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도둑
"집 나간 탕자가 걸인이 되어 돌아온 것처럼.... 집 나가면 고생이라더니 물건도 마찬가지인가 싶어 마음이 많이 좋지 않았다"
토요일은 둘째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날.
언니와 동생 사이에 끼어 속앓이가 심했을 둘째만을 위해 비워둔 날이다. 지난해부터 둘째가 좋아하는 놀이 프로그램을 데리고 다니며 둘만의 데이트를 즐긴다. 늘 엄마를 독차지하고 싶어 하는 막내도 그날은 양보를 하게끔 잘 말해 두었다. 그 시간에 막내는 좋아하는 블록방에서 만들고 싶은 것들을 만들며 친구들과 잘 논다. 그 날도 프로그램 센터에서 둘째를 기다리며 책을 읽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블록방 선생님이었다.
“저… 은호가 자전거를 타고 왔었나 봐요. 그런데 나가 보니 자전거가 없다며 우네요… 어쩌죠?”
얼마 전에 자전거 묶어 놓는 체인을 잃어버린 것이 떠올랐다. 전화 건너편에서 우는 아이를 잘 달랜 후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막내의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아파트 바로 앞에 있는 블록방인데도 왜 그걸 타고 갔는지… 지난봄에 두 발 자전거를 배운 막내는 시원해진 요즘 날이 시원해지자 매일 신나게 타고 다니던 참이었다.
그리 비싼 자전거도 아니고 사촌형에게 물려받은 것이지만 제법 반들반들하고 예뻤다. 게다가 그 날 아침에는 30분 거리에 있는 자전거포에 가서 자전거 바퀴 체인도 손보고 바퀴에 공기도 집어넣고, 공을 좀 들인 차여서 아이의 실망이 더했다.
난감하고 속상한 마음에 아이를 달래고 있는데 누군가 벨을 눌렀다. 윗층 아이와 그 아이의 친구였다.
“혹시 자전거 잃어버리지 않으셨어요?”
“응. 그렇지 않아도 지금 속상해서 저러고 있단다..”
“저희가 마트 가는 길에 어떤 형들이 은호 자전거를 타고 있더라고요. 분명 00동 00호라고 써 있길래요… 혹시나…”
4년 동안 이 동네에 살면서 아이들과 친하게 지냈는데, 그 인덕(?)이 이렇게 돌아오는구나. 사실 나는 어른들보다 아이들과 사이가 더 좋은 편인데, 윗집 아이가 자세히도 보고 와서 알려주는 것이었다.
마침 윗층 아이가 자전거를 가지고 간 아이 중 한 아이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 아이는 둘째와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어서 전화번호까지 얻을 수 있었다.
“(최대한 친절하게) 혹시 오늘 마트 앞에 세워둔 자전거 타고 갔니?”
급 당황하는 아이. 그래도 순순히 자백을 한다. 자전거 체인이 채워져 있지 않기에 주인이 없는 줄 알고 타고 갔단다. 버젓이 동 호수까지 써 놓았는데도 말이다.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고 있는 아이에게 화가 났지만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래. 아이들 때 그런 장난도 할 수 있지. 하지만 그건 분명히 절도행위야. 자기 것이 아니면 손을 대지 말았어야지. 자전거 보관소에 놓아 둔 건데… 우리 동 앞에 오늘 갖다 놓으면 문제 삼지 않을 테니 갖다 놔 주면 좋겠다.”
30분도 안되어 아래층에서 왁자지껄한 아이들의 소리가 들렸다. 나가보고 싶었지만 나와 마주치면 아이들이 많이 곤란해 할까봐 참고 있다가 나갔다. 그래도 순순히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돌려놓는 아이들이 고맙기도 했다. 조금 이따가 그 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저… 갖다 놨는데요.. 어떻게든 변상은 해 드릴게요.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졌는데 세워 놓는 지지대가 부러졌어요.. 그리고 안장이…”
얼른 다시 나가보니, 자전거는 두어 시간만에 고물이 되어 있었다. 동 호수가 적힌 스티커는 찢어져 있었고, 덩치도 큰 6학년 짜리가 작은 자전거를 탔으니 안장은 내려앉아 덜렁거리고, 세워놓는 지지대도 어디론가 가고 없었다. 말문이 막혔다. 마치 집 나간 탕자가 걸인이 되어 돌아온 것처럼… 집 나가면 고생이라더니 물건도 마찬가지인가 싶어 마음이 많이 좋지 않았다. 잃어버렸을 때보다 막내는 더 상심해서 울먹였다.
