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우 연재 05] 떠나는 부서방을 위해 01
[연재] 장인우의 문학 산책 | 역설의 문학, 최명희 『혼불』 005 일제는 허울 좋은 내선융화, 내선일체를 내세우면서 소위 황국신민화를 부르짖어 한반도를 일본영토로 귀속시키고자 했을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말살해서 우리 민족의식을 마비해체시켜 결국은 한민족을 일본인으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 최종 목적이었다. 한민족의 일본화라는 것은 조선 민족을 일본의 하층민으로 흡수한다는 것이었다.
[연재] 장인우의 문학 산책 | 역설의 문학, 최명희 『혼불』 005
사람과사회™는 한국 고전을 중심으로 글을 쓰는 장인우 선생의 글을 연재합니다. 장 선생은 ‘장인우의 고전 읽기’ 등 고전문학을 뼈대로 삼아 글을 쓰고 있습니다. 장 선생 연재는 ‘장인우의 문학 산책’으로 진행합니다. 이번 호 주요 내용은 부서방이 만주로 떠나는 모습을 평순네와 옹구네가 주고받는 이야기입니다.
-사람과사회™
떠나는 부서방을 위하여 01
장인우 독서논술지도사
사람과사회™ 통권8·9호
나는 꿈을 꾸었노라, 동무들과 내가 가지런히 / 벌 가의 일을 다 마치고 / 석양에 마을로 돌아오는 꿈을, / 즐거이, 꿈 가운데, // 그러나 집 잃은 내 몸이여, /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 / 이처럼 떠돌으랴, 아침에 저물 손에 / 새라 새로운 탄식을 얻으면서. // 동이랴, 남북이랴, / 내 몸은 떠 가가니, 볼지어다. / 희망의 반짝임은, 별빛의 아득임은, / 물결뿐 떠올라라, 가슴에 팔다리에 // 그러나 어쩌면 황송한 이 심정을! / 날로 나날이 내 앞에는 / 자칫 가늘은 길이 이어가라, / 나는 나아가리라 / 한 걸음, 또 한 걸음, / 보이는 산비탈엔 온 새벽 동무들 / 저 저 혼자……산경(山耕)을 김매이는
-김소월,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 全文
부서방이 만주를 알 리는 없었을 것이다.
평순네 : 어떻게들 가고 있을까?
옹구네 : 밑도 끝없이 뭔 말이여?
평순네 : 부서방네 말이여. 글씨 기양 여그서 살제 멋할라고 그 알지도 못허는 디까지 간다고 그리 떠났일까이.
옹구네 ; 알도살도 못히는 곳이라도 나래도 떠나고 싶겄네. 뭐 언지부터 우리겉은 무지랭이 밥 통겉은 사램들이 언지는 알도살도 험서 살었당가.
평순네 : 오노무 예펜네야, 걱정도 안되는가?
옹구네 : 이미 떠나버리기로 맴먹고 떠났는디, 걱정히본들 뭐히여. 부서방, 바본 줄만 알었드니 그리도 강단진디는 있구만. 이런 사람은 언지라도 이 지옥겉이 답답허고 팍팍헌디 벗어나서 나비맹이로 훌훌 떠나보고 잪어도 못허고 붙백이 맹이로 찰거머리 착 붙은디끼 사는디, 그리도 간다고 갈 수 있응께 부러뵈는구만 그리여.
공배네 : 아이, 자네는 오랫동안 한 동네는 아니래도 날마다 청암마님댁이 거기서 거기 붙어 살었으면서도 그렇게 몰인정허게 부러뵌다고만 허는가? 차암, 옹구네 자네도 마음씀이 그러먼 못써.
옹구네 : 아, 말이야 바른 말이제 부서방네 그 사람들이 여그 붙어산다고 별난 재미있소? 맨날 끼니 때마동 끓여 먹을 곡석이 있는가, 근다고 붙여먹을 땅이 있는가, 거, 뭐, 나라도 뺏기불고, 창씨는 안 해부렀다요. 글먼 이웃찌리라도 얼긍덜긍 훈짐나게 살먼 퍽이나 좋겄소만, 날마다 공출이다 뭐다 죄다 뺏기고 허다 못해 정짓간에 붙은 가마솥도 띠어 가불고, 놋그릇, 숟가락, 젓가락 모강댕이까지 다아 착실허게 짬짬허게 뺏어가는디, 살 수 있다요. 그리도 만주라는디는 땅도 넓고, 임자 없는 땅이 지천으로 깔렸당게 가서 부지런히 몸만 움직이면 아무리 못살어도 여그보다야 낫지 않겄소.
