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사회™ 뉴스

Obama와 Storytelling

오바마는 미국 최근세 대통령 중 아주 드물게 등장한 ‘지식인 대통령’

취임선서하는 버락 오바마. 사진=위키백과

오바마의 스토리텔링 

도정일 문학평론가·경희대 명예교수

계간 『비평』(2009년 봄호, 통권 제22호)

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들은 마침내 보게 되리라
그리고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리라
나도, 나 역시도, 미국이다
―랭스턴 휴즈

819px-President_Barack_Obama

버락 오바마. 사진=위키백과

1. 미국인들의 눈물

버락 오바마가 대선에서 승리하고 제44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하기까지의 약 두 달 보름은 미국인들이 ‘역사’라는 것을 만나본 아주 드문 경험의 한 시기이다.

역사는 대체로 두 개의 얼굴, 혹은 두 개의 행보방식을 갖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하나는 정의롭고 정당한 것에 대한 인간의 열망과 기대에 응답하기 위해 마치 크리스마스 이브의 산타 영감처럼 선물보따리 싸들고 방울 쩔렁거리며 달려오는 웃는 얼굴의 역사이다. 그는 적어도 ‘정의’의 관점을 인간과 공유한다. 인간에게 정의로운 것은 그에게도 정의롭다.

그러나 반대 얼굴의 역사, 인간에게 실패와 좌절을 안기기 위해 모든 기회를 엿보는 심술궂은 역사도 있다. 이 역사는 인간의 기대를 무너뜨리고 인간의 열망에 찬물을 끼얹는 인색하고 강퍅한 얼굴의 역사이다. 그는 인간의 성공을 눈뜨고 보지 못한다.

오비디우스가 『변신』에서 그려낸 질투의 여신처럼 그도 인간이 성공하는 곳에서는 슬퍼하고 인간이 실패하는 곳에서는 즐거워한다. 인간에게 정의인 것은 그에게는 정의가 아니다. 역사가 이처럼 서로 다른 두 개의 얼굴로 나타나는 것은 역사의 한 몸뚱어리에 두 얼굴이 달려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서로 다른 행보방식을 가진 두 종류의 역사가 동서남북 따로따로 움직이기 때문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2008년 11월 초 미국인이 본 것은, 혹은 만나보았다고 다수 미국인이 생각한 것은, 물론 ‘웃는 얼굴’의 역사이다. 대선 결과를 지켜보기 위해 뉴욕 공공도서관 ‘랭스턴 휴즈의 방’으로 달려간 한 인사는 “역사를 인터뷰하러 갔다”고 인터넷 칼럼에 쓰고 있다.

“나는 오늘 역사가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보았다”고 말한 사람도 있고 “환호하는 사람들과 함께 역사도 환호하며 길바닥으로 뛰쳐나갔다”고 쓴 사람도 있다. 95세의 아버지를 둔 한 흑인 유권자는 “아버지가 살아생전에 흑인 후보에게 투표하고 그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게 해준 신에게 감사한다”고 감격해 하다가 “그런데 아버지는 아직도 믿을 수 없다고 하신다”고 말한다. 물론 그가 말한 ‘신’이 반드시 역사의 신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어떤 신이건 간에 그가 정의의 신이라면 그 신은, 많은 미국인들이 만나보았다고 생각하는 정의로운 역사의 신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 칼럼니스트는 이렇게도 쓰고 있다.

“오바마 상원의원의 대통령 당선 선언이 나오는 순간 미국의 모든 흑인 가정들, 흑인들이 사는 동네의 모임장소와 길거리에서는 누가 미리 준비한 것도 아닌 자생적이고 즉흥적인 축제가 터져 나왔다. 우리는 이런 일을 본 적이 없었다. 우리는 언제나 이 순간을 기억할 것이며 역사가 만들어지는 것을 보라고 우리가 두들겨 깨우는 바람에 잠자다 일어난 우리 아이들도 영원히 그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오바마의 승리는 그 혼자의 성취가 아니라 ‘역사의 긴 싸움’ 끝에 얻어진 승리라는 말에도 많은 사람들이 동조한다. ‘역사의 긴 싸움’이란 말은 물론 좀 모호하다.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역사가 엎치락뒤치락 싸우다가 한쪽이 다른 쪽을 이겼다는 소리 같기도 하고, 흑백을 통틀어 오랜 세월 많은 사람들이 억눌리고 얻어맞고 죽어간 역사상의 긴 투쟁에서 인내와 희생을 감내했던 자들이 마침내 꿈을 이루었다는 소리 같기도 하다.

그러나 어느 쪽이건 간에 2008년 대선 직후의 미국인들은 역사가, 또는 역사의 신이, 인간의 시도에 결코 무심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싶은 ‘거대한 믿음의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들은 역사를 ‘만나본’ 것이다.

대통령 취임식이 있던 2009년 1월 20일, 쌀쌀한 한겨울 날씨도 마다않고 워싱턴 몰의 행사장 앞으로 몰려든 인파는 180만 명에 달한 것으로 집계되어 있다. 대통령 취임식에 이처럼 많은 군중이 모인 것은 미국역사상 초유의 일이다.

