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사회™ 뉴스

“나는 不正義를 고발한다”

비리 쫒다가 강제 출국 당한 최아숙 작가...“국가가 보호해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배신당했다”

미국으로 가게 된 이야기는 영화나 드라마에 있는 것으로 생각할 정도였다. 미국에 간 후 느낀 점을 묻자 “나에게 도움을 주려는 게 아니라 기관이나 누군가의 게임에 내가 희생양으로 넘어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국가에 대한 신뢰가 없어졌고 배신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최 작가는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정부나 기관에서 시민에게 하는 말은 국가나 국민을 위한 말이나 보호하기 위한 말이 아니며 그런 말 중 진심이 들어 있는 것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국가가 나를 보호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배신을 당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나와 딸을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버린 것이라는 말도 강조했다.

자유, 평등, 평화를 강조하는 이유는? 사회운동을 하면서 10년, 20년이 지나고 나니 객관적으로 한국 사회를 볼 수 있었다. 민주주의라고 하는데, 진정한 민주주의인지 의문이 들었다. 적이 없는 데도 적을 만드는 사회다. 개인의 영달과 사리사욕, 감투주의가 심각하다. 이른바 ‘운동권’도 이 같은 현상은 오래 됐다. 그러나 자연은 그렇지 않다. 자연의 법칙을 인간이 깨뜨리고 있다. 철조망과 새의 모습은 자유와 자유로운 움직임을 형상화한다. 자유와 인권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자유와 인권이 없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게 사람들의 모습이다. 자연은 욕심이 없지만, 인간은 욕심이 넘친다. 자연 파괴는 기후 변화, 환경오염, 미세먼지 등의 부작용을 낳는다. 인간이 욕심을 부린 결과다.

최아숙 작가

“나는 不正義를 고발한다”

• 영화와 드라마를 뛰어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작가
• 자유와 평화 누리는 평범한 생활인으로 살고 싶은 작가
• 모든 작품 속에 ‘자유, 평등, 평화’를 담으려 하는 작가
• 원전·유치원 폭행 등 비리 쫒다가 강제 출국 당한 작가
• 자연에서 얻은 ‘물건’을 그리는 ‘도구’로 사용하는 작가

사람과사회™ 2018 겨울 2019 봄 제8·9호

자연에서 얻은 것으로 작품을 만들다

최아숙 작가 작품은 강렬한 편이다. 그림 그리는 기법과 마음이 작품에 녹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최 작가가 그리는 기법은 독특하다.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으로 부르는 방법을 사용한다. 그런데 일반적인 액션 페인팅 방식과는 조금 다르다. 몸을 움직이며 그리는 것과는 조금 다른데, 자연에서 얻은 것을 ‘물건’을 그림 그리는 ‘도구’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리기 기법과 작품에 대한 작가의 말은 작가와 작품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다.

“명화(名畫)를 많이 봤다. 주로 외국 작품이다. 또 혁명적인 삶을 살아간 시인, 철학자, 혁명가를 많이 접했다. 작품은 액션 페인팅과 리얼리즘을 담는 편인데, 손과 손바닥, 손가락을 비롯해 나무, 풀 등 자연을 그대로 사용한다. 페인트를 들고 캔버스 위를 걸어 다니며 그리기도 한다. 세밀하게 표현해야 할 곳은 손톱도 사용한다. 풀이나 나뭇가지를 이용해 치고 때리며 산, 하늘 등을 표현한다. 원하는 표현이 나올 때까지 수백 번을 치고 때리는 과정을 반복한다. 그림을 본 사람들에게 감정이 엿보인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데, 사실주의 작품이면서 감정을 나눌 수 있는 공감대가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이는 작품을 보는 사람이 그만큼 작품과 가깝고 함께 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보는 사람이 그림을 이해한다는 것은 작가로서는 즐거운 일이다.”

최 작가는 사실주의 작품이라고 보는 게 자연스럽지만, 때로는 사실주의와 추상이 섞인 것으로 봐야 할 작품도 있다. 기법의 독특함 때문에 해외에서 전시를 함께 하자는 제안도 많이 들어온다고 한다. 남미, 북미 등 여러 나라다. 미국에서도 인기가 많다. 2018년 9월, 한국에서 처음 전시를 하게 된 것에 대해 묻자 “해외에서 작품에 관심을 갖고 긍정적 평가를 해주는 모습을 보면서 한국에서도 보여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며 “이 생각이 한국에서 처음으로 ‘승무’라는 주제로 전시를 한 계기”라고 밝혔다.

