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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원 01] 진보와 보수, 상식과 몰상식

[김기원 ‘개혁적 진보의 메아리’ 연재 01] 베를린 통신 39 진보와 보수, 상식과 몰상식…“개념 혼란이 소통 어렵게 한다”

진보파는 실력이 부족합니다. 실력 부족은 이념의 혼란에서 기인하는 바 큽니다. 진보파 중에는 아직도 시대착오적인 주사파 이념이나 사회주의 혁명론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이 없지 않습니다. 거기서 벗어났다 하더라도 무엇을 대안으로 삼아야 할지에 관해 진보파 내에서 정식 토론도 잘 하지 않습니다. 이제 겨우 북유럽의 복지 모델을 대안으로 거론하고 있는 정도입니다.

김기원 교수는 1983년부터 2014년까지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2014년 12월 7일 오후 10시 지병인 간암으로 별세(향년 61세)했다. 진보학계의 대표적 경제학자라는 평가를 받는 김 교수는 지난해 9월 이후 독일 베를린대학에서 안식 연수를 하다가 올해 10월 현지에서 간암 판정을 받고 귀국한 뒤 병원 치료를 받아왔다. 고인은 8·15 해방 직후 한국의 경제 상황을 주제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한국 경제의 핵심 이슈인 재벌 문제를 오랫동안 천착해왔고, 최근에는 ‘북한’, ‘북한 사회’로 관심을 확대했다. 대표적 시민단체인 참여연대 등을 통해 현실 참여에도 적극 나섰다. 2013년 9월부터 1년 동안 독일 베를린대학에서 안식년을 보내면서도 ‘베를린통신’이라는 제목으로 자신이 운영하는 블로그 ‘개혁적 진보의 메아리’에 41편을 기고하는 등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줬다. 김 교수는 진보 성향을 분명히 하면서도, 진보 진영이 흔히 비판받는 ‘경직성’과 ‘도그마’를 경계했다. 특히 이 같은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현실에 기반을 둔 진단과 대안 제시’를 큰 원칙으로 삼아 직접 실천함으로써 후학에게 존경을 받았다. 사진=이수희

[연재] 김기원, 『개혁적 진보의 메아리』 01

사람과사회 2017 가을 통권3호

“개념 혼란이 소통 어렵게 만든다”

김기원 교수는 1983년부터 2014년까지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2014년 12월 7일 오후 10시 지병인 간암으로 별세(향년 61세)했다. 진보학계의 대표적 경제학자라는 평가를 받는 김 교수는 지난해 9월 이후 독일 베를린대학에서 안식 연수를 하다가 10월 현지에서 간암 판정을 받고 귀국한 뒤 병원 치료를 받아왔다.
고인은 8·15 해방 직후 한국의 경제 상황을 주제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한국 경제의 핵심 이슈인 재벌 문제를 오랫동안 천착해왔고, 최근에는 ‘북한’, ‘북한 사회’로 관심을 확대했다. 대표적 시민단체인 참여연대 등을 통해 현실 참여에도 적극 나섰다. 2013년 9월부터 1년 동안 독일 베를린대학에서 안식년을 보내면서도 ‘베를린통신’이라는 제목으로 자신이 운영하는 블로그 ‘개혁적 진보의 메아리’에 41편을 기고하는 등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줬다. 김 교수는 진보 성향을 분명히 하면서도, 진보 진영이 흔히 비판받는 ‘경직성’과 ‘도그마’를 경계했다. 특히 이 같은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현실에 기반을 둔 진단과 대안 제시’를 큰 원칙으로 삼아 직접 실천함으로써 후학에게 존경을 받았다.
사람과사회는 진보경제학계의 대표로 손꼽히는 김기원 교수의 블로그 ‘개혁적 진보의 메아리’와 유고집 『개혁적 진보의 메아리』(창작과비평, 2015.12.07)를 참조해 주요 글을 연재한다. 김 교수는 별세 직전 사람과사회 자문위원을 수락한 바 있다. 김 교수의 글 연재는 부인인 이수희 선생과 창작과비평의 동의를 받아 진행하며 정원호 김기원교수추모사업회 회장의 도움도 받았다.
김 교수 글은 6~8회로 나눠 연재할 예정이다. 연재를 시작하는 3호에서는 ‘베를린 통신 39 진보·보수·중도 (2) 진보와 보수, 상식과 몰상식’(2014.09.16)이라는 글을 골랐다. 글 원문은 블로그나 유고집을 참조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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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통신 39 진보·보수·중도 (2) 진보와 보수, 상식과 몰상식

개념 정립의 필요성

정치를 하면 무얼 먼저 하겠느냐는 제자의 질문에, 공자는 “반드시 이름을 바로잡겠다. (…)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조롭지 않으며, 말이 순조롭지 않으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必也正名乎…名不正則言不順 言不順則事不成)”라고 답했습니다.

