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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博物館 만들고 싶다”

‘책’과 함께 ‘冊人生’ 살아온 주인공…‘古書 最高 藏書家이자 最高 專門家’

책과 함께 ‘책 인생’을 살아온 주인공이 있다. 여승구(82) (주)화봉문고 대표다. 그는 화봉갤러리와 화봉책박물관 관장이다. 책과 함께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다. 그래서 ‘고서(古書) 수집’으로 명성이 높고, 우리나라 ‘최고 장서가(藏書家)’이자 ‘최고 고서 전문가’로 손꼽힌다.

책을 많이 갖고 있다. 하지만 양(量)보다는 질(質)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1000원에도 안 팔릴 책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 많이 갖고 있다는 것 자체는 의미가 없다. 귀중본 유무가 중요하다. 문화사 측면 등 의미가 있는 책. 그런 책을 갖고 있어야 좋다. 그래서 책을 수집하려는 욕심을 자꾸 내니 결국 회사가 그냥 바뀌어버렸다. 사진은 여승구 화봉문고 대표(왼쪽)가 김영복 K옥션 자문과 고서를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

여승구 화봉문고 대표

“古書 수집 목표는 冊博物館 운영”

‘책과 人生’ 외길 살아온 주인공
‘古書 最高 藏書家·最高 專門家’

책과 함께 ‘책 인생’을 살아온 주인공이 있다. 여승구(82) (주)화봉문고 대표다. 그는 화봉갤러리화봉책박물관 관장이다. 책과 함께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다. 그래서 ‘고서(古書) 수집’으로 명성이 높고, 우리나라 ‘최고 장서가(藏書家)’이자 ‘최고 고서 전문가’로 손꼽힌다.

여 대표는 30년 넘게 책을 수집했을 뿐만 아니라 책을 창간·발행하고 책 관련 전시회를 여는 등 책과 함께 살아왔다. 1976년 잡지 『월간 독서(讀書)』를 창간해 「이달의 좋은 책」, 「독서대상」 등을 선정해 시상했다. 그러나 『월간 독서』는 1980년 강제로 폐간이 됐다. 이후 「책방소식」(1982~1988년), 「고서통신」(1987~2000년)을 발간하고, 1982년 한국 문학 작품 초판본 전시회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수십 차례 책 관련 전시회를 주최하거나 후원했다. 뿐만 아니라 1980~1990년대에는 ‘한국고서동우회’를 발기하고, ‘한국애서가클럽’을 만들어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만들기도 했다.

여 대표가 고서와 인연을 맺은 것은 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 진학에 실패한 후 서울에서 고종사촌형이 운영하는 고서점(古書店)인 ‘광명서림’에 들어갔다. 서점에 있는 동안 고서적을 조금씩 알게 됐다. 그러다 1982년 출판인이었던 그가 출판인으로서의 사명감, 출판 활성화를 위해 국내 최초로 개최한 국제 규모의 도서박람회인 ‘서울 북페어’를 개최했고 이를 계기로 고서를 본격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했다.

여 대표가 지금까지 국내외에서 수집한 책은 10만 권이 넘는다. 고활자본 7000여 권, 문학 서적 3만 5000여 권, 교과서 1만여 권, 목판 귀중본 1만여 권, 불경 및 판화본 3000여 권, 고지도 500여 점, 고문서 500여 점 등이다. 이밖에 성서 3000여 권, 신문 및 잡지 2만여 점, 포스터 및 영화사 자료 1만여 점, 일본·중국 고서 5000여 권 등 도서관 못잖은 규모다.

여 대표는 책박물관(冊博物館) 건립 등 여전히 책과 관련이 있는 것에 관심이 많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사거리 근처에 있는 백상빌딩 지하 1층에는 갤러리와 함께 고서를 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다. 2014년에는 인사고전문화중심(仁寺古典文化中心)을 새롭게 개관해 운영하고 있다.

여 대표는 또 2013년 3월 (주)화봉문고 창립 50주년을 맞아 △한국의 고서 1~6 △책으로 보는 단군 오천년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세계를 연 한국 고활자(古活字)의 세계 △한국 문학작품 산책 △한국 교과서의 역사 △고문서 이야기 △무속사상·불경·성경·도교·동학 자료 등의 주제를 정해 6개월 동안 기념 전시회를 진행했다.

