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는 ‘눈물 젖은 동북아’ 主演”
[평화재단 평화연구원 현안 진단] 거대한 변화 속에 들어간 세계, 동아시아, 그리고 한국
트럼프 등장의 세계사적 의미
세계사의 거대한 변화가 시작되었다. 제45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된 것을 충격과 경악으로 바라보던 세계인은 비로소 그것이 거대한 변화의 시작인 것을 깨닫기 시작한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미래의 희망을 노래하는 변화가 아니라 과거의 영광을 꿈꾸는 변화로 시작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변화는 퇴행적이다. 중국과 러시아에서 마오쩌둥과 스탈린이 부활하고, 일본에서 러일전쟁의 영광이 총리대신의 담화에 등장하더니, 급기야 미국에서 트럼프가 등장하여 세계의 경찰관을 그만두고 세계의 부를 독점하던 영광의 시대로 돌아가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동북아시아는 지역패권을 차례로 거머쥐었던 4대 강국이 모두 힘깨나 쓰던 영광의 시대를 그리워하며 부활을 꿈꾸는 향수의 시대로 돌입하고 있는 형국이다. 트럼프의 등장은 신파극 ‘눈물 젖은 동북아시아(Nostalgic Northeast Asia)’의 주연배우 캐스팅이 완료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향수(Nostalgia)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현재의 고통 속에서 죽음의 유혹을 이길 수 있도록 인간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21세기의 5분의 1이 지나가려고 하는 이 때, 인류가 맞부딪친 고통의 연원은 신자유주의가 이끌었던 글로벌리즘에 있다.
신자유주의는 인간이 발명해 낸 근대 기획의 최종병기였고, 인류 역사를 종착역으로 이끌어줄 기관차였다. 탈냉전 이후 30년 동안 미국이 이끄는 신자유주의호 열차를 타고 달려오면서 인류는 세계가 글로벌리즘 속에서 온전한 하나가 되어 경계를 허물고 내 것, 네 것 없이 오순도순 사는 꿈을 꾸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인류는 내게 주어져야 할 것이 남의 것이 되고, 악착같이 살아도 내 것이 내 것이 아닌 현실에 눈뜨게 되었다.
미 중부 러스트벨트(오대호 주변 공업지대) 백인 노동자의 상실감과 피곤함을 분노로 조직해 낸 트럼프의 등장은 신자유주의와 글로벌리즘의 종언을 알리는 신호가 될 것이다. 객차의 손님들이 뛰어내릴지 어떨지 망설이는 사이에 기관차 운전자가 먼저 뛰어내리는 결정을 한 것이다.
이제 인류는 ‘미지의 세계’를 조우하게 될 것이다. ‘미지의 세계’에 새로 들어설 질서는 제국이 후퇴하며 생길 빈자리에서부터 움터 나올 것이다. 제국의 파트너를 자임했던 일본이 먼저 움직였다.
트럼프 당선 직후 G7 중에서 가장 먼저 전화회담에 성공하고, 세계 지도자 중에 가장 먼저 직접 회동을 가졌던 아베의 행동을 한국에서는 부러움의 눈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당황과 초조가 역력한 행보였다. 전화회담에서 아베는 아직 당선인에 불과한 트럼프를 트럼프 대통령으로 부르고, 그의 ‘강력한 리더십’으로 미국이 더 ‘위대한 국가’가 될 것이라 확신한다고 추켜세우며, 그의 심기를 사려 안간힘을 다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평화와 안정은 미국의 힘의 원천이며, 강고한 미일동맹은 이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지탱하는 불가결한 존재’라는 것이 아베의 확신이었고, 이를 트럼프의 미국이 공유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트럼프의 등장과 동아시아
강고한 미일동맹을 기초로 중국 포위망을 완성하여, 동아시아에서 중국과의 주도권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려는 것이 재기하는 일본의 대전략이었다. 오바마의 재균형 전략에 일본이 적극 올라타서,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일본의 위상과 능력을 제고시키는 것이 그 구체적 실행 방침이었다.
TPP는 아베노믹스의 지속적인 추진을 위해 필요한 것이기도 했지만, 대 중국 포위정책의 경제적 표현이기도 했다. 일본은 오바마의 재균형 전략과 TPP 추진을 지속시켜 줄 것으로 기대되었던 힐러리에게 올인했다.
