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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된다는 것

“어떤 사람에게는 평범한 길이 어떤 사람에게는 해발 9,900m인 것이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모래와 같은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바위인 것이 있다.”

"3시가 조금 지나 아내가 돌아왔다. 훈용이가 막 잠들었다. 그동안 아빠 노릇한 것보다 엄마 노릇한 것이 더 쉽다고 생각했다. 엄마 노릇도 아빠 노릇 못지않게 너무 힘들었다. 제 눈으로 앞을 보고, 제 손으로 밥을 먹고 제 입으로 말할 수 있는 자식이야 좀 덜하겠지만, 제 손으로 씻고 양치하고 면도할 수 있는 자식은 신경 쓸 일 없겠지만……." 사진=남해바래길, 남해군

“어머니께서 녹두죽을 끓이셨다. 정작 당신 입으로 들어갈 것은 거들떠보지 않으시면서, 아들을 위해 굽은 허리를 펴신 것이다. 녹두 틈에 숨어있는 돌을 어두운 눈으로 골라내신 것이다. 당신 잇몸처럼 닳은 주걱을 젓고 계신 것이다.” 사진=최재선

엄마가 된다는 것

최재선 한일장신대 교수

2018.01. 22.

심한 설사 때문에 오늘 교회에 가지 못했다. 아내와 훈용이는 주일에 교회 가는 것이 유일하게 하는 외출이다. 아내가 시내버스로 교회에 다녀오겠다며 훈용이 밥 먹일 것과 안약 넣을 것을 여러 차례 반복하였다. 시내에 있는 교회까지 가려면 시내버스와 택시를 번갈아 타고 1시간 이상 가야 한다. 마을 앞에 있는 시내버스정류장만 해도 집에서 10여 분 이상 걸어가야 한다. 시내버스는 오전과 오후에 고작 세 번씩 오간다.

훈용이 아침은 아내가 만들어 주었다. 거의 미음에 가깝게 만든 밥을 훈용이에게 먹였다. 강냉이보다 작은 이는 있으나 마나다. 찻숟가락 두 술 정도 된 밥을 떠서 훈용이 혀에 올려주었다. 제 입속으로 무엇이 들어오는지 전혀 보지 못하고 입만 벌리는 모습이 마치 제비 새끼 같았다. 작은 그릇으로 한 공기밖에 안 되는 묽은 밥을 먹이는데 한 시간 이상 걸렸다.

훈용이 손톱이 제법 길었다. 손톱을 깎아주려고 손을 잡았다. 뼈만 남은 손가락이 앙상했다. 자기 몸 잡는 것을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습성이 나왔다. 늘 그렇듯이 어디서 그런 힘이 발산하는지 내 손을 사정없이 꼬집었다. 움푹 들어간 상처만큼 통증이 깊었다. 그렇다고 큰소리를 내거나 혼내는 시늉을 하면 더 한다. 꾹꾹 참으며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일관되게 내야 한다.

“평범한 길이 어떤 사람에게는 해발 9,900m”

열 손가락을 다 깎고 나니 모악산 대원사쯤 오른 것 같았다. 발톱은 손톱 깎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손힘보다 발힘이 더 세기 때문이다. 물을 한 컵 먹이고 잠시 쉬면서 노래를 들려주었다.

“퐁당퐁당 돌을 던지자. 누나 몰래 돌을 던지자. 냇물아 퍼져라 멀리멀리 퍼져라. 건너편에 앉아서 나물을 씻는 우리 누나 손등을 간질여 주어라.”

노래를 불러줄 때 편곡을 잘 해야 지겨워하지 않는다. 랩으로 부르기도 하고 판소리 풍이나 민요풍으로 다양하게 불러줘야 한다. 아내가 하는 것을 어깨너머로 배운 것이다. 훈용이가 진정한 기미를 보이자 발톱을 깎았다. 발톱을 다 깎고 나자 모악산 수왕사쯤 당도한 것 같았다. 어떤 사람에게는 평범한 길이 어떤 사람에게는 해발 9,900m인 것이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모래와 같은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바위인 것이 있다.

