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호와 ‘영화로운 삶 50년’
“김영삼 한 마디에 ‘서편제’ 천만 관객 됐다”, “분단 없었다면 한반도는 공산화됐을 것”
[인터뷰] 이장호 영화감독
‘큰 정신, 작은 영화’와 ‘영화로운 삶 50년’
영화감독을 시대별로 손꼽으면 1960~70년대는 신상옥·유현목·김수용, 80년대는 이장호·배창호·임권택, 90년대는 장선우·김호선·박종원, 2000년대는 이창동·봉준호·정지영, 2010년대는 강우석·강형철·이준익 등이다.
이장호(李長鎬), 대한민국 영화감독이자 제작자다. 홍익대학교 건축미술학과를 중퇴하고 신상옥 감독이 운영하던 신필름에서 1965년부터 일하다가 1974년 『별들의 고향』으로 데뷔했다. 이 감독은 “사회의 어두운 면을 영화의 주제로 삼고 비판하는 사회성을 강조하면서 영화의 흥행에서도 뒤지지 않는 상업주의 감독의 모습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최근 작품은 2014년에 발표한 영화 『시선』이 있다. 그는 이 작품과 관련해 “방탕한 삶을 후회한다며”며 “생명을 권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삶의 후반부에서 신앙을 갖게 됐다. 기독교 신도가 되면서 ‘주님’을 만나게 된 것이다.
영화 『시선』은 이 감독이 ‘시대상’을 ‘반영’하기 위해 만든 ‘또 하나의 영화’다. 영화평론가인 김영진 명지대 교수는 『별들의 고향』(1974)이 20대 나이에 최고 흥행 기록을 세울 수 있었던 이유를 ‘새로운 감성’에서 찾았다.
김 교수는 ‘시대상을 반영하는 『시선』, 이장호 감독 영화 세계관’에서 “신상옥의 조감독 출신이었지만 아직 현장 지휘 경험에 자신이 없었던 이장호는 당시 구독하던 일본 사진 잡지에서 자신이 구상하는 이미지를 오려내어 촬영을 맡은 전설적인 카메라맨 장석준 기사와 상의하며 첫 영화를 찍었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이어 “일종의 아마추어리즘, 기성 제도에서 전혀 훈련 받지 않은 이장호의 새로운 감성은 한국영화계에 평지풍파를 일으켰고 『별들의 고향』의 영화 문법과 리듬은 동시대의 다른 한국 영화들과는 달랐다”고 설명했다.
영화 『시선』은 이 감독과 김 교수의 말과 글을 바탕으로 생각하면, 기존의 ‘시선’과 달리 ‘새로운 시선’을 담으려는 이 감독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할 작품이다. 이는 『별들의 고향』에서 새로운 영화 문법을 사용한 것처럼, 새로운 의미와 감동을 찾으려는 노력의 결과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시선』은 1995년 『천재 선언』 이후 20번째 작품이다. 또 데뷔 40주년 작품이자 19년 만에 나온 영화다. 『시선』은 생사의 기로에 선 한국인 아홉 명의 이야기를 통해 사람의 본성과 종교적 신념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현실의 극한 상황에서 사람의 본성과 종교적 신념은 어떻게 되는지 다룬 작품이다.
이 감독은 작품을 통해 영화와 함께 40년 이상 보낸 시간, 그리고 세월이 흘러 삶의 끝자락을 바라보는 70대 감독의 시선으로 사람과 삶, 사람과 사회, 종교와 신념 등 철학이나 인문학에서도 잘 어울릴 수 있는 주제와 물음을 작품에 담았다.
『시선』은 규제가 심했던 70년대와 영화·섹스·스포츠라는 3S(Screen·Sex·Sports) 문화 정책을 시행했던 80년대와는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이 감독은, 『시선』도 마찬가지였지만, 이제는 선배 감독이 됐고 삶과 인생을 이야기할 수 있는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그는 관객에게 끊임없이 삶이 무엇인지 묻고, 종교와 신앙을 끌어들여 본질이나 가치를 생각할 수 있는 시선을 영화에 담았다. 4년 전부터 기획해 진행하고 있는 엘리자베스 요한나 쉐핑(Elisabeth Johanna Shepping) 선교사 이야기도 같은 맥락이다.
이 감독은 『별들의 고향』에서 시작해 『바람 불어 좋은 날』(1980), 『어둠의 자식들』(1981), 『바보 선언』(1983),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1987), 『어우동』(1985) 등을 거쳐 최근 완성한 『시선』에 이르는 ‘영화로운 길’을 걸어오며 ‘사람’과 ‘사회’를 바라보는 눈을 쉬지 않고 보여줬다. 영화의 눈으로 현실을 보고 현실을 영화로 볼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해온 셈이다.
이 감독은 2017년 9월 8일(금) 서울 이태원에서 지인과 함께 처음 만났다. 이 감독은 인터뷰 요청을 흔쾌히 수락하며, ‘영화’보다는 ‘인생’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하면 좋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2018년 새해를 맞은 지난 1월 16일(화), 서울 서대문에 있는 도서출판 모아드림(대표 손정순, 북아현로 89 버금랑사옥)에서 이 감독을 만났다. 오후 2시가 조금 지난 무렵부터 영화와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오늘 나눌 이야기는 인생과 삶을 중심으로 할 예정이지만, 영화 이야기가 이야기의 바탕을 이루기 때문에 빼놓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신필름부터 영화를 시작해 지금까지 50년 세월이 넘었다. 영화와 삶을 포괄적으로 정리해 표현한다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나?
1965년부터 신필름에서 일했다. 요즘은 대외적으로도, 내 스스로도, ‘나를 파괴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내가 망가질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나를 꾸미는 게 아니라 내려놓기를 하는 것이다. 얼마 전 인터뷰도 그렇고 여전히 꾸미고 있다는 느낌이 많다. 그래서 차곡차곡 쌓아서 상승하는 인생이 아니라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인생의 여정이 보이는 것 같아 싫다.