2016년 4월 인사문화고전중심에서 열리는 제37회 현장경매에 내놓은 『삼국유사』 정덕본(正德本) 권3∼5는 경매 시작가를 10억 원으로 정할 만큼 귀한 고서다. 이 책은 조선 중기 경주에서 간행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권3 흥법(興法)·탑상(塔像), 권4 의해(義解), 권5 신주(神呪)·감통(感通)·피은(避隱)·효선(孝善) 등으로 구성됐으며, 권5의 마지막 부분에 이계복의 발문이 남아 있는 책이다.

2017년 9월 6일 서울 인사동 백상빌딩에서 여 대표를 만났다. 고서 수집 사연, 고서 수집, 책박물관 등 고서와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최고 藏書家, 古書 전문가’

▲(주)화봉문고를 설립한 게 1963년이니까 2017년이면 54주년이 되는데, 화봉문고만 기준으로 해도 50년 넘게 책과 함께 인생을 보냈는데, 쉽지 않은 길을 걸어오셨다는 생각이 든다. 건물 안에 화봉책박물관이 있는 것을 봤다. 아직 국가에서 설립해 운영하는 책박물관은 없는 것 같다.

국가 차원에서 운영하는 책박물관은 아직 없다. 비슷한 것이라면 한글박물관이나 문학관에 있는 것 정도일 텐데, 아직 책박물관은 제대로 설립한 게 없다.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많은 장서를 갖고 계시는데, 특히 고서를 제일 많이 갖고 계시기 때문에 이 분야에서는 최고 전문가라는 평가를 받는다. 어떻게 생각하나?

책을 많이 갖고 있다. 하지만 양(量)보다는 질(質)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1000원에도 안 팔릴 책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 많이 갖고 있다는 것 자체는 의미가 없다. 귀중본 유무가 중요하다. 문화사 측면 등 의미가 있는 책. 그런 책을 갖고 있어야 좋다. 그래서 책을 수집하려는 욕심을 자꾸 내니 결국 회사가 그냥 바뀌어버렸다.

“책은 量보다 質이 중요”

▲바뀌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초창기 때 외국서적을 수입했다. 또 출판도 하고 책방도 했다. 그러다가 지금은 고서 수집 회사가 돼버렸다. 요즘에는 경매도 하고 있다. 그래서 회사 방향이 180도 변했다. 너무 한 쪽, 그러니까 고서적 중심으로 빠졌다. 본업은 외국 서적 수입하고 판매하는 것과 출판하고 판매하는 그런 게 내 본업이었는데 고서 수집에 미쳐서 회사가 변해버렸다. (좋은 변질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보람도 느끼고 후회도 있다.

한국고서협회(회장 김민재)를 만들고 초대 회장을 역임한 것으로 알고 있다.

초대 회장은 아니고 만드는 것은 주도했다. 초대 회장은, 지금은 고인(故人)인데, 통문관(通文館)을 하셨던 이겸노 선생을 모셨다. 한국 고서계(古書界)에서는 제일 원로인 분이다. 그 양반을 모셨는데 2년을 하시더니 나한테 하라고 해서 2년 후에, 그러니까 87년에 창립했는데 89년에 회장이 됐다.

협회를 만든 것은 국제고서적상연맹(ILAB)에 가입도 하고 국제교류도 하고 국내사업도 좀 하고 그런 뜻을 갖고 시작한 것이었다. 당시 서림동에서 책방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고서계 주류는 인사동에 있는 어른들이었는데, 협회를 만들어 뭐하려고 하느냐며 적극적으로 나서려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한국고서협회 역대 회장
제01대 회장 1987.07~1989.07 이겸노 通文館
제02대 회장 1989.07~1997.03 여승구 (주)화봉문고
제03대 회장 1997.04~1998.04 김재갑 호고당
제04대 회장 1998.05~2000.04 심충식 寬勳古書房
제05대 회장 2000.05~2002.05 이종소 珍明社
제06대 회장 2002.05~2004.05 고창석 張寶庫
제07대 회장 2004.05~2006.05 신준식 集文殿
제08대 회장 2006.05~2009.02 김선균 高麗社
제09대 회장 2009.03~2011.02 김선균 高麗社
제10대 회장 2011.03~2013.02 박민철 금요고서방
제11대 회장 2013.03~2015.02 김민재 (주)코베이
제12대 회장 2015.03~현재 김민재 (주)코베이

▲당시 원하는 협회를 만들었나?

