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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한 단상

어둠에 눌려 빛이 보이지 않을 때조차 엄연하게 빛이 존재함을 깨닫는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그 경계를 붙들게 만드는 불빛들을 반드시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포(그리스어: Σαπφώ)는 기원전 7세기 후반 레스보스 섬의 아르카이오스와 함께 활약한 고대 그리스의 시인이다. 기원전 612년 경 레스보스 섬에서 귀족의 딸로 태어나 한때는 시칠리아에 망명했으나 그 후 다시 복귀했다. 개인의 내적 생활을 아름답게 읊어 그리스 문학사·정신사에 독자적인 발자취를 남겼고, 시의 아름다움 때문에 열 번째 시의 여신으로 손꼽히고 있다. 사진=위키백과
사포는 남편이 죽자 미틸레네에 가서 결혼 전의 처녀들을 모아서 소규모의 학교를 개설하고 음악, 무용, 시가를 가르쳤다. 현존하는 축혼가나 사랑의 노래는 그러한 처녀나 다정한 벗들을 대상으로 해서 읊어진 것이다. 주로 서정시를 많이 썼는데, 명성은 호메로스와 견줄 만큼 높았다. 그의 시는 9권에 달한다고 하지만, 와 두세 편의 시가 거의 완전한 형태로 전해질 뿐이며, 많은 단편이 남아 있다. 사진은 화가 샤를 오귀스트 망쟁이 그린 사포의 모습이다. 사진=위키백과

사포는 남편이 죽자 미틸레네에 가서 결혼 전의 처녀들을 모아서 소규모의 학교를 개설하고 음악, 무용, 시가를 가르쳤다. 현존하는 축혼가나 사랑의 노래는 그러한 처녀나 다정한 벗들을 대상으로 해서 읊어진 것이다. 주로 서정시를 많이 썼는데, 명성은 호메로스와 견줄 만큼 높았다. 그의 시는 9권에 달한다고 하지만, <아프로디테 찬가>와 두세 편의 시가 거의 완전한 형태로 전해질 뿐이며, 많은 단편이 남아 있다. 사진은 화가 샤를 오귀스트 망쟁이 그린 사포의 모습이다. 사진=위키백과

겨울을 준비하기 위해 나무는 잎을 떨군다. 잎을 떨궈야 나무가 오래도록 추운 겨울을 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종의 가수면(假垂面) 상태이고, 의도적이고 일시적인 죽음의 형태를 띤다.

움베르트 에코의 두꺼운 그림책 ‘미의 역사(열린책들, 2014)’를 보다가, 한 그림에 오래도록 마음을 붙들렸다.

샤를 오귀스트 망쟁의 그림 ‘에릭 사포’. 무언가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사포의 눈빛은 사람을 매료시킨다. 시인임을 상징하는 리라, 검은 머리, 풀어 헤친 가슴이 그녀의 삶과 성격을 강렬하게 암시한다.

기원전 7세기 그리스 레스보스 섬에서 태어나 살아 온 사포는, 오래도록 유럽의 수많은 예술가와 시인들의 숭배를 받아 왔다.

시대에 따라 그녀를 표현한 방식은 달라도 2000년이 훨씬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그녀에 대한 찬사가 그치지 않는다. 그녀가 읊었던 사랑과 축혼의 노래, ‘아프로디테의 찬가’를 비롯한 몇 편의 시와 단편은 아직까지 완전한 형태로 남아 후대의 사랑을 받고 있다.

사포의 죽음은 그녀의 삶처럼 시적(詩的)이었다. 자신의 내적 생활을 아름답게 읊었던 사포는, 처녀들을 모아 학교를 개설하였고 이후 그리스 정신사와 문학사에 대단한 영향을 끼쳤다. 사포는 바닷가 바위에서 몸을 던져 죽음을 맞는다.

샤를 오귀스트의 작품은 마지막 순간의 사포를 그린 게 아닌가 싶다. 바위에 한 팔을 걸치고, 죽음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사포. 이 작품은 낭만주의의 극단적 측면, 즉 환희와 기쁨, 그리고 그 이면(裏面)에 있는 ‘죽음과 그로테스크’가 얼크러져 녹아져 있다.

낭만주의를 이야기하기에는 너무나 비낭만적인 사회에, 아니 에코의 시각으로라면, 낭만이 극대화돼 허무와 그로테스크가 일상화된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눈에 보이는 것, 말초적인 기쁨, 돈만 있으면 쉽게 구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우리를 현혹한다.

우리는 마치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압박감에 눌린 ‘풍선 안의 공기’들 같다. 거처와 먹거리를 구하는 문제로부터 당장 자유롭지 못할 때, 우왕좌왕 돌파구를 찾는 것처럼.

이 그림에서 사포의 죽음을 보고, 그 죽음의 방식에 내가 편을 드는 것 같아 불편하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 ‘응시凝視’의 방법과 상대성이다.

사실 죽음은 그 자체만으로는 ‘사실적 상태’이며 ‘끝’인 동시에 ‘마감’이다. 그 마지막 순간 사포의 표정에서도 말 할 수 없는 어둠이 감지된다. 죽음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상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읽고 있는 당신도 여전히 삶의 영역에 있기에 그러하다. 어쩌면 ‘죽음’이라는 것은 죽는 당사자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살아남아 있는 이’들의 몫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계가 천국이건 지옥이건, 죽음 이후에 남는 것들은, 결국 살아남아 있는 이들이 감당하여야하기 때문이다. 남은 이들에게 죽음은 ‘영원한 이별’과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이다.

이율배반 같지만, 죽음을 미화하거나 동조하고 싶은 마음은 결코 없다. 죽음을 대하는 방식에 있어서, 그것을 어떻게 직시(直視)하는가는, 달리 말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질문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죽음의 위협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이때에, ‘사랑’마저도 소모품 같아지는 이때에. 심지어 불과 한 해 전인 2014년 4월의 그 엄청나고 비참한 어린 죽음들을 속수무책 목도해야만 했던, 대한민국에서 말이다.

눈빛에도 이면이 있듯이, 죽음을 응시하는 방법에도 상대성이 존재하리라 생각한다.
좌절이 거듭되고 허무가 쌓이면, 표정과 태도는 냉소(冷笑)적으로 바뀐다. 냉소는 어둠을 어둠 자체로 두게 한다. 나 역시 오랫동안 무표정이나 냉소적 표정을 지니고 산 것이 아니었을까 반성하고 있다.

어둠과 빛의 경계(境界)에 시(詩)가 있었다.

그리고 시를 써 가면서 어둠에 눌려 빛이 보이지 않을 때조차 엄연하게 빛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그 경계를 붙들게 만드는 작은 불빛들을, 반드시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주위를 둘러보며 시선의 각도를 살짝 이동시켜 보면, 당신을 붙드는 많은 것들이 보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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