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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는 무덤에서 해도 늦지 않다”

"나는 내가 세상에 태어나 살아온 지난 35년의 세월을 더듬어 보았다. 우선 출생순위에 따라 성격이 달라진다는 부분이 특히나 흥미로웠다. 나는 부모님 두 분 다 의사인 집안에서 2남 1녀 중 두 번째 외동딸로 태어났다. 내 위로 있었던 오빠는 집안의 장손이었으므로 양가 어른들의 무한한 사랑을 듬뿍 받은 대신 나는 별 볼일 없는 여자였던 탓에 사랑을 별로 받은 기억이 없다. 남한도 남아선호사상이 강하듯이 북한 또한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때는 1994년 당시 16세일 때, 나는 무려 꼬박 14끼를 굶어본 경험이 있다. 4일하고도 두 끼. 이 일을 겪으면서 나는 나에게 강한 책임감이 자리 잡고 있음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당시 중고등학교(북한은 중고등학교가 6년제로 함께 되어 있음) 5학년에 재학 중이던 나를 비롯한 북한 주민 모두에게  들이닥친 모진 굶주림의 고통을 피해갈 수 있었던 사람은 특권층(보위부, 안전부, 당 간부 등)을 빼놓고 거의 없었다.

“포기는 무덤 속에 들어가서 해도 늦지 않다.” 언제까지일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하늘이 나에게 허락한 마지막 그날까지 나는 매일 매일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심정으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웃으며 살고 싶다. 마치 오늘이 내 인생 마지막 날인 것처럼……. 그것이야말로 후회 없이 삶을 가장 참답게, 뼛속까지 나다운 나답게 사는 길임을 이제는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과사회™
2019 여름·가을 제3권 제2·3호 통권 제10·11호
ISSN 2635-876X 92·93

나의 인생 분석

“포기는 무덤에서 해도 늦지 않다”

동명숙 안동전통명주(주) 이사

나는 복수 전공으로 선택한 사회복지 과목에서 프로이드니, 융이니, 아들러니, 삐아제니 등등 유명한 심리학자들의 심리 이론에 대해서 처음 배웠다. 참으로 흥미진진했다고나 할까……. 그리고 배우면서 여러 가지 이론들 중 어느 이론에 준하여 나를 분석하는 것이 가장 적합한지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해보았다.

고심 끝에 드디어 고른 것이 바로 아들러(Adler)의 개인심리이론이다. 아들러에 따르면 사람, 즉 개인은 사회, 집단과 상반되는 의미가 아니며, 사람은 나누어질 수 없는 단위이므로 개개인의 전체성 측면에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총체주의를 전제한다고 한다. 총체주의란 전체는 부분의 합 이상이며 유전이나 환경에 피동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창조성, 기계의 부품처럼 결합되지 않는 단일 유기체, 개인의 특이성을 강조하는 개체기술지향을 내포하고 있다고 한다.

아울러 아들러는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전제하면서 인간의 발달은 사회적 자극에 의해 동기화되며 동시에 자신의 삶을 창조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로 이해한다. 따라서 인간은 유전이나 환경적 요인보다는 스스로의 주관에 의해 결정되며 삶의 목표를 추구하는 목적지향적 존재이기 때문에 열등한 수준에서 우월한 수준으로의 이동을 추구하는 존재로 보았다. 아들러는 우월에 대한 추구는 사회적 관심을 고조시켜 원만한 대인 관계와 조화로운 사회생활을 가능하게 하는데, 이것의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 교육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 이론에 비추어서 나는 내가 세상에 태어나 살아온 지난 35년의 세월을 더듬어 보았다. 우선 출생순위에 따라 성격이 달라진다는 부분이 특히나 흥미로웠다. 나는 부모님 두 분 다 의사인 집안에서 2남 1녀 중 두 번째 외동딸로 태어났다. 내 위로 있었던 오빠는 집안의 장손이었으므로 양가 어른들의 무한한 사랑을 듬뿍 받은 대신 나는 별 볼일 없는 여자였던 탓에 사랑을 별로 받은 기억이 없다. 남한도 남아선호사상이 강하듯이 북한 또한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첫째였던 오빠는 집안의 기대 때문에 사랑을 받고, 막내동생(남자)은 또 어리기 때문에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살아남으려면 스스로를 챙기는 것이 생존에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혼자서 터득한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나는 어릴 부터 모든 것을 누구의 도움이 없이 혼자 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으며 일하시느라 바쁘셨던 어머니를 도와 동생까지 챙겨가면서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남한도 그렇듯이 북한에서도 주로 육아는 여자들의 몫이다. 일도 하며 애를 키우느라 얼마나 힘드셨을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더 도와드리지 못한 것이 미안하기만 하다.)

