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武藝는 正直·堂堂한 文化”
신성대 사단법인 전통무예십팔기보존회 회장은 ‘어려운 시절’에 중국 원서를 한국에 들여와 처음으로 중국 원서 서점을 설립해 운영한 인물이다. 그는 또한 출판사인 동문선(東文選) 대표도 맡고 있다. 그는 “십팔기는 중국, 일본, 조선 등 3국의 무술에서 좋은 점만 뽑아 체계화한 것”이라며 “우리 것으로 만든 것이고 세계 유일한 것”이라고 말한다. 특히 “5000년 역사 중에서 한국이 주도적으로 3국의 문화를 통합해 창의적으로 만든 것은 십팔기가 유일하다”면서 “중국에는 기록만 남아 있고 일본에는 기록조차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비해 우리는 지금까지 실기를 잘 보존해 재현하고 있다”고 말한다.
[인터뷰] 신성대 사단법인 전통무예십팔기보존회 회장
- 中 서적·무예 등 문화교류와 외교까지 생각하는 혜안의 소유자
- 구속 감수하고 최초로 중국 원서 서점 설립한 ‘간 큰 남자’
- “적군묘지는 세계에서 유일한 최고의 천연기념물이자 국보”
신성대 사단법인 전통무예십팔기보존회 회장은 ‘어려운 시절’에 중국 원서를 한국에 들여와 처음으로 중국 원서 서점을 설립해 운영한 인물이다. 그는 또한 출판사인 동문선(東文選) 대표도 맡고 있다. ‘동문선’은 시문집 이름이기도 하다. 조선 성종(成宗) 9년(1478년) 12월에 당시의 예문관대제학 서거정이 홍문관대제학 양성지 등과 함께 왕명으로 삼국 시대 후기(대부분 신라) 때부터 고려 시대를 거쳐 조선 초기에 이르는 시인이나 문사들의 시문 가운데 우수한 것을 모아 편찬한 시문집이다.
인터뷰를 마친 후 신 회장이 오랫동안 십팔기보존회 회장을 맡아온 이유, 출판사 이름을 동문선으로 정한 까닭 등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 외항선을 타며 여러 나라를 다녔다. 이 같은 경험은 세상을 보는 시선과 생각은 넓고 깊은 뜻을 갖게 해줬다.
세상을 보는 눈과 생각의 깊이를 여행에 비유하기도 한다. 여행을 좋아하는 것, 국내 여행을 하는 것, 세계 여행을 하는 것으로 간단하게 나눠 등급이나 수준으로 구별한다면, 신 회장은 세계 여행을 통해 오래 전부터 최고 수준의 눈을 갖춘 셈이다.
2015년 5월 13일, 서울시 인사동 동문선 사무실에서 만난 신 회장은 외항선을 탄 이야기부터 시작해 십팔기를 중심으로 한 무예와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정갈하게 들려줬다. 그는 중국의 서적과 무예를 통해 문화교류는 물론 외교까지 생각하는 혜안(慧眼)의 소유자였다.
다음은 신성대 회장과 나눈 인터뷰 전문이다.
文化와 外交까지 생각하는 慧眼의 소유자
▲외항선을 오래 탔고 이는 독일에 파견한 간호원이나 광부, 그리고 월남참전과 같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어떤 의미인가.
1977년부터 7년 동안 1등기관사로 근무했다. 외화 획득을 위한 해외 수출 선원이었다. 세계를 수차례 일주하며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었다. 광부, 간호사, 참전용사 등이 외화를 얻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수출 선원은 이보다 몇 배, 몇 십 배 더 많은 외화를 벌어들인 주인공이다. 광부나 간호사는 선택을 받아 가는 것이지만 선원은 선택 없이 배를 타는 것이었다. 인원만 해도 수천, 수만 명에 이르렀을 것이고 5대양을 돌며 국위선양을 했던 만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다.
더구나 선원은 배에 있는 만큼 월급을 모두 한국으로 보내기 때문에 외화벌이에 더 좋았다. 첫 월급이 당시 24만원(500달러) 정도였는데, 지금으로 환산하면 대기업 부장급 수준이었다. 대략 1000만원 전후는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침몰이나 사고로 사망하는 선원도 꽤 있었다. 그런데도 대부분 광부, 간호사, 참전용사 등은 잘 기억하고 있는 반면 선원에 대한 이해나 기억은 없는 편이다. 이들이 있었기에 한국 조선업도 가능했다.
“중국은 같은 문화권이자 우리 문화의 뿌리”
▲30대에 출판사인 동문선을 설립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외항선을 타고 다니면서 견문은 넓어졌다. 하지만 미국이나 유럽은 익숙한 느낌이었는데, 동남아에서는 큰 충격을 받았다. 너무 낯설다는 점이 충격이었다. 선진국은 정보가 많아 익숙하지만 당시만 해도 동남아는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아시아에 대해 관심을 갖는 순간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했고 출판사를 설립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1985년 출판사 ‘동문선’이 탄생했다.
이 무렵부터 중국을 비롯해 아시아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당시 중국은 수교국이 아니었다. 냉전시대였기 때문이다. 중국은 같은 문화권이고 우리 문화의 뿌리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중국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때는 중국 관련 책을 보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던 시절이다. 모든 게 불온문서였다. 그러니 정보가 턱없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을 비롯한 다양한 정보를 찾고 이를 책으로 만들기 위해 설립한 게 출판사인 셈인데, 중국 관련 책은 얼마나 출간했나.
