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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

"실은 나라는 사람의 바라는 이상향이 그러하다. 윤리나 종교나 법 따위의 인간사를 규정짓는 무수한 것 들에 대한 무용론이나 회의에 빠져있던 시기에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라는 시구는 혁명동지를 만난 것과 같은 기쁨이었다. "

비판받거나 축복받지 못한 사랑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어두운 면을 보게 된다. 자신과 날것으로 맞서게 된다. (물론 다른 방법으로 자신과 마주하는 경우도 있지만) 여기서 전제는 주위 시선이나 규범에 꼬리 내리는 것이 아니고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 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자기 반성과 성찰을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존고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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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처음 접한 것이 불과 3년 전 일이다.
아마도 무언가에 대하여 한 번에 매료되기란 이때가 처음이지 않았나 싶다.
처음 읽었을 때 그려지는 영상이 너무나도 또렷 하여 어떤 사진이나 짧은 활동사진을 본듯한 상큼한 기분. 이것이 시의 형상화라는 것임을 그 다음해 몇몇 사람들과 함께 시를 공부하면서 알게 되기도 하였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시에 내가 사로잡힌 이유는 그 선명한 영상 보다 세상따위 더러워 버려버리겠다는 시인의 외침 때문 이었다.

이 시는 백석이 여고 교사로 있던 때 요정에서 만난 기생과 한눈에 사랑에 빠져 그 여인에게 지어 바쳤던 시라고도 한다. (물론 다른 이야기도 있긴 하지만)
백석은 그 기생에게 ‘자야’라는 이름도 지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기생 자야와 결혼하려 하였으나 집안의 반대로 하지 못하고 오히려 집안에서 정해 준 여인과 결혼을 하게 되고 이것이 백석과 자야의 짧지만 강렬하고도 긴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탄생된 계기가 되기도 한다.
아마도 이 시는 그 무렵 쓰였으리라.
사랑하는 자야를 두고 집안에서 정해준 이와 결혼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던 그때 말이다.

흰 눈이 펑펑도 아닌 푹푹 나리던 달 밝은 밤
고뇌에 찬 시인은 쓴 소주를 쓸쓸히
홀로 흰 벽을 마주하고 앉아 마시었으리라
마시면서 사랑하는 이를 떠올리었을 것이다
먼데 산은 흰 눈으로 뒤덮였을 것이고
어느 집 헛간에서 어린 당나귀 한 마리 메이어 응앙응앙 울고 있고 밤 공기 사이로 출출이도 한번 울었으리라

이때 시인은 생각하였을 것이다. 세상의 관습과 법, 예의 니 범절이니 신분이니 또 사람들의 이목 까지도 다 버리고 싶다고. 사랑하는 자야와 흰 눈 덮인 산 속 마가리를 짓고 세상 따위 등지고 살고 싶다고.
그리하여 결국 오지 않을 사람을 상상하며
세상의 허다한 것들을 등지고 싶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실은 나라는 사람의 바라는 이상향이 그러하다.
윤리나 종교나 법 따위의 인간사를 규정짓는 무수한 것 들에 대한 무용론이나 회의에 빠져있던 시기에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라는 시구는 혁명동지를 만난 것과 같은 기쁨이었다.
혹자는 무정부주의라고도 하고 누군가는 허무주의라고도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사랑에 있어서 만큼은 원시적 이건 원초적이건 타인이 정해 놓은 잣대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한 데로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이다. 물론 그것이 반 사회적이거나 반 윤리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지라도 말이다.

비판받거나 축복받지 못한 사랑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어두운 면을 보게 된다. 자신과 날것으로 맞서게 된다. (물론 다른 방법으로 자신과 마주하는 경우도 있지만) 여기서 전제는 주위 시선이나 규범에 꼬리 내리는 것이 아니고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 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자기 반성과 성찰을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분명 시인은 그런 사람 이었을 것이다.
자야와의 사랑의 시작도 그러하였을 것이다. 기생과 선생의 사랑. 거기에 더 나아가 유부남이 된 백석과 아직 기생인 자야의 사랑은 지금의 잣대로 보아도 인정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 사랑 앞에 시인은 고뇌하며 명치끝이 눌리는 아픔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시인은 이렇게 세상에 외치는 것이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라고

About 양승영 (5 Articles)
매일 공항에 가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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