무엇이 오바마를 대통령이 되게 했는지, 또 무엇이 미국인들로 하여금 그의 당선에 그토록 열광하게 한 것인지는 적어도 앞으로 100년간 (그때까지 미국이 망하지 않고 존속한다면) 지금의 생존 세대 미국인은 물론 미래 세대들도 노망들어 기억을 상실하는 날까지 끊임없이 입에 올릴 얘깃거리이자 학문적 연구꺼리가 될 것이 확실하다.

오바마가 장차 어떤 대통령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1930년대 대공황기 이후 가장 참담한 시기에 난파선의 선장처럼 거의 망해버린 미국을 떠맡은 오바마의 정치적 미래는 지금 누구도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에 싸여 있다.

다만 그의 당선이 촉발한 전국적 열광의 크기만으로 판단한다면 그는 벌써 신화이고 신화적 존재이다. 남북전쟁이 끝난 뒤 링컨의 어떤 연설장에 갔던 한 인사는 “그때 방으로 걸어 들어오는 순간의 링컨은 인간이 아니라 신(demi-god) 같았다”는 메모를 남기고 있다.

미래의 이야기꾼들도 21세기 초의 미국인들 상당수가 오바마에게서 감히 신의 그림자를 보았다고 말할지 모른다. 오바마의 승리가 확정되던 날, 하염없이 눈물 흘리며 서 있었던 제시 잭슨 목사의 검은 얼굴은 마치 신을 본 자의 얼굴과도 같은 감격과 충격을 담고 있었다고 묘사될 만하다. 미국 전역의 철든 아프로-아메리칸들 가운데 오바마 당선을 보며 울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고 말해도 된다.

흑인들만 운 것이 아니다. 취임식 전날 워싱턴 시에서는 남북전쟁 당시 흑인 병사들만으로 조직되었던 제54 매사추세츠 연대를 재현한 의장행진이 벌어졌는데 그때 사람들 사이에서 한 흑인여성이 길바닥으로 달려 나와 링컨 시절의 오래된 노래 한 대목을 부르기 시작했고 노래는 금새 군중들의 합창으로 번졌다고 한다.

“감사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 오, 감사합니다, 주님!”

이 장면을 보고 있던 백인시민들도 얼굴을 모자로 가리고 울었다고 어떤 칼럼니스트는 쓰고 있다. 20년 전 하버드 법대 시절의 대학원 초년생 오바마에게 조교 자리를 주고 그에게 헌법학을 가르쳤던 로런스 트라이브 교수도 오바마의 당선이 확정되던 날 밤 터져 나오는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백인교수이다.

이날 미국 전역에서 사람들이 흘린 눈물의 총량에 대한 통계수치는 물론 나온 바 없지만 아마 플라스틱 바가지 수백만 개는 채울 정도의 것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오바마를 둘러싼 이런 종류의 많은 이야기들은 아직 시퍼렇게 살아 있는, 그것도 나이 50이 채 안된 한 젊은 정치지도자를 신화적 차원의 인물로 올려놓기에 족하다.

오바마의 등장에 바쳐진 미국인들의 이런 눈물과 열광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물론 흑인 대통령이 나왔다는 사건의 극적인 성격 하나만으로도 오바마의 성공은 충분히 감격적이다.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최초의 흑인 노예가 미국대륙에 발을 디딘 이후 389년 동안, 한두 사람이 내놓은 소망충족적 예언이나 판타지를 빼고는 누구도 그 현실적 가능성을 상상할 수 없었던 ‘흑인 대통령’을 눈앞의 현실로 등장시켰다는 점에서 그 드라마는 상당한 설화적 요소를 갖고 있다.

그러나 오바마의 승리를 흑인의 승리라는 관점에서만 보는 것은 타당한 상황 파악이 아니다. 그런 관점은 흑인들이나 흑인 인권에 동정적이었던 사람들의 열광까지는 설명할 수 있을지 몰라도 대선에서 오바마를 지지해준 52% 유권자들 전체의 선택과 환호를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대선 때 오바마 마차를 밀어준 것은 흑인들만이 아니다. 오바마는 흑인 대통령이긴 하되 ‘흑인의 대통령’은 아니다. 흑인 티켓만을 정치자본으로 한, 그래서 흑인을 대변하는 흑인의 대통령이 되는 것을 목표로 했다면 그는 대통령 당선은커녕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조차도 얻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다른 설명 방식이 필요하다. 흑인들의 감격만이 아니라 인종적 분계선을 넘어 다수 미국인들이 보여준 눈물과 열광까지도 설명해줄 좀 다른 방식의 그림 그리기가 필요하다.