공자의 이 정명론(正名論)은 임금이든 신하든 각자 자기 이름에 걸맞게 행동해야 한다는 의미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엔 사물의 이름을 제대로 붙여야 세상사가 제대로 굴러간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수학에서 정의(定義, definition)가 분명해야 정답을 찾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애매모호한 개념으로 서로 대화하고 논쟁하는 것은 불어와 이태리어로 서로 대화하고 논쟁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들 사이에 뜻이 언뜻 통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정작 중요한 대목에선 혼선을 빚기 쉽습니다.

한국 현실에선 바로 이처럼 개념의 혼란이 소통을 어렵게 만드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친북이니 종북이니 하는 애매한 용어를 동원한 색깔론이 이성적 대화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지요. 신자유주의라는 딱지 붙이기도 시장의 의의와 한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흔히들 엄밀한 정의 없이 막연한 느낌만으로 사용하는 진보↔보수, 개혁↔수구, 중도 같은 용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일각에선 아예 진보, 보수라는 개념의 폐기를 주장하기도 합니다.

진보와 보수의 구분을 넘어서자고도 하지요. 세월호 참사, 박근혜의 묘연한 7시간, 원세훈에 대한 선거법 무죄 판결, 박희태의 성추행 이런 것들이 어찌 진보↔보수와 같은 고상한(?) 개념으로 파악될 수 있느냐고 합니다.

일리 있는 지적들입니다. 한국 사회에선 진보↔보수의 개념 구분으로는 파악하기 어려운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진보↔보수의 엄밀한 개념 정립이 필요하고, 이와 다른 차원에서 개혁(상식)↔수구(몰상식)의 개념 구분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개념이 현재 애매모호하다고 해서 개념 그 자체를 폐기하자는 것은 자칫하면 홍길동이 정식 자식인지 애매모호하다고 해서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게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특히 실천적으로 중요한 경우엔, 애매모호하다고 해서 폐기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개념을 더 분명히 해야 하겠지요. 정치세력 사이의 이념과 정책의 대립이 도대체 무슨 이슈를 둘러싸고 벌어지는지를 이해하고, 또한 보다 나은 사회로의 방향을 설정하기 위해선 바로 이러한 진보↔보수, 개혁↔수구 등의 개념 구분이 필요한 법입니다.

정치 세력 사이의 대립은 주로 정책을 둘러싸고 전개됩니다. 미국에선 민주당과 공화당이 의료보험제도에 관해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한국에선 요즘 세월호 특별법이나 담배값 인상을 둘러싸고 여야가 대립하고 있고, 예전엔 사학법, 국가보안법, 종합부동산세, 재벌개혁 등등을 둘러싸고 싸웠습니다.

이런 식으로 어떤 정치 세력이 지지하는 개별 정책들의 종합적 지향성이 바로 그 정치 세력의 이념입니다. 따라서 정치 세력을 ‘총체적으로 규정’하는 개념이 진보↔보수, 개혁↔수구인 셈입니다. 물론 각각의 정책에 대해서도 진보↔보수, 개혁↔수구 중 어디에 속하는지를 따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당만이 아니라 개인의 이념도 마찬가지로 규정됩니다.

새누리당 내에는 이념과 성향이 다소 다른 사람들이 섞여 있고, 특히 새민련은 잡탕이지요. 게다가 한국의 여야 대립에는 아직도 지역대립 요소가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당론으로 뭉뚱그려지는 방향성이란 것은 존재하고, 그걸 규정하기 위해 진보↔보수, 개혁↔수구의 개념 정립이 필요합니다.

역사적으론 진보↔보수 개념보다 좌↔우 개념이 먼저 등장했습니다. 아래 사진에서처럼 18세기 말 프랑스혁명 당시 국민의회가 개최된 바 있습니다. 이때 국왕을 지지하는 세력은 의장석에서 보아 오른쪽에 앉았고, 혁명을 지지하는 세력은 왼쪽에 앉았습니다. 그리해서 좌↔우 구분이 생겨난 것입니다. 보수주의는 프랑스혁명 이전의 사회적 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데서 출발했으니, 기본적으로 우파에 해당합니다.

