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도 없고 나도 없다”
도예가(陶藝家) 이당(利堂) 박철원, “그릇을 만들 때 만드는 내 자신이 사라지는 경험을 할 때가 종종 있는데, 그럴 때만이 뜻밖에 아름다운 작품이 탄생하는 것을 본다. 나의 기술, 나의 재주, 나의 의도 같은 것들은 잊히고 그릇이 저 스스로 형태를 만들고 나갈 때 단지 내 손을 통해 흙이 물레 위에서 무음의 춤을 추며 하나의 모습을 지어 나갈 때, 나는 문득 그것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경험한다. 그릇을 만드는 일 자체가 나를 비우고 어딘가에 존재하는 온전한 그릇의 형태에 가까이 다가가는 수행의 길임을 나는 잊지 않으려 한다”
기고
사람과사회 2017년 봄
“소도 없고 나도 없다”
-도예가(陶藝家) 이당(利堂) 박철원에 대하여
정유림 한국시각예술인협동조합 수석 큐레이터 art_in@hanmail.net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도자기가 상감청자(象嵌靑瓷)라면 고려 후기부터 조선시대에는 분청사기(粉靑沙器)와 백자(白磁)를 꼽을 수 있다. 당시 분청은 만드는 방법도 다양하고 많은 물량을 생산해 서민들이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었지만 요즘 사람들에겐 청자(靑瓷)나 백자는 알려져 있어도 분청자(분청사기)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분청은 분청사기를 일컫는 것인데, 분청사기란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의 준말로 분장을 한 회청색흙으로 만들어진 자기라는 뜻이다.
사기(沙器)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자기(瓷器) 대신 쓰던 말이다. 그래서 사기나 자기는 사토(돌가루)를 같이 쓰기 때문에 ‘분청자=분청사기’, ‘자기=사기’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분청의 특징은 ‘소박’과 ‘추상(抽象)’
조선시대 분청의 여러 특색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청자와 백자와는 또 다른 매력, 즉 구수하면서도 털털해서 보는 이들이 부담스럽지 않은 어리숙한 소박함이 도공(陶工)의 자유로운 그림과 모양에 나타나 있다는 점이다.
또 다른 하나는 추상(抽象), 즉 눈에 보이지 않는 사물의 내면에 숨어 있는 상을 뽑아내는 기법이 그림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기법을 사용해 우리의 도자기에 나타나 있는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음을 꼽을 수 있다.
도공의 그림은 무심코 그린 그림이며 화공의 그림과는 사뭇 다른 차이가 있다. 양각이나 음각을 사용하기도 하고 점으로 또는 선으로 나타날 수 도 있으며 투각(透刻) 또는 유약이 흐르는 자연스러운 모습을 표현(덤벙기법)하거나 흙으로 조각한 꽃무늬인 인화문(印花文)이나 여러 가지 모양을 넣은 도장을 찍는 방법 또는 형태 자체에서도 나타 낼 수 있다.
많은 도자기나 다른 예술작품들 또한 마찬가지이겠지만 다기(茶器)의 경우는 더 특별히 중요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다. 예쁘고 아름답게 화려하고 고상하게 만드는 성형기술이나 더러는 상품 가치가 높아서 많이 팔릴 수 있도록 만드는 것도 중요하고 좋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찻잔을 만드는 도공의 마음가짐이다. 이는 만드는 이의 마음가짐이 흙과 불과 함께 조화롭게 뒤섞여 여러 가지 과정을 거친 후 고온을 이겨내고 탄생한 작품에 그대로 전해지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수백 수천 게송(偈頌)보다 차(茶) 한 잔이 낫다
수백 수천 편의 게송(偈頌)보다 차(車) 한 잔 마시고 가는 것이 낫다 하지 않던가.