평순네 : 그런다고는 히도, 그 날강도 같은 일본놈들의 말을 믿을 수 있을까 싶으제.
공배네 : 그 어린 자슥들, 배를 곯았쌍께 뼈만 앙상헌 것이 다 보타버린 것맹인디, 그 춥고 추운디를 홑저고리 홑치마 입고 남부여대로 갔이니, 쯧쯧…….
떠날 수밖에 없었다. 만주로 가면 임자 없는 땅이 지천으로 깔려 있고, 누구든지 먼저 가서 말뚝 박고 개간하면 그곳이 바로 자기 땅이 된다는 달콤한 유혹, 충동질 때문만은 아니었다. 서원에 하사된 노비로서의 삶은 벗어났지만, 어차피 자기 고향이 아닌 곳에서, 조상 대대로 뼈가 묻힌 땅은 더더욱 아닌 곳에서 어영부영 엉거주춤 눌러앉은 곳이었지만, 그래도 할아버지 대부터 살아온 곳이고, 무엇보다도 타국과 견줄 수조차 없는 내나라 내 땅인 것이매 떠날 수 없는 곳이지만, 부서방, 그는 살아보고 싶었다. 한번 제대로 살아보고 싶은 ‘욕망’이었다.
대한제국의 이름으로 살지 못하는 대한 땅, 대한 사람들은 참혹, 비참했다. 1910년 8월 22일 경술국치, 한일합병이 시작된 그날로부터, 1919년 3월 1일, 거국적인 기미독립만세운동이 벌어지던 날까지 거의 10년 간 나라는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마저도 스스로 놀랐을 만큼 잔인하고 가혹한 탄압과 폭력적 동화정책에 만신창이가 된 암흑의 세월이었다.
일제는 허울 좋은 내선융화, 내선일체를 내세우면서 소위 황국신민화를 부르짖어 한반도를 일본영토로 귀속시키고자 했을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말살해서 우리 민족의식을 마비해체시켜 결국은 한민족을 일본인으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 최종 목적이었다. 한민족의 일본화라는 것은 조선 민족을 일본의 하층민으로 흡수한다는 것이었다.
일제는 1910년 합병 직후에는 ‘범죄즉결례’를 제정해 경찰서장과 헌병분대장에게 언제라도 자의적으로 조선 민족을 구금‧태형‧벌금형에 처할 수 있는 즉결심판권을 주었고, 1911년 8월에는 조선인 교육 방침을 규정하는 ‘조선교육령’을 공포했다. 천황에게 충성하는 일본 신민을 양성하고, 일본인다운 품성을 함양하며, 국어(일본어)를 널리 보급하는 것, 그리고 조선인의 민도(民度))에 알맞은 보통교육, 즉 정치의식이 발달할 수 있는 고등교육과 인문교육의 기회를 박탈하고, 오직 구체적인 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실업교육에 중점을 두는 것이 중요한 목표였다. 보통학교에서는 조선의 역사와 지리는 과목 자체를 없애버렸고, 고등보통학교에서도 일본사와 일본 지리는 가르쳤지만, 조선의 역사와 지리는 아예 가르칠 수 없도록 교육과정을 편성했다.
일본 천황과 일장기에 대해 감사하고 복종하게 했으며, 민족정신에 자극을 준다하여 초등‧중등 ‘국역사지지’, ‘동국사략’, ‘대한역사’ 등을 비롯해 신채호의 ‘을지문덕전’, ‘이순신전’, ‘월남망국사’, ‘미국독립사’, ‘의태리 삼걸전’ 등등, 한 나라의 독립과 건국의 역사나 이를 위해 활동한 위인들의 전기를 담은 책 삼십여 종 수십만 권을 서울로부터 각 지방에 이르는 책방과 개인 집까지 모조리 뒤져 샅샅이 압수하고 불태웠으며, 이러한 책들은 읽지도 간수하지도 못하게 판매 금지 조치를 했다.
-최명희, 『혼불』 제5부 10권, 심진학 선생의 말과 설명 중 일부 수록
부서방, 그가 매안땅(조국)을 떠나 유랑민이 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은 결코 조선 사회의 봉건적 제도와 신분제로 인한 차별, 지주와 소작농 간의 갈등에서 찾는 탈출구는 아니었다. 빼앗긴 나라, 식민지 지배에 놓인 민중들의 삶은 골짜기 골짜기를 넘어 전 국토를 빼놓지 않고, 처절하게 수탈당하고, 착취당하고 억압당한 역사, 통분의 역사였음을 부서방을 비롯한 매안 사람들과 유랑민들의 삶에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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