또한 성격이 워낙 명랑하고 활달한지라 인민학교(남한의 초등학교)에서부터 반장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으며 그렇게 이어진 역할이 중고등학교에서는 사로청(북한의 대표적 청년 학생 조직) 부위원장의 역할까지 맡아서 수행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리더십이라든가, 분위기를 주도하는데 익숙하게 되었다고 하겠다.

김노은 교수님이 주신 이 기회를 빌려 나의 살아온 지난날을 뒤돌아보게 되어서 정말 좋은 것 같다. 지금껏 성장해오면서 내가 겪었던 무수한 경험들 중 인생의 전환기에 세워주었던 굵직한 몇 가지 사연들만 떠올려보고 싶다.

“나는 14끼를 굶어본 경험이 있다”

때는 1994년 당시 16세일 때, 나는 무려 꼬박 14끼를 굶어본 경험이 있다. 4일하고도 두 끼. 이 일을 겪으면서 나는 나에게 강한 책임감이 자리 잡고 있음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당시 중고등학교(북한은 중고등학교가 6년제로 함께 되어 있음) 5학년에 재학 중이던 나를 비롯한 북한 주민 모두에게  들이닥친 모진 굶주림의 고통을 피해갈 수 있었던 사람은 특권층(보위부, 안전부, 당 간부 등)을 빼놓고 거의 없었다.

배급은 주지 않지, 쌀독에 쌀은 이미 바닥난 지 오래지, 통행증을 발급 받으려니 갈 사람은 수천인데 하루 백장밖에 허가가 나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로 어머니는 천리 남짓 떨어져 있는 멀리 황해도 평산(개성에서 5정거장에 자리한 곳임, 전연지대)에 있는 친척집으로 나를 보낼 결심을 내리게 되었다.

당시 학생은 통행증이 없어도 차표만 있으면 크게 단속을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부모님의 눈물어린 배웅을 받으며 식량을 구해올 막중한 책임을 지니게 된 내가 근 24시간이 훌쩍 넘기는 기차여행을 떠나게 되었으며 황해도 시골의 친척집(농촌이었음)에 무사히 도착해 강냉이 30kg을 둘러메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원래 정상적으로 기차 운행이 이루어지면 하룻길이었으나 전력이 부족했던 관계로 기차가 가다가 서는 일이 다반사였다. 올 때는 그런대로 하루 만에 왔는데 돌아가는 길에 평안남도 양덕 쪽의 어느 이름 모를 시골마을에 기차가 서버린 것이다. 처음에는 몇 시간 서 있다가 가겠거니 했는데 하루 이틀이 지나도 꿈쩍을 하지 않는다. 남한이야 먹을 것이 지천이니 큰 상관없겠지만 북한은 여행을 떠날 때 필수로 도시락(도중식사)을 싸가지고 다닌다. 그러지 않으면 꼼짝없이 굶어야 하기 때문이다.