오늘 인터뷰도 몇 년 지나면 거짓말을 했구나, 할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하면서 무수한 내리막과 오르막을 오가는 실패와 성공을 겪었는데, 이제 도착해보니 영화를 더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있을까 느낀다. 이런 기복 속에서 인생을 돌아볼 수도 있게 됐다.
최근 젊은 사람이 만든 영화를 보면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낀다. 그나마 나는 어리숙한 시대에 영화를 만들었기에 이름을 유지했다는 생각이 든다. 돈으로 영화를 만드는 시대에 적응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최근에 『신과 함께 : 죄와 벌』(김용화, 2017)도 보고, 봉준호 감독은 내가 좋아하지만, 『옥자』(봉준호, 2017)도 봤는데, 그런 영화를 보면, ‘돈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 같은 경우에는 할리우드에서 영화 만들 수 있겠느냐 물으면 자신이 없다. 거대한 자금을 어떻게 안배할 줄 모르니까, 그런데 요즘 젊은 감독은 그런 훈련이 잘 돼 있는 것 같다. 그나마 이전에 태어나서 감독의 작가 의도나 의식이 먹히던 시절이어서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지금 새 작품에 들어가야 하는데, 돈으로 만드는 시대다 보니, 돈을 쓰는 사람이 얼마나 까다로운지 모른다. 가령 시나리오가 완벽해야만 투자가 이뤄진다. 사람을 믿지 않는다. 감독을 믿지 않고, 작가를 믿지 않는다. 결과물을 믿는다. 그래서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4년 째 영화를 준비하고 있는데, 계속 시나리오가 실패하고 또 내 스스로 하는 자기 검열에서 쉽게 넘어가지 못하고 있다.
▲조금 전 말씀하신 ‘파괴’라는 것은 새로움을 찾는 것이자 변신의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파괴의 묘기를 부리는 이유는 그동안 실패하거나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전환점이 됐다. 스스로 약점을 드러내야 지혜가 생기고 극복할 수 있는 아이디어가 생긴다고 보는 것이다. 내려놓는 것이다.
“나를 파괴하며 내려놓고 있다”
▲논문을 보니 ‘큰 정신, 작은 영화’라는 표현이 있다. 무척 인상 깊었다. 이 말은 방금 하신 말씀과 연결이 돼 있다고 보는데, 이 표현의 의미를 알고 싶다.
‘큰 정신, 작은 영화’를 썼을 때, 점점 제작자본의 중요성이 산업영화에서 나오게 되고, 우리가 갖고 있는 세계라는 것은 자주 위축을 당하게 된다. 가령 초창기 때 제작에 참여했던 대기업은 대우, SK 등이었는데, 탐색 시대인지 모르겠지만, 기존 영화인을 상대로 해서 영화를 만들었는데, 대기업 영화 담당자, 이들은 대기업이 원하는 엘리트인데, 이들이 나오면서 영화인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아는 엘리트기에 검색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투자할 만한 영화인가, 영화 제작자의 생각이나 의식은 자꾸 소외를 받게 된다.
영화는 가장 중요한 게 자본이라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큰 정신, 작은 영화라는 표현, 주장을 했다. 이는 선진 사회에서 이미 결론이 난 것이다. 할리우드 시스템을 이상적으로 생각했는데, 프랑스도 미국 영화가 자본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제작비를 많이 들였지만, 이겨내지 못했다. 그래서 찾은 돌파구는 젊은 사람이 카메라를 직접 들고 나와 ‘누벨바그’(La Nouvelle Vague)를 만들면서 프랑스 영화의 진짜 모습이 드러났다.
이탈리아도 그렇다. 무솔리니 때 헐리우드처럼 대규모 영화를 만들었다. 그러나, 다른 역사 과정이기는 하지만, 패전 후 영화는 자본이 아니라 젊은이가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Italian Neorealism, Neorealismo)이 생겨서, 전 세계에 퍼졌고 이탈리아 영화가 모델이 됐다. 독일은 히틀러가 나와서 독일의 전통적인 표현주의 영화가 사라졌다.
한국 같은 경우는 재밌다. 이는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어서 이장호영화연구회(2016년 11월 24일 발족)에서도 파헤치자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영화를 발명한 미국, 프랑스는 처음부터 대기업, 자본, 대형 스튜디오 중심의 시스템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때 유럽 사회 체제를 끌어들였다. 법은 독일, 산업은 영국, 문화나 예술은 프랑스에서 끌어왔다. 영화도 마찬가지여서 대기업 중심의 시스템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한국은 흥미롭다. 식민지 시절 일본에서 대기업 시스템에서 밀려난 소자본이 만나 식민지 영화인이 만들어진다. 당시 이 시스템은 독립영화와 같은 것이어서 감독이 배우, 촬영, 편집 등 서너 가지 역할을 하는 구조다. 시작부터 이런 체제(mechanism)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게 나쁜 게 아니고 분업화하지 않은 상태로 제작을 하게 돼 작가적 생각이 영화로 나올 수 있었다.
물론 어떤 면에서는 유치할 수도 있지만, 때에 따라서는 좋은 작가에 의해 좋은 영화가 나올 수 있는 방식이다. 또 이 같은 방식이 대기업화되지 않고 해방 이후 이승만 정권 속에서도 이어졌다. 북한은 해당이 없다. 대기업화하려는 노력은 신상옥 감독 한 사람만 있었다. 여하튼 우리 영화는 자생적으로 프로덕션 중심의 영화 제작 시스템이 생겼다. 이 방식이 발전하면서 좋은 점은 돈으로 만드는 영화가 아니라 사람으로 만드는 영화가 됐다. 오랜 역사를 갖고 있었는데, 대기업을 만나면서 산업화가 되면서 제도가 붕괴되고 자본이 영화를 만드는 때가 됐다.