나쁜 아이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아이의 ‘어떻게 해서든지’ 하겠다는 ‘변상’이 마음에 걸렸다. 그 아이는 형편이 그리 넉넉할 것 같지 않았고, 목격자 아이의 말에 의하면 다른 친구들은 다 자전거를 타고 있었는데 그 형만 타고 있지 않았다고 하였다. 무엇보다 그 아이가 망가진 자전거 때문에 부모에게 거짓말을 하게 될 것 같아 염려가 되었다. 자전거를 가져간 아이에게 장문의 문자를 보냈다.
‘자전거는 염려 마라. 어짜피 못 타게 되었으니 변상은 필요 없게 될 것 같다. 하지만 막내가 많이 속상해 하고 있으니 만나면 꼭 사과해 주면 좋겠다. 그리고 다시는 남이 물건에 손 대지 않았으면 좋겠다. 약속하자. 그리고 우리 오늘 일은 잊자.’
하지만 정작 나는 이 일을 잊지 못하고 이렇게 글을 쓰고 있으니, 약속은 내가 지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길가에 있는 것이라도 내 것이 아니라면 손을 대지 않는 것이 맞다. 그리고 어린 호기심에 그것을 어떻게 가지게 되었더라도 물건을 그리 험하게 다루면 안 되는 것이 맞다. 그 아이들은 분명 그렇게 빨리 자신들의 소행이 발각될 거라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공짜로 손에 넣은 물건이라고 함부로 굴리다, 남의 물건을 그렇게 고물로 만들어 놓았으니 그 아이들을 따끔하게 혼내는 것이 맞을 지도 모른다.
박노해 시인의 ‘경운기를 보내며’라는 시가 떠오른다.
11월의 저물녘에
낡아빠진 경운기 앞에 돗자리를 깔고
우리 동네 김씨가 절을 하고 계신다
밭에서 딴 사과 네 알 감 다섯 개
막걸리와 고추장아찌 한 그릇을 차려놓고
조상님께 무릎 꿇듯 큰절을 하신다
나도 따라 절을 하고 막걸리를 마신다
23년을 고쳐 써온 경운기 한 대
야가 그 긴 세월 열세 마지기 논밭을 다 갈고
그 많은 짐을 싣고 나랑 같이 늙어왔네그려
덕분에 자식들 학교 보내고 결혼시키고
고맙네 먼저 가소 고생 많이 하셨네
김씨는 경운기에 막걸리 한 잔을 따라준 뒤
폐차장을 향해서 붉은 노을 속으로 떠나간다
경물(敬物)할 줄 모르는 자는
경천(敬天)도 경인(敬人)도 할 줄 모른다는 듯
물건에 대한 예의가 없는 세상에서
인간에 대한 예의가 남아 일을 리 없어
사람을 쓰고 버릴 때 어떻게 하더냐고
살아 있는 인간에 대한 아픔도 없이
돈만 알고 경쟁력과 효율성만 외치는 자들은
이미 그 영혼이 폐기처분된 지 오래라는 듯
씁쓸한 마음이 많이 들었지만, 무엇보다 잠시 자전거 도둑이 된 그 아이가 내 작은 용서의 의미를 알아줬으면 싶다. 운 좋게 넘어갔다라고 생각하지 말고, 자신의 잘못을 좀 진지하게 생각해주었으면 싶다. 물건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우리는 물건을 잃어버리고 사는 것이 아니라 경물과 경천, 경인하는 마음을 잃어버려 이렇듯 메말라가고 있는 건 아닌지…
어쩌면 우리 아이의 낡은 자전거 하나 가지고 내가 너무 부풀려 생각하고 있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내일은 폐기처분될 아이의 낡은 자전거에 막걸리라도 뿌려줘야겠다. 그동안 막내의 두 발 자전거가 되어줘서 고맙다고, 아이와 그동안 잘 놀아줘서 참 고마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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