2. 오바마의 이야기-재생과 추구

버락 후세인 오바마는 미국사의 무대를 누볐던 저명 정치인들 가운데서 비교 유례를 찾기 어려운 뛰어난 ‘이야기꾼’이다. 그의 당선을 도운 요인은 물론 한두 개가 아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것의 하나는 그의 ‘스토리텔링’, 곧 그가 미국인들에게 들려준 일련의 매혹적인 이야기들이다. 물론 그가 연설과 토론에서 보여준 실력은 탁월하다.

그러나 흑인 후보에다 중앙 정치무대 경력도 극히 짧은 초선 상원의원이 경선과 대선과정에서 힐러리 클린턴, 존 매케인 같은 강력한 경쟁자들을 이긴다는 것은 언변만으로 될 일이 아니다. 불리한 조건의 오바마가 판세를 뒤집고 승리할 수 있었던 비밀의 하나는 그가 들려준 이야기의 힘에 있다.

그는 이야기로 대통령이 된 사람이다. 최근 미술사학자 사이먼 샤마는 『미국의 미래』(2008)이라는 책에서 “미래의 미국 대통령은 스토리텔러일 것”이라 쓰고 있다. 정확히 오바마를 염두에 두고 한 소리 같다.

오바마의 이야기꾼 자질은 그의 첫 저술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에서부터 이미 발휘되고 있다. 이 책은 정치 지망생의 그렇고 그런 자전이 아니라 (오바마가 이 책은 낸 것은 연방 상원의원으로 전국 정치무대에 등장하기 9년 전인 1995년이다) 한 흑인 소년의 고뇌에 찬 방황과 모색을 담은 성장소설(Bildungsroman)의 성격을 갖고 있다.

모든 자서전은 개인의 이야기를 펼친다. 그러나 같은 전기적 이야기도 그것을 어떻게 조직하고 사건을 어떻게 배치하며 상황묘사는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소설적 효과를 거두기도 하고 평범한 연대기적 전기에 머물기도 한다.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은 “스물한 번째 생일이 지나고 몇 달 뒤, 낯선 사람이 전화를 걸어 내게 그 사실을 알려주었다”라는 느닷없는 서술로 시작되는데, 이것은 독자의 호기심(그 사실이라니 무슨 사실?)을 단숨에 휘어잡으려는 듯한 소설적 ‘오프닝’(서두 떼기)이다. 서술, 관찰, 묘사들은 소설의 기법을 더 많이 활용하고 있다.

사건들은 큰 틀에서는 시간적 발생 순서를 따르지만 세부적으로는 모더니즘 소설처럼 들쑥날쑥 시간의 선후관계를 헝클어트리면서 새로운 내적 질서를 만드는 방식으로 배치되고 제시된다. 소설적 효과를 염두에 둔 것 같은 플롯 짜기의 기술이다.

물론 정치인 오바마를 탁월한 이야기꾼이게 하는 것은 그런 소설적 기술의 활용이라는 요소만은 아니다. 민주당 후보 경선 출마에서 대선 승리까지의 3년간 오바마가 줄기차게 채택한 ‘이야기의 전략’은 크게 두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는 개인의 꿈과 집단(미국)의 꿈을 어떤 공통의 비전 속에 절묘하게 이어 붙여 미국이라는 운명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그리고 미국인 누구나가 믿고 싶어하는 ‘미국의 이야기(American story)’로 용접해낸 연결과 융합의 전략이다. 흑인 후보가 그 개인은 물론 그가 속한 일차적 소수 인종집단의 열망에만 매이지 않고 그 열망을 더 큰 다수집단(미국)의 꿈으로 확장시켜 다수에 의한 동일시의 효과를 거둔 것은 오바마 승리를 가능하게 한 결정적인 서사전략이다. 이 전략이 아니었다면 그는 과거 제시 잭슨의 패배가 보여주듯 소수 흑인후보를 구속하는 원천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 확실하다.

오바마 서사전략의 두 번째 특징은 그 자신이 “우리들 속의 더 나은 천사(The better angels in our nature)”를 이끌어내자는 말로 표현한 고양(高揚)의 전략이다.

오바마의 편에 선다는 것은 좁고 누추한 것들의 속박에서 벗어나 정의롭고 고결한 것들의 편, 역사의 편, 신의 편에 서는 것이라는 상승의 느낌을 갖게 하기―이런 도덕적 상승감을 촉발하는 것이 고양의 효과이다. 진한 공명을 일으켜 사람들의 가슴을 열리게 하고 그 열린 가슴들이 그동안 잊었던 어떤 선하고 의로운 것, 신성한 것,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것들의 가치세계로 이어지고 그 세계를 향해 올라간다는 느낌으로 전율하게 하는 것은 어떤 종교적 체험에나 견줄만한 감동과 자기 변모의 경험이다. 미국 정치가 대중에게 이런 유사 종교적 경험을 준 것은 아마도 1863년 링컨의 노예해방선언 이후 처음일 것이다.

오바마의 이야기가 거둔 연금술적 효과의 예들은 아주 많다. ‘우리는 하나(We are one)’라거나 ‘하나의 미국’ 같은 통합의 구호는 오바마 캠페인이 내건 주종 메뉴 가운데 하나이다.

