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로 보는 우리 시대의 사람과 사회”
"어떤 것에 계속 관심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대단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문학도 그렇지만 음악도 그렇다. 그런데 이를 통해 생기는 영향을 자신의 생애에서 가시적 형태의 모습을 보겠다고 생각하는 것, 즉 조급증을 갖기 시작하면, 힘들어지기 시작한다. 생애에서 보고자 한다면 정치에 뛰어들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정치는 바로 적용할 수 있는 법을 바꾸거나 폐지할 수 있다. 또 사회운동에 뛰어드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다."
[인터뷰] 최정우 Association des Amitiés Asiatiques 교수
“예술로 보는 우리 시대의 사람과 사회”
페이스북 친구인 최정우 교수를 만나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난 2017년 여름, 부부가 함께 방한 일정이 있어 페이스북에서 인터뷰 여부와 일정을 잡을 수 있었다. 최 교수는 현재 아내인 이수정 씨와 함께 프랑스에서 살고 있다. 이수정 씨는 의상과 패션을 전공한 패션 디자이너다. 쇼핑몰인 트렌비(TRENBE) 프랑스 지점 운영자이기도 하다.
최 교수는 프랑스에서 5년째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 Parti Socialiste와 Inalco Langues O’를 거쳐 현재는 파리 앙탱(d’Antin) 거리에 있는 어학교육기관인 AAA(Association des Amitiés Asiatiques)에서 교수로 근무 중이다.
AAA어학원은 낱말 뜻풀이만 보면 ‘아시아우호협회’로 풀 수 있는데, 1989년 설립 후 1990년부터 한국인과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프랑스어 교육을, 1991년부터는 프랑스인에게 일본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어 1994년부터는 재불 2세 아동을 위한 2개 국어 교육을 목적으로 조셉학교(Lycée Saint-Joseph of Avignon)와 결연을 맺었다. 1995년부터는 언어를 위한 전문학교로 공식 인정을 받았다.
미학·음악·철학·문학·어학 ‘五位一體’
최정우 교수는 철학자, 음악가(작곡가 겸 기타리스트), 미학자, 문학비평가다. 뿐만 아니라 어학까지 가능하니 미학·음악·철학·문학·어학을 묶어 ‘오위일체(五位一體)’를 갖고 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다양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특히 미학은 고등학교 1, 2학년 즈음에 공부하겠다고 결심을 굳힐 만큼 관심이 많았던 학문이다.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원 불어불문학과에서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의 에로티시즘 문학과 유물론적 철학에 대한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문학평론은 2000년 『세계의문학』(2015년 겨울호 후 폐간)으로 등단했다.
최 교수는 ‘람혼(襤魂)’이라는 애칭을 쓴다. 한자를 풀면, ‘람(襤)’은 ‘가선이 없는 옷(누더기)’, ‘혼(魂)’은 ‘넋’이라는 뜻이다. 애칭을 보며 흔히 하는 말인 ‘자유로운 영혼’이 떠오르기도 했다. 2017년 어느 날, 최 교수가 한국을 방문한다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글을 본 후 곧장 인터뷰가 가능한지 물었다.
최 교수와 인터뷰를 하고 싶었던 이유는 예술과 사회라는 큰 주제에서 예술(문학)이 사람과 사회에 어떤 작용을 하고 역할을 하는지, 일상에서 겪는 일이나 사회 현상을 예술의 시선으로 보는 기회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쓰는 ‘예술’은 ‘문학’과 ‘문화’를 하나로 묶어서 부르는 개념으로 생각하면 좋겠다.
아놀드 하우저(Arnold Hauser)가 쓴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Sozialgeschichte der Kunst und Literatur, 1951)를 예술사회학의 고전이자 명저로 손꼽는 것은 예술과 사회의 관계를 잘 정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 교수와 함께 예술과 사람, 예술과 사회를 생각하고 싶었던 이유도 비슷한 맥락이다. 문득 예술사회학과 인문사회학이라고 표현하면 적절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2017년 8월 21일(월) 오후 2시 서울 종로구에 있는 카페 겸 한식당 경성주방(삼청로 122-4, 02-737-9373)에서 최정우 교수와 이수정 선생을 만났다. 이날 인터뷰는 사람과사회™ 3호에 게재하려 했으나 4호로 늦어졌다. 발행 주기를 계간에 맞추는 까닭에 6개월이 훌쩍 지난 2018년에 나오게 됐다. 이 글을 통해 두 분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노래 짓는 남편, 제목 짓는 아내
“남자는 그의 아내를 위한 노래를 만들고, 여자는 그 노래의 제목을 짓는다.”
2017년 인터뷰를 뒤늦게 정리하다가 최근에 아내인 이수정 선생이 2018년 4월 5일 런던에서 쓴 페이스북 글이 눈에 들어왔다. 남편인 최정우 교수가 노래를 짓고 아내는 제목을 짓는다는 문장 속에서 멋과 낭만을 찾지 않을 수가 없었다. 최 교수와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우선 살펴볼 낱말이 있다. 바로 ‘인문학(人文學, Humanities)’이다.
인문학은 인간과 인간의 사상(철학), 사회, 문화 등 인간을 이해하려는 학문적 연구를 말한다.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이 경험을 중심으로 하는 연구 방법이 중요한 반면 인문학은 분석, 비판, 사변을 폭넓게 사용한다고 돼 있다.