“영화는 ‘큰 정신, 작은 영화’가 좋다”
어떻게 보면, 이제 와서 대기업화하는 것을 볼 때, 선진 사회와 비교하면 후진성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선진 사회에서 이미 몰락한 시스템인데, 우리는 이제 시작하는 단계다. 할리우드 영화는 컬러TV가 미국 전역에 보급되면서 TV와 경쟁하면서 자꾸 다른, 차별성이 있는 영화를 만들려고 했다. 끊임없는 경쟁을 하게 되는데, 70mm가 나온 것도 새로운 노력과 경쟁의 산물이다.
그러나 도산을 겪는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이 상황에서 미국의 영화와 기업을 살린 것은 ‘뉴아메리칸시네마’(New American Cinema)다. 뉴욕에서 제도권 아닌 비제도권에서 돌파구가 생겼다. 이런 움직임은 앞에서 말할 누벨바그나 네오리얼리즘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한국 영화는 이런 과정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태생부터 갖고 온 제도를 자꾸 개선해서 장점을 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큰 정신, 작은 영화 이야기가 나왔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당시 생각이 아직까지도 중요하고, 또 어떤 사회 변화에 의해 대기업이 언제 두 손을 들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때 살릴 수 있는 것은 독립영화다. 특히 독립영화는 대기업 영화보다 더 왕성해졌고 더 성장했다. 이것은 무서운 힘이다. 독립영화가 언젠가 효자 노릇을 할 수 있는 대안으로 계속 성장할 것으로 보고 있다.
누벨바그(Nouvelle Vague) 누벨바그’(La Nouvelle Vague)는 ‘새로운 물결(New Wave)’이란 뜻의 프랑스어다. 전 세계 영화에 큰 영향을 준 프랑스의 영화적 경향인 ‘누벨바그운동’을 말하며, 영화 역사에서 고전영화와 현대영화를 가르는 중요한 분기점으로 평가한다. 누벨바그는 1957년 무렵부터 시작됐으며, 영화평론지 『카이에 뒤 시네마』(Cahiers du Cinéma) 발행인이었던 비평가 앙드레 바쟁(André Bazin)의 영화 비평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신예 영화감독이었던 프랑소와 트뤼포(Francois Truffaut), 장뤼크 고다르(Jean-Luc Godard), 클로드 샤브롤(Claude Chabrol), 루이 말(Louis Malle), 알랭 레네(Alain Resnais)등이 주도했다. 20~30대의 젊은 영화감독은 당시 침체에 허덕이던 프랑스 영화계에 신선한 발상과 표현 양식을 제시하며 기성 영화를 거침없이 비평하며 새로운 변화를 주도했다. 프랑소와 트뤼포는 1954년 ‘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이라는 글을 『카이에 뒤 시네마』에 기고한 후 기성 영화를 비판하고 ‘작가주의 영화’를 선언했다. 트뤼포는 시나리오에 의해 잘 만든 영화는 영화제에서 ‘상’을 받기 위한 것일 뿐이며, 이를 대신해 감독의 창조적 개성을 반영한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고다르는 당시 유명 감독을 비판하면서 기존의 안이한 영화 관습에 대항해 좀 더 개인적인 방식의 영화 제작, 즉 감독의 ‘개인적인 영감과 비전’을 투여하는 방식과 스타일을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은 당시 문학에서 ‘앙티로망’(Anti-Roman)으로, 연극에서 ‘앙티테아트르’(Anti-Theater) 등으로 나타났으며 이후 영화계가 받아들여 ‘새로운 물결(누벨바그)’로 자리를 잡았다. 누벨바그 영화의 대표작으로는 『네 멋대로해라』(장뤼크 고다르, 1959), 『비브르 사 비』(장뤼크 고다르, 1962), 『미남 세르주』(클로드 샤브롤, 1958), 『사촌들』(클로드 샤브롤, 1959), 『400번의 구타』(프랑소와 트뤼포, 1959), 『피아니스트를 쏴라』(프랑소와 트뤼포, 1960), 『사형대의 엘리베이터』(루이 말, 1957), 『연인들(루이 말, 1958), 『24시간의 정사』(알랭 레네, 1959) 등이 있다. 자료=위키백과·두산백과사전 |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Italian neorealism, Neorealismo) 제2차 세계 대전 전후(1944~1952)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영화운동이다. 이탈리안 네오리얼리즘이라고도 불린다. 세트 촬영보다는 야외 촬영을, 전문 배우보다는 비전문 배우를 사용했으며, 주로 허구적인 스토리보다는 노동자 계급의 절망적 현실을 가감 없이 다룬 것이 특징이다. 용어 네오레알리스모(Neorealismo)는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Andrea Amilcare Mussolini) 정권이 무너지기 한 달 전인 1943년 6월에 움베르토 바르바로(Umberto Barbaro)가 로마의 잡지 『영화』(Cinema)에서 언급함으로써 처음으로 사용했다. 정권이 무너진 후 루치노 비스콘티, 쟌니 푸치니, 케사르 자바티니, 주세페 데 산티스, 피에트로 잉그라오 등 잡지 『시네마』에서 활동한 평론가를 중심으로 발전했다. 이들은 당시 주류였던 백색전화 영화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리얼리즘 영화를 시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료=위키백과 |
뉴아메리칸시네마(New American Cinema) 1966~1975년 미국에서 일어난 영화의 특징을 이르는 말이다. 1960년대 미국은 시위, 행진, 폭동 등에 의한 시민권 운동과 학생 파업, 베트남전 반대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이 같은 저항 운동과 함께 ‘청년문화’(Youth Culture)가 생겼다. 청년문화는 부모 세대와 달리 머리를 기르고 성의 구별이 모호한 옷을 입는 등 과거와 다른 모습으로 존재를 드러냈다. 일종의 ‘전통 거부하기’ 형태다. 영화에서도 표현의 자유, 영화 검열 전면 부정 등의 움직임이 일어났으며, ‘청년영화’(Youth Films) 혹은 ‘현재영화’(Now Film)로 나타났으며, 저항 운동 열기가 줄어들 때까지 인기를 누렸다. 당시 영화는 구세대와 갈등하는 젊은이와 그들의 새로운 생활 방식에 관한 것이 많았다. 이런 영화는 젊은 영화감독이 많이 만들었으며, 이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을 탐구했고, 몇몇은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 또 외국에서 들어오는 당시 영화처럼 전통적 허구 양식과 함께 기록 영화나 실험적 양식이나 주제 등 여러 가지 형식을 결합했다. 대표적 영화 작품은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아서 펜, 1967), 『졸업』( 마이크 니콜스, 1967), 『이지라이더』(데니스 호퍼, 1969) 등이 있다. 자료=필름메이커스·인터넷 |
“한국은 어떻게 영화 선진국 됐을까”
▲독립영화는 『워낭소리』(2009),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2014)에서 보듯이 최근 몇 년 동안 빠르게 성장한 것은 많이 느낄 수 있다. 돌파구 등 여러 면에서 긍정적인 현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현상이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나?