어른들에게 국제교류도 하고 사업도 해서 좀 키워보자, 책 파는 업자 모임 같은 것도 하나쯤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랬더니, 그러면 정관 등 필요한 것을 기안해서 만들어오라고 했다. 하지만 정관을 만들어 갖고 갔더니 국제교류와 사업 부문은 전부 빼라고 했다. 이겸노 선생이 원로신데, 그 양반이 그렇게 하길 원해서 그렇게 따랐다.

▲국제교류를 하는 것은 좋은 것 같은데, 이겸노 선생 등 어른들이 왜 좋아하지 않았나?

이겸노 선생은 가능한 하지 않으면 좋겠다는 입장이었다. 국제교류를 잘못 하면 외국에 한국 문화재 팔아먹는 짓거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려했다. 그리고 사업은 상법에서 정하는 곳에서 하는 것이지 협회인데 왜 사업을 하려 하느냐는 입장이었다. 사업이라는 게 장사를 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었는데,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교류, 사업, 이 두 가지를 지운 후 시작했다. 그리고 2년 후에 이겸노 선생이 나에게 회장을 하라고 해서 두 가지를 다시 복원했다.

▲조금 전 국제고서적상연맹을 말씀하셨는데, 어떤 곳인가?

ILAB(International League of Antiquarian Booksellers)이라는 곳이 있다. 국제고서적상연맹이라고 하는데, 회원은 18명이다. 주로 서양 사람이고 비서양은 일본 하나뿐이다. 1990년으로 기억한다. 일본에 있는, ILAB 이사를 했던 리따 회장이 나보고 자꾸 협회를 만들어 가입하라고 권유했다. 같이 국제 활동을 하자는 뜻이다. 당시 고서 관련 사업이 힘들고 어려웠지만 10년만 참으면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국제교류를 하자는 것이니 좋은 일 아닌가. 그때에는 우리도 88올림픽을 치른 직후였고 87년에 협회를 만들었으니까 글로벌 분위기도 많이 있었다. 90년 동경에서 ILAB 총회가 열릴 때 가입해서 한국도 ILAB 회원이 됐다.

가입을 했지만 91년에 개최할 예정이었던 회장단회의로부터 인증을 받아야 한다. 총회가 건의하면 18개국 회장이 참여하는 회장단회의에서 결정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영국 회장이 한국 가입에 대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가 됐는데, 회장단회의에서 브레이크를 걸었다.

한국은 교류의 자유가 없는 나라 아니냐, 그래서 교류를 막고 있지 않느냐, 그러니 자격이 없는 나라를 어떻게 회원으로 가입시키냐, 이런 게 이유였다. 그의 말은 옳은 얘기다. 그랬더니 리따 회장이 설득을 했다. 여승구 한국 회장은 활동적이니 법이나 정책을 바꿔서 자유로운 교류를 할 수 있도록 만들 것이니 통과시키자고 해서 통과가 됐다. 이를 계기로 국내에 ‘애서가클럽’이라는 애서가 모임을 90년에 창립했다. 회장을 하는 동안 ‘문화재 지정과 교류,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세미나를 열었다. 왜냐하면 ILAB에서 우리나라가 자격이 없다고 했으니 문제를 제기해서 법도 고치고 정책도 바꿔야 한다는 뜻을 알리고 싶었다.

“한국은 교류의 자유가 없는 나라 아니냐?”