인문학은 인문학이 다루는 인간의 역사만큼 오랜 시간을 갖고 있다. 인간, 즉 인류의 역사가 수천 년에 이르기 때문이다. 밸버트 레비(Levi, Albert W.)는 『오늘날의 인문과학』(The Humanities Today, 인디애나대학출판부, 1970)에서 인문학의 개념과 관련해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서 4과(음악, 기하, 산술, 천문)와 3학(문법, 수사, 논리)을 포함해 일곱 가지 항목을 인문학을 위한 기술 또는 방법으로 제시했다.
오늘날, 특히 20세기 이후의 인문학은 역사학, 언어, 음악사학, 연극, 미술사학, 무용, 공연예술학, 철학, 종교학 학문으로 세분해서 다룬다. 인문학은 자연, 때로는 사회과학뿐만 아니라 전문 교육과 연관이 있다고 옥스퍼드사전(OED, Oxford English Dictionary, 3판)이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레비의 표현에 따라 인문학이 다루고 있는 기술이나 방법을 살펴보면 역사·철학·종교·언어·음악·미술·무용 등은 인간의 면면(面面)을 살펴볼 수 있는 대표적인 소재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근대와 현대의 역사에서 겪은 전쟁과 갈등의 영향이 커서 이분법 형태로 구별하는 게 일상이다. 세상은 분명히 천연색(color)인데, 흑백(black and white)으로 보려는 습성이 유전자처럼 굵고 깊고 넓게 박혀 있다.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가 쓴 인류학 책인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 강의』(류재화, 문예출판사, 2018.02)를 설명하기 위해 ‘다양성을 거부하는 사회를 위한 인류학의 조언’이라는 부제(副題)처럼 ‘이분법 인식’은 심각할 정도다. 그가 『슬픈 열대』(Tristes Tropiques)에서 ‘서구의 문명과 야만’이 갖고 있는 개념을 비판했듯이 ‘한국의 이분법’은 ‘한국형 문명과 야만’인지도 모른다.
문화나 사회의 범주에서 이와 같은 이야기를 즐겁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이 생각을 하며 찾은 이가 바로 최정우 교수다. 그는 인터뷰 이틀 전인 8월 19일 저녁 광주광역시에 있는 문학 전문서점인 검은책방흰책방에서 ‘패관의 문학, 온 뫎으로 내려가기의 잡스러움 : 고 박상륭에 대한 잡설 한 자리’라는 강연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온 직후였다.
페이스북 아이디 ‘니브리티’를 쓰는 김종호 선생은 박상륭 문학을 다룬 최 교수 강연에 대해 ‘마음의 평화평화평화(솬티솬티솬티)가 필요하다’고 쓰기도 했다. 소설가인 김종호 선생은 검은책방흰책방 서점 주인이다. 또 최 교수의 강연을 제안하고 기획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다음은 최정우 교수와 두 시간 가까이 나눈 이야기를 간추려 정리한 글이다.
▲뵙게 돼 반갑고 기쁘다. 오늘은 예술이 사람과 사회에 끼치는 영향이라는 넓은 범주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미학 등 예술에 대한 내용이 많을 것 같다. 우선 한국에는 어떻게 오게 됐나?
방학 때 인문학 강의를 하러 종종 온다. 10여 년, 7~8년 즈음 되는 것 같다. 중앙대학교 자유인문캠프 때문에 왔다. 자유인문캠프는 중앙대를 기반으로 대학(원)생들이 직접 기획하는 인문학 플랫폼인데, 강연에는 나 외에 서동진, 최원, 김항 선생 등을 비롯해 여러 명이 참여하고 있다.
캠프 관련 강연이나 정보의 예로 들면 서울시NPO지원센터가 진행한 ‘잠수함 토끼들’이 있고 소식을 전하는 잡지인 ‘잠망경’이 있다. 정치, 철학, 미학 등을 중심으로 강연을 구성한 게 많은데, 최근 4~5년 전후에 강연한 것은 ‘현대 미학·정치의 네 가지 범주’라는 주제로 말과활 아카데미에서 한 게 있다.
이 강연에서 J. 랑시에르와 미학의 장면, G. 아감벤과 미학의 성사, 디디-위베르만과 미학의 잔존, A. 바디우 또는 J. 데리다와 미학의 진리 등 네 개의 주제를 담았다. 이는 내가 현대 미학의 새로운 범주 설정을 위해 수년 동안 고심하여 고안하고 연결시킨 개념들의 연속이다. 여러 철학 이야기를 새로운 하나로 만드는 개념이라 할 수 있는데, 절대적인 범주로 보는 게 아니라 네 가지 범주를 상대적이고 유기적인 것으로 본다. 시간성, 역사성을 갖고 있고 서로가 서로를 공유하는 범주로 이해하는 것이다.
“고등학교 때 미학 공부 결심”
▲미학과 평론을 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
대학 학부에서 미학을 공부했다. 어릴 때, 고등학교 때부터 미학을 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원래 철학을 하고 싶었지만, 그런데 어릴 때 미학을 접해보니 미학은 철학 중에서 미를 탐구하는 것이고, 이를 바탕으로 여러 예술 장르에 철학적으로 접근하는 학문이다. 나중에 이게 근대미학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이론에 관심이 많았고 스스로 음악, 그림을 좋아했다. 예술적 실천과 함께 동시에 이론적 작업을 좋아했다. 이 두 가지가 미학 속에서 조화를 이룰 것으로 생각해 미학을 선택했다. 하지만 학교에서 배우는 것과 현실은 합치는 안 됐다.
하지만 졸업하면서, 2000년도에 비평으로 등단할 수 있게 됐다. 쉽게는 음악비평이라 분류할 수 있는 글이지만 사실 음악과 철학, 미학과 비평의 경계 위에 있는 것인데, 이때부터 비평을 쓰기 시작했다. 글을 쓰면서 변하지 않는 원칙으로 정한 것이 있다.