자본 문제가 아니고 영화를 만들려는 의지의 문제다. 이는 또 성장이라고 보는데, 어려울수록 도전은 같이 성장하는 것 같다. 그래서 한국 영화는 틀림없이 미래가 있다고 본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한국 영화가 왜 선진국인가 생각해보자. 한국 영화는 선진국이다. 대중문화가 선진국인데, 작은 나라에서 영화를 보는 관객은 엄청나다.
이장호영화연구회가 연구하고 싶은 주제기도 하다. 작년(2017년)에는 시작이었기 때문에 내(이장호) 영화만 다뤘는데, 올해(2018년)부터는 다른 영화까지 살펴볼 예정이다. 시대마다 영화가 달라져도 영화가 왜 관객에게 큰 반응을 일으키고, 한국 사람은 왜 영화를 좋아하는지, 왜 영화를 많이 관람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찾고자 한다.
이런 게 한국 영화가 전 세계 영화 선진국에 들어가는 중요한 계기고 자본에 의해 만들어진 영화가 할리우드와 달리 IT가 성장하면서 컴퓨터그래픽을 사용해 예산은 할리우드처럼 큰 자본을 들어가지 않아도 할리우드에 버금가는 좋은 영화를 만드는 힘, 한국 영화의 무서운 힘이라고 생각한다. 여전히 프로덕션 시스템, 즉 독립영화 정신이 상업영화에도 살아있다고 본다. 정말 이상하다. 어떻게 영화에서 선진국이 됐을까. 정치에서 선진국이 됐다면 기가 막혔을 것이다.
▲감독은 선택을 할 수 권한이 있는데, 어떤가? 주연, 조연, 스탭 등 ‘선택’을 해야 할 때 고민도 클 것 같다. 이럴 때 어떻게 하나?
요즘에는 그렇지 않다. 우리 때는 그랬었다. 그런데 감독은 고민을 하지만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는 없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주변 사람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이는 것을 비롯해 여러 사람이 갖고 있는 힘을 활용해야 한다. 오랫동안 영화 제작을 하지 않아 주변에 있는 A급 스텝을 선택해야 하는데, A급 스텝이 주변에 올 수 있도록 하는 게 무척 힘들다.
영화는 시스템으로 만들어야 한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시스템 없이 혼자서 하려는 정치를 했기 때문에 정치를 망쳤다고 본다. 정치는 시스템화해야 한다. 전문가가 얼마나 많이 포진하느냐가 중요한데, 영화는 이게 무척 중요하다.
안성기를 스카우트한 것도 내가 아니라 조감독이었던 배창호 감독 생각이었다. 주변이 도와줌으로써 새로운 얼굴을 발견할 수 있다. 신인 발굴한다는 것은 굉장히 큰 힘이다. 적은 돈으로 좋은 인재를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좋은 배우를 쓰려면 영화 제작비 절반은 쏟아 부어야 할 정도다.
“김영삼 한 마디에 ‘서편제’ 천만 관객 됐다”
▲영화가 사회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것 중에 3S가 있고 여기엔 영화가 들어간다. 미디어로 볼 때, TV와는 조금 다르겠지만, 영화는 전 세계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영화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영화의 힘, 영화의 역할을 중심으로 듣고 싶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개인이 꿈을 꾸는데, 프로이드가 꿈 해석한 것을 보면, 내가 부족하거나 소망하는 부분과 맞아떨어지는 게 꿈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도 집단무의식이 있다. 이 무의식이 맞아떨어지면 영화가 흥행한다. 예를 들면, 박정희라는 무서운 독재자가 어느 날 부하의 총에 죽었다. 그러면 그 시대를 살았던 국민은 싫던 좋건 박정희라는 리더의 사회 속에서 살다가 어느 날 너무 간단하고 쉽게 해결이 되어버리니까, 그래서 20년 동안 갖고 있던 가치관이 하루아침에 날아가 버리니까 허탈한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이 당시에 가장 인기 있던 영화는 『취권』(원화평, 1976)이었다. 『취권』이 얼마나 허무맹랑하냐면, 취하면 취할수록 초인적 힘이 나오는 것이다. 그 시대의 국민에게 큰 위로가 됐을 것이다. 그렇게 집단무의식과 맞아떨어지면 큰 힘을 발휘한다. 그게 영화 흥행의 요소이면서 사회적 기능을 한다. 꿈의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위로가 됐을 것이다.
두 번째는 생각하지도 않았던 영화가 성공했던 게 『서편제』(임권택, 1993)다. 처음에는 관객이 들지 않아서 영화를 내리려고 했다. 그런데 1993년 5월 김영삼 대통령이 춘추관에서 서편제 상영회를 열어 영화를 본 후 ‘큰 감동을 받았다’며 ‘진짜 우리 영화는 이런 영화’라고 말했다. 당시 김영삼은 슈퍼스타였다. 지금의 문재인 대통령의 인기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김영삼은 당선 당시 90%가 넘었다. 연예인보다 더 인기가 많았다.