사회 부조리에 실망하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시절, 지하철 2호선 공사 현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형편이 여의치 않아 학비를 마련해야 할 상황이었다. 해창개발이라는 곳으로 가서 발파 작업을 하던 중 인부가 사망하는 대형 사고가 생겼다. 원청은 삼성이었는데, 그런데 사고 수습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인건비 대장을 이중으로 작성하는 등 문제가 심각했다.

진심으로 애도하지 않는 모습과 인건비를 조작해 어떻게 해서든 비용을 줄이려는 데만 관심을 보일 뿐 사람의 생명, 서민의 삶을 챙기지 않는 태도를 바라보면서 6개월 만에 대학을 포기했다. 대학 나와서 취업을 한다고 해도 비인간적인 곳에 가서 일하는 게 옳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학교를 그만 두고 지리산 일대를 돌아다녔다. 1월, 한겨울이었다. 며칠 동안 방황을 하다가 고향인 경북 영주로 내려갔다. 그 후 강원도 양구 방산으로 갔다. 당시 그 지역은 찾아오는 민간인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방산초등학교와 인연이 닿았다. 교장 선생님이 학교에 와서 교사를 해달라고 했는데, 쉬러 왔다며 거절했다.

그 즈음 땅굴이 발견됐다. (1990년 3월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에서 발견된) 제4땅굴이었는데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주위에서 찾기 어려웠다. 당시 영어를 좀 했었는데, 영어로 땅굴에 대해 설명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통역을 했다. 이게 인연이 돼 군부대에서 통역 요원으로 근무했다.

제대 후 대구로 내려왔다. 대구에서는 도자기 만드는 법을 배웠다. 어릴 때부터 했지만 손을 놓았다가 제대 후 대구대 대학원에 있는 전문가 과정에 입학해 약 1년 6개월 동안 배웠다. 이 기간 동안 대구에 있는 신문사에서 기자 생활을 잠시 했다. 하지만 6개월 만에 그만뒀다. 사회 문제에 대한 내 생각과 신문사의 정서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군인·기자·시민활동가의 삶을 살다

이 시간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시민 활동을 시작했다. 어느 날 바람을 쐬러 기장 쪽에 있는 어촌 마을을 가게 됐다. 마을이었는데, 사람이 없었다. 거의 폐허 분위기였다. 알아보니 한 집 건너 암 환자가 생겨 마을을 떠났다고 했다. 근처에 고리원전(부산시 기장군과 울산시 울주군 일대에 있는 원자력 발전소)이 있었다. 남아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죽음을 기다리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남은 사람들은 떠나려 해도 떠날 여유가 없어 눌러 앉아 있다고 했다.

“고리원전 때문에 마을이 처한 상황을 정리해서 지역 기자와 언론에 제보했지만 기사가 나오지 않았다. 인터넷과 포털 카페에도 글을 올렸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 당시 기장을 중심으로 고리원전 문제를 인터넷에 계속 올렸더니 시민 단체에서 연락이 오고, 그러면서 합류하게 됐다.”

당시에는 원전 문제가 사회적으로 크게 떠오르지 않던 때여서 원전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는 게 익숙한 풍경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조건이나 상황이 있다고 해도 최 작가의 비판적 시각을 언론이 쉽게 받아주기 어려웠을 가능성이 크다. 최 작가는 마을에서 직접 보고 겪은 만큼 원전을 새롭게 조명해야 한다는 주장을 계속 이어갔다. 원전을 잘 모르기 때문에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그런 만큼 원전을 알기 위한 시도와 정보 공유가 필요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절감했기 때문이다.

고리원전 구글 검색 결과
“원전 옆에 살았더니 온 가족이 암에 걸리고 장애”, 오마이뉴스, 2016.01.25
외면당한 원전 지역 주민 건강, 한겨레21 제1239호, 2018.11.23
법원, “주민 갑상선암 발병은 원전 책임” 첫 인정, 한겨레 2014.10.17
“정부는 속이고 언론도 원전 칭찬하는 기사만 쓰더라”, 프레시안 2012.03.08
“고리원전 옆에서 못살겠다” 길천마을 한 달째 시위, 연합뉴스 2015.04.30
영광-고리원전 사고 시뮬레이션 보고서 최종(PDF), 환경운동연합, 2012.05.21

비리 쫒다가 강제 출국을 당하다

최 작가의 삶은 이후에도 순탄하지 않았다. 고리원전 이후 유아원(유치원) 폭력 사건, 사찰, 그리고 강제 추방을 겪어야 했다. 최 작가가 밝힌 이야기는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내용이다. 아래는 최 작가가 구술(口述)한 내용을 정리해 옮긴 것이다.

