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由를 위한 긴 旅情
"시인 김수영의 삶은 깨진 吐器들로 끼워 맞춘 질박한 스테인드글라스 같다. 그의 窓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4.19혁명 등 굵직굵직한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예리한 窓이다"
1
너는 언제부터 세상과 배를 대고 서기 시작했느냐
너와 나 사이에 세상이 있었는지
세상과 나 사이에 네가 있었는지
…
유리창이여
너는 언제부터 세상과 배를 대고 서기 시작했느냐
-김수영, ‘너는 언제부터 세상과 배를 대고 서기 시작했느냐’ 중에서(1955)
시인 김수영(金洙暎, 1921년 11월 27일~1968년 6월 16일)의 삶은 깨진 토기(吐器)들로 끼워 맞춘 질박한 스테인드글라스 같다. 그의 창(窓)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4.19혁명 등 굵직굵직한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예리한 窓이다. 세상을 향해 열려 있는 창문은 자기 자신에게는 깨진 유리조각이 되어 붉은 피를 내곤 하는데, 그것은 어쩌면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부친의 강권에 의해 선린상업학교를 입학하게 된 유년기의 상처, 병약한 신체조건, 전쟁 중 포로수용소의 수감 생활과 그로 인한 가정생활 의 불화가 원인이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2
근현대 한국시에 모더니즘이라는 잣대를 들이댄다면 1920년대 이장희, 1930년대 김기림, 백석, 이상, 오장환 등이 떠오르는데, 1950년대에 이르러 한국적 모더니즘을 완성하고 있는 이는 김수영이 아닐까 한다. 시적 표현의 개성적 특성이랄지, 반전통주의적 성향과 새로움의 비전, 자아의 탐구와 존재 인식이 그의 시에서 종종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시어(詩語)를 반복적으로 나열하여 주제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도 하고, 이미지를 병치하면서 새로운 이미지를 표현해 내기도 한다.
여편네의 방에 와서 기거를 같이 해도
나는 점점 어린애
나는 점점 어린애
태양 아래의 단 하나의 어린애
죽음 아래의 단 하나의 어린애
애정 아래의 단 하나의 어린애…
-김수영, ‘여편네의 방에 와서’ 중에서
모르지?
아무리 더워도 베와이샤쓰의 에리를
안쪽으로 접어 넣지 않는 이유,
모르지?
아무리 혼자 있어도 베와이샤쓰의 에리를
안쪽으로 접어 넣지 않는 이유,
모르지?
술이 거나해서 아무리 졸려도
의젓한 포오즈는
의젓한 포오즈는 취하고 있는 이유(理由),
모르지?
모르지?
–김수영, ‘모르지?’ 중에서
그는 전통적 운율과는 다른 리듬을 확보하고 끊어읽기를 의도적으로 파괴하면서 개성적인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언어인식은 모더니즘적 세계관과 관련이 있으며, 특히 초현실주의자들이 즐겨 사용한 객관적 우연성과 일맥상통한 면이 있다. 도립倒立된 이미지로 표상되는 부성父性의 거부, 상황론적 존재 인식이 아닌 존재 자체로서의 고민은, 그의 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공자(孔子)의 생활난(生活難)’, ‘아버지의 사진(寫眞)’에서 볼 수 있다.
3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돌아왔을 때 그가 사망한 줄 알았던 가족과의 화합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의 시 곳곳에서는 여성혐오적인 표현이 나오는데, 그것은 개인사적으로 들여다보면 이해가 가는 부분이 있다. 한국 전쟁 발발 후 김수영이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수감되었을 당시, 그가 사망한 것으로 안 아내는 김수영의 절친과 서로 위로하며 같이 살게 된다. 물론 그가 돌아와 다시 결혼생활을 유지하지만, 이미 수용소에서 바닥을 경험한 그가 겪었을 아픔과 상처는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40대의 김수영이 시대적 아픔과 개인사적 핍진함을 극복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힘’으로서의 ‘시학’인데, 시대를 통찰하는 힘으로서 ‘반시론’을 제시하며 자기 자신과 세상에 대해 늘 경계하며 성찰하는 태도를 보인다.
폭포瀑布는 곧은 절벽(絶壁)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規定)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向)하여 떨어진다는 의미(意味)도 없이
계절(季節)과 주야(晝夜)를 가리지 않고
고매(高邁)한 정신(精神)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금잔화(金盞花)도 인가(人家)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瀑布)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醉)할 순간(瞬間)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懶惰)와 안정(安定)을 뒤집어놓은 듯이
높이도 폭(幅)도 없이
떨어진다
-김수영, ‘폭포(瀑布)’ 전문
4
어린 날 서당에서 공부하며 조부(祖父)로부터 전통적 사고방식의 세례를 받고 자라, 상업학교 진학, 연희전문대 영문과 편입, 전쟁과 4.19혁명을 목도한 영문학 출신의 기자, 그리고 포로수용소의 수감생활… 신산했던 삶을 살아 온 김수영, 욕망을 지닌 한 인간 개인으로 그를 바라본다면 ‘정신’만이 그를 지탱하게 할 수 있었을까. 김현은 일찍이 김수영의 시가 ‘노래’가 아니라 ‘절규’라고 한 바 있다.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도시(都市)의 끝에
사그러져가는 라디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
강이 흐르고 그 강건너에 사랑하는
암흑이 있고 三월을 바라보는 마른나무들이
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고 그 봉오리의
속삭임이 안개처럼 이는 저쪽에 쪽빛
산이
…
-김수영, ‘사랑의 변주곡(變奏曲)’ 중에서
복사씨같고 사과씨같은 단단한 사랑, 도시의 피로에서 배우는 사랑, 한번은 미쳐 날뛸 사랑. 인류종언의 날에 자신의 술을 다 마시고나서야 깨닫게 되는 단단한 ‘사랑’이 김수영을 지탱하게 해 주지는 않았을까.
5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 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김수영, ‘풀’ 전문(1968. 5. 29)
48세의 나이로 귀가 중 버스에 치어 사망한 그가 생(生)의 막바지에 남긴 작품이다.
갈수록 강퍅한 세상에서 쓸쓸한 마음이 든다면, 북한산 자락에 있는 그를 한 번 찾아가보자. 김수영문학관에 가면 그가 형형한 눈빛으로 까칠하게 당신을 바라볼지 모르나, 그의 시는 당신을 위로할 것이다.
자유를 위하여 비상하는 당신의 이마를,
바람처럼, 바람 되어
쓰다듬어 줄지 모를 일이다.
참고
『김수영 시전집』(1989, 민음사), 『시여, 침을 뱉어라』(1980, 민음사), 『퓨리턴의 초상』(1976, 민음사)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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