친척집에서 떠날 때 도시락을 싸주긴 했으나 그것은 하루 만에 다 먹어치웠고 내게 남은 것은 강냉이 30kg밖에 없었다. 무려 14끼를 굶는 동안에 나는 몇 번씩이나 강냉이를 팔아서 뭐든 사먹고 싶은 유혹을 이를 악물고 견뎌야만 했다. 무엇보다도 나를 지탱하게 해준 것은 바로 어머니의 하얗게 세어버린 머리카락과 주름진 얼굴이었다. 자신은 멀건 죽물을 드시면서 자식들에게 한 숟가락이라도 더 주려고 모진 고생을 다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라 차마 굶어 죽을지언정 강냉이배낭에 손을 댈 수가 없었다.

14끼를 굶는 동안에 느낀 바를 적어보고 싶다. 사람이 보통 기본적으로 아침 7시, 점심 12시, 저녁 6시, 이렇게 식사 시간이 정해져 있다. 그러니 위도 거기에 적응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침 7시가 되었는데도 밥을 주지 않으니 위가 먹을 것을 달라고 조르고, 쓰리다 못해 쪼그라든다. 이렇게 한 시간 정도 요동을 치다가 잠잠(배고프면 수도에 가서 맹물을 벌컥벌컥 들이켰음)해지고 또 점심을 먹을 때면 또 위가 꼬이고 아프고, 저녁 때 역시 같은 패턴 이렇게 이틀(만 6끼)이 지나니까 그 다음에는 위가 아무 반응이 없이 무덤덤해지더라는 것이다.

당시 어린 내가 생각하기를 아마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으니까 이제는 먹을 것을 안 줄려나 보다 하고 위가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막상 위가 무감각해지니 오히려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겠다. 그렇게 맹물만 마시면서 14끼를 버티면서도 강냉이는 단 한 톨도 손을 대지 않았다. 나중에 기차가 움직였고 드디어 고향에 도착했을 때 나는 줄줄 흘러내리는 바지를 한손으로 움켜잡고 집으로 겨우 겨우 기다시피 당도했다.

다행히 우리 집은 역에서 400m 정도 떨어져 있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는 나를 부둥켜안고 목메어 슬피 우셨다. “제정신이냐고……. 죽으려고 그랬냐고……. 그 강냉이 다 팔아가지고 빵이라도 사먹어야지 그러다 죽으면 어쩔 것이냐고…….” 멈출 수 없는 슬픔에 목메어 눈물을 흘리시던 어머님의 피를 토하듯 처절한 울음소리가 이십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씩 귀전에 메아리치곤 한다.

사실 지금 돌이켜 떠올려보아도 또다시 그걸 겪어보라면 도저히 못할 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든다. 하지만 마음먹기 탓이라는 말도 있지만 정신력 하나로도 얼마든지 버텨낼 수 있다는 것을 느낀 귀한 시간이기도 하다. 그런 일을 겪고 나서는 나에게 서너 끼 정도 굶는 것은 일도 아니게 되었다.

“목숨이 붙어있는 한 무조건 중국 쪽으로 뛰세요!”

또 하나의 제법 큰 경험은 바로 탈북을 하면서 국경인 두만강을 넘을 때이다. 당시 22살. 내가 탈북하던 날은 바로 4월 15일(김일성 생일), 북한에서 제일 경사스러운 명절이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뜻하지 않게 4월 15일 도강을 하게 되었는데, 당시 도강 안내인이 하는 말은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오늘이 바로 4월 15일인데 경사스러운 수령님 탄생일에 도망치다 잡히면 바로 총살인 거 아시죠? 그러니 이제 내가 수신호를 보내면 강 저편을 향해 죽기 살기로 뛰어야 합니다. 지금 도강자는 무조건 사살하라는 발포 명령이 중앙에서 내려왔으니 국경경비대가 발견하면 바로 사격할겁니다. 그러니 머리에 총을 맞아서 바로 죽지 않는 한 다리나 팔이나 다른 데 총을 맞더라도 무조건 중국 쪽으로 뛰어야 삽니다. 명심하세요.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더라도 목숨이 붙어있는 한 무조건 중국 쪽으로 뛰세요!”