그런데, 영화를 끝내려던 참이었는데, 김영삼이 영화를 봤다는 뉴스가 나온 후 단성사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단성사에서 100만 관객이 넘었다. 당시 100만 명은 지금으로 보면 1000만 관객이 본 것과 같은 것이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여러 극장에서 상영하는 멀티스크린이 아니라 한 곳에서만 상영하던 시절임을 감안하면 대단한 것이다.
『취권』 영화 『취권』은 홍콩 출신 영화배우, 영화감독, 무술감독인 원화평(袁和平) 감독이 만든 영화. 성룡, 황정리, 원소전이 주연을 맡았으며, 1976년 개봉했다. 취권의 정식 이름은 “팔선취권(八仙醉拳)” 혹은 “취팔선권(醉八仙拳)”이다. 중국에는 무수히 많은 취권이 존재하나 특히 취팔선은 ‘8명의 취한 신선’의 동작을 본따 만들어진 권법으로 그 창시자는 소화자(소걸아)로 알려져 있다. 취권에 나오는 노래인 남아당자강은 황비홍 시리즈의 주제곡으로 유명하다. 자료=위키백과 |
『서편제』 영화 『서편제』는 임권택 감독이 태흥영화에서 제작해 1993년에 개봉한 한국영화다. 이청준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며 김명곤이 각색했다. 주연으로 김명곤·오정해·김규철이 맡았고, 안병경·강선숙·이인숙·최종원 등이 출연했다. 역대 한국 영화 역사상 최다 관객을 기록한 영화로, 판소리와 한(恨)을 소재를 통해 한국 전통문화에 대한 소중함을 일깨워준 영화다. 특히 1993년에는 멀티플렉스(복합상영관) 상영 형태가 아니라 단성사에서 개봉해 상영 196일 동안 서울에서 100만 관객을 동원한 것으로 유명하다. 1993년 5월 김영삼 대통령은 청와대 춘추관에서 서편제 상영회를 열어 영화를 관람했다. 김 대통령은 “많이 보지는 못했지만 지금까지 내가 본 영화 중에서 가장 큰 감명을 받았다”며 “이 정도면 세계 어디에 내놔도 되겠다. 문화대국으로 가는 것도 신한국 건설의 하나”라고 극찬했다. 자료=위키백과·서울신문 |
영화가 성공한 이유를 생각해보면, 우리 무의식 속에 있는 것, 그러니까 군인 독재가 지배하던 사회에 문민정부가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마음에 문민정부를 바라는 욕구가 강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욕구뿐만 아니라 긍지도 있었다. 우리가 살던 사회가 변하기 시작하는데, 온돌이나 요강과 같은 것을 불신하던 시절에서 인사동에 요강을 놓아도 골동품이 되고 시골에 있는 여물통도 인사동에 가서 골동품이 되는 시절이다.
박동진이라는 소리꾼이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라는 광고(CF)가 있었다. 그런데 우리 국민이 점차 우리 것이 좋다는 자긍심을 갖기 시작했다. 돼지, 고추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 것이 좋다, 국산이 좋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 시기에 문민정부가 들어섰다. 문민정부의 인기도 국민의 긍지에서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옛날 같았으면 『서편제』를 『미워도 다시 한 번』(정소영, 1968) 정도로 취급할 수도 있었는데, 국악 구닥다리라고 생각하지 않고 자랑거리로 생각했다. 영화 『서편제』의 힘이 사회 변화에 중요한 것이다. 집단무의식과 맞았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는 사회에 집단무의식을 만들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은 굉장히 복잡해졌다. 문화의 다양성이 나오면서 욕구가 달라지고 복잡해졌다. 이제는 오락거리가 집단무의식 중의 하나인 것 같다. 가볍게 보고 복잡한 것을 바라지 않는다. 간단하고, 정신 쏙 빼고, 끝나면 잊고 평안한 마음을 갖고자 하는 경향이 많은 것 같다. 이런 것은, 이를 테면, 풍속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작품을 평가할 때 ‘사회파(社會派)’라는 말을 종종 한다. 시대와 시대의 삶을 많이 담았기 때문일 텐데, 어떻게 생각하나?
그것은 시대, 그 시대 때문에 그런 평가를 받게 됐을 것이다. 한 생각을 끝없이 유지하고 싶지는 않다. 사회가 변할 때 변한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당시에는 권위 체제, 정권이나 사회를 이끌어가는 여러 가지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 평가가 나왔을 것이다. 지금은 그 반대다. 옛날, 초창기 싫어하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본다. (초창기처럼) 성장과 성숙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시 고등학교나 대학 시절처럼 탐닉하던 상황으로 빠지고 싶다. 옛날에 읽던 책을 읽으며 지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주로 성장소설이다.
“분단 없었다면 한반도는 공산화됐을 것”
▲성장소설이라면 인생의 변화나 생각의 변화, 인생이나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 등 전체적으로 ‘변화’가 있기 때문일 것 같다. 그렇다면 최근에 사람이나 사회적 현상에 특별히 관심을 가는 게 있나?
진보와 보수 사이의 갈등이 매우 불편하다. 지금은 신앙에 빠져 있다. 최근에는 새벽 기도를 나간다. 잘 안 나가다가 특별 새벽 기도 때문에 나가고 있다. 불안한 계시 속에서 기도를 하는데, 이런 말은 처음 하는 이야기인데, 중국으로 백두산 관광을 간 적이 있는데, 그 과정에서 옥수수밭이 끝이 없을 만큼 계속 되는 것을 보며 중국이 정말 크다는 생각을 했다. 도문강(豆滿江)에 앉아 북한을 바라보니, 거리도 30m 정도밖에 안 되는데, 두만강 건너편에는 옥수수가 하나도 안 보이고, 황폐했다. 눈으로 봐도 가난한 모습이 보였다.