지난 9월 미국을 방문한 아베 총리가 힐러리의 요청으로 아베-힐러리 회담을 가졌던 데 반해 트럼프와의 면담을 굳이 실현하려 노력하지 않은 것은 그러한 기대의 표현이었다. 그랬던 아베였기에 트럼프의 등장에 적잖게 당황했던 것이고, 개인적인 신뢰관계를 신속히 확인해 둘 필요가 있었다.
그런 아베에 대해 트럼프는 두툼한 립서비스로 대응했다.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정권을 유지하는 비결을 묻고, 그런 총리의 업적을 높이 평가한다고 추켜세웠다. ‘미일관계는 탁월한 파트너십’이며, 이 특별한 관계를 더욱 강화시켜 나갈 생각이라고도 했다.
일본 외무성은 전화회담의 성과에 만족하며, ‘트럼프 정부도 간단히 궤도수정을 하기는 힘들 것’이라는 낙관론을 내비치기도 했다. 주일미군 경비를 100% 요구하며, 이를 거부할 경우에 철수할 수도 있다고 위협하던 트럼프에게서 ‘신뢰감’을 얻을 수 있었다는 평가였다.
개인적 신뢰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고 생각한 아베는 직접 회동을 제안하여 트럼프를 외교 무대에 데뷔시켜주는 역할을 자임했다. 지난 17일의 회담 후에 아베는 ‘흉금을 터놓고 솔직한 이야기를 했다’면서 ‘동맹은 신뢰가 기본인데, 트럼프는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지도자’라고 예찬했다. 물론 일본은 대선에서 트럼프가 열세인 상황에서도 보험을 들어 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트럼프의 외교 자문역으로 지난 10월 일본을 방문한 마이클 플린 전 국방정보국 국장에게 스가 관방장관이 접촉했고, 이 자리에서 플린은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어도 ‘안보정책은 변함없을 것’을 약속했었다. 트럼프 당선 이후 플린이 국가안보보좌관으로 기용되자 미일동맹의 지속성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가 일본에서 퍼졌다.
그러나 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11월 21일, 아베와의 회담으로부터 나흘 뒤, 트럼프는 공약으로 내걸었던 ‘100일 계획’을 실천하겠다며 TPP로부터의 탈퇴를 선언했다. TPP의 발효를 위해 국회의 비준을 서두르고, APEC에서도 미국의 TPP 잔류를 압박하던 일본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격이다.
일본은 성공의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아베노믹스를 수정해야할 필요에 직면했고, 동아시아 다자주의 무역질서의 주도권을 RCEP와 AIIB를 주도하던 중국에 내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일본은 TPP 발효를 전제로 이를 지렛대로 삼고, 아시아태평양FTA(FTAAP)를 인큐베이터로 하여 RCEP를 보다 높은 수준의 경제연계협정으로 끌어 올린다는 구상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트럼프가 TPP 탈퇴를 공식 선언함으로써 APEC은 중국의 무대가 되었다. 미국에서는 AIIB에 미국이 참가하지 않은 것이 실책이었다는 소리가 나오고 있다. 아시아태평양에서 미국이 물러서는 자리를 중국이 넘보고 있다.
일본의 구상은 러일관계에서도 뒤틀리기 시작했다. 러일간의 평화조약은 북일국교정상화와 함께 전후국가 일본이 남겨 놓은 미완과제로, 아베는 이를 해결하여 ‘전후체제로부터의 탈각’을 위한 마중물로 삼고자 했다.
푸틴의 극동에 대한 관심을 대규모 경제협력 프로젝트로 이끌어 내어 ‘북방영토문제(러시아의 입장에서는 남쿠릴문제)’를 해결하려는 의도였다.
이러한 아베의 대러 접근은 우크라이나와 시리아에서의 미러대결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미국이 러시아를 압박하고 러시아가 마지못해 일본에 내민 손을 미국 대선정국의 틈새에 낚아채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트럼프 당선 이후 푸틴의 태도가 돌변했다. 미러관계가 대결에서 협조관계로 돌아서는 가운데, 푸틴이 영토 문제를 건너뛰고 경제협력만 취하여 ‘먹튀’할 가능성을 엿보고 있는 것이다.
APEC에서 이루어진 푸틴과 아베의 회담 직후 찍은 사진에서 득의양양한 푸틴의 표정과 씁쓸한 아베의 표정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중국 포위망에 러시아까지 끌어들이려 했던 일본의 대전략은 여기서도 수정이 필요한 상황이 되었다.