마치 사형선고 같은 이 말을 듣는데 아무 느낌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도무지 모르겠다. 아마 이미 죽은 목숨이라는 생각을 수십 번 했던 터라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다. 깜깜한 어둠속에서 희미하게 철조망 밖으로 건너다보이는 두만강은 폭이 60m 정도 되었다. 강까지 도달하려면 거리 100m 남짓, 강을 건너는 것 60m, 도합 160m에 나의 20년 인생을 걸어야 했던 순간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아마 북한에서의 나의 삶은 그때 이미 두만강가에서 끝났던 것 같다. 12시 조금 못 미쳐서 국경경비대가 서로 교대하는 짧은 시간을 틈타 나는 죽기 살기로 뛰어 두만강을 건넜으며 무사히 중국 쪽 이름 모를 산등성이로 넘어지며 뒹굴며 정신없이 올라가서야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다행히 경비대는 우리(나와 세 살 많은 동네 언니 한 명과 같이 탈북했음)를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고 각오했던 총성은 천만다행으로 울리지 않았다.

그렇게 낯선 이국의 산등성이에 올라서서 잠시 숨을 돌리며 오른쪽을 바라보니 지금껏 태어나 자라온 모국=북한은 전력난으로 인해 한 점 불빛도 안 보이는 깜깜 세상인 것을 보게 되었고 왼쪽에서는 등소평의 개혁개방정책으로 인해 하루 다르게 발전하는 중국 도시의 화려한 모습이 형형색색의 네온사인으로 어둠을 밝혀주며 영롱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때 비로소 ‘나에게 고향이란 것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던 것 같다. 비록 나에게 작은 배조차 채워줄 수  없었던 지지리도 아프고 괴로움만 가득했던 고향이었지만 막상 등지게 되는 이 순간에는 왜 이다지도 마음을 아프게 비틀고 허비는지에 대한, 미처 아무에게도 속 시원히 털어 놓을 수 없는 말 못할 괴로움의 싹이 움트기 시작했던 것 같다.

하지만 앉아서 굶어 죽느니, 어차피 죽을 목숨 총 맞아 죽더라도 가다가 죽으리라고 결심했고 떠나오게 되었으니 이렇게 대한민국에 입국해 새로운 자유를 누리게 된 것이 아닐까? 이순신 장군이 그랬듯이 ‘사즉생, 생즉사’(生卽死, 死卽生)의 참뜻을 나는 험난한 인생을 통해 체험할 수 있었다.

“삶에 대한 가치관을 바꾸게 한 가장 중요한 경험”

마지막으로 털어놓고 싶은 경험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3년 전인 32살 때다. 이것이야말로 삶에 대한 나의 가치관을 바꾸게 했던 가장 중요한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꿈에도 그리던 대한민국에 입국해 3D 업종이라고 기피하는 식당일부터 시작하면서 나는 누구보다 성실히 자신의 땀과 노력으로 정착에 임해왔었다.

공부하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았지만 먼저 남한사회에 대한 이해가 우선이라는 생각아래 이를 악물고 적응에 모든 노력을 다해 왔었다.

그러던 중 나이가 되어 결혼을 하게 되었고 또 아들을 낳게 되었다. 하도 악바리처럼 해산하기 전날까지 무리하게 출근을 해서인지 덜컥 몸에 무리가 와버렸다. 처음에는 단순한 병으로 생각했으나 좌측 난소를 적출하게 되었고 대구 경북대병원으로 조직 검사를 보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살던 곳은 경상북도 안동으로 시골도시였는지라 조직 검사는 큰 병원에 보내서 하고 그 결과가 돌아오기까지는 무려 보름이라는 시일이 소요되었다.

나는 여태껏 피가 마른다는 표현을 책에서만 보았지만 내가 체험하리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의심이 병이라고 했던가? 알음알음 알아보니 난소암일 가능성이 반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한은 인터넷이 잘 되어있으므로 난소암이 어떤 것인지 알아보니 최대 남은 수명이 달랑 5년이라고 한다.