내가 함경도 출신인데, 건너편이 함경도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데 이상하게 눈물이 핑 돌면서 ‘아,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어떤 계시를 받았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분단을 만들어줬기 때문에 강력한 중국, 옥수수밭을 보면서 강력함을 느꼈는데, 분단이 없었다면 한반도는 금방 공산화됐을 것이다. 공산화가 안 됐기 때문에 통일 자금을 꿈꿀 만큼 경제 성장을 이룬 것은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분단을 감사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 새벽 기도에서 갑자기 나라가 이 모양이 되게 만든 것은 옛날 독재정권 때부터 지금까지 자생적 공산주의자를 만들게 한 보수 쪽에 있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분단을 만들어준 하나님의 예지가 앞으로는 어떻게 될 것인가 생각했다.
평양은 1900년대에 평양대부흥회라는 게 있었다. 또 기독교가 크게 부흥하던 때였다. 그런데 평양은 그때 복을 받은 게 아니다 공산화로 분단됐기 때문이다. 반면 남한은 민주주의로 성장했고 기독교도 크게 성장할 수 있게 해줬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죄는 무엇일까’, ‘하나님이 어떤 것 때문에 노하실까’에 대해 생각해봤다.
평양대부흥회 1907년 1월 6일부터 10일 동안 평양에 있는 장대현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난 기독교 신앙 대부흥운동이다. 원산에서 하디 선교사가 시작한 운동에 영향을 받아 교회가 많은 평양을 중심으로 시작해 대한민국 모든 교회로 확산된 대부흥운동이다. 이 부흥운동은 내 개 교회가 연합한 집회며, 1월 6일(주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시작했다. 평양대부흥회는 믿음의 힘으로 일제하에서 모진 박해와 수난을 잘 견디고 전진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한국 교회의 장래를 예견하시는 하나님의 세밀하고도 비상한 섭리였다고 평가한다. 자료=위키백과 |
보수가 그동안 안심하고 방심했고 그 사이에 자생적 공산주의자를 만들었다. 기독교가 정말 강력한, 정치보다 더 높은 곳에서 예언할 수 있을 정도가 되고, 종교가 정치를 바르게 인도할 수 있어야 하는데, 종교가 정권 밑에서 하수인 노릇을 하고 있었다. 이런 기독교를 보면 하나님이 진노할 수 있다. 그러면 정말 무서운 게 생길 수 있다. 아무것도 몰랐을 때는 분단으로 끝났다. 하지만, 이번에 진노한다면 전체가 공산주의 사회가 되는 것을 허락하고 공산주의 체제에서 진짜 헌신하는 순교자가 나와 통일을 허락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시를 느꼈는데, 이 때문에 많이 놀랍고 무서웠다.
진짜 계시일까 아니면 나의 불안일까 고민을 했는데, 내 고민이었다. 바라는 바는 우리 사회가 이 같은 예언이나 예시적인 생각을 갖고 기독교는 기도를 하고 사회는 바르게 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보수는 불안을 조성하고 진보는 속상한 행동만 하고 있다. 그러니 두렵다는 생각이 든다.
“운동권, 참된 운동권 됐으면 좋겠다”
▲평양대부흥회와 하나님의 진노한다, 이 상황은 흥미롭다.
요즘에는 예전과 달리 순박하게 소외 계층을 위한 영화를 만드는 것과는 달라졌다. 역사 대체라는 게 있다. 지난 역사를 대체하는 것도 있겠지만, 미래 역사를 미리 계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영화 『신과 함께: 죄와 벌』(김용화, 2017)가 (미래를 계시하는) 그런 환타지로 만들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최근 서울대 대자보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386세대 운동권이 박종철, 이한열 등의 죽음을 민주화로 위장한 것이라는 내용이 서울대 대자보에 나왔다는 이야기다. 나는 과거 운동권이 참된 운동권이 됐으면 좋겠는데, 점점 권력화가 되면서 정치적이고 집권하기 위한 것에 집중하고, 그러면서 두려움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본다. 그래서 불안하지 않은 시대로 돌아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고, 운동권을 바라보는 곱지 않은 시선도 갖고 있다.
서울대 트루스포럼 대자보 ‘서울대 대자보’는 서울대 트루스포럼이 2018년 1월 15일 영화 『1987』 내용을 담아 학생회관 앞에 게시한 ‘서울대 트루스포럼 대자보’를 말한다. 대자보는 ‘1987, 난 안 봐! 토가 나올락 하네!’라는 제목으로 ‘영화 1987에 대한 운동권 선배의 회고’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대자보는 ‘박종철, 임종석을 비롯한 386 운동권은 스스로 민주화운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이 실제로 추구한 것은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 즉 공산주의 체제였고 그들이 한 운동은 공산화운동이었다’는 내용을 담았으며 대자보를 쓴 사람은 ‘인문대 83학번 YK’로 되어 있다. |
▲참된 운동권을 바라는 마음은 과거 386 운동권 세대가 지금은 권력을 갖게 되면서 순수와 거리가 멀어졌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대학에서 강의도 많이 하셨는데, 강조하는 게 있나?
특별한 것은 없다. 내 생각을 마음대로 이야기할 수도 없고 강요할 수도 없다. 그런데 취업 준비를 하느라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왜 그럴까 하는 생각을 해보면, 성공한 것을 앞세우는 사회이기 때문일 것이다.