대개 비평은 문학, 영화, 음악 등 장르나 영역이 정해져 있다. 자신이 평론의 대상으로 삼는 매체나 영역을 아주 당연하다고 정해놓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나의 글쓰기는 이러한 당연시되는 영역을 거부하고 오히려 그러한 영역들의 경계를 문제 삼으며 바로 글쓰기의 수행성, 그 자체를 통해서 이러한 여러 경계를 넘나든다.
▲비평을 하는 방식, 글에 문체가 있듯이, 비평도 나름 특징이 있을 텐데, 어떤 모습인가?
비평, ‘크리틱’이라는 것은, 칸트도 말했고 마르크스도 말했지만, 특정 장르에 대한 분석이나 평가가 아니라 모든 궤를 통과하거나 다양한 경계에 걸쳐서 자기 이야기를 하는 형식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작품이 좋다고 말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어떤 작품을 통과할 수도 있고, 넓게는 작품은 물론 어떤 현상까지도 통과해서 글을 쓸 수도 있다. 그 글이 비평이라면, 그 자체로 사람에게 뭔가를 상기하거나,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무엇인가를 떠오를 수 있게 하는 게 비평이라 생각한다.
글은 이런 원칙이 있고, 음악은 연극과 무용 관련 작업을 많이 했는데, (음악도) 문학처럼 원칙을 계속 이어왔다고 생각하는데, 음악도 음악만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고 본다. 음악은 어쨌든 개인이나 집단에 영향을 끼친다. 음악 자체가, 그러니까 우리가 연극을 보러 가면, 오페라나 음악 공연을 보러 가는 게 아닌 이상, 연극은 중간에 음악이 존재한다. 관습적으로 소비하는 음악이 아니라 연극에서 음악이라는 자리가 어떻게 독립적이면서 상호적으로 있느냐가 중요하다.
“독립적이면서 상호적으로 있느냐가 중요”
▲독립성과 상호성, 이 말은 독립과 상호작용이 함께 필요하다는 것인데, 어떻게 이해하면 되나?
그래서 음악을, 작곡하면서 전달하는 방식을 많이 고민했던 것 같다. 일로 하는 경우, 음악을 예로 들면, 한 작품으로 몇 달 동안 매달려야 한다면, 일을 할 수도 없고 안 된다. 나의 경우 한 작품을 하려면 3개월은 필요하다. 배우를 정하고 읽기(Reading)를 하고 그 후에는 서기(Standing)를 한다. 서기 과정에서는 대본을 들고서 동선을 짜고 무대를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한다. 공연 텍스트를 읽을 때부터 공연이 올라갈 때까지 전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
그런데 작곡가는 전 과정에 참여한다고 하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물론 배우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어떤 음악을 만들어야 할 것인지 고민하지만, 연습하는 모습으로서 표현적인 면을 본다면, 그 공간에 존재한다고 해서 가시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은 없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 과정이 매우 중요했다. 그래야만, 그러니까 계속 호흡하면서 끝까지 갖고 가야만, 음악이 미적으로나 예술적으로,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정당성이 있다고 제 스스로 생각했다.
이런 게 상호작용이다. 이렇게 할 때 배우나 무대에서 실제 작업을 하는 분들이 호흡을 같이 느끼는 경우가 많았다. 연극에 비하면 무용은 더욱 그렇다. 무용은 언어가 없기 때문에 음악이 끊이지 않는다. 언어가 아닌 음악과 몸짓의 만남이 어떻게 이뤄지는 것인가가 중요하다. 이런 점에 음악 작업을 재미있게 했다.
▲문학과 음악이 만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두 영역을 동시에 하기 때문에 좋은 점이 있을 것 같다.
『사유의 악보』 서론에서도 이야기한 것인데, 다른 사람과 달리 독특할 수 있다. 두 영역에 걸쳐 있다 보니, 원해서 그러는 것 같지는 않는데, 언어적 텍스트를 음악 구조로 이해하려는 습관이 있는 것 같다. 마찬가지로 음악을 텍스트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비평은 읽은 사람이나 본 사람, 즉 공통으로 경험한 사람이 있다는 전제가 없다면 의미가 없다. 비평은 넓게 또는 깊게 생각하든 이러한 접점이 있어야 한다. 그런 만큼 언어, 연기, 몸짓 등과 맞닿아 있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또한 관심도 많았다.
“내용과 형식, 교차적으로 생각하는 경향 있다”
▲내용과 형식의 입장에서 본다면, 형식보다 내용이 중요하다고 이해해도 되나?
흔히 이야기하는 내용과 형식의 구분은 내게 큰 의미가 없다. 조금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흔히 내용과 형식으로 구별하는 게 실제로는 구별이 불가능하거나 오히려 식별하기 불가능한 지점에서 다른 가능성이나 잠재성이 나오는 것 같다. 글과 음악 사이도 그렇고 음악과 몸짓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단지 음악 자체로만 이해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음악이 어떤 형태로 공연이 이뤄지는가를 봐야 한다. 이는 사실 내용과 형식이 같이 가는 것이다.
글이면 글, 음악이면 음악이라는 그 자체의 형식이 있지만, 그 형식으로만 담아낼 게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과 달리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서로 섞인 것을 해보고 싶었고 해왔다고 생각한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인데, 언어적 텍스트 자체를 음악 구조로 이해하려 했고, 음악을 만들 때는 글을 쓴다는 느낌으로, 글을 쓸 때는 그 글의 음악성이 어떻게 들리는가, 음악을 만들 때는 이 음악이 어떠한 맥락에서 어떠한 텍스트성으로 다가가는가, 이런 문제를 서로 교차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다.