▲영국 회장이 반대한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은 교류의 자유가 없는 나라 아니냐, 그래서 교류를 막고 있지 않느냐, 그러니 자격이 없는 나라를 어떻게 회원으로 가입시키냐, 이런 게 이유였다. 그의 말은 옳은 얘기다. 그랬더니 리따 회장이 설득을 했다. 여승구 한국 회장은 활동적이니 법이나 정책을 바꿔서 자유로운 교류를 할 수 있도록 만들 것이니 통과시키자고 해서 통과가 됐다. 이를 계기로 국내에 ‘애서가클럽’이라는 애서가 모임을 90년에 창립했다. 회장을 하는 동안 ‘문화재 지정과 교류,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세미나를 열었다. 왜냐하면 ILAB에서 우리나라가 자격이 없다고 했으니 문제를 제기해서 법도 고치고 정책도 바꿔야 한다는 뜻을 알리고 싶었다.

▲세미나를 치를 만큼 문제를 제기하는 효과가 있었나?

효과가 거의 없었다. 언론에서는 문화재 지정에 대한 것은 써도 교류에 대한 것은 쓰지 않았다. 교류를 하자는 데에 목적을 뒀는데, 그래서 협회에 가입할 수 있도록 바꿔야 하는데, 아무도 교류에 대해서는 쓰지 않았다. 아니, 못 썼다. 교류하자고 하면 문화재를 파는 것이라는 비판, 심하면 매국노라는 말까지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만났던 조선일보 문화부장에게 교류를 내용으로 한 기사를 쓰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했더니 교류하자고 쓰면 독자가 뚝뚝 떨어져나갈 게 뻔한 것인데 어떻게 쓰느냐고 했다. 그래서 글을 한 편 투고하겠다며 받아달라고 부탁했다.

▲교류를 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썼을 텐데, 주로 어떤 내용이었나?

지금 시기는 문화재를 붙잡고 있기만 할 때는 아니고 외국에 내보내서 우리 문화를 홍보해야 한다고 썼다. 가령 같은 책이 백 권이 있는데 그거 한 권, 두 권, 다섯 권, 열 권이 외국에 나갔다고 해도 나라가 망하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서 유럽, 미국 등 큰 세상에 나가서 전시도 하고 우리 문화를 홍보하는 쪽도 생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국보급 문화재는 외국에 나가선 안 된다. 그러나 다른 문화재도 못 나가게 만들어놓았다. 그 조건이 무엇이냐 하면, 문화재 반출은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법 기준으로) 문화재의 정의가 무엇이냐 하면, 50년 전 것은 문화재라고 한다. 50년 전 것을 갖고 나가려면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나갈 수가 있다. 누가 그런 것까지 갖고 나가지 못하게 하느냐는 말도 나왔지만, 사실상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였던 법이었다. 이 같은 문제를 바꾸는 여론을 환기하려고 세미나를 했는데 교류를 아무도 안 써버렸다. 그때 이어령(李御寧) 선생이 문공부장관(19대, 1989.12.28~1991.12.19)을 할 때다. 그때는 문화부가 생기기 전이라 문화재관리국장이 일을 맡고 있었다.

“돈 때문에 ‘문화재 교류’는 무관심”

▲문화재 지정에는 관심이 많고 교류에 무관심한 이유가 따로 있었을 것 같다.

왜냐면 지정을 하면 값이 올라가기 때문이다. 게다가 흥미도 있지 않나. 국가가 인정해주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 압력도 가하고 청탁도 해서 지정을 하면 값이 올라가니 모두 지정하지 않으려는 이가 어디에 있겠나. 그러니 지정이 관심사가 되는 것이다. 국장을 혼내기 위해 교류를 말한 게 아니었는데도 언론에서 지정 문제를 자꾸 쓰니까 이어령 장관에게 문화재관리국장이 애를 많이 먹었다.

▲협회가 오래 됐으니 한 일도 많을 텐데 어떤 게 있나?

90년에 가입한 후 서울고서전을 91년부터 개최했다. 공평아트센터라고 굉장히 큰 빌딩이 있는데, 거기에 미술관이 있다. 거기에 부스를 30여 개 만들어서 전부 판매하려고 시작한 게 서울고서전이다. 빠지지 않고 큰 기획전을 열기도 했다. 지금은 이제 ILAB도 참석도 안 하고, 서울고서전도 하지 않고 있어서 조금 답답하다.