얼마 전에 유튜브를 봤다. 황진이, ‘황당한 진짜 북한 이야기’라고 하던데, 탈북민이 나와서 이야기를 하는데, 대한민국은 꿈을 이룰 수 있는, 노력한 만큼 보수를 받는다는 사회라는 말을 듣고 놀랐다. 한 달에 몇 십 만원, 100만 원이 안 되는 돈을 받으면서도 안정이라고 생각하는 모습을 봤다. 탈북민도 빚을 갚을 게 있고 가족을 데려오는 데 써야 하는 등 힘든 게 많이 있다. 또 나쁜 점보다는 좋은 점을 먼저 보려고 하는 것 같아 느낌이 좋았다. 불편이나 불만이 있어도 참는 게 많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생각한 것은 ‘그럼 우리 학생들은 어떤 것을 생각하고 무엇을 꿈꾸고 있는 있을까’였다. 탈북민이 높다고 생각하는 월급은 대체로 150만 원 정도인 것 같았다. 그래서 생각한 게 젊은이들이 이런 것을 보면서 때로는 위안이나 축복이라는 생각을 가졌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 세대 알려주는 것도 중요한 역사”
▲행복이라는 개념이나 기준이 달라지면 삶을 바라보는 게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사례로 봐야 할 것 같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풀빵을 사오는 날에는 아버지도 우리도 행복했다고 기억한다. 역사 교과서 논란이 있었지만, 어릴 적 아버지와 겪었던, 부모와 겪었던 이야기를 나누며 그것을 자식에게 알려주는 것도 중요한 역사 교육이다. 이승만 정권, 건국, 박정희 정권 등은 정치와 정치인이 싸움을 하는 것이라고 본다. 미래의 국민, 대한민국을 사랑하게 하는 힘이 어디에 있는지 빨리 파악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런 역할도 영화가 할 노릇이다.
▲이장호영화연구회 이야기를 좀 하고 싶다. 2016년 11월에 발족한 후 2017년에는 월 1회 영화를 관람하면서 진행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연구회는 초점을 어디에 두고 있나?
연구회 만든 것도 실험적이다. 영화평론이 있지만 영화계에 실질적인 방향을 제시하거나 반성을 하게 하는 역할이 없어서 연구회가 모델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서 만들었다. 2017년에는 내 영화를 보면서 시대에 따라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살펴봤다. 개인적으로는, 앞에서 말했듯이, 나 자신을 파괴하는 것, 나를 꾸미지 않고 보는 것을 생각했다. 그러다보니 내가 어떻게 영화감독이 맞는지, 어쩌다 영화를 만들었는지, 이런 생각까지도 하게 됐다.
시대와 시대마다 있었던 영화가 당시에 매력을 키운 이유가 무엇일까, 이것을 발견하고 싶었다. 영화를 많이 보고 영화 선진국이 된 것, 이것은 지금의 힘이 아니라 오래 누적된 힘이라고 본다. 그 힘을 발견하자는 게 연구회의 취지다. 이 힘을 찾아서 영화계에 알려주자는 마음이 있고 실험적인 의도를 갖고 있다.
▲영화계는 어떤 곳인가? 감독, 배우를 비롯해 산업에 이르는 영화계 전체를 아우르는 것으로 봐야 하나?
현재 영화계에서 실질적으로 일하는 사람, 그리고 영화학도에게 알려주자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책을 만들 예정이다. 아마 하반기에 나올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집단무의식 깨달을 수 있는 사람 돼야”
▲분재는 오랜 시간이 걸려 만들어진다.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별로 매력 있는 소리는 아닌데, 이 나이에 오니 무능하다, 능력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고, 또 이것을 인정했을 때 결국 종교, 하나님이 나오게 된다. 인간은 무능한 존재다.
세상에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본다. 하나는 자기 힘으로만 성공하거나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인사이드 세계에 있는 사람, 다른 하나는 잘 적응하든 무능하든 아웃사이더 세계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본다. 아웃사이드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은 그를 늘 지배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다. 사람이 이를 알고 산다면, 악착같이 살지 않아도 된다. 정치하는 사람이 이를 좀 알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정치인이 문화적이면 좋겠고 그 다음에는 신앙적이었으면 좋겠다.
▲앞에서 ‘영화가 우리 사회에 있는 집단무의식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면 큰 힘을 발휘한다’고 했는데, 이 맥락도 같이 엮어서 볼 수 있지 않나?
집단무의식을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한다. 그러려면 지금처럼 자신을 비워야 한다. 비워야 집단무의식이 들어올 수 있다. 자기집착이 있으면, 욕심이 있으면 집단무의식이 들어올 자리가 없다. 오늘 거룩한 소리를 많이 하는 것 같다. (웃음) 이것도 나중에 또 깨야 할지도 모른다.
▲깨진다, 파괴한다는 말씀은 더 좋은 것, 더 새로운 것을 찾는다는 뜻으로 들린다. 방금 사람에 대해 들었는데, 제호가 사람과사회™인 만큼 사회에 대한 말씀도 듣고 싶다.
사회라는 게 광범위해서 이야기하는 게 어렵지만, 옛날부터 우리가 하는 말 중에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가 있다. 가정을 꾸려나가는 것을 보면 사회에 나갈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가정은 작은 사회인데, 마음에 들 정도는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늦둥이가 지금 군복무를 하고 있는 중이라 아내와 함께 있는 시간이 많다. 둘이 사는 것을 보면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아내와 둘이서 말없이 시간을 보낸다. TV를 보거나 책을 읽는 게 대부분이다. 이런 모습을 보면 (뭔가 더 좋은 것을 해야 할 것 같은데 하지 못하고 있으니) 가정을 잘 이끌어가지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사람은 평범하게 살 수 있는 모습, 소소한 행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을 갖추려면 몇 십 년이 지나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행복이라는 말도 한다. 안정을 느끼며 살 수 있다면, 그게 바람직한 삶이라고 봐야 하지 않느냐는 의미다.
글쎄, 둘이서 싸우지 않고 살아가는 것도 좋은 것이다. 그런데 항상 꿈꾸는 게 아내와 다정하게 다니며 대화를 나누고, 학교나 다른 데에 가는 것이 좋은데, (부부가 모두) B형이라 그런지, 그게 잘 안 된다. 이런 게 사회라고 본다.