▲미학은 학문이 아닌 일상에서도 많이 녹아 있다. 이것을 ‘생활 속 미학’이라면, 어떤 것을 예로 들 수 있나?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근대미학의 의미에서 문학, 미술, 음악 등을 보면, 우리가 예술이라고 하는 것은 ‘근대’라는 틀에 익숙하다. 생활에서 볼 수 있는 미학이라면, 보통 두 가지를 말한다.
우선 명동에 가보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명동에 가면 가타카나(カタカナ)로 쓴 ‘에스테(aesthe)’를 볼 수 있다. ‘에스테틱(aesthetic)’을 줄인 말인데, 이것은 대개 ‘피부 미용’을 이르는 말이다. 이 말은 또 ‘미(美), 미술, 미학, 심미적인’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래서 에스테틱을 전공했다고 말한 후에는 미용이 아닌 미학을 전공했다는 설명을 덧붙여야 한다. 에스테틱이라는 말이 여러 의미의 장(場)을 갖고 있는 것이다. 사실 미학이라고 하면 미용을 포함해 ‘미적인 여러 가지 것’이 포함돼 있는 것이다.
그리고 느림의 미학을 예로 든다. 대략 20년 전에는 일상에 ‘미학’을 붙이는 게, 형용모순(Oxymoron, 形容矛盾)처럼 무척 생소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느림의 미학’, ‘요리의 미학’ 등 ‘미학’을 생활에 붙여서 말하는 게 자연스러운 때가 됐다. 느림이라는 속도도 요리처럼 미학을 넣어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할 만큼 인식이 변했다.
제한적이었던 미, 미학의 영역이 예술가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것에서 예술과 일상의 경계가 약해졌다. 때에 따라서는 제도적으로 영역을 구분하지 않아도 될 정도다. 에스테틱과 느림의 미학이라는 두 가지 예를 생각하면, 미학은 예술 장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다른 요소에서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미학이라는 예술론도 있지만, 또 그런 시대도 있었지만,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미학이라는 용어는 아름다움 자체에 대한 어떤 태도라는 느낌도 있다. 더 나가면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을 물었을 때 삶의 가치로서의 진리냐 아니면 살아가는 데에는 돈이 최고 중요하다는 두 가지 입장에서 대단히 상반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도 진리를 추구하는 입장에서는 미는 사실 여분의 것, 부차적인 것이었다. 진, 선, 미라는 전통적인 구분 방식의 순서 자체가 이러한 위계를 잘 보여준다. 사회적, 정치적 측면에서도 진리를 추구한다는 면에서 보면 변혁을 이루고 나서 미를 논하는 것이지 중심적인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미의 문제는 그러한 위계와 서열 안에서 생각될 수 없는 문제이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구상하며 계속 발전시켜 오고 있는 현대 미학의 새로운 범주 구성의 작업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이는 어떤 조건, 어떤 생활 조건이나 물리적 조건의 변화 또는 그것의 발전, 이런 것의 힘을 얻은 것도 있다.
그러나 미라고 하는 것 또는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어떤 추구나 경험이 사실은 부차적인 게 아니라 어쩌면 다른 것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도 있고 또는 그것보다 더 근본적일 수 있는 어떠한 충동이거나 어떤 영역이라고 본다. 그런 것들이 현대에 와서 좀 더 분명해지고 사람들이 (일상에서) 느끼고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흔히 이야기하는 내용과 형식의 구분은 내게 큰 의미가 없다. 조금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흔히 내용과 형식으로 구별하는 게 실제로는 구별이 불가능하거나 오히려 식별하기 불가능한 지점에서 다른 가능성이나 잠재성이 나오는 것 같다. 글과 음악 사이도 그렇고 음악과 몸짓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단지 음악 자체로만 이해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음악이 어떤 형태로 공연이 이뤄지는가를 봐야 한다. 이는 사실 내용과 형식이 같이 가는 것이다.”
“미학은 영역 구분 무의미할 만큼 대중화”
▲이런 현상은 미학의 대중화가 일어났다고 볼 수도 있나?
물론이다. 보다 익숙한 용어를 사용하자면 외연(外延)이 넓어지기 때문이다. 미학이라 부르던 좁은 영역에서 다뤄지던 것이 이제는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이뤄지고 있다. 이를 ‘저변(底邊)’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고, 내가 쓰는 용어로는, ‘구조’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미학이라는 말 자체가 이제는 우리가 느낄 수 있고, 감지할 수 있고, 감상할 수 있는 모든 영역에 해당하는 것이 됐다. 그래서 강의할 때도, 계속 강조하는 부분인데, ‘학(學)’자를 좀 떼버리면 좋겠다고 말하곤 한다.
▲그럼 ‘미(美)’로 떼어 그대로 둔다는 것인가?
그럴 수도 있다. 아직 이러한 사태에 대해 일반적으로 합의한 용어가 없기 때문에 임의적으로 아직 ‘미학’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학(學)’이라고 하면 분과로 나눠지고 말 그대로 ‘학’으로 느끼게 된다. 20세기에 들어와 번역을 하면서 ‘학’을 넣으면서 생긴 문제로 볼 수 있다. 서구 개념에서는 ‘문학’은 ‘학’은 아니다. 그냥 ‘literature’(문예, 文藝)인데, 대등한 위계질서를 맞추다보니 ‘학’을 넣은 것일 수도 있다. 철학도 마찬가지다. 그냥 ‘philosophy’(생각하고 공부하는 것)인데, 여기에도 ‘학’을 붙였다.
