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 품격
“맛있는 음식과 향기로운 술로 조상을 섬기고 부모를 봉양하며 잔치를 즐기었도다. 반갑고 귀한 손님들이 모여드는 것을 크게 기뻐했으며, 이 고을을 지나는 선비들 반드시 찾아와 함께 즐겼도다”
음식 품격
이숙인 /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공자는 문왕(文王)이 창포절임을 즐겨 먹었다는 말을 듣고 자신의 구미에 맞지 않지만, 이맛살을 찌푸리며 먹었다. 3년이 지나서야 이 이상한 맛에 익숙해졌다. 주(周)나라 문화의 핵심을 경험하기 위해 3년을 노력한 공자의 행위는 “네가 먹는 것이 네가 된다”는 힌두법전의 생각과도 통하는 것이다. 이를 보면 음식은 물질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과연 음식은 그 시대의 사상과 문화를 담아내는 그릇이었다. 하지만 개인의 그릇에 따라 음식을 대하는 태도와 실천은 달랐다.
절제의 밥상과 주방의 성인
왕실의 전속 요리사인 사옹원 숙수(熟手)들이 비번일 때면 부귀한 집에 불려다니느라 바빴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퇴계(李滉, 1501~1570)의 밥상은 세속의 그것과 달랐다. 퇴계가 서울의 서성(西城) 안에 우거할 때 당시의 좌의정 권철(權轍)이 찾아오자 식사를 대접했다. 반찬도 없고 맛도 없어 젓가락을 댈 수가 없었던 권철과는 달리 퇴계는 마치 진미(珍味)를 대한 듯 조금도 어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권공이 물러나와 사람들에게 “입맛을 잘못 길러서 이렇게 되고 보니 매우 부끄럽다”고 하였다.
성호(李瀷, 1681~1763)는 잘 차려진 밥상을 싫어할 사람은 없겠지만 “자기를 극복하는 것은 가까운 데서 시작되기 때문에 아침저녁으로 음식을 조절하는 것을 요점으로 삼는다”고 하며 소박하고 담박한 밥상으로 일관했다. 음식을 자기 수양과 결부시킨 예들이다.
특출한 미각의 능력을 적극 활용하여 음식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도 있다. 공자가 대현(大賢)이라 평가한 이윤(伊尹, 기원전 1500년대)은 ‘솥을 지고 칼을 차고[負鼎佩刀]’서 탕(湯) 임금을 보필했다고 한다. 그는 요리의 이론에 능통했을 뿐 아니라 요리 기술을 나라 다스리는 원리에 접목시킨 사람이기도 하다. 그에 의하면 음식이란 단맛·신맛·쓴맛·매운맛·짠맛의 오미(五味)를 적절하게 사용해야 하지만 어떤 것을 먼저 쓰고 어떤 것을 나중에 쓰는가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주방의 성인(聖人)’이자 ‘요리의 성인’으로 불리는 또 한 사람, 역아(易牙)는 제나라 환공(桓公, 기원전 716~643)의 전속 요리사였다. 신의 미각을 가진 그는 치수(淄水)와 민수(澠水)을 섞어 놓아도 각 물맛을 가려냈다고 한다. 역아는 제환공의 입맛을 장악함으로써 권력을 전횡한 부정적인 인물로 그려지기도 하지만 음식을 통해 성인의 반열에 오른 사람이다.
“좀 더 맛있는 요리를 위해서라면 영혼 없는 노동과 강도 높은 굴욕이라도 감내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소감일 뿐일까. 새삼 절제와 철학이 담긴 옛 선비들의 품격 있는 밥상이 그리워진다.”
‘수운잡방’, 소통과 기다림의 음식
한국의 16세기, 안동의 사족 김유(金綏, 1491~1555)는 요리서 『수운잡방(需雲雜方)』을 통해 그 시대 음식문화를 체계화하고 지식화하였다. 잡방에 불과한 음식을 지식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선비사회의 일반적인 행보는 아니었다. 사실 그는 문·무과에 여러 차례 응시했지만 모두 실패하였다. 그러자 ‘한번 사는 인생 즐겁게 살기’로 작정하고 세속의 명예를 뒤쫓기보다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삶을 살기로 하였다.