사실 그런 구호는 지금까지 역대 대선 주자들이 거의 빠짐없이 선거판 밥상에 올려 온 진부한 차림판 속의 것이다. 그러나 조지 부시가 ‘우리는 하나’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면 감동은커녕 몸서리 쳤을 법한 사람들이 오바마의 동일한 구호 앞에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환호한 것이다.

‘희망’의 메시지도 그러하다. 정치인 치고 희망을 팔아먹지 않는 사람 없다. 오바마가 들고 나온 것도 희망의 정치학이다. 그런데 그 새로울 것 없는 수사가 오바마의 손에서는 동트는 새벽 햇살 같은 신선한 메시지로 바뀐다.

연설 중인 오바마(2007년). 사진=위키백과

연설 중인 오바마(2007년). 사진=위키백과

이야기꾼 오바마가 발휘한 이런 능력들은 분명 작가적 제시기술의 차원을 넘어선 곳에서 대중적 열망의 심부에 대한 통찰, 인간과 사회의 복잡성에 관한 이해, 역사와 문명에 대한 인문적 성찰 등과 결합하여 그를 탁월한 이야기꾼이게 하는 데 기여한다.

오바마의 이야기들은 표면상 희망, 믿음, 변화 같은 정치적 수사들을 내걸고 있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마치 건축물의 보이지 않는 기본설계처럼 몇 개의 핵심적 주제들이 그의 이야기 만들기를 이끄는 밑그림의 얼개를 짜고 있다.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이 죽음, 부활, 불멸이라는 상징적 주제들을 밑그림으로 해서 짜여 있는 것과 유사하게, 오바마의 이야기는 재생, 추구, 발견, 변모 같은 기본주제들을 깔고 있다. 이 주제어들을 중심에 놓고 말하면 오바마가 들려준 이야기는 크게 네 개의 서사들―재생의 서사, 추구의 서사, 발견의 서사, 변모의 서사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 서사들은 ‘미국의 이야기’나 ‘미국의 꿈’ 같은 집단신화에 불가분으로 엮여 있다. 미국적 집단신화란 미국인들이 자기 자신과 자기 나라 미국에 대해서 오랜 기간 집단적으로 만들고 믿고 전승시켜온 미국만의 특별한 이야기이다. 그것은 미국인에 의한, 미국인을 위한, 미국인의 신화이다.

대체로 신화는 한 사회 또는 한 시대의 사람들이 품은 집단적인 꿈과 무의식적 열망의 서사적 조직이다. 역사학은 이런 의미의 신화를 다루지 않고 기록으로서의 역사는 신화를 배제한다. 그러나 ‘일어난 사건’으로서의 역사의 발생문법은 사람들이 어떤 집단적 신화를 만들고 어떤 꿈에 지속적으로 심취하고자 했는가 라는 문제와 깊게 연결된다.

니체가 잘 알고 있었듯이 (오바마는 니체를 즐겨 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논리의 외투 안쪽 깊은 곳에서 보이지 않게 사람들을 움직이는 욕망의 비밀, 대중을 열광하게 하는 극적 사건들의 발생과 전개의 비밀도 종종 거기에 숨겨져 있다.

‘재생(Rebirth)’은 미국인들을 거의 항구하게 사로잡는 강력한 신화적 주제의 하나이며, ‘미국의 이야기’의 핵심 테마이다. 잘 알려진 ‘미국의 꿈’이라는 것도 이 재생의 주제를 중심에 둔 많은 변주들과 세속적인 꿈의 총합이다.

이 점에서 보면 오바마가 만들고 들려준 재생의 서사는 새로운 것이 아니고 그의 독창적 발명도 아니다. 재생의 주제는 구원, 부활, 승리 같은 기독교적 상징체계와 깊게 연결되어 있다. 미국의 이야기나 미국의 꿈이라는 집단서사들은 근대 서구문명의 서사적 성격이 그러하듯 기독교 서사의 세속화된 판본들이다.

물론 재생의 주제가 전적으로 기독교만의 독점물인 것은 아니다. 죽었던 것의 되살아남으로서의 ‘소생’이나 낡은 것을 새로운 것으로 바꿔내기로서의 ‘갱생’의 주제들도 재생의 신화적 모티프 군에 속하는 것들이며, 그것들은 기독교와 연결되기 훨씬 전부터, 그리고 기독교를 넘어 거의 모든 문화권 사람들의 경험과 심리 내부에 잠재해 있으면서 신화와 문학, 예술과 민속의식들을 만들어온 상당히 보편적인 원형적 주제들이다.

재생의 서사가 오바마 혼자의 발명품이 아니라면 오바마의 이야기에서 특별히 ‘오바마 서사’라 부를 만한 부분은 무엇인가.

앞서 잠깐 언급했지만 오바마의 특별한 재능은 무엇보다 그 자신의 특수한 이야기(출생과 성장, 방황과 모색, 발견과 결단)를 미국적 집단신화의 주제와 플롯에 맞게 구성하고 그렇게 구성된 그의 개인서사를 미국인 공통의 집단서사인 미국의 이야기 속으로 통합시켜낸 데 있다. 물론 그의 경우 이 통합이 용이했던 것은 아니다.