달을 떠서 찻잔에 담고 은하수 국자로 찻물을 떠서 차 한 잔에 명상을 했다던 한국의 다성(茶聖) 초의선사(草衣禪師)의 시(詩) 구절에도 나오듯이 많은 이들에게 오래 전부터 현재까지 흠모의 대상인 차를 담는 찻잔을 만드는 사람의 마음가짐이 어찌 중요하지 않을까.
경기도 이천 신둔면 수광리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 중 구불거리는 좁은 골목을 지나 가장 끝집, 이곳이 이당도요의 주인인 도예가(陶藝家) 이당(利堂) 박철원 선생이 있는 곳이다.
이당도요는 나지막한 산을 끼고 있어 아래로는 동네의 정겨운 풍경이 펼쳐져 있고 커다란 대추나무 한 그루가 집 앞 마당 평상 위로 시원한 그늘을 내려주고 있는 곳. 비가 오면 마치 어느 산사의 고즈넉한 풍경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조용한 이곳의 분위기와는 상반되게 오가는 사람들로 바빴던지 평상 위가 삼복더위에 땀 흘린 듯 번들거린다.
어느 날은 대금소리가 구슬프게 울려 퍼지기도 하고 때로는 머리를 길게 땋은 사람이나 한복을 곱게 입은 사람들이 방문하면 정가나 판소리, 북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화가, 사진가, 스님, 신부, 교수, 목사 등 저명인사는 물론 남녀노소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차(茶)를 좋아하고 우리 고유의 전통 도자기를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기도 하다.
“茶 좋아하는 사람이 이당 선생 모르면 간첩”
이당 박철원 선생은 경기도 이천 태생으로 빼어난 성형 솜씨로 “차(茶)를 좋아하는 사람이 이당 선생을 모르면 간첩”이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유명한 도예가다.
일단 그의 작업실에 들어서면 화려한 경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된다. 전국기능올림픽 금메달, 수십 차례의 각종 수상 경력과 다기공모대전 대상, 세계도자기엑스포 초대 작가 등등……. 그러나 그 화려한 경력보다 더 사람을 끄는 것은 그의 분청과도 같은 호방하고 자유롭고 약간의 익살스러움이 묻어나오는 소박하고도 친근한 인상과 뚝배기처럼 은근하고 구수한 작가의 사람됨이다.
이당 선생의 작품들은 대부분 백자와 분청으로 이뤄져 있다. 많은 분 중에서도 특히 돌아가신 법정 스님은 그의 작품들을 사랑했다. 전시실을 비롯해 이곳저곳에 법정 스님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다기(茶器) 외에도 무수히 많은 작품들이 있지만 커다란 연잎 발과 달항아리(조선시대 보물 1437호)라고 부르는 작품이 있는데 보름달을 닮은 백자 달항아리는 소박하고 단순하며,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기품이 흐르고,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다.
달은 무심한 듯 차갑게 보이고 비워져 있지만 허(虛)가 아니다. 달이 이지러지는 것은 때가 되면 다시 차오르기 위함이다. 공(空)하되 허(虛)하지 않음은 비움이지 모자람이 아니다. 작품 하나마다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기에는 단어가 모자랄 정도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는 경험은 무척이나 신선한 것이다.
전시실에서 차 한 잔을 조금씩 다 넘기는 순간 다른 세상 속 공간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느껴지는데 무엇인가 비움과 깨달음을 알게 하는 깊고 낮은 울림들을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이곳에서 그릇을 대하는 사람의 마음이 차분해진다. 동시에 조금씩 평온해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더구나 이를 느끼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조그만 차호(茶壺)를 빚을 때는, 갓난아기를 안고 있을 때의 마음으로, 커다란 발을 빚을 때에는 진흙 속에서도 고고하게 피어나는 연꽃을 받쳐주는 연잎의 마음으로, 고요히 임하기에 한 작품 한 작품이 이당 선생에게는 자식과도 같다.
다음은 류시화 시인이 이당 선생에 대해 쓴 글을 미술 잡지가 게재한 것이다.