그때 나는 입국한 이래 처음 병원침대에 편안히(?) 누워서 삼일 밤낮을 울고 또 울었다. 하나님에게 왜 이렇게 불공평하시냐고 묻고 또 물었다. 북한에서 굶어죽을 고생을 죽도록 하고 갖은 멸시와 천대 속에 타향을 떠돌다가 이렇게 겨우 대한민국에서 자리 잡고 귀여운 아들도 얻으며 살만해졌는데 남은 삶이 5년이라니……. 어쩌면 이렇게 가혹할 수 있냐며 하나님을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른다. 2008년 1월, 삼일 밤낮을 울다보니 지쳐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물론 난소암일지 아닐지는 결과가 나와 봐야 알지만 적어도 내가 살아본 세상은 그렇게 장밋빛 희망에 가득 찬 곳이 아니라는 것을 어린 나이에 비교적 일찍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삼일 밤낮을 실컷 울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곰곰이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어차피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누구나 한 번은 반드시 가야 하는 것 아닌가? 그것이 좀 빠르고 늦는 차이가 있는 것이지 제 아무리 위대한 위인이라 할지라도 피해갈수 없는 것이 죽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실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지 죽음은 항상 우리들 곁에 맴돌고 있었다는 것을 이때에야 비로소 똑똑히 알게 된 것이 제일 큰 깨달음이었다.

그리고 거듭해서 이렇게 생각하였다. 솔직히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치고 자기가 언제까지 산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냐고? 그러나 나는 적어도 내가 언제까지 산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으니 오히려 좋은 것이라고 말이다. 비록 5년이지만 남들의 50년 못지않게 내가 더 열심히, 후회 없이 살게 되면 그것으로도 나는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다짐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내가 실현할 수 있는 부분들을 구체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최악의 경우 난소암이라 하더라도 당장 죽는 것이 아니니까 계획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일단 그동안 들어놓은 보험이 있으니 과연 암보험일 때 얼마나 나올지 먼저 계산해봐야겠다고 생각했고 실행에 옮겼다. 담당 보험설계사를 불러서 보험 증권을 보여주니 암일 경우에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수령할 수 있는 금액이 무려 5,000만 원이라고 한다. 그때 나는 나에게 들어둔 보험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했고 고마웠는지 모른다. 안 그랬으면 몸 아픈데 마음까지 더 아프고 또 가족들이 병원비를 구하느라 뛰어다니는 모습을 지켜봐야 되니 더 괴로웠을 테니까 말이다.

보험금 금액을 알고 나서 나는 다음 계획을 세웠다. 결과가 나오고 나서 몸을 좀 추스른 후에는 보험금을 타가지고 세계 일주를 하겠다고 말이다. 그 보험금 내 목숨 값이니 없는 것인 셈 치고 내가 태어난 세상을 한 바퀴 돌아보고 나서 그동안 이리저리 핑계를 대어 미루고 있었던 공부를 다시 시작하겠다고 말이다. 이러한 고민을 거듭한 과정들을 거쳐 마음을 정리하고 보니 세상만물이 그렇게도 평온하게 보일수가 없었다. 이때는 새해가 막 시작된 겨울이었던지라 창밖으로 보이는 하얗게 눈 덮인 세상은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열흘 뒤 조직 검사 결과가 나왔고 병명은 난소기형종인데 주기적으로 검사받으면서 몸을 잘 돌봐야 한다고 한다. 양성이긴 하나 악성으로 넘어갈 확률 또한 완전히 배제할 수 없으니 몸 관리에 각별히 신경을 쓰라고 한다. 하지만 이미 나는 그때의 사건을 통해 사람이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 가치 있는 삶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사람답게 사는 것인지에 대해서 나름대로 큰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육신은 언젠가 나를 떠나가지만 나의 정신만큼은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라는 것, 육신은 잠시 빌린 것일 뿐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 참으로 귀한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당시의 그러한 깨달음이 없었더라면 나는 그저 그런 존재만을 위한 무의미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생의 황혼기에 이르러서야 깨달았을지도 모를 이러한 경험들을 비교적 젊은 나이에 할 수 있어서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 한 가득이다.