▲대표께서 움직이지 않으니 서울고서전도 ILAB 참여도 침체 상황이 된 것 같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다. 현재도 유지는 하고 있지만 활동이 미약하다. 사실상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과 같다. 이름만 있는 셈이다. 그래서 해산하자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기념하는 것 정도, 그러니까 특별한 일이 있을 때 한두 번 나가고 활동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해산하자는 말이 나오기에 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어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협회를 새로 창립하는 수준으로 다시 만들자는 게 내 생각이다.

▲환골탈태(換骨奪胎) 수준으로 작업을 진행하게 되나?

맞다. 요즘 불경기다. 그리고 고서들이 많이 없어져버렸다. 시장에서 많이 없어졌다는 얘기다. 무슨 뜻이냐면, 지금 국공립기관이나 연구소에서 1년에 몇 백억씩 들여서 사고 있다. 그러다보니 민간이 갖고 있는 소장품이 바닥이 날 수밖에 없다. 또 지방자치단체에서 요즘 박물관, 기념관을 만드는 게 유행 아닌가. 상황이 이렇게 돼 있으니 시장에서는 자꾸 물건은 없어지고 값은 올라간다.

“古書는 博物館과 圖書館 사이에 붕 떠 있다”

▲국립중앙도서관도 최근 근현대 자료, 문학 분야를 중심으로 옛날 자료를 구입한다는 공고를 내던데, 그런 현상도 방금 말씀하신 것과 맥이 닿아 있다고 봐야 하나?

고서라는 것은 책도 있고 미술도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문화관광부나 문화재청이 정책 부서다. 그리고 실제 일을 하는 부서는 미술 쪽은 국립중앙박물관이고 책 쪽은 국립중앙도서관이다. 그런데 고서는 지금 형편이 어떻게 되어있냐면, 국립중앙박물관은 미술이 담당 분야라며 책은 큰 관심이 없다. 반면 국립중앙도서관은 고서에 관심이 별로 없고, 서책을 열람하고 정리하는 일에만 관심을 갖고 있다. 그것뿐만 아니라 돈, 예산을 안 준다.

▲예산이라면, 고서 관련 예산을 말하는 것인가?

맞다. 고서 예산이라는 게 대략 1억인지 2억 정도인 것으로 알고 있다. 아주 빈약하다. 더구나 고서는 도서관 측에서는 박물관이 맡으라고 하고 박물관은 도서관에게 미루고 있다. 결국 고서는 중간에 떠 있다. 박물관과 도서관 사이에 붕 떠 있는,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그런 상황이다. 그래서 노무현 정부 때인 정동채(鄭東采) 장관(11대, 2004.07.01~2006.03.06)이 재직할 때 장관 면담 신청을 해서 국립책박물관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한국의 문화를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자부심을 내세우자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큰 자부심은 금속활자를 세계 최초로 만들어서 책을 인쇄한 출판인쇄 문화라고 말해줬다.

한문을 숭상하는 사람은 한글을 문자로 안 본 것이다. 중국 글자인 한자를 써야지 어떻게 쓰느냐는 논리다. 그러니 우리 출판정책이라는 것은 소수 엘리트를 위한 정책이었다. 국민을 계몽해서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처럼 했다면 우리도 주변 나라보다 먼저 발전했을 것이다. 일제 36년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고 동족상잔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 활자가 최고의 우리 문화이고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고급 문화이자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인쇄술은 ‘貧者의 聖書’ 사라지게 했다”

▲왜 금속활자와 출판문화인가?

왜냐하면 비교하는 수단으로 보면 1등이고 최고라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 팔만대장경, 중국 만리장성,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 이집트 스핑크스를 비교해서 우열을 가릴 수는 없다. 그러나 속활자는 구텐베르크보다 먼저 나온 것이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중세 문예부흥을 성공시켰고, 그 다음에 루터의 종교개혁을 성공시켰고, 프랑스대혁명을 성공시켰고, 영국의 산업혁명을 성공시켜서 오늘날 서양이 세계를 지배하게 하는 최초의 동인(動因) 같은 것이다.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만들어 책을 찍어냈기 때문이다. 구텐베르크 이전에는 성서를 하나 쓰기 위해 660마리의 양을 잡아야 했다. 종이가 없으니까 양을 잡아서 양피지 종이를 만들어 성서를 인쇄했다. 양피지가 있다 해도 필사를 해야만 만들 수 있었다. 책 자체가 너무 귀해서 일반 국민은 책을, 성서를 볼 수가 없었다. 사원(寺院), 귀족, 왕실 등이 책을 사용했다. 이런 형태로 만든 책은 통치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왜곡을 낳기도 했다. 그와 같은 상황을 구텐베르크가 만든 인쇄술이 바꿨다.