진보↔보수 개념의 역사

역사적으론 진보↔보수 개념보다 좌↔우 개념이 먼저 등장했습니다. 아래 사진에서처럼 18세기 말 프랑스혁명 당시 국민의회가 개최된 바 있습니다. 이때 국왕을 지지하는 세력은 의장석에서 보아 오른쪽에 앉았고, 혁명을 지지하는 세력은 왼쪽에 앉았습니다. 그리해서 좌↔우 구분이 생겨난 것입니다. 보수주의는 프랑스혁명 이전의 사회적 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데서 출발했으니, 기본적으로 우파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이런 개념 구분은 시대 상황에 따라 조금씩 그 내용을 달리해 왔습니다. 봉건왕조가 존재할 때의 좌↔우 구분과 그런 왕조체제가 사라지고 난 이후의 좌↔우 구분은 달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회주의 혁명 사상이 융성하고 사회주의 국가가 존재하던 시기의 좌↔우 구분과 사회주의 사상과 체제가 몰락하고 난 이후의 좌↔우 구분 역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대립을 좌우대립으로 파악하는 게 거의 무의미해졌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일제강점기, 광복 직후 및 한국전쟁 당시의 좌↔우 구분과 오늘날의 좌↔우 구분은 달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날 한국 정치세력 사이의 주요 대립은 사회주의냐 자본주의냐가 아니라 어떤 자본주의냐 하는 것이니까요.

다만 한국전쟁의 비극적 역사로 인해 우리에게선 좌파라면 북한 체제를 동경하는 ‘빨갱이’를 연상시키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좌↔우 구분 대신에 진보↔보수의 구분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 물론 보수파 일부에서 진보파를 악의적으로 공격하기 위해 좌파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기는 합니다.

남북한 사이의 적대 관계가 해소되고 나면 좌파라는 용어를 훨씬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좌파라는 용어의 사용을 어느 정도 자제할 수밖에 없는 실정입니다. 다만 서구 용어법 아니 동서고금의 보편적 용어법으로서의 좌파는 한국에서 진보파에 해당하고, 우파는 보수파에 해당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뿐만 아니라 서구에서도 좌↔우 구분과 진보↔보수 구분을 서로 다르게 파악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예컨대 진보란 뭔가를 변화 발전시키는 것이고, 보수란 현재 상태를 그대로 지키려는 것이라는 식의 해석이 바로 여기에 해당합니다. 또는 급진적 변화와 점진적 변화로 진보↔보수를 구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해석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생산력 발전 이외엔 도대체 무엇이 변화 발전인지를 정의하기는 곤란합니다. 그리고 대처나 레이건처럼 기존의 노사 관계나 복지제도를 크게 ‘변화’시키려 한 사람들을 진보파라고 하면 혼란스러워집니다. 한국에서 영리병원을 인정하지 않는 기존의 의료정책을 고수하려는 걸 보수파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좌↔우 구분과 진보↔보수 구분을 동일하게 파악하는 입장을 취하고자 합니다. 좌↔우 개념을 동서고금에 널리 통용되도록 넓게 파악하면, 그것은 진보↔보수 구분과 겹치게 마련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한국전쟁을 통해 사회주의 좌파의 세력은 거의 말살되었습니다. 대신에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 하에서 민주↔독재의 대립 구도가 설정되었습니다. 그러다 1987년 민주화 이후엔 다시 사회주의 좌파도 일부 등장했고, 한국사회의 이념적 정책적 대립 구도는 한층 복잡해지기도 했습니다.

다만 이것도 일시적이었습니다. 옛 소련 동구 체제가 몰락하고 북한의 실상이 드러나면서, 이제 ‘민주당↔새누리당’이라는 ‘진보↔보수’ 대립 전선이 한국사회의 주된 대립 구도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저는 한국에서의 이러한 정치 대립을 나름대로 고찰해보고 서구와 비교하면서, 제 나름의 좌(진보)↔우(보수) 개념을 정립했습니다.