소년 시절의 오바마를 괴롭히고 방황하게 한 번민은 그가 흑/백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그래서 아프리카나 미국 어느 쪽에서도 고향을 찾을 수 없는 ‘쪼개진 아이(divided child)’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 속하는가” 같은 정체성의 질문들 앞에서 오바마가 마침내 성취한 것은 ‘자기의 재발명(reinvention of self)’이다.

자기 재발명은 미국적 집단서사의 핵심에 있는, 그러므로 가장 미국적인 재생신화의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미국에서 사람들은 자기를 새로 만들고 재발명할 수 있다. 이름도 바꾸고 운명도 바꾸고 일도 바꾼다. 그리고 성공한다’는 것이 자기 재발명 혹은 재창조(re-making)의 신화이다.

오바마는 이 신화의 틀 안에서 자기 이야기를 만들고 자신의 전기를 재창조한 사람이다. 그는 신화를 새로 발명한 것이 아니라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처럼, 랠프 앨리슨, 리차드 라이트, 제임스 볼드윈, 토니 모리슨 같은 흑인 작가들의 소설에서 자기를 찾아 나가는 위기의 인물들처럼 자신의 전기를 다시 발명한 것이다.

그리고 그 재발명된 오바마 이야기는 모든 미국인에 친근한 미국의 이야기의 일부가 된다. 오바마는 오바마 자신이 재창조해서 미국의 이야기 속으로 밀어 넣은 ‘아메리칸 캐릭터’이다. 이 캐릭터는 미국인 누구에게도 낯설지 않고 미국 땅 어디에서도 이방인이 아니다.

오바마 이야기가 개인서사와 집단신화의 통합이라는 수준에만 머문 것은 아니다. 그는 그 서사를 대선 캠페인의 강력한 전략의 하나로 활용한다. ‘미국 되찾기’라는 호소가 그것이다. 미국을 되찾아 다시 살려내어야 한다는 주장은 재생신화에 충실한 주제이다.

대선 기간의 여론 조사를 보면 미국 유권자의 85%가 “지금 미국은 잘못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와 있다. 그 잘못된 미국을 원래 모습의 미국, 미국인이 생각하는 미국으로 되돌리자는 것이 미국 ‘되찾기(reclaiming)’이다.

<뉴욕타임스> 같은 진보계 신문들이 오바마 당선에 보낸 환영사의 골자는 “이제 미국을 되찾게 되었다”는 것이다. 부시 정부 8년의 실정에 대한 불만이 팽배했던 유권자들에게 오바마가 들고 나온 미국 되살리기의 호소는 강한 위력을 발휘한다.

정당성 없는 이라크전쟁, 아부 그라이브와 관타나모 같은 포로수용소에서의 인권 유린, 민주주의 원칙을 어기는 무수한 권력남용, 부자 감세정책 등에 의한 불평등의 항구화, 국제사회로부터의 고립, 기후변화 등 환경문제에 대한 무시와 오만, 그리고 경제 파탄―부시 정권의 실정에 대한 이런 비판들이 오바마의 입에서만 나온 것은 아니다.

오바마가 유권자 대중을 끌어당긴 매혹의 비밀은 그 망가진 미국을 “되살릴 수 있다(Yes, we can)”는 자신감 넘치는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믿음과 희망을 회복할 길을 열어준 데 있다.

오바마의 하버드 법대 스승 트라이브 교수가 대통령 당선 직후의 오바마를 만나고 나와서 했던 말이 있다.

“그들 부부는 나를 얼싸 안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작 감사해야 할 것은 나였다. 희망을 버리지 않으려는 모든 미국인을 위해 미국을 되찾는 여정에 나서준 것은 바로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오바마 이야기의 두 번째 내용은 ‘추구(Quest)의 서사’이다.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한 것을 성취하기 위해 힘든 모험 여정에 나선다는 것이 추구서사의 골간 플롯이다. 추구서사는 크게 세 개의 요소들로 구성된다.

모험 길에 나서는 주체, 그가 얻고자 하는 대상, 목표 달성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추구라는 주제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모험과 사랑의 이야기로서의 로망스(romance)는 추구서사이며, 어떤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누구나 추구서사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추구라는 동일한 주제 위에서도 누가 무슨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어떻게 추구하는가에 따라 이야기의 플롯라인은 달라진다.

대통령 전용기에서 참모진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오바마. 사진=위키백과

대통령 전용기에서 참모진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오바마. 사진=위키백과

청소년 시절의 오바마에게는 자기정체성(“나는 누구인가”)을 찾고 인생목표(“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를 세우는 일이 시급한 과제였다면 변호사가 되고 나서 시카고 공동체운동에 뛰어들었을 때의 그의 관심은 자신의 사적 목표와 흑인공동체 건설이라는 공적 목표를 연결하는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개인과 공동체의 연결, 이것은 오바마의 추구서사를 특징짓는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변호사 오바마가 시카고대학으로부터의 법학교수직 제의도 사양하고 월 1000달러 정도의 수입만으로 빈궁을 견디며 흑인 유권자 등재운동과 흑인공동체 권익신장에 헌신하는 쪽을 선택한 것은 그가 자신에게 내린 그 연결의 명령 때문이었다고 말해도 된다.