▲미학과 관련해 구체적인 작품을 예로 들며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다. 어떤 문학 작품, 음악, 그림은 그 시대에서 주목을 받기도 하고 시간이 지난 후에도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것은 문화, 정신, 언어 등 여러 가지 측면에 영향을 준다. 이런 예에 적절한 작품이나 작가가 있다면 소개해 달라.
박상륭 작가를 소개하고 싶다. 2017년 7월 1일 타계하셨는데 아시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죽음의 한 연구』, 『칠조어론』 등의 책이 유명하다.
문학 중 많이 소비하는 형태가 소설이다. 소설은 ‘근대’에서 찾을 수 있는 ‘경제와 소비의 시대’가 아니면 불가능한 장르다. 근대(modernity)라는 공간을 전제하지 않으면 성립하기 어렵다. 근대는 개인이 탄생하게 했는데, 똑같은 권리와 능력을 갖고 있는 ‘인간’이라는 전제가 탄생했다.
인간이라는 전제가 없었다면 소설은 태어날 수가 없었다. 소설은 개인이 대량으로 소비할 수 있는 어떤 여흥(餘興), 이야기, 환상의 형식을 추구하는 데서 나왔다. 입장은 달라도 삶의 관계를 다루고,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 인물과 사건이 등장해 결말을 맺는 구성이다.
그런데 박상륭은 다르다. 그는 소설가지만 ‘죽음의 한 연구’나 ‘칠조어론’ 같은 작품은 소설이라고 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소설은 동시대를 살고 있는 어떤 한 인물이 등장해 익숙하게 느끼는 어떤 사건을 겪고 또 거기에서 일반성, 보편성을 찾는 게 일반적인데, 박상륭 소설에서는 그런 게 없다.
박상륭의 작품은 소설의 형식으로 담을 수 없는 문제적인 것을 소설의 형식으로 담으려고 했다. 어떤 것을 갖고 있으면서 또는 그것을 유지하면서 어떻게 거기에서 벗어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대단히 예민했던 것 같다.
박상륭 작가는, 이런 점을 생각할 때, 소설이라는 근대적 장르 안에서 그 근대를 언제나 초과(超過)하는 것을 추구하고자 했던 작가다. 대단히 역설적이며 또한 그 자체로 대단히 근본적인 작업을 했던 작가다.
“박상륭 작가, 김진석 교수는 좋아하는 사람”
▲박상륭 작품 중 방금 언급한 ‘죽음의 한 연구’와 ‘칠조어론’은 20대 초에 읽어봤는데, 상당히 읽기 어려운 책으로 기억한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바를 묶어 생각하면, 영역이나 범주를 넘나들면서 ‘새로운 것을 찾고 만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머물지 않는다’, ‘나만의 것을 만든다’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스스로 이 같은 방향을 걸어왔다고 생각하는데, 주변에 이와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나?
철학, 철학자 중 한 사람을 소개하고 싶다. 좋아하는 철학자 중 김진석 교수(인하대 철학과, 계간 『황해문화』 편집위원) 같은 분이 있다. 한국의 근대 철학은 수입품이다. 이런 측면에서는 철학을 하는 사람을 ‘철학소매상’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근대에 있어서, ‘어떻게 우리의 사상을 만들 것인가’는 오랜 물음이다. 이는 단지 ‘한국 고유의 철학’ 따위의 존재하지 않는 환상을 재구성하면서 그것과 서양의 철학을 대척점에 놓는 민족주의적 작업과는 전혀 다른 무엇이다.
그런데 김진석 교수는 이 물음에 합(合)한다고 생각한다. 서양 철학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든 후 우리의 사상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우리의 사상’이란 ‘한국 고유의 철학’ 따위가 아니라 근대를 통과해 현대를 관통하고 있는, ‘우리가 바로 그 서양의 근대를 어떻게 체화하고 어떻게 그 형질을 변화시키며 우리의 안과 밖을 표현하고 성찰할 수 있는 언어를 갖는가’ 하는 문제와 연결되는 것이다.
김진석 교수는 이러한 작업에 있어서 내게는 한국에서 거의 유일하며 선구적인 철학자다. 김 교수는 자기 언어로 철학을 하고 철학으로 주변의 어떤 상황을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또는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에 대해서 대단히 민감한 분이다. 그래서 『초월에서 포월로』라는 책이 있는데 ‘포월(匍越)’이라는 개념도 원래는 없는 개념이다. 초월은 무엇인가를 넘어간다고 할 때 우리는 정신적인 것만을 생각하는데, 사실 초월은 언제나 포월일 수밖에 없다.
‘포(匍)’는 ‘포복하다, 기어가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포는 초월, 즉 정신적인 것과 달리 몸을 끌어안고, 어쩌면 기어야 할지라도, 어떤 사상을 만드는 노력을 표현한다고 봐야 한다. 초월은 언제나 이 물질적인 세상의 몸을 입은 상태에서 넘어가야 하는 것이기에 항상 ‘포월’일 수밖에 없다.
흔히 이상보다 현실에 무게를 둔 것으로 볼 수 있겠으나, 사실은 이상과 현실 사이의 근대적이고 낭만적인 구분 자체를 무화하고 다시 생각하게 하는 개념이다. 이런 게 그를 단순히 철학소매상이 아니라 하나의 사상가로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이유다.