하지만 이게 완전히 제 자의적인 구분법은 아닙니다. 제가 여러 해 전 좌(진보)↔우(보수) 개념 구분에 관한 글을 쓰고 난 이후 접하게 된 유명한 서구학자들 중에서도 저와 비슷한 구분법을 취하고 있는 학자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이탈리아의 노르베르토 보비오(Norberto Bobbio)의 저작 『Left and Right: The Significance of a Political Distinction』을 보면 좌↔우 구분을 ‘불평등’에 대한 접근법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인식들과 흐름을 같이 하되, 한국적 상황에서는 좌↔우 구분과는 별개로 개혁(상식)↔수구(몰상식) 구분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아울러 좌↔우 구분을 동서고금에 적용할 수 있게 했고, 동양의 음양(陰陽) 사상과도 접목시켰습니다.

동서고금에 통용될 수 있는 진보(좌)↔보수(우) 개념은 다음과 같습니다. 진보파는 사회적 약자를 상대적으로 더 대변하며, 보수파는 사회적 강자를 상대적으로 더 대변합니다.

진보(좌)↔보수(우) 개념과 양자의 균형

동서고금에 통용될 수 있는 진보(좌)↔보수(우) 개념은 다음과 같습니다. 진보파는 사회적 약자를 상대적으로 더 대변하며, 보수파는 사회적 강자를 상대적으로 더 대변합니다.

진보파가 대변하는 사회적 약자는 지난 글에서 살펴본 걸인이나 빈민층과 같은 경제적 하층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장애인, 성(性) 소수자, 양심적 병역 거부자, 미국의 흑인, 외국인노동자, 성매매 여성처럼 사회에서 소외당하는 모든 집단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한편, 보수파가 대변하는 사회적 강자가 모두 ‘나쁜 놈’들인 것은 아닙니다. 남들보다 머리가 뛰어나고 더 열심히 일해서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또한 이들은 성(性)이나 인종 문제에서 보듯이 사회적 주류로서 숫자 면에서 다수를 차지하기도 합니다.

사회적 약자가 다수이니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진보파가 항상 승리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적 강자냐 약자냐 하는 것은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재벌 총수나 고급 관료나 특권 엘리트만이 사회적 강자는 아닙니다. 연봉 7000만 원의 대기업 회사원은 연봉 2000만 원의 비정규직보다는 사회적 강자입니다. 그리고 호모나 병역 거부자 문제에서처럼 사회적 약자가 애당초 소수인 경우도 있습니다. 이리해 선거에서 진보파가 이기기도 하고 보수파가 이기기도 하는 것이지요.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진보파는 사회연대(공생), 경제적 평등, 분배, 민주성, 정치적 자유를 강조합니다. 이런 가치들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비인간적인 경제 모델에 반대합니다. “규제받지 않은 자본주의는 새로운 형태의 독재이며, 불평등은 우리 시대의 가장 큰 경제적 문제”라고 했습니다. 이건 바로 좌파(진보파)의 성격을 가장 잘 대표하는 말씀입니다.

교황의 말씀대로 종교란 원래 사회경제적 약자를 품어주고, 사회가 지나치게 물질만능에 흐르지 않도록 막아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만 기득권화한 오늘날의 종교가 그런 역할을 제대로 못해서 문제인 것이지요. 서울대 조국 교수는 교황을 좌파가 아니라 저파(低派)로 규정했습니다. 교황이 사회의 저층에 마음을 많이 쏟고 있다는 지적인 셈입니다. 역시 기지가 번득이는 조국 교수다운 표현입니다.

하지만 사실 좌파는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세력이고, 따라서 좌파가 바로 저파입니다. 그러니 교황은 저파이자 좌파입니다. 교황을 좌파로 규정하는 건, 결코 교황을 욕되게 하는 일이 아닙니다. 교황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고, 또한 좌파의 영광입니다.

한국의 진보파, 즉 좌파들이 이런 교황의 정신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해서 문제이지, 좌파가 결코 악마이거나 북한정권에 무조건 동조하는 ‘빨갱이’는 아닌 것입니다. 반면에 사회적 강자를 대변하는 보수파는 자기책임(경쟁), 경제적 자유, 성장, 효율성, 정치적 질서를 강조합니다. 이런 가치들은 사회적 강자가 더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이들 역시 쉽게 배척할 수 없는 가치이지요.

인간 본성으로 따지자면, 진보파는 음(陰)과 모성(母性)의 기(氣)가 강하고, 보수파는 양(陽)과 부성(父性)의 기(氣)가 강하다고 생각됩니다. 어미는 상대적으로 못난 자식이 더 안타까운 반면, 아비는 잘난 자식을 편애하기 쉽습니다.