세 살 딸을 유아원에 보냈는데, 어느 날 아이 몸에 멍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아이는 표정이 이상했음에도 말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자꾸 다그칠 수도 없었다. 당시 대구에서는 아동 폭력으로 유아원이나 유치원에서 몇 명이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다. 하지만 언론은 이를 보도하지 않았다. 엄마도, 선생도 쉬쉬 하면서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유아원 선생님을 만나 딸 아이 이야기를 하면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
선생님이 해준 이야기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참을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올라 아동 폭력에 대한 글을 써서 기자들에게 보냈다. 다른 유치원은 물론 우리 아이가 다니던 곳에서 일어났던 폭력 등을 모두 적어서 공개했다. 말도 못하는 아이들이 폭력을 당했고, 더구나 아이 몇 명은 폭력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원장은 고발했다. 이를 계기로 대구 수성경찰서에서 원장을 연행해 조사했다. 그러자 원장은 대구시유치원협회 원장들에게 아이 엄마가 고발을 해서 전국 유치원이 실사를 받아야 할 상황이라고 이야기했다. 아이 엄마를 가만히 두면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면서 내 아이 이름이 공개되는 등 협박에 시달렸다.
약 1주일 정도 지난 후인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 짧은 시간에 나와 딸은 신상이 모두 공개돼 있었다. 원장들은 애를 죽이겠다며 깡패를 동원해 협박했다. 불안해서 이곳에서 살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때는 아이를 데리고 경기도 강화도까지 도망가서 숨기도 했다. 그런데 경찰에 신변 보호 요청을 했는데, 아무 것도 해주지 않았다. 도리어 나의 움직임을 깡패들이 경찰보다 더 빨리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청와대 신문고에 사연을 올렸다. 그랬더니 정치권(?)에서 연락이 왔다. 신문고에 올린 것을 보고 연락했다며 해외로 가라고 권유했다. ‘여기서는 네가 안 되겠다’(내가 한국에 있는 것은 곤란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임)는 말도 했다. 하지만 해외에 친인척도 없고 돈도 없고 무서워서 갈 수가 없다고 대답했다. 딸과 살 수 있게 신변 보호만 제대로 해달라고 요청했다.
미국으로 떠나던 때도 추운 1월, 1998년 1월이다. 한국에 머물러 있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는 두려운 생각이 들어서 비행기를 탈 수밖에 없었다. 항공권을 주며 출국하라고 말할 정도였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선택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다. 미국 캘리포니아공항에 내리자마자 어떤 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어 무작정 경찰서를 찾아갔다. 그랬더니 즉각 보호소로 끌고 갔다. 그곳에서 2년 6개월을 살았다. 하지만 보호소에 있는 동안 ‘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데려다 달라’고 계속 주장했다. 두려움 때문에 비행기를 탔지만 도저히 살아갈 용기도, 방법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보호소 직원이 권고를 했다. CIA, FBI 등이 조사를 했는데, 한국에 돌아가면 아이(딸)가 위험하다며 아이를 봐서 미국에서 살라고 했다. 영구 영주권을 주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하지만 내가 한국에 왜 들어가지 못하는지 이유를 알려 달라고 물었지만 대답을 하지 않았다. 수십 번을 묻고 물었더니 ‘당신은 물론 애가 위험하다’며 ‘그러니 아이 인생을 봐서라도 (미국에) 머무르는 게 좋다’는 대답을 해줬다.

최 작가가 미국으로 가게 된 이야기는 영화나 드라마에 있는 것으로 생각할 정도였다. 미국에 간 후 느낀 점을 묻자 “나에게 도움을 주려는 게 아니라 기관이나 누군가의 게임에 내가 희생양으로 넘어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국가에 대한 신뢰가 없어졌고 배신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최 작가는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정부나 기관에서 시민에게 하는 말은 국가나 국민을 위한 말이나 보호하기 위한 말이 아니며 그런 말 중 진심이 들어 있는 것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국가가 나를 보호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배신을 당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또 “국가가 나와 딸을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버린 것”이라는 말도 강조했다.

최 작가는 2018년 1월 영구 영주권(시민권)을 받았다. 시민권을 받았기 때문에 한국에 오는 부담이 줄었다고 생각했다. 이 같은 상황은 한국에서 전시를 하겠다는 결심을 하는 데에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 2018년 전시 때는 딸(15세)과 함께 한국을 찾았다.

