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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海에 最初로 ‘우리떡집’ 열다

“아침 식사를 ‘떡’으로 먹는 문화 만들자”, “사업 승부는 기술과 서비스에서 나온다”

안태호(64) 우리식품유한공사 대표를 만났다. 그는 중국에서 창업해 성공한 대표적 기업이자 경영인으로 손꼽는 사람이다. 현재 중국 상해(上海)에서 아내 김미혜(62) 씨와 함께 우리식품유한공사(우리떡집), 떡카페, 가미가(한식당) 등 한식 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아침 식사를 떡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하려고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떡을 공짜로 줬다. 반응이 좋았다. 그렇기 때문에 매일,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아침밥을 제공하기 위해 새벽부터 떡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우리 떡은 시키면(주문하면) 아침 7시 전에 도착한다는 것을 인식하도록 했다. 지금까지 이 약속은 쉬지 않고 지켰다. 지금은 8만 교민은 물론 중국인조차도 널리 알고 있다.

[인터뷰] 안태호 우리식품유한공사 대표

최초로 중국 상해에 ‘우리떡집’ 문을 열다

사람과사회 2018년 여름·가을 통권6·7호

2018년 5월 26일, 천연염색축제가 열리는 경남 양산 통도사 서운암에서 안태호(64) 우리식품유한공사 대표를 만났다. 그는 중국에서 창업해 성공한 대표적 기업이자 경영인으로 손꼽는 사람이다. 현재 중국 상해(上海)에서 아내 김미혜(62) 씨와 함께 우리식품유한공사(우리떡집), 떡카페, 가미가(한식당) 등 한식 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우리떡집은 개업 3년 이후 상해에서 한국 떡의 대명사로 자리를 잡았다. 입소문이 퍼지면서 특별한 마케팅을 하지 않아도 수십 곳에서 떡을 주문한다. 평상시에도 주문이 많지만 설, 추석, 돌잔치, 회갑연을 비롯해 상해총영사관 공식 행사에서도 우리떡집 떡을 사용한다.

안 대표는 세계한인무역협회(World-OKTA) 상해지회,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해협의회, 상해한식협의회 회장 등 다방면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쳐오고 있다. 2014년 10월 18일에는 ‘제2회 글로벌한식문화포럼’ 행사를 연변(2013)에 이어 상해에서 주최했다.

안 대표는 또 2012년 12월 7일 중국한국상회(회장 정창화) 산하 상해한국상회(한국인회) 제21대 신임 회장으로 선출됐다. 상해한국인(상)회 역사상 최초로 경선을 통해 선출한 회장이다. 안 대표는 6년 동안 상해한국상회 부회장을 역임한 바 있다. 상해한국상회 회장은 그동안 추대나 단독 후보 찬반 투표 형태로 선출했으나 21대 회장은 처음으로 두 후보가 나와 경선이 이뤄졌다.

안태호 우리식품유한공사 대표는 약 한 시간 동안 중국에서 떡집 경영으로 성공한 이야기, 중국에서 사업을 잘 하기 위한 조언 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상해에서 떡집 등 식품 사업을 하고 있는데, 어떤 게 있나?

우리떡집이 있다. 떡집은 공장 2개인데, 1공장은 상해, 2공장은 난경 옆 진강에 있다. 이 외에 상해 시내에 떡카페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고 ‘가미가’라는 전통한식 뷔페식당도 운영하고 있다.

▲한국과 중국은 1992년 8월 24일에 수교했다. 2018년은 한중수교(韓中修交) 26주년이다. 한중 수교 전인 1989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9년 전 중국으로 가서 활동을 시작했는데, 어떤 계기로 중국에 가게 됐나?

1989년 6월 21일, 신발 제조 회사인 (주)진양 수출부에서 근무하다 사직하고 무역을 하기 위해 토마토무역상사를 설립했다. 당시는 한중이 수교 전이라서 홍콩이나 오사카 등을 거쳐서 상해로 갔다. 이날이 1989년 6월 21일이다.

“우리 떡에 승부 걸어보자”

▲처음 중국에 간 후 떡집을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시작했나? 신발 제조 회사에서 무역 회사를 설립했는데, 어떤 계기로 떡집을 운영하게 된 게 궁금하다.

중국에 가자마자 떡집을 한 것은 아니다. 1989년부터 무역업을 하면서 주종인 신발 및 잡화, 의류 등 무역 컨설팅 사업을 했다. 거래처를 연결해주고 커미션을 받는 일이었다. 하지만 남의 일을 대리하는 컨설팅 사업에 한계를 느꼈다. 뜻한 만큼 수익도 오르지 않았다. 그러면서 인생의 전환을 가져올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고 싶었다.