미일동맹을 글로벌 동맹으로 격상시켜 대중 포위망을 완성하고, TPP 발효를 주도하여 아베노믹스의 성장노선을 지속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던 일본의 ‘대전략’은 트럼프의 당선으로 총체적으로 수정되어야 하는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트럼프의 등장으로 시작된 거대한 변화는 이제 막 시작되었고, 그 주연배우들의 덩치가 모두 거대하다는 것 때문에, 그 변화는 매우 느리게 진행될 것이 예상된다. 그런 가운데 낡은 질서를 묶어두려는 마지막 한 획이 번개가 스쳐 지나가듯 그어졌다.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체결이 그것이다.
세계사적 변화를 못 읽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본래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은 미국의 동아시아 재균형 전략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미국 오바마 정권의 재균형 전략은 국내적으로는 재정절벽이라는 도전과,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부상이라는 도전에 직면한 미국이 국내외 양면으로부터의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 미일동맹과 한미동맹을 엮어 한미일 동맹을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통해 미일동맹의 기능이 업그레이드되었고, 사드 배치 확정을 통해 한미동맹의 기능이 업그레이드된 마당에, 마지막 한 수가 한일간의 군사정보보호협정 체결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중국의 발전을 대륙에 고정시켜 태평양을 미국의 바다로 확보하면서, 한국을 미중대립의 전선에 내모는 결과를 낳는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북한은 미국의 범위 밖에서 중국과의 관계를 긴밀히 해 나가게 될 것이며, 미중 간의 신냉전 속에서 남북관계는 대립과 갈등의 구조가 정착되는 운명을 감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중국 쪽에서 핵을 보유한 북한을 용인하고, 동북아의 핵무장 도미노를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구상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발언이 흘러나오기 시작하자마자 미중간의 신냉전 질서를 스스로 앞당겨 가져오는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을 맺는 한국의 외교 국방 당국의 무신경함에 놀랄 뿐이다.
한편 동 협정의 체결을 두고 ‘군사주권을 팔았다’며 국방 당국을 매국노로 몰아가는 야당 일각의 얕은 세계인식에도 한숨이 나온다. 동 협정의 체결이 지니는, 보다 거대하고 본질적인 문제를 건드리지 않고, 그저 휘발성이 강한 반일민족주의로 탄핵정국을 이끌어가겠다는 것이라면 이 문제는 얼마 되지 않아 부메랑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
다시 아베와 트럼프의 세기의 만남에 시선을 돌려보자. 회담 개시 전에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이고, 회담 중에는 이따금 파안대소를 보이던 아베 총리는 회담 이후 기자회견이 시작되자, 구체적인 내용은 비공개로 할 수 밖에 없다면서 미일관계의 ‘신뢰’를 수차례 강조할 뿐이었다.
사전의 보도로 미루어 보아 아베는 트럼프에게 미일동맹을 기축으로 한 재균형 전략의 기조를 유지할 것과 TPP 발효를 위해 노력해 줄 것을 요청했을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이후 드러나고 있는 트럼프의 언사와 행동 등으로 미루어 보아, 아베가 요청하는 안보 면에서 미일동맹의 현 수준에서의 지속과 트럼프가 주장하는 경제면에서의 미국의 일방주의를 교환, 확인하는 선에서 타협한 것이었다고 예측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거대한 변화의 서곡은 갈등과 대립의 격화를 주조로 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거대한 변화는 매우 느리게 시작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하자. 종종 영화나 드라마에서 최초의 거대한 일격이 가해질 때, 한 순간 적막해지고 모든 동작이 일시에 멈추는 정지화면이 이어지다가, 슬로모션으로 바뀌면서 이내 화면 전체가 흔들릴 정도의 움직임과 굉음이 뒤따르게 된다. 표현의 기법이겠지만, 인간의 인지 능력이 현실의 변화를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거대한 변화를 스크린의 바깥에서 바라보는 관객은 슬로모션의 움직임 속에서 생존의 동선을 찾아낸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대한 변화가 시작되는 지금 이 순간, 변화의 바깥에서 관찰하는 여유와 지혜라고 할 수 있다. 조급하게 먼저 움직여서 스스로의 활로를 막지 말아야 한다.
현재 우리 스스로가 국정의 기본축을 바로 잡으려는 거대한 투쟁을 진행하는 와중에 놓여 있어서, 먼저 움직일 여유가 없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거대한 세계사적 변환기에 슬기롭게 대처하기 위해서라도, 우리 안의 거대한 변화를 차분히 준비하자.
이 혼란을 극복하여 평화와 공동번영의 선도국가로 스스로 거듭나고, 퇴행하는 세계사의 흐름을 다시 전진시키는 물꼬를 한반도에서 틀어 여는 상상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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