인쇄술은 상업출판을 가능하게 했고 국민계몽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해줬다. 이전에는 성서도 잘 볼 수 없었다. ‘빈자(貧者)의 성서’라는 게 있다. 가난한 사람들의 성서인데, 가난한 사람들이 대여섯 개의 낱장으로 된 성서를 보는 것을 말한다. 성서 한 권을 사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업출판이 생기고 인쇄소도 40여 곳이 됐다. 상업출판과 국민계몽은 오늘날 서양이 문화·경제·군사·외교적으로 세계를 지배하는 결과를 낳았다. 우리는 먼저 발명했다. 그런데 출판을, 즉 책을 어떻게 활용했느냐 하면, 소수 엘리트를 위한 책으로 사용했다. 한문으로 되어 있으니 일반 서민은 볼 수도 없었다. 그래서 세종이 한글은 만들었지만 학자들이 왕실에 압력을 가해서 한글은 제대로 쓰지 못했다.

▲한글은 문자로서의 의미가 참 약했던 것 같다.

한문을 숭상하는 사람은 한글을 문자로 안 본 것이다. 중국 글자인 한자를 써야지 어떻게 쓰느냐는 논리다. 그러니 우리 출판정책이라는 것은 소수 엘리트를 위한 정책이었다. 국민을 계몽해서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처럼 했다면 우리도 주변 나라보다 먼저 발전했을 것이다. 일제 36년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고 동족상잔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 활자가 최고의 우리 문화이고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고급 문화이자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이제 보통 문화재하면 책은 살짝 옆으로 빠지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이제 문화재를 말할 때 책을 당연하게 떠올릴 수 있어야 할 텐데, 오랫동안 책과 함께 살아온 만큼 책이 갖고 있는 문화재 또는 문화로서의 책이 갖고 있는 가치, 이런 면에서 남과 다른 생각을 갖고 있을 것 같다.

문화라고 하면 예술 쪽, 그리고 정신적인 측면의 문화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은 정신적인 면에서 훨씬 더 높은 수준의 의미와 가치를 갖고 있다고 본다. 겉모습, 그러니까 시각적으로만 즐기는 것이 아니다. 언어를 잘 모르면 읽기 어려운 것이 책이고 다른 예술과 비교하면 시각적인 면은 뒤떨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개발을 해서 보릿고개를 해결한 것은 좋다. 그러나 한문교육을 중단시켰다는 것은 아쉽다. 한문교육을 제2외국어 정도로 유지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어, 프랑스어, 독어, 일본어는 하면서 우리글과 밀접한 한문은 금지했다.

책이 도자기나 회화보다 훨씬 가치가 없는 이유는 다른 것은 눈으로도 감상하지만 책은 눈으로 감상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읽어서 머리로 즐기고 생각해야 하니 힘들고 어렵다. 더구나 한문으로 되어 있는 게 많아 제목도 제대로 읽지 못한다. 요즘 대학교수들도 한문으로 된 책을 잘 읽지 못한다. 한문 전공자나 역사학, 국어학 등을 하신 분이 그나마 읽는 편이다. 지금 형편이 이런 정도다.

“冊은 끝이 없는 宇宙다”

▲‘책은 우주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책이 왜 우주인가?

책 속에 모든 것이 다 있지 않나. 책 속에 없는 것이 뭐가 있나. 다 있다. 그리고 책은 크고 넓다. 책은 끝이 없다. 고서협회를 창립하고 보니 당시 고서점을 다니는 분들은 호주머니 돈으로 사신 분들이다. 책을 좋아하는 분이지 직업적인 분은 거의 없었다. 고서는 전광석화(電光石火)와 같은 존재다. 알 수 없는 시간에, 알 수 없는 장소에, 알 수 없는 책이 전광석화처럼 나타났다가 바로 없어진다. 고서를 비롯해 옛 물건, 즉 고물이라는 것은 상당히 느릴 것 같지만, 전혀 아니다. 매우 빠르게 흘러간다. 그리고 끊임없이 나온다.