어느 날 상해에 있는 한국 식당에 떡이 있어 먹어 보았다. 한국 떡이라고 내놨는데 우리 떡이 아니었다. 조선족 동포가 대충 흉내를 낸 것이었다. 순간 ‘우리 떡에 승부를 걸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떡집 창업과 함께 떡집 이름을 ‘우리떡집’이라고 지은 이유기도 하다.

2002년 말, 그러니까 중국에 진출한 후 약 12년이 지난 후 방앗간과 떡집을 시작했다. 올해(2018) 16년째다. 떡집은 처음 5명이 시작했다. 지금은 40여 명이 돼 약 여덟 배 늘었다. 떡집이라는 게 쉽지 않은 길이었다. 떡에 대해 아는 게 없었던 그는 어찌해야 할지 막막했다. 떡을 만드는 기술이 문제였다. 고민 끝에 그는 부인을 서울 유명 떡집으로 ‘연수’를 보내 기술을 배워왔다.

▲새벽부터 떡을 만들어야 하기에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새벽 2시부터 떡 만들기 작업을 시작한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쉬지 않았다. 아침 7시에 8만 여 교민(주민)에게 떡을 보내주기 위해서는 새벽에 일을 할 수밖에 없다. 아침에 인절미 떡을 아침 삼아 먹는 문화에 맞추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아침 식사를 떡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하려고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떡을 공짜로 줬다. 반응이 좋았다. 그렇기 때문에 매일,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아침밥을 제공하기 위해 새벽부터 떡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우리 떡은 시키면(주문하면) 아침 7시 전에 도착한다는 것을 인식하도록 했다. 지금까지 이 약속은 쉬지 않고 지켰다. 지금은 8만 교민은 물론 중국인조차도 널리 알고 있다. 사진=Pixabay

“아침 식사를 떡으로 먹는 문화 만들자”

▲아침 문화를 바꾼다, 어떤 의미인가?

아침 식사를 떡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하려고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떡을 공짜로 줬다. 반응이 좋았다. 그렇기 때문에 매일,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아침밥을 제공하기 위해 새벽부터 떡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우리 떡은 시키면(주문하면) 아침 7시 전에 도착한다는 것을 인식하도록 했다. 지금까지 이 약속은 쉬지 않고 지켰다. 지금은 8만 교민은 물론 중국인조차도 널리 알고 있다.

▲떡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면 맛과 서비스도 좋아야 하지 않나?

모든 사업이 그렇듯 결국 승부는 기술과 서비스에서 난다. 최고 품질의 떡을 만들기 위해 쌀은 헤이룽장성(흑룡강성, 黑龍江省)에서 가져오고, 참깨는 산둥성(산동성, 山東省)에서 직접 조달한다. 잣, 호두 등은 냉동이 아닌 것을 그때그때 조달한다. 상해 부인들이 한국에 갈 때 우리 떡을 싸가지고 갈 정도가 됐다.

▲중국어를 전공하지 않았는데, 물론 29년 동안 있었으니 중국어는 잘 하실 것이라 생각한다. 특히 상해는 상해 방언(사투리)을 사용한다고 알고 있는데, 중국어 사투리도 말하고 들을 정도라고 하던데, 중국어는 어떻게 배웠나?

중국어를 전공하지 않았기에 잘 몰랐고 잘 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중국에 처음 갔을 때, 그러니까 1989년부터 1998년까지는 조선족 재중 동포가 통역관을 맡아 늘 함께 다녔다. 1998년 통역관이 떠난 후에는 중국어가 빠르게 늘었다.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에 오는 사람에게 늘 하는 말은 한국에서 중국어를 배운 후 오는 것이 제일 좋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현지에서 살면서 사는 사람과 함께 하며 배우는 게 좋다. 아울러 출장을 나온 사람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은 거주하면서 배우는 게 좋다. 문화와 습관이 다르기 때문에 살면서 배우는 게 효과적이다. 또 한 가지는 말보다 글자, 글자가 중요하다. 여기 사람들은 한자를 잘 쓰면 박수를 쳐준다. 그래서 글자가, 말보다 한자가 중요하다.