이걸 인체의 신경계에 비유하자면, 진보와 보수는 각각 부교감신경과 교감신경에 견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부교감신경이 음적(陰的) 활동(이완)에 해당하고, 교감신경이 양적(陽的) 활동(긴장)에 해당하니까요.

진보↔보수를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적용하면 어찌될까요.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경제활동을 조절하는 기본적인 두 축은 ‘시장’과 ‘국가’입니다. 진보↔보수의 구분은 이 시장과 국가의 상대적 양(量)에 관한 것입니다.

진보파는 사회적 약자를 돕기 위해 국가를 통해 세금을 더 거두어 복지 지출을 확대할 것을 주장합니다. 이런 진보파가 극단으로 흐르면, 국가가 경제활동을 주관하는 사회주의가 됩니다.

반대로 보수파는 국가의 활동을 사회적 강자의 재산과 생명을 지키는 일로만 제한하려 하고, 세금과 복지지출을 최소화하고자 합니다. 이런 보수파가 극단으로 흐르면, 시장에 대부분을 맡기려는 시장만능주의, 정글자본주의가 됩니다.

개인과 사회가 건전하게 발전하려면 진보적 논리(陰)와 보수적 논리(陽)가 균형을 이뤄야 합니다. 음양의 조화가 바로 그걸 나타냅니다. 건강한 인간상태를 나타내는 음양화평지인(陰陽和平之人)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제가 건강을 위해 수련했던 활원(活元)이라는 일종의 요가 운동에서도, 긴장(陽)과 이완(陰)의 균형을 건강의 기본 원리로 보고 있습니다. 선도(仙道) 수련에서 들숨과 날숨의 균형을 중시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에선 진보파와 보수파가 상대를 악으로 규정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서로 살기(殺氣)가 그득하지요. 특히 양자의 극단적인 분파에서 그런 경향이 강합니다. 통합진보당이나 노동당은 새누리당을 아마도 공존 대상이 아니라 타도 대상으로 간주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새누리당의 극단적인 세력들은 통합진보당이나 노동당은 물론 새민련까지 타도대상으로 여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우리 정치판에서 독일이나 북유럽처럼 대화와 타협이 자리 잡기는 힘들지요. 진보와 보수가 선악의 관계가 아니라 균형을 추구해야 할 관계임을 망각한 소치입니다.

진보와 보수 어느 한 쪽이 지나치면 개인이나 사회가 병듭니다. 활력을 잃고 붕괴한 옛 소련 및 동구 체제는 진보파 논리의 극단적 사례입니다. 반대로 양극화가 심해지고 금융위기가 빈발하는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시장만능주의라는 과도한 보수파 논리가 지배한 결과입니다.

한국 사회는 그동안의 압축적 고도성장 과정에서 성장 이데올로기가 압도했고, 미국 유학생 출신이 학계를 지배함으로써 미국식 시장만능주의가 세계 표준인 것처럼 착각하는 논리가 휩쓸었고, 남북 분단으로 진보 이념이 맥을 추지 못함으로써 지나치게 보수 쪽으로 기울어 있는 셈입니다.

이런 지나침을 바로잡고 진보와 보수가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지난 글에서 걸인 대책에서 진보와 보수가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고 한 것처럼, 다른 나라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진보와 보수의 비율이 어느 정도가 되어야 균형인가 하는 정답은 없습니다.

진보파와 보수파가 서로 상대를 인정하는 속에서 생산적으로 경쟁할 수 있을 때, 바로 균형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상대를 인정한다는 것은 진보, 보수 모두 극단적이지 않다는 의미이고, 그러면 대화와 타협이 가능해집니다.

양 세력이 균형을 이루려면, 진보, 보수 모두가 이 글 끝부분에서 논할 개혁적(상식적·합리적) 세력일 것도 전제가 되어야겠지요. 오늘날 세계에서는 독일을 비롯해 북유럽이 여기에 가장 가까운 셈입니다.

진보와 보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선 시장과 국가의 양적(量的) 관계를 의미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시장과 국가의 관계가 일정 비율 이상이면 보수이고 그 이하이면 진보라는 식으로 구분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보라는 이름이 붙은 정당만이 진보파 정당인 것도 아닙니다.

진보↔보수의 상대성과 상호침투

진보와 보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선 시장과 국가의 양적(量的) 관계를 의미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시장과 국가의 관계가 일정 비율 이상이면 보수이고 그 이하이면 진보라는 식으로 구분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보라는 이름이 붙은 정당만이 진보파 정당인 것도 아닙니다.