▲흘러간다는 속뜻은 누군가가 그 가치를 알고 구입하거나 소장한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가치가 매우 큰 고서, 이를 테면 『삼국유사』나 『삼국사기』 같은 책을 갖고 있다고 알고 있다.

그런 책은 수집할 기회가 있었다는 게 행운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 두 책. 『삼국사기(三國史記)』 한 책. 『제왕운기(帝王韻紀)』 한 책을 갖고 있다. 『삼국유사』만 해도 몇 권 밖에 안 남았다. 열 권 전후일 것 같다. 『삼국유사』는 두 책이 한 권인데, 1·2권, 3·4·5권으로 되어 있다. 나눠져 있는 책을 낱권으로 생각하면 대략 열에서 열다섯 권 정도일 것으로 생각한다. 『삼국유사』는 대단한 책이다. 이 책에 따르면 단군역사가 민족의 정통성이 된다. 그리고 향가, 이두, 불교 관련 내용이 들어 있다. 이는 한국문화계의 정점에 해당한다. 단군의 경우 일본이나 중국은 자꾸 신화라고 격하하려 한다. 특히 단군을 인정하면 일본은 훨씬 아래로 가야 한다. 박혁거세가 일본 역사와 같은 지점이 되기 때문이다.

서울에서는 고전문화와 전통문화의 중심이 인사동 아닌가. 그런데 인사동이 가짜 문제 등 경영을 잘못해서 수집가에게 지탄을 많이 받았다. 요즘에는 관광객이 몰리고 있다. 그렇지만 대부분 통과하는 관람객이다. 갤러리를 보거나 문화를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북촌이나 삼청동으로 가는 통과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인사동이 아주 공동화되어 있다.

“文學博物館이 冊博物館으로 변했다”

▲국가가 운영하는 책박물관을 만드는 게 소망이라고 들었다. 지금은 화봉책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는데, 어떻게 해서 책박물관을 만들 생각을 했나? 고서 수집을 하게 된 배경도 듣고 싶다.

근대사 자료를 많이 갖고 있다. 최초의 신문학인 『혈의누』를 비롯해 김소월의 『진달래꽃』, 백석의 시집 『사슴』 등 문학 작품으로 보면 최고봉(最高峰)에 해당한다. 82년에 20주년 기념으로 책전시회인 ‘서울북페어(Seoul Book Fair)’를 기획했다. 당시에는 북페어를 대부분 학술 문화 행사로 알고 있었고 싸게 판매한다고 하니까 언론에서 대서특필(大書特筆)했다.

기사를 보고 어떤 분이 찾아왔다. 문학 작품 초판본 200여 권을 갖고 있는데 서울북페어에 내놓고 팔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그 책을 모두 샀다. 그게 내 고서 수집의 시작이다. 중고등학교 때 문학을 했는데, 책을 구입해 문학박물관을 만들자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문학박물관을 만들려 했는데, 왜 책박물관이 됐나?

초판본 200권은 한국문학 작품 초판본 전시회로 기획해 한 달 동안 전시했다. 전시가 끝난 후 일간지 신문사 부장들과 저녁을 먹자는 연락이 왔다. 문화부장단회의 소속 7명이 모였는데, 이종석(李種奭) 동아일보 문화부장이, 나보다 두서너 살 위였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경매로 팔 게 아니라 문학박물관(文學博物館)을 만들라고 해서 충격을 받았다.

경매를 확인해보니 연세대학교에서 입찰 신청을 한 상태였다. 이종석 부장 이야기가 생각이 나서 내정가 미달로 유찰시키고 문학박물관을 만든다는 이유로 문학 관련 책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학만 수집하지 않고 여러 가지를 모았다. 활자, 지도, 교과서, 성경, 불경, 신문, 잡지 등 다양했다. 그렇게 모은 책을 모아 만든 게 책박물관인데, 2004년 10월 개관해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는 화봉책박물관이다.