한국인학교는 1999년 9월 개교한 상해한국학교(上海韓國學校)인데, 초등학교에 이어 중학교(2002)와 고등학교(2004) 과정을 설립하고 학교 발전을 위한 모금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상해 화동 지역에 진출한 기업, 자영업을 하는 교민 등 여러 사람이 참여해줬다. 모금을 통해 2006년에 고등학교 과정까지 포함하는 학교를 설립했다. 발전 기금은 학교 건축 비용으로 사용했는데, 당시 한국 정부에서도 도움을 주었다. 최근 들은 바에 의하면 재학생은 1,300여 명이고, 교사도 145명이 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사진=안태호

“모든 사랑을 교민에게 돌려주자”

▲좋은 말씀이다. 현지에서 한국인회 회장, 한국인학교 이사장도 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삶이 바쁠 텐데, 이런 활동을 한 계가가 있었나?

떡집을 오늘날까지 잘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떡집을 사랑해준 교민 덕분이다. 그래서 교민에게 돌려주기 위해 무료 봉사도 하고, 월급도 없는 재단 이사장도 하고, 상공회장도 맡아서 하면서 ‘모든 것을 돌려주자’고 생각했다. 지금도 ‘모든 사랑을 교민에게 돌려주자’는 마음으로 오늘까지 살아오고 있다.

한국인학교는 1999년 9월 개교한 상해한국학교(上海韓國學校)인데, 초등학교에 이어 중학교(2002)와 고등학교(2004) 과정을 설립하고 학교 발전을 위한 모금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상해 화동 지역에 진출한 기업, 자영업을 하는 교민 등 여러 사람이 참여해줬다. 모금을 통해 2006년에 고등학교 과정까지 포함하는 학교를 설립했다. 발전 기금은 학교 건축 비용으로 사용했는데, 당시 한국 정부에서도 도움을 주었다. 최근 들은 바에 의하면 재학생은 1,300여 명이고, 교사도 145명이 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상해는 한국인 8만 여 명이 거주하는 도시가 됐다. 최근에는 한국이나 미국에서 중국에 관심이 있는 예비 창업자를 대상으로 강연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신화인데, 강연에서 어떤 것을 강조하나?

전남대, 경희대, 미국 뉴욕한인회 등에서 강연을 했다. 초청을 받아 강연할 때는 자영업자는 대기업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한다. 대기업은 시스템이 있고 시스템으로 움직이지만, 자영업, 그러니까 창업자는 본인이 결정권자(Decision Maker)다. 그런데 결정권자가 실수를 하면 본인도 멍들고, 가족도 멍들고, 처가도 멍들고, 같이 갔던 친구도 멍들게 된다.

그래서 자영업은 본인의 판단력이 매우 중요하다. 그 판단력은 경륜과 경험에서 나온다. 그래서 너무 쉽게 창업을 하지 말고 약간 연습을 하는 게 좋다. 아니면 성공한 사람, 좋은 사람을 만나 등을 타고 가는 게 좋다고 늘 후배들에게 말한다.

“중국 창업은 판단력과 좋은 사람 만나는 게 중요”

▲최근에는 ‘중국 시장이 어렵다’, ‘창업 환경도 쉽지 않다’, 이런 말을 하는데, 현재 중국에서 사업을 하기 위한 상황이나 환경은 어떤가?

중국의 창업 환경은 한국이나 다른 서방 국가보다 어렵다. 하지만 아주 중요한 것 중 첫째는 ‘중국을 사랑해야 한다’(我们必须爱中国)이고, 둘째는 ‘중국을 알아야 한다’(我们需要了解中国)는 것이다. 중국을 사랑하지 않으면 절대 성공하기 어렵다. 또 말말 하지 말고 문화와 관습, 상법 등 알아야 한다. 중국에서 사업을 하고자 한다면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는 점, 자기 판단이 중요하다는 점을 꼭 말해주고 싶다. 중국에서 원칙(FM)대로 해야 한다. 위생, 생산, 안전검사 등 원칙에 맞춰 해야 한다. 언제 어떻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원칙대로 하는 것도 강조하고 싶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조언해주면 좋겠다.

많은 한국인들이 적은 자금을 들고 중국으로 온다. 그들은 중국을 인생 마지막을 걸 만한 ‘엘도라도’로 여긴다. 그러나 ‘기회 속에는 항상 위기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중국에서 보따리를 싸는 고통을 겪는 이가 적지 않다. 짐을 싸는 비율을 줄이려면 전문성 없는 사업에는 절대 도전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중국 직원들에게 밀착해서 일을 지도하고 감독할 수 있어야 한다. 중국 직원은 사장이 약해 보이면 언제든지 주인에게 이의를 제기해 불편을 겪을 수도 있다. 이는 위탁 경영을 가능한 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 합법적인 비즈니스를 해야 한다. 중국은 어수룩한 점이 많다. 하지만 그게 함정이자 실패를 낳기도 한다. 몇 번은 법망을 피할 수 있을지 몰라도 속이는 게 버릇이 되면, 크게 속이는 일이 생기고, 그러다 한 번 걸리면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 타격을 받는다.

