사냥의 풍파로부터 도망치기 시작한 지 수백 년이 흐른 상태였다. 사람을 피해 다니며 때론 나무늘보처럼, 때론 거대한 고래처럼 지구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이 거인 아저씨와 인디언 소년이 만나게 된다.
질문하기 좋아하는 인디안 소년은 숲의 거인으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듣는다.
지구상의 거대한 숲이 거의 사라져갈 무렵에 거인과 ‘잭’이라는 사냥꾼이 얽혔던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지구의 모든 거인을 처치하기로 왕에게 맹세한 잭은 욕심꿀깨비라는 거인을 처치할 만큼 용감무쌍한 사냥꾼이었다.
그 잭이 드디어 숲의 거인과 마주쳤다. 그런데 칼을 휘두르다가 그만 벼랑에서 떨어지려는 잭을 숲의 거인이 아슬아슬하게 구해준다. 그러나 잭은 칼로 거인의 손가락을 베어 버렸고, 거인은 쓸쓸한 마음이 되어 바다로 걸어 들어갔단다.
“아저씨가 그 사람을 구해 주었다고요? 나 같으면 그냥 땅에 홱 내던지고, 납작하게 밟아 버렸을 거예요. 왜 죽이지 않았어요?”
“잭도 나한테 그렇게 물었단다. 그래서 대답했지. ‘내가 만약 너를 죽인다면 내가 너보다 나을 게 뭐가 있겠느냐’고.”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요?”
“잭은 다시 칼을 휘둘러 내 손가락을 잘랐어.”
“잭이 정말 그런 짓을 했어요? 아저씨가 목숨을 구해 주었는데도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잭은 사람이었거든. 사람들이란 다 그런 거지.”
책을 읽어주다가 한참을 머뭇거렸다. 더 이상 읽어주기가 쉽지 않았다. 다행히 아이들은 이 이야기에 머물지 않고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는가를 더 궁금해 했다.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생각이 유연하지만, 먹을 것과 놀 것과 휴식이 충족되면 대체로 불편한 생각을 오래 하지 않는다.
사람으로 산다는 것, 사람답게 산다는 것, 그리고 사람을 좋아하고 아끼는 것,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나는 사람을 참 좋아하는 편이다. 어지간하면 사람에게 실망하고 포기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 나이를 먹어갈수록 마땅히 생각이나 이해의 폭이 넓어져야 하련만, 어쩐지 요즘은 내가 자꾸만 경직되어간다는 느낌이 든다. 종종 숲의 거인처럼 ‘사람이란 다 그런 거지’ 씁쓸히 중얼거리곤 하는 것이다.
하나의 생각은 변함없다. 내 아이들을 사람으로 키워야겠다는 것. 괴물로 커가는 아이들을 멀리서 가까이서 알게 되면, 그 아이들의 잘못이 아닌데 싶으면서 안타깝기만 하다.
누가 그 아이들을 ‘사람이란 다 그런 거지’ 하고 사람을 포기하게 만들었을까? 누가 그 아이들의 여린 손가락을 잘라버렸을까?
* 참고 : ‘거인 사냥꾼을 조심하세요!’, 콜린 맥노튼 글/그림, 전효선 옮김, 시공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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