훈용이는 물을 참 좋아한다. 씻자고 했더니 알아서 옷을 벗었다. 면도하고 머리를 감긴 다음 몸을 씻겼다. 양치질하고 입안을 물로 씻어냈다. 온 얼굴에 웃음꽃이 만발하여 한때나마 봄날이다. 머리를 드라이로 말린 다음 보습제를 발라주었다. 훈용이의 하얀 눈이 해거름 녘처럼 붉었다. 저 눈에 아침 해 뜨고 저녁 달 밝아온다면, 저 눈에 봄꽃 피고 여름 숲 찾아온다면, 단풍 물들고 눈발 날리는 모습 환히 비친다면.

훈용이가 연신 입을 나에게 갖다 댔다. 훈용이의 입술이 달짝지근했다. 오전이 흰 거품처럼 금방 사라졌다. 훈용이 점심을 준비했다. 물컹하게 만든 계란부침을 밥에 넣고 참기름을 쳤다. 배추김치를 가위로 자디잘게 잘라 넣고 비볐다. 집안에 뭉클한 향기가 떠돌아다녔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밥을 못 먹은 지 사흘째다. 밥 냄새가 이렇게 향기로웠단 말인가. 훈용이에게 밥을 먹이는 동안 뱃속에서 거품이 한 잎 한 잎 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곧 상의 한마디 하지 않고 허기가 유출되었다.

“당신 잇몸처럼 닳은 주걱”

어제 먹다 남긴 죽을 먹었다. 양이 차지 않아 밥을 몇 술 더 떴다. 맨밥을 먹었는데도, 꿀맛이었다. 설거지하고 훈용이 눈에 안약을 넣었다. 안압이 올라가는 것을 멈칫하게 하는 약이다. 훈용이가 내 등으로 올랐다. 업어달라는 무언의 명령이다. 훈용이를 업고 일어섰다. 등이 뻐끔했다. 아내는 버릇이 된다며 절대 업어주지 말라고 한다. 녀석은 무엇이든 진득하게 하는 법이 없다. 금방 내려왔다.

3시가 조금 지나 아내가 돌아왔다. 훈용이가 막 잠들었다. 그동안 아빠 노릇한 것보다 엄마 노릇한 것이 더 쉽다고 생각했다. 엄마 노릇도 아빠 노릇 못지않게 너무 힘들었다. 제 눈으로 앞을 보고, 제 손으로 밥을 먹고 제 입으로 말할 수 있는 자식이야 좀 덜하겠지만, 제 손으로 씻고 양치하고 면도할 수 있는 자식은 신경 쓸 일 없겠지만…….

훈용이 옆에 잠시 누워 있겠다고 한 것이 깊숙이 잠들고 말았다. 잠든 순간만큼 천국이 따로 있을까. 오른팔이 저려 잠에서 깼다. 훈용이가 내 팔을 베개 삼아 온기를 가만가만 보태고 있었다. 잠든 훈용이는 앞을 전혀 보지 못한 아이가 아니었다. 말을 하지 못한 아이가 아니었다. 성장과 발육이 정지한 아이가 아니었다. 그냥 고요한 천국이었다. 훈용이 볼에 입을 맞추고 일어나 약을 먹었다. 묵방산 공제선에 해가 반쪽쯤 걸쳐있고 겨울 한 조각이 떨어져 먼 하늘로 날았다.

어머니께서 녹두죽을 끓이셨다. 정작 당신 입으로 들어갈 것은 거들떠보지 않으시면서, 아들을 위해 굽은 허리를 펴신 것이다. 녹두 틈에 숨어있는 돌을 어두운 눈으로 골라내신 것이다. 당신 잇몸처럼 닳은 주걱을 젓고 계신 것이다.

최재선
월간 『한비문학』(시, 동시)과 월간 『창조문예』(수필)로 등단했다. 시집 『잠의 뿌리』, 『마른 풀잎』이 있고, 수필집 『이 눈과 이 다리 이제 제 것이 아닙니다』, 『무릎에 새기다』 등이 있다. 한국문학비평가협회 선정 명시인·명수필가(2015), 한국대표 서정시인(한비문학, 2016), 제10회 해양문학상(수필), 제3회 경북일보문학대전(수필 당선), 제4회 『시인과 사색』 올해의시인(2016) 등을 수상했다. 현재 사람과사회 편집위원이며, 한일장신대학교 인문학부 교양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choijs117@hanmail.net

About 김종영 (888 Articles)
사람과사회 발행인이자 편집장이다. ‘글은 사람과 사회며, 좋은 비판은 세상을 바꾼다’는 말을 좋아한다. weeklypeopl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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