아름다운 찻잔
류시화
내 집과 작업실에 있는 몇 안 되는 다기들은 모두 이당선생의 작품이다.
이당 선생을 내게 소개해준 이는 법정스님이시다.
강원도 원두막에서 시내로 나오실 때 가끔씩 이천에 있는 그의 작업실에 들러
마음에 드는 찻잔들을 하나씩 가져다주신 것이다.
그것들은 단순하되 기품이 있고, 소박하되 은근한 화려함을 지니고 있었다.
어느 핸가는 바닥에 작은 국화무늬를 새겨놓은 찻잔 한 벌을 선물 받았는데,
얼마 후 이당선생을 만났을 때 나는 전문가도 아니면서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이제 대가가 되셨더군요.”
그러자 그는 시골사람처럼 웃으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그것들은 내가 만든 것 같지 않아요. 무엇인가가 나를 통해 그것들을 만든 것 같아요.”
작품을 만들 때 어느덧 그가 자신을 모두 비워버렸음을 느낄 수 있었다.
빈잔 하나를 만들려고 해도 먼저 자신을 비워야 할 것이다.
모든 일이 이처럼 하나의 자기수행에 다름 아니다.
그의 아름다운 찻잔들을 바라보는 즐거움 때문에
나는 전보다 더 차 마시는 일을 가까이 하게 되었다.
그해 겨울에는 인도 여행을 떠나면서 그 국화무늬 찻잔을 가지고 갔다.
그래서 갠지즈 강변에서도 차를 마시고
히말라야 산중에서도 그 찻잔으로 다르질링 차를 마셨다.
이당 선생이 처음으로 흙을 접한 것은 1970년대다.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보고 자라왔던 도자기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도공의 길에 들어선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여러 가지 기계가 있던 시대가 아닌지라 흙을 발로 밟고 손으로 꼬막(꼬박)을 치고, 흔히들 하는 말처럼 청소 3년, 꼬막 밀기 3년, 그 후에야 비로소 물레를 닦고 근처에 가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한다.
어려운 환경에서 힘들게 배운 터라 요즘사람들과는 다르게 천직인 도자기 굽는 일이 더 귀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찻잔 하나하나 마다 세심히 살피며 입술이 닿는 위치가 편안해야 차를 마시는 즐거움이 배가된다며 이미 도통했음직한 번거로운 그 작업을 수십 년 째 계속 하고 있다.
경건히 수양하듯 겸손한 마음가짐을 가진 도공의 손에서 빚어진 그릇만이 사용하는 사람에 대한 깊은 배려가 숨어 있기에 왠지 모를 편안함과 차분히 가라앉아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주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맥락에서 읽는 이당 박철원 선생의 말씀은 깊고 넓다.
“그릇을 만들 때 만드는 내 자신이 사라지는 경험을 할 때가 종종 있는데, 그럴 때만이 뜻밖에 아름다운 작품이 탄생하는 것을 본다. 나의 기술, 나의 재주, 나의 의도 같은 것들은 잊히고 그릇이 저 스스로 형태를 만들고 나갈 때 단지 내 손을 통해 흙이 물레 위에서 무음의 춤을 추며 하나의 모습을 지어 나갈 때, 나는 문득 그것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경험한다. 그릇을 만드는 일 자체가 나를 비우고 어딘가에 존재하는 온전한 그릇의 형태에 가까이 다가가는 수행의 길임을 나는 잊지 않으려 한다.”
선화(禪畵) ‘십우도(十牛圖)’의 마지막이 ‘소도 없고 나도 없다’였었나. 득도를 한다는 것이나 온전한 그릇을 빚는 과정이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함이며 수도자의 기도나 수행과 같음을 이미 알고 행하는 도공. 그릇을 빚는 도공에게도 마지막 해탈의 단계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이와 같지 않을까.
※ 이 글은 계간 사람과사회(2017년 봄호)에 있는 것을 게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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