초월과 포월 ‘포월(匍越)’이라는 개념은 ‘초월(超越)’에 대응하며 ‘기어 넘다’로 풀이된다. ‘초월’이 현실 속에서 할 수 있는 경험과 인식의 범위를 훌쩍 벗어나 어떠한 이상을 상정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이에 맞서는 개념인 ‘포월’은 우리 몸에서부터, 즉 구체적인 현실로부터 사고를 시작하자는 일종의 수사학적 표현이다. ‘소내’는 ‘소외’의 부정적 의미를 극복하는 개념이다. 소외됨의 지독한 부정성을 껴안으며, 오히려 그것을 긍정적 도전으로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초월’이 상정하고 있는 바깥쪽에서 소외의 슬픔과 아픔에 대해 투정하지 말고, 고독하고 막막하지만 안에서 제 안의 상처를 껴안고 가면서 나름의 힘과 긍정성을 확보하자는 취지를 담고 있다. -김진석, 『포월과 소내의 미학』(문학과지성사, 2013) ‘책 소개’ 중에서 |
▲문학, 음악, 미술이 그렇듯이, 방금 예로 든 김진석 교수와 그의 철학은 다른 사람이나 우리 사회에 크고 작은 영향을 끼친다. 이런 것은 어느 정도의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봐야 하나?
영향력은 힘의 문제인데, 그런데 사실 힘의 문제는, 철학자든 예술가든 문학가든, 사람이기 때문에 어떤 이상을 갖고 있어도 조급증이 생긴다고 본다. 그래서 다른 방식으로 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유지하기 힘든 면이 있다. 박상륭의 경우 철학과 종교라는 관심을 갖고 있더라도 읽기가 어려워 진입 장벽이 높다.
어떤 것에 계속 관심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대단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문학도 그렇지만 음악도 그렇다. 그런데 이를 통해 생기는 영향을 자신의 생애에서 가시적 형태의 모습을 보겠다고 생각하는 것, 즉 조급증을 갖기 시작하면, 힘들어지기 시작한다. 생애에서 보고자 한다면 정치에 뛰어들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정치는 바로 적용할 수 있는 법을 바꾸거나 폐지할 수 있다. 또 사회운동에 뛰어드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다.
정치 이야기는 약간 극단적인 예로 생각할 수 있지만, 박상륭도 그렇고 김진석도 그렇듯이,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다. 많은 사람을 위한 것을 만들 수도 있지만, 결국 어떤 형태로든 남기는 것을 하는 게 중요한 것 같다.
이런 경우는 정치적 활동이나 사회적 운동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느린 것이고 작은 것의 영역이다. 책상에 뜨거운 커피를 쏟으면 쫙 퍼지면서 테이블을 적시게 된다. 누군가는 젖을 수도 있다. 이런 게 가시적으로 보이는 것이고 이는 정치나 사회적 운동과 같은 것이다.
반면 차가운 또는 뜨거운 기운이 퍼지는 것은 다르다. 전파 속도가 매우 느리고 오래 걸린다.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은 강렬하게 느낄 수도 있겠지만, 얼리거나 태우는 게 아니어서 주변을 식히거나 데우는 형태다. 변화 자체가 상당히 느리고 오래 가야 한다. 단번에 어떤 것을 바꾸기 어렵다. 이 같은 행위를 하는 자신조차도 어떻게 갈 것인지는 모른다. 이런 과정은 좀 넓은 의미에서 가야 할 방향이다.
“어떤 힘이나 가능성, 그 자체로 의미 있다”
▲넓은 의미는 ‘새로운 의미’, ‘다르게 보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겠다.
좋아하는 역사학 계통이 있다. 프랑스 아날학파와 장기지속(longue durée)을 많이 이야기한다. 장기지속 개념은, 예를 들면, 이 친구들은 근대가 끝나면 현대가 되고, 어떤 정권이 끝나면 또 다른 시대가 열린다고 보는 게 아니다. 중세도 중세가 끝나고 르네상스가 온다는 형태로 보는 게 아니다. 중세도 사실은 고대 사람의 어떤 사상 또는 물질적인 제도가 쌓여서 이뤄진 것으로 본다. 근대도 중세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중세 사상의 특성이나 사람들의 생활 태도, 물질 양식을 고스란히 갖고 있는 게 있다.
세계도 그렇지만 역사도 어느 하나의 분기점을 기준으로 바뀌는 게 아니라 장기적으로 지속되고 있는 어떤 형태라고 보는 관점이다. 하나의 물질 덩어리처럼 보는 경향이다. 개인적으로 우리가 우리의 현상이나 현실을 이야기할 때 이 같은 관점이 맞다고 생각한다. 느린 리듬으로 바뀌는 것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현실의 빠른 리듬을 무시하고서라도 어떤 힘이나 어떤 가능성을 갖고 있는 영향력이라면 그 자체로 또 다른 의미가 크다.
▲양과 질의 문제로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물론이다. 양과 질의 문제, 처음에는 양을 추구하지 않고 질적인 것을 추구한다 해도, 또 그게 소수의 양처럼 보이는지만 언젠가는 서서히 퍼져갈 것이라는 생각, 그것이 언젠가는 하나의 기준이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는 것 같다.
페이스북은 ‘보여주기’, 트위터는 ‘독백’
▲양이든 질이든 적거나 작은 것일지라도 요즘에는 신문, 잡지, 방송, 사회관계망(SNS) 등 통해 순식간에 퍼진다. 작은 게 작은 게 아닌 시대다. 특히 페이스북, 트위터 등 SNS는 ‘확대,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대단한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조금 전 생활과 미학을 연결해 이야기를 했는데, SNS도 일상생활과 밀접하다. 미학 시선으로 SNS을 어떻게 볼 수 있나?