진보나 보수는 다른 이념과 정파에 대비한 상대적 개념입니다. 새민련은 새누리당보다는 진보적이고 노동당보다는 보수적이라는 식으로 나눠지는 셈입니다.

한국의 노동당과 같은 진보정당은 자신들만이 진보정당이고 새민련은 자유주의정당이라는 식으로 말하고 싶어합니다. 진보라는 말을 독점하고 싶은 것이지요.

그런데 노동당은 사회주의정당이고 새민련은 자본주의정당이라는 식의 구분이라면 납득이 갑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고 양자를 진보와 자유로 구분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는 구분입니다. 왜냐하면 진보-보수는 모두 자유와 겹치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진보는 정치적 자유를, 보수는 경제적 자유를 강조하니까요.

게다가 요즘 와선 노동당도 사회주의를 당면과제가 아니라 장기적인 목표 정도로 생각하는 듯합니다. 그러니 그냥 노동당이 새민련보다 더 진보적이라는 식으로 구분하는 게 훨씬 이치에 맞습니다.

나라로 따지자면, 오늘날 자본주의 중에서 북유럽이 가장 진보적인 반면, 미국은 유럽보다 보수적입니다. 독일의 보수파인 기민련(CDU/CSU)도 한국에 오면 아마도 새민련보다 더 진보적일 것입니다. 그리고 미국 내에선 민주당이 공화당보다 진보적입니다. 이런 식으로 진보↔보수 구분은 상대적입니다.

또 진보파라고 보수파 가치인 자기책임이나 성장에 전혀 무관심하지는 않습니다. 보수파도 진보파 가치인 사회적 연대나 분배를 무조건 배척하지는 않습니다. 상대적으로 진보파는 사회적 약자를 더 배려하고, 보수파는 상대적으로 사회적 강자에 더 관심을 쏟을 뿐입니다.

그리고 진보↔보수는 상호침투합니다.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이야기냐고요. 제 어렴풋한 기억에 의하면, 모택동의 『모순론』에서는 대립물이 ‘상호투쟁’만 하는 게 아니라 ‘상호침투’도 한다고 나와 있습니다(이 저작의 실제 저자는 모택동이 아니라 주은래 등 여러 공산당인물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만, 그런 건 여기서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택동이 무슨 대단한 철학자는 아닙니다. 하지만 일본 제국주의 및 국민당과 투쟁하면서 그가 나름대로 획득한 현실 인식으로서, 진보↔보수의 상호침투를 설명하는 데 유용합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독일의 보수파 수상 비스마르크는 사회주의를 견제하기 위해 사회보장제도를 수립했습니다. 미국의 닉슨은 중국과 국교를 맺었습니다. 남한의 이승만이 북한 토지개혁의 영향으로 농지개혁을 시행했다든가, 박정희가 의료보험제도를 도입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게 모두 진보이념이 보수파에 침투된 결과입니다.

반대로 미국의 상대적 진보파인 민주당 대통령 케네디는 쿠바를 침공했습니다. 독일 사민당 총리였던 슈레더는 경제성장을 위해 노동자들과 실업자의 권리를 제약했습니다. 한국의 노무현은 한미FTA와 같은 보수파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이처럼 보수파, 진보파는 모두 상대를 견제하기 위해 상대편 정책에 속하는 걸 때로는 실천에 옮기기도 하는 법입니다. 이게 대립물의 상호침투입니다. 다만 그렇더라도 무게 중심은 자기편에 두는 법이지요.

개혁(합리·상식)↔수구(비합리·몰상식)

한국 사회에서는 진보↔보수의 구분과는 별개로 개혁↔수구의 구분도 강조될 필요가 있습니다. 앞에서 진보는 음적(陰的) 기운, 보수는 양적(陽的) 기운을 나타낸다고 말했습니다. 개혁과 수구는 이와 달리 기운이 맑으냐(淸氣), 탁하냐(濁氣)의 구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보와 보수는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 관계인 반면, 개혁(합리·상식)↔수구(비합리·몰상식)의 관계는 수구를 물리치고 개혁으로 나가야 하는 관계입니다. 다만 그 과정을 급진적으로 추진해야 하느냐 점진적으로 추진해야 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사회가 병들어 있는데 개인이 고고하게 맑은 기운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건 도사(道士)의 경지입니다. 그러나 진보↔보수가 상대적이듯이, 맑으냐 탁하냐 하는 데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는 것이지요.