최 작가 인터뷰는 2018년 9월 10일 진행한 ‘승무’ 전시회와 2019년 3월 25일부터 4월 13일까지 전시한 ‘항거’를 묶어 구성했다.

최아숙 작가 작품은 강렬한 편이다. 그림 그리는 기법과 마음이 작품에 녹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최 작가가 그리는 기법은 독특하다.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으로 부르는 방법을 사용한다. 그런데 일반적인 액션 페인팅 방식과는 조금 다르다. 몸을 움직이며 그리는 것과는 조금 다른데, 자연에서 얻은 것을 ‘물건’을 그림 그리는 ‘도구’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리기 기법과 작품에 대한 작가의 말은 작가와 작품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다.

▲자신을 소개해 달라.

자연 속에서 자유와 평화로움을 느끼며, 평범한 생활인으로 살고자 노력하는 아티스트다. 11년 전 대구 지역 유치원 비리를 폭로했다가 미국으로 쫓기는 신세가 됐다. 미국 보호소를 거쳐 망명자가 된 후 딸을 키우면서 그림과 도예를 하고 학생들에게 예술을 교육·안내하고 있다.

▲‘승무’ 전시에 출품한 작품은 어떤 그림인가?

멀리 타국에서 홀로 사랑하는 내 조국, 내 민족을 그리워하며 매일 조국 산하를 어루만지며 기도하듯 그린 그림이다.

▲전시 제목을 ‘승무’로 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림이 바로 내 자신이고 자연을 통해 보여주고 싶은 것 세 가지, 즉 자유, 평등, 평화를 담았다. 조용한 침묵 가운데 우리는 예민하게 가슴에서 발작하는 그 뜨거운 무엇을 다시 배워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모든 그림을 가장 잘 표현한 시는 바로 조지훈의 ‘승무’다. 한 편의 시지만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다 들어 있다. 「승무」는 다이내믹(dynamic)하지만 고요와 한국의 정서인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담고 있다. 전시 작품은 자연, 구상, 추상, 풍경, 수묵, 사진 등 다양한데, 이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많다고 생각했다.

▲자유, 평등, 평화를 강조하는 이유는?

사회운동을 하면서 10년, 20년이 지나고 나니 객관적으로 한국 사회를 볼 수 있었다. 민주주의라고 하는데, 진정한 민주주의인지 의문이 들었다. 적이 없는 데도 적을 만드는 사회다. 개인의 영달과 사리사욕, 감투주의가 심각하다. 이른바 ‘운동권’도 이 같은 현상은 오래 됐다.

그러나 자연은 그렇지 않다. 자연의 법칙을 인간이 깨뜨리고 있다. 철조망과 새의 모습은 자유와 자유로운 움직임을 형상화한다. 자유와 인권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자유와 인권이 없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게 사람들의 모습이다. 자연은 욕심이 없지만, 인간은 욕심이 넘친다. 자연 파괴는 기후 변화, 환경오염, 미세먼지 등의 부작용을 낳는다. 인간이 욕심을 부린 결과다.

적이 없는 데도 적을 만드는 사회

불교적 색채가 강하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종교적인 것보다는 자연이 주는 평화로움, 그 속에 자유와 질서가 있고 또 정연한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러나 인간만이 유일하게 자연의 질서를 깨뜨린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자연을 통해 자유, 평등, 평화를 그림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유나 평화가 들어오려면 여유가 있어야 한다. 여유가 있을 때 깨우침도, 치유도 들어올 수 있다. 특히 한반도 분단 상황을 아프게 느꼈고 새들처럼 자유롭게 왕래하는 그날을 바라보는 마음도 담았다. 휴전이라는 결과물은 오랜 시간이 지난 현재, 안일한 무감각을 낳았고 이는 인간성 상실이라는 흉물이 돼가고 있다. 휴전선, 태극기 등에 이런 마음을 담았다. 한반도가 평화 정착과 평화 통일로 나아가고, 무질서를 질서로 바로잡아나갈 수 있기를 기원한다.

작품집을 보면 그림과 함께 글과 음악 제목을 함께 넣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

휴전선, 철조망, 독도 그림 등은 과거 역사의 아픈 상흔이 남아 있는 장소를 표현한 작품이다. 이 작품들은 애착이 많은데, 아마 치유의 역사가 이뤄지길 바라는 간절함이 깃들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림은 시각적 통찰로 지난 역사를 돌아보는 것으로, 그리고 글과 음악은 이를 마음에 되새김하고 남아 있는 모든 감정을 치유하고 회복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을 담은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기법이 독특한 것 같은데, 어떤 방법인가?

