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네팔에도 ‘희망’이 있다
"다민족 사회인 네팔에서 인접국의 교역 방해로 겪는, 수탈에 가까운 경제 환경이 주는 고통을 본다. 그리고 이질적이기만 한 다양한 민족들이 얽혀 살고 있어 우리가 자랑스러워하는 대동 세상의 모습은 찾기 쉽지 않다. 그런데도 부러운 것이 많다. 왜냐하면 우리는 적어도 현대 사회에서 겪을 만한 것이 아닌 사건들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주장] 안부 인사조차 버거운 조국의 새해…나의 ‘정치적 유랑’은 언제까지 계속될까
척박한 땅에 푸른빛의 싹이 돋아나는 것을 보는 순간, 사람들은 모두 생명의 경이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희망을 이야기한다.
지난 2004년 네팔을 처음 찾은 이후 지금처럼 최악의 환경에서 보내본 적이 없다. 절망의 질곡이 깊이 찾아든 것처럼 느껴지는 네팔. 네팔 사람들의 활기가 그 어느 때보다 더 고맙고 소중하게 와 닿은 이유다. 그리고 부러웠다.
부러운 것은 무엇인가?
다민족 사회인 네팔에서 인접국의 교역 방해로 겪는, 수탈에 가까운 경제 환경이 주는 고통을 본다. 그리고 이질적이기만 한 다양한 민족들이 얽혀 살고 있어 우리가 자랑스러워하는 대동 세상의 모습은 찾기 쉽지 않다. 그런데도 부러운 것이 많다. 왜냐하면 우리는 적어도 현대 사회에서 겪을 만한 것이 아닌 사건들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최악의 환경 네팔, 희망을 품은 그들이 부러웠다
단일민족이라는 조건 속에서 분화된 의식 아니, 왜곡된 의식으로 살아가는 지도자들의 모습에서 분노도 느끼지 않고, 깊은 자괴감만 든다.
‘어쩌다가…….’ 라는 긴 탄식이 저 아랫배에서부터 쏟아져 나온다. 불법한 선거의 정황이 우박처럼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그런 선거로 선출된 대통령은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해를 거듭해 임기를 채워가고 있다. 당시에 불법이 벌어지는 현장을 생중계로 보았던 국민은 죄인이 의인 행세를 하며 선거에 출마한다는 소식을 접하면서도 속수무책이다.
왜 수많은 생명이 바다 밑에 수장이 돼야 했는지 밝히는 것도 돈 때문에 안 된다며 일부 세력들은 세월호 선체 인양을 반대했다. 또 일본군 위안부라는 영원히 용서할 수 없는 역사적 범죄도 일부 세력에 의해 돈 몇 푼에 용서하고(?) 말았다. 이런 점입가경에 현실을 정보통신 사회 속에서 막연히 지켜보고 있다. 몰지각한 정권은 아랑곳 하지 않고 국민의 마음을 왜곡했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가 오히려 역사 교과서를 왜곡하겠다고 나서는 일이라는 사실을 국민은 알고 있다. 바른 정보와 소통이 되어야 할 일은 깊이 감추어지고, 국민의 자존은 무참히 짓밟히는 나라. 조국의 현실을 보면 히말라야 산중에 사는 네팔사람들이 더없이 부럽다. 적어도 그들은 자신을 부정하는 세력들에 갇혀 살고 있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이명박-박근혜…난 언제까지 조국을 떠나 있어야 할까
몇 해 전이다.
이명박 정권 아래에서 살 수 없다고 떠돌다 우크라이나에 머물던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소비에트 사회가 많이 부러웠다. 조국의 현실은 그때보다 참혹하다. 언제까지 정치적으로 불만만 가져야 하나 안타깝다. 또 얼마나 더 조국을 떠나 살아야 하나 싶다.
나의 이 유랑은 싸움이 아닌가? 모자란 역량의 소유자로 조국을 지키는 방법은 무엇일까? 깊은 자괴감을 안고 일상을 지내며 그 어느 해보다 무덤덤한 새해를 맞았다.
새해에 대한 특별한 감흥도 없다. 지인들이 페이스북과 카톡으로 새해 인사를 건네도 답하는 일이 버겁다. 언제나 먼저 인사하고, 새해를 축복하던 내가 지금 왜 이리 되었나? 나로서는 사상 초유다. 최악의 현실을 내 조국에서 본다.
하지만 현재 내가 머무는 네팔 사람들은 지극히 일상적인 삶의 질곡을 온전하게 이겨내기 위해서 극심한 고통을 성자처럼 이겨가고 있다. 눈물도 없고 아우성도 없이 지긋한 눈빛으로, 은근하게 웃음을 띤 모습으로 말이다. 나는 지금 그들을 한없이 부러워한다.
왕정이 폐지되고 최근 몇 년 사이 네팔 몽골리안들이 정치적 자립을 선언하며 연대하고 있고, 자신들의 종족공동체를 주장하며 독립된 공화국에 가까운 자치를 쟁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지난해 12월 30일 아내의 종족인 터무(구릉)족의 새해맞이 행사가 열렸다. 새해를 맞아 카트만두 둘리켈 광장에는 구릉 족들이 인산인해를 이뤄 희망이 가득한 모습으로 축제를 벌였다. 나도 구릉 족 남자들이 입는 전통의상을 입고 참석했다.
멀고 먼 지역에 흩어져 살지만, 새해맞이 행사에는 자신이 사는 지역의 문화를 소개하며 단일한 종족적 연대를 과시하는 그들이 더없이 부러웠다. 마치 원시공동체 사회의 풍모가 이런 걸까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더욱 부러운 것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구릉 족 행사에는 입장권을 사야 참석할 수 있었고, 또 다른 종족들은 참여가 자유롭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행사에서는 모두가 자유롭게 입장할 수 있었다. 다른 종족과 함께 한 것이다.
이번 위안부 문제 합의 등 자신의 역사를 왜곡시키는 데 앞장서는 한국 정부와 최악의 조건 속에서 네팔 소수민족이 화합하고 이해하며 새해 희망을 품는 모습이 대비됐다. 대체 발전한 나라가 둘 중 어디인가 생각했다. 자신의 역사와 문화공동체적 가치를 소중히 여기지 못하는 민족에게 희망이 있을까? 염려와 걱정이 가득한 가운데 새해를 기약한다.
터무(구릉)족의 새해 인사인 로샤르 아쉬말라! 새해 모두 평안하소서!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함께 게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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