“절정 경험은 인생에서 여러 번 겪는다”

매슬로우의 인간욕구이론을 배우다보니 ‘절정경험’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절정경험이란 확 트인 경험, 이전의 어떤 때보다도 더욱 힘이 있고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는 느낌, 그리고 황홀하고 감동스럽고 경외스러운 감정을 경험하는 ‘짧고 강렬한 느낌’을 말한다.

사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살아가면서 겪었던 순탄치 않은 인생 속에서 이러한 절정경험들을 여러 번 겪게 되었으며 그러한 과정들을 통하여 보다 성숙된 나 자신으로 변화되어가는 모습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는 것을 새롭게 느끼고 있다.

마지막으로 겪었던 죽음에 대한 경험은 나로 하여금 보다 낮은 자세에서 세상을 대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삶이 아무리 힘들고, 괴롭고, 아프고, 비참할지라도 살아있음으로 하여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이라는 것, 살아있지 않다면 이러한 삶의 회로애락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 앞으로 살아나가는데 있어서 무엇보다 귀중한 삶의 근본적인 인생철학이 됐다는 것이다.

그 후 나는 마음을 깨끗이 비우고 오로지 내가 살아있다는 것, 그리고 내가 열심히, 오늘 하루 푸른 하늘도 바라볼 수 있고, 노란 단풍도 바라볼 수 있고, 사랑하는 아들의 이마에 입을 맞춰줄 수 있다는 현실에 무한한 행복감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결국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렇듯 애타게 찾아 헤매이는 행복이 결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고 할까? 살아있다는 것에 진정으로 감사하면서 일상의 소소한 것들에 행복을 느끼면서 살아간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사람답게 세상을 살아가는 참된 모습임을 다시금 확신한다.

지금은 열심히 배우고 배워서 언젠가는 하나로 되어야 할 통일조국을 위한 길에 부족한 자신을 기꺼이 바치리라는 오직 한 마음으로 늦은 나이에 띠 동갑 학생들과 나란히 학업에 열중하고 있다. 내가 삶의 고비 고비에서 부딪히는 난관과 시련들을 마주할 때마다 지쳐 쓰러지고 싶어 하는 나 자신에게 홀로 수십, 수백 번이고 곱씹어 되뇌는 말이 있다.

“포기는 무덤 속에 들어가서 해도 늦지 않다.”

언제까지일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하늘이 나에게 허락한 마지막 그날까지 나는 매일 매일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심정으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웃으며 살고 싶다. 마치 오늘이 내 인생 마지막 날인 것처럼……. 그것이야말로 후회 없이 삶을 가장 참답게, 뼛속까지 나다운 나답게 사는 길임을 이제는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2011년 11월 8일

동명숙
2003년 3월 하나원(35기)을 수료한 후 경북 안동에서 정착 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동국대 북한학과에 입학했다. 경기도대학생기자단(2011)으로 활동했다. 북한개발지원아카데미(2011), 통일지도자리더쉽아카데미(2011), 탈북대학생통일리더양성프로그램(2012, 미국 국무부), 독일 한스자이델재단 한국사무소 인턴쉽(2012)을 수료했다. 경기도지사 표창(2012), 이우정평화장학금(2012)을 받았으며, 서영교 민주통합당 의원실 인턴(2012), 새정치민주연합 새터민위원회 위원(2015) 등으로 활동했다. 2019년 1월부터 농업회사법인 안동전통명주(주) 이사로 재직하고 있다.

About 김종영 (888 Articles)
사람과사회 발행인이자 편집장이다. ‘글은 사람과 사회며, 좋은 비판은 세상을 바꾼다’는 말을 좋아한다. weeklypeopl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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