일반적으로 붓으로 그리지만 붓을 사용하지 않는다. 생활 도구나 자연물에서 재료를 찾아서 그린다. 재료는 다양하고 다양한 만큼 다양한 기법을 써서 한 작품을 완성한다. 캔버스를 세워서 작업하지 않고 눕혀서 액션 페인팅 기법과 다양한 터치 기법을 모두 사용한다. 오래 전 명화를 보면서 연구하고 실험하고 현대 예술 중 추상화를 보면서 그것들을 종합적으로 정리하면서 모든 기법은 과거와 현재의 기법이 조화를 이루게 됐다. 과거와 현대미술의 결합이다.

▲작품(집)을 통해 하고 싶은 말씀은?

이 책을 통해 깊은 명상과 사색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래서 개인의 역사와 나라의 역사가 치유되기를 바란다. 치유를 통해 진보적인 생각과 방향으로,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길 기원한다.

▲이제 ‘항거’ 전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이 전시를 기획한 배경이나 이유가 있나?

이번 그림 전시는 100년 전 국내외 우리 민족이 나라의 자주 독립을 위해 항거했던 역사를 되살리자는 의미로 진행하고 있다. 당시 3.1운동은 민족 자결의 원칙에서 민족의 자유와 평등, 인류애를 담아 국내외 동포들이 참여한 거국적 항거였다. 그 결과로 임시정부가 출범했다. 이를 기리고자 전시회를 열었다.

▲전시 제목을 ‘항거’로 정한 이유는?

3.1운동은 전국적 항쟁이었고, 임시정부의 독립투쟁은 30년 가까이 진행됐다. 단말마(斷末摩) 싸움이 아니었다. 온몸으로 사력을 다해 일제의 압제와 침략을 거부한 것을 표현한 것이다.

승무(僧舞)

조지훈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에 황촉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을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인데,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출전 : 조지훈, 「승무(僧舞)」, 『문장』 11호(1939.12)

조지훈(趙芝薰, 1920.12.03~1968.05.17)
일제 강점기 이후 활동한 수필가, 한국학 연구가, 시인이며 청록파 시인 중 한 사람이다. 경북 영양 출생. 본관은 한양(漢陽), 본명은 조동탁(趙東卓)이다. 독학으로 중학 과정을 마친 후 동국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39년 『문장』에 발표한 「고풍의상」과 「승무」로 문단에 데뷔했다.

▲전시 주제를 보면 3.1운동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이고 작품 제목도 ‘광야에서’, ‘서시’, ‘유관순’, ‘태극 대지’ 등이 등장한다. 작품 주제를 중심으로 이번 전시에서 의미나 바라는 바는 무엇인가?

작품들 속에서 고난의 시대를 뚜벅뚜벅 걸을 갔을 독립 운동가들이 광야에서 자유를 갈구하며 울부짖었을 모습들, 일제와 타협하지 않고 한 치 부끄럼 없이 나아갔을 충심, 그리고 그들이 품에서 꺼내 두 팔 높여 만세소리와 함께 치켜졌을 태극기 등을 상상할 수 있다. 작품들을 보고 독립 운동가들의 외침을 듣기를 바란다.

헌법 가로막는 세력에 항거해야 한다

▲항거는 강렬한 낱말이다. 100주년을 맞았지만, 항거라는 낱말의 의미처럼 아직도 항거할 게 많다고 생각하는가?

아직도 민족의 분열을 유도하는 쪽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사회의 한축을 장악하고서 대다수 국민의 자유로운 삶을 방해하고 불평등을 야기하며, 한반도를 전쟁 분위기로 몰아가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통일을 인류애와 동포애를 바탕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밝혀 놓았다. 자손과 내가 자유롭게 평등하게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이를 가로막는 세력에 항거해야 한다고 본다.