그런데 음식을 글로 쓰려면 관찰과 실험 등의 과학 기술적인 접근이 요구되면서 풍부한 음식 재료를 조달할 수 있는 일정한 경제적 기반이 마련되어야 한다. 김유는 이 두 가지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다. 『칠정산내외편』의 공동 저자이자 조선을 대표하는 과학자인 이순지(李純之)와 김담(金淡)은 각각 외가와 친가의 조부들이었다. 즉 의서(醫書) 및 농서(農書)를 집필한 친인척의 선조들이 그의 지적 자원이었던 셈이다. 게다가 친부와 양부로부터 받은 풍부한 유산이 그의 ‘새로운’ 인생에 힘을 실었다.
김유의 책 이름『수운잡방』은 ‘음식의 도’를 가리키는 『주역』의 5번 째 괘 수괘(需卦)에서 유래하였다. 수(需)는 “구름이 하늘에 오르는 상으로, 군자가 음식으로 연락(宴樂)한다”는 뜻으로, 대의(大義)는 기다림이다. 수운(需雲)의 뜻 그대로, 김유는 음식으로 반가운 손님을 접대하여 잔치를 즐기고 사방의 선비들과 교제함으로써 편안히 때를 기다렸다.
탁청정(濯淸亭)의 그 음식향연에 퇴계와 농암(李賢輔, 1467~1555)은 특별히 귀한 손님이었다. 농암은 김유의 시에 화답하여 “다행히 내가 늙어 물러나 한가로우니, 언제든 부르면 가서 그 신선한 맛을 나눌까 하오” 라고 하였다.
또 김유의 묘지명에서 퇴계는 “맛있는 음식과 향기로운 술로 조상을 섬기고 부모를 봉양하며 잔치를 즐기었도다. 반갑고 귀한 손님들이 모여드는 것을 크게 기뻐했으며, 이 고을을 지나는 선비들 반드시 찾아와 함께 즐겼도다”라고 썼다. 농암과 퇴계가 인정한 잔치였다면 그 격조가 매우 높았을 것이다.
김유는 수괘(需卦)에 함축된 기다림의 의미를 4남 2녀의 자녀를 통해 실현하였다. 퇴계도 언급한바, 그의 뜰에서 용감한 무신(武臣)도 나고 아름다운 문사(文士)도 났다. 그리고 김유는 농암의 딸을 며느리로, 퇴계의 조카를 사위로 맞아들였다.
이렇게 길 가던 선비들의 쉬어가는 공간이자 인근 군자들의 토론 장소가 되었던 탁청정에서 16세기 음식의 전통이 구현된 것이다. 누가 그를 과거에 실패한 인생이라고 할 것이며, 누가 그에게 문장 짓고 성리(性理)를 탐구하지 않았다고 토를 달겠는가.
음식을 앞에 두고 절제의 미학을 실천했거나 음식을 통해 자신의 인생철학을 구현했거나, 선인들의 음식 품격은 오늘 우리가 직면한 음식의 과잉 담론을 되돌아보게 한다. 건강과 정력, 미용이 결부된 음식에 상업이 가세하면서 삼시 세끼가 포획당한 느낌이라고들 한다.
좀 더 맛있는 요리를 위해서라면 영혼 없는 노동과 강도 높은 굴욕이라도 감내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소감일 뿐일까. 새삼 절제와 철학이 담긴 옛 선비들의 품격 있는 밥상이 그리워진다.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한국 철학
저서
<정절의 역사>, 푸른역사, 2014
<동아시아 고대의 여성사상>, 도서출판 여이연, 2005
<노년의 풍경>, 글항아리, 2014 (공저)
<일기로 본 조선>, 글항아리, 2013 (공저)
<선비의 멋, 규방의 맛>, 글항아리, 2012 (공저) 등 다수
역서
<열녀전>, 글항아리, 2013
<여사서>, 도서출판 여이연,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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