풍족한 삶의 전망을 내버리고 차별과 억압에 시달리는 소수 인종집단을 위해 일하기로 한 그 어려운 선택은 오바마의 추구서사적 인생 여정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대목이다. 그 선택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오바마는 없었을 것이고 흑인 대통령의 출현은 필시 연기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선에 나섰을 때의 오바마의 목표가 ‘대통령’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어떻게 어떤 대통령이 될 것인가의 방법론에서 그가 생각한 것은 미국 사회의 ‘통합’이라는 목표이다. 흑인공동체 건설이 시카고 시절의 그의 주 관심사였다면 대선 출마 이후의 그의 목표는 흑백통합만이 아닌 더 넓은 의미에서의 미국사회 전체의 통합이라는 쪽으로 확대된다.

그의 대선 캠페인 전략은 인종분할선의 고수가 아니라 그 분할선 지우기이다. 이것은 그가 민주당 후보 경선에 뛰어들던 때로부터 대선 승리의 순간까지 시종일관 견지한, 오바마 캠페인의 대원칙이다.

“오바마는 흑인이야”라며 인종문제를 들먹이다가 오히려 표를 갉아먹은 것은 공화당 후보 존 매케인 쪽이다. “백인의 미국, 흑인의 미국, 히스패닉의 미국, 아시아계의 미국이 따로 있지 않고 오직 ‘하나의 미국’이 있을 뿐”이라는 오바마의 유명한 연설은 사회통합의 과감한 희망을 잘 표현한다.

물론 ‘하나의 미국’이라는 비전은 ‘여럿이면서 하나(E pluribus unum)’라는 자유주의적 다원주의의 오랜 신화에 입각해 있다. 그러나 그 비전은 다인종 다문화사회의 갈등을 경험해온 미국 유권자들이 인종, 민족, 문화, 종교의 분할선을 넘어 오바마 밀어주기에 나선 강한 요인의 하나이다.

오바마가 세운 통합의 목표 속에는 분열과 분할의 미국정치를 통합과 화해의 정치로 바꾸어야 한다는 비전도 들어 있다.

경선 기간에 나온 두 번째 책 『담대한 희망』에서 오바마는 미국정치가 큰 것은 놓치고 작은 것들에 목매어 사분오열 이권 쟁투와 사소한 이슈 투쟁을 벌이고 있는 것에 넌더리를 내고 있다. 통합과 화해의 정치가 필요하다.

사회정의, 민주주의, 민생, 인권, 빈부격차, 환경, 노동 등 본질적인 것들의 중요성을 놓치지 않는 정치, 시민과 사회 전체를 생각하는 큰 스케일의 정치로 재편되어야 한다는 것이 오바마식 정치통합론의 골자이다.

어느 사회에나 긴장과 갈등은 있다. 갈등은 사회관계의 복잡성에서 연유하는 긴장의 결과이다. 그러나 사회가 갈등으로 폭발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반대자의 말에 귀 기울이는 열린 마음,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는 입장교환의 자세, 부단한 민주적 대화와 토론과 화해의 정치학이 필요하다―이런 얘기는 사실 무슨 새로운 정치학이기보다는 자유주의 정치학의 재확인이다.

오바마의 정치학도 큰 틀에서는 자유주의 서사의 전통 속에 있다. 그러나 오바마 서사에서 특징적인 것은 통합과 화해의 정치학이 타자, 타 집단, 타문화들 사이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선에서만 만족할 것이 아니라 차이를 넘고 단순 관용주의의 무심한 한계를 넘어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줄 ‘공통의 끈과 바탕’을 찾아내야 한다고 말하는 부분이다.

이것은 중요한 제안이다. 그런데 그 공통의 끈과 바탕은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가? 여기서 오바마의 추구 서사는 또 하나의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한다. 그의 추구서사가 ‘발견(Discovery)의 서사’로 이어지는 대목이다.

3. 오바마의 이야기-발견과 변모 

청년 시절의 오바마가 골몰했던 것은 그가 가진 두 개의 ‘뿌리’를 어떻게 이어 붙이는가라는 문제이다. 그의 아버지 쪽 뿌리는 아프리카에 있고 어머니 쪽의 뿌리는 미국에 있다. 두 뿌리를 연결한다는 것은 흑·백 두 색깔을 얼버무려 이것도 저것도 아닌 회색의 초상을 그리는 일 이상의 것이다.

어느 한쪽을 완전히 버리는 것도 해결책은 아니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미국에서 자란 오바마로서는 아프리카를 잊고 아버지의 뿌리를 포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비의 나라 케냐를 찾아가 그쪽의 어머니, 이복형제들, 일가친지들을 만나고, 그리고 무엇보다 ‘아프리카’를 만나면서 오바마는 아비의 뿌리 아프리카를 버릴 수 없다는 깨침에 도달한다.