중국에서 사업을 시작하려면 적어도 1년 이상의 준비 기간을 가져야 한다. 서비스업의 경우 영업 허가를 얻기가 쉽지 않고, 행정 규제도 심하다. 소비 행태도 한국과 많이 다르다. 이런 상황을 제대로 모르고 사업을 시작하면 거의 백전백패다.

“기회 속에는 항상 위기가 있다”

▲상해 교민이 겪는 어려움은 어떤 게 있나? 한국상회, 한국인회 회장을 맡았을 때 여러 고민과 활동을 했을 것 같다.

상해 교민이 겪는 어려움 중 관심을 갖는 것은 교육 문제다. 초등학교의 경우 최소 700만 원 이상의 교육비가 들어가기 때문에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재외 국민 교육을 위한 제도적 개선이 시급하다.

상회와 한국인회 회장이 된 후 한국상회, 한국인회 회장과 상해한국학교 이사장 등 주요 업무를 챙기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부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회와 한국상회가 합쳐져야만 상호 간에 정보 공유 등이 수월하며, 관련 사업을 진행하는 데도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중국 상해에서 성공한 한국 동포라는 주제로 나와 우리떡집을 소개했다. 신민만보, 중국 동방위성TV, 내몽고위성TV 등을 비롯해 여러 매체에서 소개했다. 29년 동안 한국 떡으로 사업에 성공한 것과 상해에 있는 양노원, 노인회, 고아원 등에 떡을 기부하는 한편 여러 면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취재를 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자원 봉사도 하고 있다. 특히 2008년 5월 사천성(쓰촨) 대지진 때는 한국 의사가 참여하는 봉사 단체인 상해그린닥터스와 함께 10여 일 동안 현장에서 봉사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2010년 4월 청해성(위수) 대지진 때에는 성금을 모아 전달했다. 사진은 안태호 회장이 운영하는 떡카페 모습. 사진=안태호

▲중국 매체에서도 많이 소개한 것으로 알고 있다.

중국 상해에서 성공한 한국 동포라는 주제로 나와 우리떡집을 소개했다. 신민만보, 중국 동방위성TV, 내몽고위성TV 등을 비롯해 여러 매체에서 소개했다. 29년 동안 한국 떡으로 사업에 성공한 것과 상해에 있는 양노원, 노인회, 고아원 등에 떡을 기부하는 한편 여러 면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취재를 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자원 봉사도 하고 있다. 특히 2008년 5월 사천성(쓰촨) 대지진 때는 한국 의사가 참여하는 봉사 단체인 상해그린닥터스와 함께 10여 일 동안 현장에서 봉사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2010년 4월 청해성(위수) 대지진 때에는 성금을 모아 전달했다.

▲성공에 이르기까지 가족의 도움도 컸을 것 같다. 가족에게 하고 싶은 말씀은?

아내를 사랑하고 고맙고 감사하다. 거의 29년 동안 얼마나 많은 사연이 있었겠나. 아들, 딸에게도 미안하고 고맙다. 명절 때도 만나지 못하는 시간이 몇 년씩 지나는 것은 일상이다. 그런 만큼 아내와 아이들에게 고맙고 미안하다. 가족 모두 사랑한다.


안태호
1955년 5월 12일 출생했다. 1978년 부산대를 졸업했다. 1989년 토마토무역상사를 설립했고, 다음해 1998년 회사를 상해로 이전해 2003년 우리식품유한공사를 세워 현재 대표를 맡고 있다. 우리떡집 외에 떡카페, 가미가(한식당) 등 한식 업체도 운영하고 있다. 상해한국상회 회장, 상해한국인회 회장, 상해한국학교 재단법인 이사장, 상해한식협의회 회장, 상해화동한식품발전협의회 명예회장, 세계한인무역협회(World-OKTA) 상해지회 고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해협의회 회장, 부산대 중국동문회 회장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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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사회 발행인이자 편집장이다. ‘글은 사람과 사회며, 좋은 비판은 세상을 바꾼다’는 말을 좋아한다. weeklypeopl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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