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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톱을 깎으며

“깎은 손톱은 떨칠 수 없는 그리움처럼 또 자라날 것이다. 아픈 사랑을 잘라내면 또 다른 사랑이 너무 멀지 않은 생애에 손톱처럼 자라날 것이다. 깎이고 잘려나가야 다시 자라나는 것이 왜 손톱뿐이겠나.”

“손톱은 계절이나 시절에 굴복하지 않고 늘 자란다. 그리움은 손톱과 같은 존재여서 의지와 관계없이 아무리 잘라내도 또 자라난다.” 사진=PixaBay

“꿈을 꾸었다. 산으로 깊숙이 들어갔는데, 나무는 보이지 않고 온통 손톱뿐이었다. 서둘러 그 자리에서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발이 땅바닥에 달라붙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겨우 도망쳤으나 앞이 낭떠러지였다.” 사진=최재선

“알래스카까지 갔다가 어김없이 돌아오는 방향 감지 능력을 갖춘 연어가 갑자기 부러웠다. 잠시 후 이 상황을 방향 감지 능력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소재 기억 능력으로 교정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진=최재선

손톱을 깎으며

최재선

2017.12.07.

“내일쯤 깎아야지.”

차일피일 미루며 미처 깎지 못한 손톱이 비닐장판을 누르면 푹 꺼져 개미가 누워 잘 정도까지 컸다. 흙을 막 뚫고 올라온 새싹만큼 자란 손톱 꼴마저 대대손손 용납하지 못한 성미를 가진 터라 여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자정을 막 넘겨 귀가하여 서재에서 손톱깎이를 찾았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아 아침에 손톱을 깎아야겠다고 마음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꿈을 꾸었다. 산으로 깊숙이 들어갔는데, 나무는 보이지 않고 온통 손톱뿐이었다. 이들은 나무처럼 꼿꼿이 서 있는 게 아니라, 더럽고 낡은 표정으로 저마다 날 노려보거나 날 잡으려고 덤벼들었다. 서둘러 그 자리에서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발이 땅바닥에 달라붙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겨우 도망쳤으나 앞이 낭떠러지였다. 이 나이에 더 이상 키가 클 리 없는데, 열없이 키 큰 꿈을 꾸었다.

일어나자마자 독서광처럼 시간을 읽었다. 새벽 2시 50분, 물을 한 잔 마시고 다시 손톱깎이를 찾았다. 꿈을 꾸다 잠에서 깬 상태에서 행방이 묘연한 손톱깎이 소재를 짐작하는 것이 막연했다. 알래스카까지 갔다가 어김없이 돌아오는 방향 감지 능력을 갖춘 연어가 갑자기 부러웠다. 잠시 후 이 상황을 방향 감지 능력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소재 기억 능력으로 교정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톱깎이를 끝내 찾지 못하고 누웠다. 기억의 회로에 불길하게 각인된 손톱이 계속 잠과 나 사이를 이간질했다. 엎치락뒤치락하다 잠결에 후드득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들었다. 눈이 많이 내린다는 절기인 大雪에 눈이면 몰라도 하늘이 빗방울을 저렇게 폭탄세일 하면 무단으로 횡단하는 것 아닌가. 여기저기서 경적이 울렸다. 모든 감각이 귀로 몰려들었다. 창문을 열었다. 여지없는 빗소리였다.

어머니께서 화장실을 다녀가신 소리가 났다. 엎치락뒤치락하다 마지못해 일어나 다시 손톱깎이를 찾았다. 녀석은 책상 위에 있는 필기구를 담는 통속에 있었다. 문득 어렸을 때 들은 말이 떠올랐다. 밤에 손톱을 깎으면 부모님 임종을 지켜볼 수 없고 병이 들거나 일찍 죽는다는 것이다. 아예 거들떠보지 않았던 이 말이 갑자기 요즘 생긴 일들과 인과관계로 엮였다. 어머니는 몸살감기를 심하게 앓으셔서 병원에 다니고 계시고 나는 4주째 감기를 달고 있다.

그냥 그대로 흘려보내면 좋을 말도 불길하게 뀌어 맞추면 그럴싸하게 보인다. 손톱을 깎으려던 생각을 똘똘 말아버렸다. 아침에 일어나 손톱 깎는 일을 잊지 않으려고 손톱깎이를 자동차 열쇠와 함께 두었다. 빗소리가 어둠 속에서 금속성으로 명료하게 뒹굴었다. 우리가 가진 오감 가운데 청각이 가장 감성적이다. 빗소리를 음악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고 웃음소리나 울음소리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잠을 앗아가는 소음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장노래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9시부터 강의가 있어 아침 일찍 연구실에 도착했다. 책장을 넘기다 우연히 책 귀가 손톱 사이에 끼었다. 순간 간밤에 있었던 일이 앞뒤 재지 않고 뭉텅이로 떠올랐다. 거사를 치를 요량으로 책상 서랍에서 손톱깎이를 꺼냈다. 엄지손가락, 집게손가락, 가운뎃손가락, 약손가락, 새끼손가락 순으로 손톱을 깎았다. 손톱은 잘라도 다시 자란다. 잘라도 다시 자라는 것은 손톱뿐만이 아니다. 풀잎이나 나무도 전지하면 또 자라지만, 사시사철 자라는 것이 아니라 한때에 불과하다.

손톱은 이들과 달리 계절이나 시절에 굴복하지 않고 늘 자란다. 그리움은 손톱과 같은 존재여서 의지와 관계없이 아무리 잘라내도 또 자라난다. 얼마 전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고 가슴 아파하는 제자를 페이스북에서 만났다. 그 제자를 생각하며 시를 썼다.

네 비보 여러 번 읽는다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사랑 끝났다고?
끝난 사랑 이미 먼 과거 거지
이별 앞에서 의연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고?
의연함과 깨달음 이별 뒤차 타며 오고
사랑 시름시름 아픈 거야
여러 각도에서 봐도 그대로지 않아
네 아픔도 영원할 일 아냐
지금 그 아픔 실컷 추종해라
어느 세월엔가 지겨워진 아픔 때문에
네 정신 광활하게 맑아질 거야
행여 다신 사랑하지 않겠다 마음먹지 마라
아플지라도 다시 사랑해라
폭폭 앓으며 사랑해야 한다
-졸시 「소브다에게」 전문

깎은 손톱은 떨칠 수 없는 그리움처럼 또 자라날 것이다. 아픈 사랑을 잘라내면 또 다른 사랑이 너무 멀지 않은 생애에 손톱처럼 자라날 것이다. 깎이고 잘려나가야 다시 자라나는 것이 왜 손톱뿐이겠나.


최재선
한일장신대 교수 choijs11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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