SNS에 대해 5년 전 즈음에 정리했던 글이 있다.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이 있다. 지금은 페이스북이 영향력 있는 매체고, 트위터는 약간 죽었고, 인스타가 뜨고 있다. 5년 전 글에서 규정했던 언어가 있는데, 트위터는 ‘독백의 형식’이고 페이스북은 ‘전시의 형식’이라고 이야기를 했다. 페이스북은 ‘전시’, 즉 ‘보여주기’ 형식이다. 반면 트위터는 다른 이에게 말을 거는 것 같지만 사실은 ‘독백 형식’이다.
트위터는 끊임없는 이야기들이 올라온다. 140자에 반응한다. 어떤 것에 대해서는 뜨겁게 얘기도 하고 서로 싸우기도 한다. 그런데 결국 140자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내가 그냥 잠언처럼 ‘툭’ 하고 던지는 어떤 독백이다.
페이스북은 그냥 보여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스스로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만들어서 그걸 보여주는 형태다. 그런 마음이 없으면 페이스북을 잘 안 하게 된다. 그러니까 페이스북을 하는 사람은, 의식하건 하지 않건, 자기가 스스로 자기의 삶 자체를 예술로 만들고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페이스북의 이러한 전시 방식은 미학적으로 대단히 근본적이다. 왜냐하면 스스로 어떤 예술 작품을 만들기 때문이다.
▲첫 번째로 쓴 『사유의 악보』는 어떤 책인가?
『사유의 악보』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비평의 경계 자체를 의문시하면서 그 경계들을 넘나들 수 있는 비평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그것을 제 나름대로 실험한 전략 사용 실험서 같은 책이다. 약간 설명서(Manual) 같은 그런 느낌이 있다.
‘우리 미학정치의 지도제작법’
▲미학과 정치를 생각하면, 미학정치와 정치미학이라는 낱말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낱말을 앞뒤로 쓸 수 있느냐 문제처럼, 특정 표현이나 인식이 영향을 주기도 한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사회 변화를 위한 느림의 미학처럼, 미학이나 미학자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역할이 있을 텐데, 이런 면에서 말하고 싶은 게 있나? 미학과 미학자의 역할을 묻는 질문이라 생각하면 좋겠다.
물론 있다. 정말 싫어하는 게 있는데, ‘아프니까 청춘이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는 말은 싫어한다. 『아프니까 청춘이다』와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는 김난도 선생의 책 제목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프니까 청춘이다’에는 왜 아픈지에 대한 구조적인 이유가 빠져 있다. 아픔은 개별적으로 거쳐야 하는 과정이자 구조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아픈 이유는 구조의 문제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얽힌 문제라는 사실을 슬쩍 빼버린 것이다.
그리고 『사유의 악보』에 이어 곧 출간할 예정인 책은, 부제를 ‘우리 미학정치의 지도제작법’이라고 정했는데, (이번 질문은 미학과 미학자의 역할을 묻는 것인데) 어느 정도 답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 책 『사유의 악보』에서는 지금까지 비평에 대한 생각과 어떠한 요소를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에 대한 전략이었다면 이번에 출간할 책은 어떤 구체적인 이미지. 우리가 스쳐지나가기 쉬운 주변의 감성적인 경험,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포착할 수 있고 거기에서 어떠한 결론 또는 우리의 사고의 어떤 지형이 어떻게 펼쳐져 있는가를 지도처럼 그려낼 수 있을까 하는 그 지점에 초점을 많이 맞췄다.
▲개인적인 물음인데, 두 사람은 부부지만, 부부가 되기 이전에도 각자의 삶에서 서로에게 도움을 많이 주고받았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아내가 감정적으로 안정성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가끔 산만하고 기복도 심하다. 소심하고 우울한 감정을 갖고 있을 때도 있다. 그렇지만 아내와 함께 있으면 편안해진다. 또 작은 문제보다 큰 문제에 직면했을 때 결정을 잘 해주는 편이라 좋다. 여하튼 감정적 측면에서 도움을 많이 받고 있다.
▲남편 말에 공감하나?
신랑은 산만하다고 표현하지만 산만한 사람은 전혀 아니고 약간, 아니 굉장히 예민하다. 감정적으로 우울할 때도 있고 기복이 굉장히 있는 편이다. 반면 나는, 편한 말로 하자면, 무던한 것 같다. 그래서 신랑의 그런 변화를 감지해도 심리적인 타격을 준다고 생각하지 않는 편이다. 때로 힘들 때도 있지만 내가 버텨줘야 한다는 생각이 강한 것 같다.
또한 지적인 부분에서 신랑을 굉장히 존경하는 부분이 많고 신랑한테 영감을 많이 받는 게 있다. 일상의 많은 부분에서 신랑이랑 있으면 내 자신의 사상이나 생각을 환기할 수 있고 가치관 안에서 어떤 부분은 각성을 하기도 한다. 그런 부분에서 에너지를 많이 받고 있다. 그래서 굉장히 좋다. 생활 측면에서는 설거지 등 집안일을 많이 해줘서 편하다.
신랑은 자신이 이상주의자라며 자신처럼 나도 이상주의자인데, 현실을 잘 인식하는 현실주의자라고 말하기도 한다. 서로 다른 영역이고 각자의 일을 하지만, 서로에게 용기를 주는 관계라고 생각한다. 이상주의자이면서 현실을 인식하는 현실주의자라는 남편의 설명에 공감한다.