“신앙 영화 ‘쉐핑 이야기’ 제작 중”
▲아내와 함께 하는 시간을 꿈꾸고 있다는 말씀을 들으니 ‘두 분 사이에는 좋은 게 참 많이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시간이 많이 지나서 한두 가지만 더 묻고자 한다. 요즘 주로 하시는 활동은 어떤 게 있나?
요즘 하는 일이 굉장히 많다. 이장호연구회도 있고, 그리고 전남 광양시 홍보대사다. 광양에 테마마을, 그러니까 청년영화마을을 구상하고 있다. 타당성 검토는 이미 끝났고 광양시에서 올해(2018) 예산을 확보해 2019년부터 마을 조성 사업을 시작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대학 강의도 계속 하고 있다. 지금은 동양대학교 공연영상학부에서 강의를 한다. 또 4년째를 맞은 충무로뮤지컬영화제 일도 하고 있는데, 조직위원장을 맡고 있다. 올해 3회인데, 7월에 오픈할 예정이다. 이 외에 몇 가지 다른 활동도 하고 있다. 그런데 제작하려는 영화는 계속 4년째 진전이 없이 답보(踏步) 상태에 머물러 있다.
▲답보 상태에 있는 영화, 어떤 영화인가?
흥행은 생각하지 않고 만드는 영화인데, 신앙 영화다. 세 번째 신앙 영화다. 미국 간호 선교사 엘리자베스 쉐핑 이야기다. 1912년 전라도 광주에 처음 도착한 미국 선교사다. 한국 이름은 ‘서서평’이고 얼마 전에 다큐멘터리가 나왔다.
이 선교사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겠다고 다짐한 후 자아비판이랄까, ‘내가 만들 자격이 있는가?’부터 시작해 여러 가지로 마음의 변화가 생겼다. 시나리오를 쓰다가 실패하기도 하면서 여러 고통을 겪고 있다. 이 작품을 만들기 위해 광주에는 제작추진위원회도 있다. 위원회 압박과 부담도 크게 느끼고 있다. 그러면서도 내려놓고 있다. 어떻게 만들어야 할 것인지 고민하고 있다.
50년이 지났지만 다시, 아마추어처럼 깊이 고민하고 있다. 50년 동안 늘 해왔던 게 ‘이 영화는 어떻게 만들까’였는데, 마찬가지다. 이번 작품은 고민과 고통이 더 크다. 제대로 만드는 것은 물론 신앙적으로 서서평의 생애에 미치지 못한다는 게 이유다. 처녀로 와서 20년 동안 헌신한 사람 이야기다. 헌신적인 생애를 함부로, 내 마음대로 만들 수 없다는 것 때문에 고통이 크다.
▲이제 인터뷰를 마칠 시간이다. 좋은 말씀 해주셔서 감사드린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쉐핑 선교사 이야기가 고통을 이기고 멋진 작품으로 관객과 만나기를 기원한다.
서서평(徐舒平) 서서평(徐舒平, 1880~1934)은 독일 출신 선교사다. 엘리자베스 요한나 쉐핑(Elisabeth Johanna Shepping)이 본명이다. 미국 이름은 엘리자베스 쉐핑, 한국(조선) 이름은 ‘서서평’이다. 쉐핑(Schepping)은 이디시아어로 ‘샘에서 무엇을 끌어내다(Shep), 그로부터 큰 기쁨을 얻고 매우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의미가 있다. 1912년 2월 20일 한국으로 파송돼 광주선교부 제중원(원장 우월순) 간호사로서 병원과 주일학교를 돕는다. 한국어를 배우고, 옥양목 저고리와 검정 통치마를 입었으며, 남자 검정 고무신을 신고, 된장국을 좋아했다. 온전한 조선인이 되고자 했고, 평생 독신으로 살며, 미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입양아였던 박해라, 문안식, 문천식과 평생 가족처럼 지냈다. 32세인 1912년부터 1934년 54세로 소천하기까지 22년 동안 일제점령기에 광주, 제주, 추자도 등에서 간호선교사로 활동했다. 의료 혜택을 받지 못했던 지역을 중심으로 미혼모, 고아, 한센인, 노숙인 등 가난하고 병약한 많은 사람을 보살폈다. 월급 대부분을 빈민과 병자, 여성을 위해 사용했다. 입양해 키운 고아 14명, 오갈 곳 없는 과부를 가족처럼 품어 집에서 같이 지낸 사람이 38명이다. 광주 양림동에서는 여성의 자립을 위해 양잠업을 지도했다. 뽕나무를 더 심고 시설을 세우기 위해 미국에 기금을 요청했다. 제주에서는 여성의 자립을 위해 고사리 채취를 도왔다. 임종 때에는 자신의 시신을 의학용으로 기부했다. 장례 때는 자신이 세운 이일학교 학생이 운구 행렬을 이루고 그 뒤로 수많은 여성이 소복을 입고 뒤따랐다. 광주 최초의 시민사회장으로 기록돼 있다. 2017년 홍주연 감독이 쉐핑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를 개봉한 바 있다. 자료=위키백과·인터넷 |
이장호(李長鎬)
영화감독이자 제작자다. 1945년 5월 15일 출생. 홍익대학교 건축미술학과를 중퇴하고 신상옥 감독이 만든 신필름에서 일하다가 1974년 『별들의 고향』으로 대종상 신인감독상을 수상하며 데뷔했다. 작품으로는 『바람 불어 좋은 날』(1980), 『어둠의 자식들』(1981), 『낮은 대로 임하소서』(1982, 대종상 영화제 감독상, 백상예술대상 작품상), 『바보 선언』(1983),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1987, 베를린 국제영화제 칼리가리상), 『무릎과 무릎 사이』(1984), 『어우동』(1985) 등이 있다. 1980년대 한국 영화계 최고의 감독이자 80년대 대한민국의 영화가 안고 있는 현실과 영화의 간격을 좁히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당시 무명에 가까웠던 배우 안성기와 이보희를 캐스팅하며 스타 반열에 올림으로써 뛰어난 연출력과 탁월한 안목으로 주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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