맑은 기운에 입각한 개혁파(즉 합리파·상식파)는 사실과 이성에 입각해 효율성과 민주성 모두를 해치는 사회 시스템, 예컨대 부패나 특권 구조를 뜯어고치려 합니다. 수구파(즉 비합리파·몰상식파)는 이에 저항하는 세력입니다. 조선시대 조광조나 김옥균 같은 세력은 그런 의미에서 개혁파에 속하는 셈입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는 어떨까요. 진보와 보수는 시장과 국가의 상대적 양(量)의 관계라고 했습니다. 개혁과 수구는 시장과 국가의 질(質)의 문제입니다. 시장의 질을 높인다는 것은 시장의 투명성과 공정경쟁을 발전시키는 것이고, 국가의 질을 높인다는 것은 국가의 민주성과 효율성을 높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많은 구미 선진국에선 시장과 국가의 질이라는 개혁↔수구의 문제는 덜 심각합니다(다만 이라크 침공과 같은 수구적 제국주의의 형태가 존재하므로, 국제관계에서는 다른 차원의 논의가 필요합니다). 이와 달리 후진국은 물론 한국도 바람직한 선진국으로 나아가기 위해, 수구파를 물리치고 개혁을 추구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한국의 진보↔보수와 개혁↔수구는 뒤엉킨 모습을 보여, 진보파가 곧 개혁파는 아닙니다. 주체사상파는 복지확대를 주장하는 점에서 진보파라 할 수 있으나, 북한체제의 개혁과 개방에 반대하는 수구파입니다. 또한 진보파의 상당수는 거대기업 정규직, 공기업 정규직, 공무원이 누리는 부당한 특권의 문제를 외면하는 수구파에 가깝습니다. 재벌체제의 개혁을 거부하는 장하준 교수 역시 수구파인 셈입니다. 반면에 보수파 중에서도 국가와 시장구조의 개혁에 적극적인 개혁적 보수파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새누리당 내의 소수 쇄신파가 적어도 겉으로 지향하는 바는 여기에 가깝습니다.그런데 한국의 진보↔보수와 개혁↔수구는 뒤엉킨 모습을 보여, 진보파가 곧 개혁파는 아닙니다. 주체사상파는 복지확대를 주장하는 점에서 진보파라 할 수 있으나, 북한체제의 개혁과 개방에 반대하는 수구파입니다. 또한 진보파의 상당수는 거대기업 정규직, 공기업 정규직, 공무원이 누리는 부당한 특권의 문제를 외면하는 수구파에 가깝습니다. 재벌체제의 개혁을 거부하는 장하준 교수 역시 수구파인 셈입니다. 반면에 보수파 중에서도 국가와 시장구조의 개혁에 적극적인 개혁적 보수파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새누리당 내의 소수 쇄신파가 적어도 겉으로 지향하는 바는 여기에 가깝습니다.

시장과 국가만이 아니라 ‘사회문화’의 측면에서도 개혁(합리·상식)↔수구(비합리·몰상식)의 문제를 짚어볼 수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에서 드러난 승무원과 해경 공무원의 직업윤리 부재는 몰상식적인 한국 문화의 수준을 드러냈습니다.

검찰 간부가 섹스 파티를 벌이고, 국회의장까지 지낸 박희태가 성추행을 저지르고도 뻔뻔한 태도를 보인다든가, 일베 등이 세월호 유족에게 막말을 퍼붓는다든가, OO전우회가 걸핏하면 가스통을 들고 설친다든가 하는 일 등은 모두 한국 보수의 저열한 문화 수준을 표현합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상류층의 도덕적 의무)” 같은 건 약에 쓰려 해도 찾기가 힘들지요.

진보파 역시 이런 낙후된 문화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민주노총 대의원대회나 통합진보당 대회에서 발생했던 폭력적인 의사 진행 방해를 보십시오. 진보파라고 하면서 재벌 돈을 받고 부끄러워하지도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진보언론이 수구언론처럼 진영논리에 갇혀 취재를 성실히 하지 않는다든가, 심지어 조선일보 사설을 표절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한국 사회의 이념적 정책적 대립구도에서는 진보↔보수와는 별개 차원에서 개혁↔수구의 문제가 존재합니다. 이것을 편의상 그림으로 표시하면 아래와 같이 진보(좌)↔보수(우)는 X축에, 개혁↔수구는 Y축에 표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 시절엔 야당을 비롯한 반정부세력은 ‘반독재 민주화투쟁’만으로 충분했습니다. “무릎을 꿇고 살기보다는 서서 죽기를 원한다”는 강철 같은 불굴(不屈)의 자세가 기본 동력이었습니다. 그러나 1987년 민주화 이후의 한국 사회는 달라졌습니다. 이슈(대치전선)에 따라 대응(투쟁) 방식이 달라져야 하게 된 것입니다.