▲인사동에 자리를 잡았는데, 인사동이 예전 모습을 많이 잃고 있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

서울에서는 고전문화와 전통문화의 중심이 인사동 아닌가. 그런데 인사동이 가짜 문제 등 경영을 잘못해서 수집가에게 지탄을 많이 받았다. 요즘에는 관광객이 몰리고 있다. 그렇지만 대부분 통과하는 관람객이다. 갤러리를 보거나 문화를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북촌이나 삼청동으로 가는 통과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인사동이 아주 공동화되어 있다.

관람객이 주로 사는 것은 중국에서 가져온 기념상품이다. 한국 것이 아닌 것이거나 한국 것도 액세서리나 인형이 대부분이다. 이런 현상은 서울시나 종로구, 그리고 인사동에서 골동품을 하는 분이 멀리 내다보고 정돈된 것으로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요즘 인사동은 권리금이 없어도 사무실에 들어오는 이가 없다. 사무실이 안 되니 점포도 안 되고 있다.

▲경매도 하고 있는데, 어떻게 진행하나?

경매는 두 달에 한 번씩 셋째 토요일에 한다. 나오는 물건은 보통 300점이나 400점 정도다. 책도 있고 미술품도 경매한다. 좋은 것이 나오면 잘 팔린다. 문학 분야 책은 값이 상당히 올랐다. 『진달래꽃』(김소월) 초판본은 1억5000만원에 팔렸다. 『사슴』(백석)은 경매에서 7300만원, 『무정』(이광수) 재판본은 6000만원, 『화사집』(서정주)이 6000만원에 팔렸다. 예전에는 양장본을 얕봤었다. 고서 취급을 하지 않았었는데, 이제는 투자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기 시작했다. 지금은 한문 세대와 한글 세대가 교대를 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관리자이지 소유자는 아니다”

▲앞으로 하고 싶은 계획이나 소망은 무엇인가?

수집의 최종 목표는 박물관을 운영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제대로 된 박물관이다. 문화재를 계속 사입(仕入)하고, 전시도 하고, 출판·연구 사업도 하고, 국제교류도 하는 박물관, 이 정도를 해야 박물관이라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박물관은 국공립기관이나 삼성 같은 대기업이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중소기업 사장이면 수집까지는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작은 규모의 수집가가 박물관을 한다는 생각은 안 맞는다. 때문에 박물관을 운영하는 것은 국가에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박물관을 할 경우 나는 관리자이지 소유자는 아니다. 관리자로서 내가 수집한 것을 관리해서 국가와 사회에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충분하다. 국가에 수집품을 팔거나 기증해서 국가가 관리를 해준다면 그것이 진짜 박물관 아니겠나. 그러니 관리자일 뿐 소유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랜 시간 동안 좋은 말씀을 해주셔서 감사드린다.

여승구
1936년 전남 담양에서 출생했다. 1963년 설립한 (주)화봉문고 대표다. 화봉갤러리 관장, 화봉책박물관 관장도 맡고 있다. 광명서원(1955~1962) 사원부터 시작해 현재까지 책과 출판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우리나라 최고 장서가(藏書家)이자 최고 고서 전문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국내 최초로 국제 규모 도서박람회인 서울북페어를 기획해 전시회를 개최했다. 2014년 인사고전문화중심(仁寺古典文化中心)을 개관했으며 고서, 미술 작품 등 경매(2017년 11월 현재 제46회 화봉현장경매)를 진행하고 있다. 『월간 독서(讀書)』 발행인(1976~1980), 서울북페어 창설 및 전시회 개최(1982~1988), 한국고서동우회 부회장(1982~1987), 한국출판학회 부회장(1983~1987), 한국고서협회 회장(1989~1996), 한국애서가클럽 회장(1990~1996), 한국고전문화진흥회 회장(2000~2002)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책사랑 33년』(1988), 『책·冊과 歷史』(2003)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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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사회 발행인이자 편집장이다. ‘글은 사람과 사회며, 좋은 비판은 세상을 바꾼다’는 말을 좋아한다. weeklypeopl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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