최정우
작곡가, 비평가, 기타리스트. 1977년에 태어났다. 열 살에 서점 한 귀퉁이에서 호기심에 무심코 뽑아 읽었던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대한 어떤 ‘오독’ 때문에 인문학 책들을 읽기 시작했으며, 열한 살에 기타와 처음으로 만나고 열두 살에 가야금 스승과 조우하면서 음악에 빠져들었다.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 불어불문학과에서 조르주 바타유의 에로티시즘 문학과 유물론적 철학에 대한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2000년 『세계의문학』에 비평을 발표하며 등단했고, 그 후 8년 동안 공식적으로 어떤 글도 발표하지 않았다. 연극과 무용 등 무대음악 작곡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2002년 결성한 3인조 음악 집단 ‘레나타 수이사이드(Renata Suicide)’를 이끌면서 보컬과 기타를 맡고 있다. 2003년 박상륭 원작의 연극 ‘평심’을 시작으로 연극과 무용에 들어가는 음악을 작곡하거나 연주했다. 연극 음악은 ▲박정희 연출 ‘발코니’, ‘새벽 4시 48분’, ‘애쉬즈 투 애쉬즈’, ‘철로’, ‘마라/사드’ ▲김광보 연출 ‘천년전쟁’, ‘블라인드 터치’, ‘인간의 시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루시드 드림’, ‘내 심장을 쏴라’ ▲임영웅 연출 ‘밤으로의 긴 여로’, ‘우리, 테오와 빈센트 반 고흐’, ‘달이 물로 걸어오듯’ ▲김낙형 연출 ‘검둥이와 개들의 싸움’ ▲신호 연출 ‘염소 혹은 실비아는 누구인가?’ 등이 있다. 무용 음악은 ▲장은정 안무 ‘몇 개의 질문’, ‘육식주의자들’ ▲정영두 안무 ‘휘어진 시간’ ▲이소영 안무 ‘I’m All Ears’ ▲이윤정 안무 ‘아바나 간이열차’, ‘안전한 표류’ ▲ 공영선·박성현·허효선 안무 ‘내일의 어제’ 등을 작곡하고 연주했다. 데이비드 헤어의 희곡 『철로(The Permanent Way)』를 번역하고, 무용 ‘육식주의자들’ 대본을 썼다. 2011년 『사유의 악보 : 이론의 교배와 창궐을 위한 불협화음의 비평들』을 출간했다. 현재 계간지 『자음과모음』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글은 페이스북과 블로그에서 읽을 수 있다. sacrilegium@gmail.com
[상자]
‘불규칙·불협화음에서 새로운 질서·이론 찾으며 생각 만들어가는 길’
『사유의 악보 : 이론의 교배와 창궐을 위한 불협화음의 비평들』
최정우 저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02월 28일
최정우 교수가 쓴 『사유의 악보』를 살펴보며 ‘합종연횡(合縱連衡), 동서남북(東西南北), 좌고우면(左顧右眄)’ 등 한자성어 세 개가 떠올랐다. 그러면서 한 줄 평(評)은 ‘불규칙과 불협화음에서 새로운 질서와 이론을 찾으며 생각을 만들어가는 길’이라 쓰면 좋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출판사 자음과모음은 ‘새로운 사유와 글쓰기를 위한, 나아가 새로운 이론을 형성하기 위한 위험한 감행’이라고 설명한다. 또 “불친절한 의도를 가지고 쓰인 이 책은 ‘이론’의 증폭과 심화, ‘혁명’을 위한 친절한 ‘매뉴얼’”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따옴표로 강조한 세 글자인 ‘이론, 혁명, 매뉴얼’을 떼어낸 후 다시 붙여서 ‘이론·혁명·매뉴얼’이라는 한 낱말로 책을 소개해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다.
이 책은 자음과모음이 지난 2010년 12월에 정통 학술 총서 ‘새로운 사유의 힘, 뉴아카이브 총서’에 이어 2011년 3월에 한국 인문학의 새 지형을 담기 위해 ‘하이브리드 총서’로 기획해 진행한 것이다. 이 책은 3권의 총서 중 한 권이다. 서곡, 1~13장, 종곡 등 세 부문 15개 주제로 구성해 발간했다.
최정우 교수는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에서 ‘사유의 수원(水原)’을 찾았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박상륭과 그의 책은 그가 지금의 모습을 이루는 데 있어 주요한 영향을 준 것 사람 중 하나라고 밝혔다. 박상륭의 작품은 무척 어려워서 쉽게 읽지 못했는데, 최 교수에게는 지식과 지혜를 품은 ‘혜안의 수원’이었다.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가 ‘사유와 혜안의 수원(水源)’이 되어 ‘이론 혁명 매뉴얼’을 낳았듯이, 이 책은 『사유의 악보』는 누군가에게 또 다른 ‘사유와 혜안의 수원’을 준다는 점이다. 『사유의 악보』에서 나온 수원을 마신 독자는 새로운 혜안을 얻고, 새로운 이론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사유의 악보』는 번역, 평론, 음악, 연극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저자는 음악, 문학, 철학, 미학, 정치학, 심리학, 신학, 윤리학 등 예술, 인문학 분야의 다양한 작품과 담론들을 독특한 방식으로 ‘접붙이는’ 비평 방식을 통해 경계의 경계되는 지점을 질문하고 새로운 사유, 새로운 글쓰기의 가능성을 찾는다. 언어와 이미지가 범람하는 이 시대의 우울과 불안, 그리고 무엇보다 무감각을 이유로 들면서 저자는 다시 이론과 사유가 가동되어야 할 필요성을 절박하게 외친다.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혹은 인문학이 위기인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사유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강요된 이데올로기에서 새롭게 사유해야 할 근거를 찾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시대’ 혹은 ‘세대’라고 하는 구성된 집단적 주체와 인위적 시공간에 대해 도발적 질문을 던진다. 자료=예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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