즉 한편으로는 진보와 보수 사이의 적절한 균형을 확보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수구(몰상식)를 물리치고 개혁(상식)으로 나가야 하는 이중적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북한 관계까지 포함하면 3중적 과제입니다). 위의 그림에서는 오른쪽 아래에 위치한 한국사회의 좌표를 X축 상에서 왼쪽으로 옮기고, 동시에 Y축 상에서 위쪽으로 옮겨가는 일입니다.

새민련을 비롯한 한국의 진보파는 이렇게 변화한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고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해 반독재 민주화투쟁 당시의 진정성은 크게 약화된 채 당시의 운동권적 관성적 행태를 벗어나지 못하기도 하고, 또는 그와 정반대 편향으로서 정체불명의 ‘실용주의’, ‘중도노선’을 부르짖기도 합니다.

진보파가 근래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는 데는 여러 요인이 있겠습니다. 리더십을 갖춘 인물의 부재, 정치 세력과 대중의 괴리 같은 것도 그 주요 요인입니다. 하지만 이와 더불어 한국 사회가 진보와 개혁의 이중적 과제를 떠안고 있다는 인식의 결여도 그 하나의 요인입니다. 그러다보니 제대로 정책 개발도 못하고,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상 다소 따분한 이론적인 논의를 펼쳐 보았습니다. 한국 사회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불가피한 과정으로 생각해 주십시오. 다음 글에서는 이런 논의를 전제로 중도란 게 과연 무엇인가, 그게 올바른 정치노선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따져 보겠습니다.

김기원 교수 1주기 추도식 및 출간기념회. 사진=이수희

김기원(金基元)
1953년 부산에서 출생해 부산경남고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 후 같은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3년부터 2014년까지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를 지냈다. 2014년 12월 7일 간암으로 별세했다. 일제 귀속 재산 연구를 통해 재벌의 근원을 파헤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이 논문은 『미군정기의 경제구조』로 출간했다. 1990년대 들어서는 재벌 문제를 오랫동안 천착해 참여연대 등에서 활동하면서 『재벌개혁은 끝났는가』를 펴냈다. 이 외에 『현대자본주의론』, 『한국산업의 이해』, 『생활 속의 경제』, 『경제학 포털』, 『한국의 진보를 비판한다』 등을 썼고, 『기업시스템의 비교경제학』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일본 도쿄대학 사회과학연구소 객원연구원, 미국 유타대학 경제학과 객원연구원, 베를린자유대학 한국학연구소 객원연구원 등을 지냈고, 한국사회경제학회, 한국산업조직학회, 한국경제발전학회, 서울사회경제연구소 등에서 활동했다. 8·15 해방 직후 한국의 경제 상황을 주제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한국 경제의 핵심 이슈인 재벌 문제를 오랫동안 천착해왔고, ‘북한’과 ‘북한 사회’에 대한 관심도 많았다. 대표적 시민단체인 참여연대 등을 통해 현실 참여에도 적극 나섰다. 2013년 9월부터 1년 동안 독일 베를린대학에서 안식년을 보내면서도 ‘베를린통신’이라는 제목으로 자신이 운영하는 블로그인 ‘개혁적 진보의 메아리’에 41편을 기고하는 등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줬다. 김 교수는 진보 성향을 분명히 하면서도, 진보 진영이 흔히 비판받는 ‘경직성’과 ‘도그마’를 경계했다. 특히 이 같은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현실에 기반을 둔 진단과 대안 제시’를 큰 원칙으로 삼아 직접 실천함으로써 후학에게 존경을 받았다. 김기원 교수 글은 페이스북블로그에서 만날 수 있다.

참고
블로그 ‘개혁적 진보의 메아리’
http://blog.daum.net/kkkwkim/
유고집 『개혁적 진보의 메아리
http://www.yes24.com/24/Goods/23315876
김기원 교수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kywon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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