아버지는 이미 죽고 없다. 그 없는 아비 대신에 오바마는 친척들, 아버지의 친구들, 루오족 이웃들이 전해주는 ‘이야기’를 통해 아비를 만난다. 오바마가 미국인이면서 동시에 아프리카인, 아프리카인이면서 동시에 미국인이라는 두 형식의 공존 가능성을 찾아낸 것은 아버지와의 그 서사적 조우를 통해서이다.

그 가능성은 ‘아버지의 꿈’이다. 케냐를 사람이 더 잘 살 수 있는 나라로 바꾸어 내고 아프리카를 평등, 자유, 품위가 살아 있는 땅으로 만들자는 것이 오바마가 만나 알게 된 아버지의 꿈이다. 이 꿈은 미국인의 꿈과 다르지 않고 모든 인간의 꿈과 다르지 않다. 아프리카와 미국, 그리고 인간의 세계는 모두 이 동일한 꿈의 끈으로 연결된다.

아비 오바마의 꿈이 아들 오바마의 꿈이고 동시에 어머니가 품었던 꿈이기도 하다―이것이 오바마의 ‘발견’이다. 발견은 깨침이기도 하다. 소설에서 주인물이 그를 뒤흔들고 바꿔놓는 어떤 진리를 알게 되면서 깨침의 희열에 잠기듯 오바마는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가 오열한다. 자기정체성을 찾고 아비를 찾기 위해 헤맨 그의 긴 방황이 그 발견과 깨침으로 마침내 종착점에 도달한 것이다.

미국의 흑인 아이들과 비백인 가정의 아이들이 학교에 입학했을 때 느끼는 혼란과 당혹감의 하나는 벽에 걸린 ‘아버지들(미국 건국의 아비들)’의 초상이 모두 백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사마 빈 라덴의 사살 소식을 듣고 있는 오바마와 그의 행정부. 사진=위키백과

오사마 빈 라덴의 사살 소식을 듣고 있는 오바마와 그의 행정부. 사진=위키백과

“나는 흑인인데 내 조상이 백인이라고?”

이 혼란에 대한 다문화주의자들의 수습책은 백인 조상에 관한 이야기를 비백인 아이들에게 강요하지 말라는 것이다. 오바마의 접근법은 다르다.

백인이건 흑인이건 또 무슨 다른 인종이건 간에 사람들 사이에는 그들을 연결하고 이어붙이는 공통의 끈과 바탕이 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그 공유의 것, 공통의 것을 찾아내어 사람들을 묶고 연결하는 일이다―라는 것이 오바마의 생각이다. 그 연결의 끈은 인간이라면 누구도 거부하거나 부인할 수 없는 공통의 자명한 가치, 목표(꿈), 인간성이다.

이 방식으로 오바마는 미국 역사에서 흑/백을 가리지 않는 ‘공동의 조상’을 찾아낸다. 그 공동의 조상에는 백인 링컨도 있고 흑인 목사 마틴 루터 킹도 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선언과 함께 “이것은 자명한 진리다”라는 메시지에 기초한 미국 독립선언, 헌법, 기타의 주요 문서들도 미국을 탄생시킨 공동의 아비에 포함된다.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이나 킹 목사의 ‘꿈’의 연설은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태어났고 이것은 자명한 진리라고 말한 그 공동 아비들의 말을 계승하는 후손들이다. 이런 대목에서 오바마의 이야기는 그 자신의 전기만이 아니라 아비의 전기, 미국 건국자들의 전기, 링컨과 킹 목사의 전기를 서사적으로 ‘재발명’하고 있다.

이것은 정체성의 서사적 확립이고 미국사의 서사적 재해석이다. 그리고 이 작업의 중심에는 오바마가 케냐 방문에서 구성한 발견의 서사가 자리 잡고 있다. 서로 다른 것들 사이에서 공통의 것을 찾아내어 그 다른 것들을 연결하는 것은 시적 은유의 방식이며, 오바마의 발견도 그 방식을 원리로 삼고 있다.

미국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무슬림’을 언급한 것은 오바마가 처음이다. 이슬람 과격파와 테러 진영을 향한 그의 메시지는 경고와 화해제의의 두 방향을 취하고 있다.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면서 그는 미국과 이슬람이 ‘공통의 인간성’으로 연결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의 이런 접근법은 무슬림 진영만이 아니라 미국 내의 흑인 인권운동에도 적용된다. 흑인 인권운동은 대체로 W. E. B. 뒤 보아(뒤 보이스)나 맬컴 엑스처럼 과격한 저항과 투쟁의 노선을 취한 쪽과 부커 T. 워싱턴의 현실주의나 킹 목사의 평화주의 노선을 따르는 전통으로 대별된다.