▲2018년 서울과 대구에서 ‘승무’를 주제로 해서 전시한 것과 2019년 4월 ‘항거’를 보면 사회성이 짙은 작품이 많다. 작품에 사회성을 담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2018년 그림전은 한국의 여러 산천과 지역을 표현했다. 한반도, 독도, 도시골목, 시골길, 그리고 하늘, 강, 하늘을 날아가는 새 등이다. 한국의 자연 속에 있는 자유로움, 평등, 평화로움을 표현했다. 이번에 진행하는 ‘항거’는 일제의 압제로부터 자유로워지길 바라는 선조들의 마음과 실천을 그렸다. 2018년이나 2019년 지금, 필요한 시대정신을 담았다. 그림 속 소재가 달라지더라도 그 속에 추구하는 자유, 평등, 평화, 인류애는 녹아 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더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사람이 동물과 다른 것은 정의를 추구한다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저 생존하기 위해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독립 운동가들을 탄압했던 자들이 있다. 또 100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을 두둔하는 자들이 있다. 해외동포로서 정의로운 대한국민으로 살아가길 기원한다.

‘항거’ 전시에 등장하는 ‘태극새’의 경우 ‘태극새 진군기’를 만들어 작가 사유재산(판권, 지적재산권)으로 끌어안고 있지 않고 깃발을 제작해 전 세계에 뿌리고 싶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이메일에 파일로 첨부해서라도 뿌릴 수 있기를 바란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좀 더 바른 인식과 사고로 사회를 바라보고 좀 더 냉철하고 지혜롭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최 작가가 민족성 짙은 작품을 다루는 이유는, 비록 부당한 상황에서 강제로 출국했지만, 해외에 나와 살아오면서 내 나라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고국의 중요성을 깨달으면서 그 정신을 그림에 담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한반도 분단과 일제강점기라는 역사는 ‘국가적 한(恨)’으로 맺혀 있고 인권, 통일의 문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숙명적 과제인 만큼 역사의식을 토대로 민족의 정기를 그림으로 이끌어내야겠다는 생각을 그림에 담고 있다.

그래서 최 작가에게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의 해인 2019년은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는 “지난해 11월 미국 캘리포니아에 대형 산불이 나서 이재민이 된 이후로 텅 빈 피난 공간에서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며 “특히 올해는 3.1운동과 건국 100주년이기 때문에 조국을 위해 뭔가 해야겠다는 일념으로 그림 작업에 몰두했고, 그렇게 완성한 100점을 한국으로 보내 ‘항거’ 전시를 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 작가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가르침대로 역사 왜곡을 바로 잡아 우리 민족의 자긍심과 애국심을 끌어내는 100주년이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항거’ 출품한 작품에 태극기를 이미지화한 태극새, 태극불새, 슈퍼블루문 등을 표현한 그림, 유관순 열사를 형상화한 그림, 이육사·윤동주·한용운 등의 시를 그림으로 표현한 이유기도 하다.

최아숙
1972년 경북 영주에서 출생했다. 지하철 건설 현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인부가 죽는 사고를 처리하는 과정을 목격하면서 부조리한 사회의 모습을 본 후 대학을 그만 두고 예정에 없던 삶을 살았다. 군 통역 요원과 지방 일간지 기자를 지냈다. 이후 유치원 폭력 사망 사건, 고리원전 문제점 등을 폭로하며 사회 활동을 했다. 하지만 원하지 않은 상황에서 어린 딸을 데리고 미국으로 강제로 건너가 작품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2018년 9월 한국에서 첫 개인전인 『승무』를, 2019년 3월에는 두 번째 전시회인 『항거』를 진행했다.

그림이 바로 내 자신이고 자연을 통해 보여주고 싶은 것 세 가지, 즉 자유, 평등, 평화를 담았다. 조용한 침묵 가운데 우리는 예민하게 가슴에서 발작하는 그 뜨거운 무엇을 다시 배워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모든 그림을 가장 잘 표현한 시는 바로 조지훈의 ‘승무’다. 한 편의 시지만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다 들어 있다. 「승무」는 다이내믹(dynamic)하지만 고요와 한국의 정서인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담고 있다. 전시 작품은 자연, 구상, 추상, 풍경, 수묵, 사진 등 다양한데, 이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많다고 생각했다.

최 작가가 민족성 짙은 작품을 다루는 이유는, 비록 부당한 상황에서 강제로 출국했지만, 해외에 나와 살아오면서 내 나라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고국의 중요성을 깨달으면서 그 정신을 그림에 담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한반도 분단과 일제강점기라는 역사는 ‘국가적 한(恨)’으로 맺혀 있고 인권, 통일의 문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숙명적 과제인 만큼 역사의식을 토대로 민족의 정기를 그림으로 이끌어내야겠다는 생각을 그림에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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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사회 발행인이자 편집장이다. ‘글은 사람과 사회며, 좋은 비판은 세상을 바꾼다’는 말을 좋아한다. weeklypeopl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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