오바마가 선택한 것은 흑인들이 그들 자신의 실력과 품위를 높여 백인들의 존경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는 실용주의노선과 킹 목사의 평화적 투쟁 노선을 따르는 것이다. 물론 이 노선은 백인들에게 완전히 복속해서 그들의 선의와 온정에 기대는 이른바 ‘엉클 톰 주의’와는 다르다.

오바마는 뛰어난 화해의 기술자이면서 동시에 상당한 투사이다. 그는 흑인이 대통령이 되었다고 해서 미국사회의 인종차별과 편견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백인사회가 변해야 한다면 흑인공동체도 변해야 한다. 그래야 미국 전체가 더 나은 사회를 향해 ‘변모’할 수 있다고 오바마는 생각한다.

오바마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은 ‘변모(Transformation)의 서사’이다. 여기서는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대선 기간 중 그가 유권자들에게 거듭 강조한 대목은 “미국을 바꾸어야 하고 우리는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변화의 메시지이다.

그 메시지가 단순히 전임정권의 실정에 대한 비판의 맥락에서만 제시된 것 같지는 않다. 그의 취임사는 부시 정권이 추구해온 노선, 정책, 접근법에 대한 단절을 선언하고 있다. 이것은 부시 정권만이 아니라 공화당과 네오콘 전체의 정책방향에 대한 단절 선언이기도 하며, 그의 정부가 대내외정책에서 상당한 변화를 추진할 것이라는 암시이기도 하다.

문제는 미국을 어떻게 변모시킬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이 변모를 위한 서사에는 미국사회의 내적 변화에 대한 비전과 함께, 부시 정권 8년 동안 바닥으로 떨어진 미국의 대외 이미지를 한차례 개선하고 국제관계를 수선하는 등의 외적 변화의 비전도 필요하다.

이 점에서 오바마 이야기 중의 변모의 서사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지금 오바마 정부는 부시 실정이 낳은 경제파탄을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러나 이 파탄이 한 정권의 잘못된 정책이나 금융 부패의 탓이기만 한가?

천만의 말씀이다. 그 파탄은 지금까지의 미국인 전체의 경제적 삶의 방식과 습관, 집단적 욕망, 정신상태, 가치관 등에도 깊게 연결되어 있고 서유럽 자본주의 문명의 근원적 모순과도 본질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그 문명의 대중적 약속과 기본논리를 그대로 두고 외피를 수리하는 것으로 미국의 미래를 바꿀 수 있을까?

오바마는 미국의 최근세 대통령들 중에서는 아주 드물게 등장한 ‘지식인 대통령’이다. 리차드 홉스테더가 미국 대중의 ‘반지성주의’라 부른 것의 전통에서 보면 오바마의 등장은 상당히 예외적인 사건이다.

지식인이란 문제의 복잡성을 살피고 본질을 꿰뚫어 볼 줄 아는 자, 인간사의 모순과 역설에 대한 통찰을 가진 자, 인간의 일이 기대와는 달리 종종 반어적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것을 아는 자이다.

그는 조지 부시 류의 단순논리나 일방적 밀어붙이기, 마니키아니즘적인 이분법을 거부한다. 이 점에서 지식인은 불가피하게 ‘아이러니스트’의 면모를 갖는다. 오바마도 이런 자질과 면모를 갖고 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들 속에 담긴 수사적 공허성과 허위에 대해서도 성찰할 수 있는 인물이다. 이런 자질은 미국만이 아니라 모든 나라의 정치지도자들에게 요구되는 지적 도덕적 요청이다.

그러나 지금 같은 대중정치시대에 미국 같은 나라에서 사람들의 무리한 집단욕망과 광기가 터져 나왔을 때 대통령이 거기 대응할 유효한 수단을 가지기는 매우 어렵다. 미국 대중이 오바마 당선에서 경험한 그 자기 변모의 감격을 미국이라는 나라를 변모시키기 위한 에너지로도 전용할 수 있을지는 극히 의심스럽다.

“미국은 다르다”라고 말하는 미국적 ‘예외주의’가 지금까지의 예외주의와는 다른 방향에서 “그래, 정말 미국은 다르네”라고 말할 수 있는 변화를 일으킬 때, 그때가 아마도 오바마적 변모의 서사가 완성되는 시점이 아닐까 싶다.


Langston Hughes
랭스턴 휴스(Langston Hughes, 1902.02.01~1967.05.22)는 미국의 시인, 소설가, 극작가다. 인종차별에 저항하는 시를 많이 썼다. 그는 새로운 문학예술 형식인 ‘재즈 시’의 초기 혁신자 중 한 명이었다. 휴즈는 할렘 르네상스(1920년대 미국 뉴욕의 흑인 지구 할렘에서 퍼진 민족적 각성과 흑인예술문화의 부흥을 이르는 말) 동안 그의 작품으로 가장 잘 알려진 상태다. 출처=위키백과

About 김종영 (885 Articles)
사람과사회 발행인이자 편집장이다. ‘글은 사람과 사회며, 좋은 비판은 세상을 바꾼다’는 말을 좋아한다. weeklypeople@gmail.com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