1988년부터 중국 관련 책을 본격적으로 출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8년 6월에 방영한 TV 다큐멘터리 ‘하상(河殤)’은 중국에게 큰 영향을 끼친 작품이다. 나에게도 깊은 인상을 줬고 다큐멘터리를 책으로 엮어 1995년 7월 5일자로 동문선에서 출간했다.
‘하상’은 문화열(文化熱)을 다루고 있다. 중국의 젊은 철학자인 김관도(金觀濤)는 중국의 문화와 사상을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변화가 없이 왕조만 바뀌는 과거 시스템이 현재에도 영향을 주고 있는 만큼 중국의 변화를 위해 근본적인 시스템을 해체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당시 조자양(趙紫陽) 총서기는 개혁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 ‘하상’을 재방영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상황이 좋지 않자 뒤늦게 방영 금지 등의 조치를 했다. 하지만 개혁을 바라는 중국 사람들은 ‘하상’에 열광했고 이는 걷잡을 수 없이 퍼졌다. 결국 ‘천안문 사태’를 촉발하는 결정적인 심지 역할을 했다.
‘하상’은 조자양이 실각하게 된 결정적인 요인이기도 하다. 또한 ‘하상’의 영향으로 장예모 감독의 ‘붉은 수수밭’ 같은 명작도 나왔다고 생각한다. 중국은 점진적 개방 정책을 선택했다. 러시아와는 다르다. ‘개방’은 결국은 ‘성공’이 됐다.
이후 중국의 전문 학술서적을 60여 권 번역 소개했다. 덕분에 중국 학술계 대가들도 알게 되어 한중 학술교류의 물꼬를 터는 역할도 하게 되었다. 이런 건 참 좋은 일이고 또 기쁜 일이어서 그 분들과 교류하며 즐겁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중국의 출판은 국영기업이어서 출간 당시 바로 책을 구해야 했다. 재판(再版)도 거의 없다. 홍콩을 통해 나오는 약간의 신간을 놓치면 거의 포기해야 했다.
한국과 중국은 92년 수교했다. 하지만 아직도 중국은 학자들이 외국으로 나가는 것을 통제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도 자유롭지 않은 편이다. 학술교류나 교환교수 등을 통해 교류를 하는 게 많은데, 자유롭게 교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중국은 점진적 개방 정책으로 성공을 거둔 대표적 국가”
▲중국 원서를 판매하는 서점을 처음으로 운영했다고 알고 있다.
방금 얘기한 것처럼 중국 관련 책을 내면서 원서를 구해 판매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판매 수익을 내는 것보다 중국 책을 쉽게 구하고 접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게 목적이었다. 그래서 국교 수립을 하기 전인 1990년 4월 1일 인사동에 중국 원서 판매 전문 서점을 냈다. 서점을 시작하기 1년 전부터 홍콩 서점을 들락거리며 중국 책을 구해 달라는 부탁을 하고 다녔다. 당시로서는 구속을 감수하고 진행한 일이었다. 홍콩에서도 잡혀 가면 어떻게 할 것이냐며 걱정을 많이 했다.
하지만 5kg 미만인 물건은 뜯어보지 않는다는 점을 알고 5kg 미만으로 포장해 달라고 요청했다. 두 달이 지난 후 용산우체국에서 전화가 왔다. 한 곳으로 한 트럭의 우편이 도착해 깜짝 놀랐다는 것이다. 배송할 방법을 고민하고 있길래 트럭을 갖고 용산우체국으로 가서 직접 싣고 왔다. 그렇게 수차례 책을 받아 서점을 운영했다. 잡혀 갈 줄 알았는데, 운이 좋았는지, 구속이 되는 일은 없었다. (웃음)
▲서점을 열었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도 컸을 것 같다.
사실 서점을 열고 난 후에 곧 잡혀갈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잡혀가게 되면 공론화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학문 연구와 중국에 대한 이해를 위한 활동은 국가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동아일보 기자가 찾아와 한국 최초의 중국 원서 서점이라는 내용으로 기사를 쓰기도 했다.
여하튼 구속이 안 된 것은 91년 아시안게임, 91년 정상수교 분위기 확산 등 긍정적인 분위기가 큰 몫을 했다고 본다. 그렇게 92년 수교가 됐고 서점은 99년 폐점했으니 10년 정도 운영한 것 같다. 97년 IMF 등 어려운 환경도 폐점을 하게 된 배경이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국내에 대여섯 개의 중국 원서 서점이 문을 열었다.
“죽은 자는 적이 아니다”
▲국방부 전통의장대 무예지도 사범으로 활동했었고, 이 활동은 유해발굴사업과 ‘적군묘지’와 인연이 닿는 계기가 됐다고 알고 있다.
의장대 지도 사범을 하던 때, 2010년으로 기억하는데, 당시는 국방부가 유해발굴사업을 시작하던 시점이었다. 그 즈음에 적군묘지의 존재를 알게 됐다. 그냥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묘지 근처 동네에 사는 친구를 앞세워 적군묘지를 찾았다. 우리 군은 물론 연합군, 북한군, 중공군 등 가리지 말고 유해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관리가 안 돼 있었다. 묘지를 찾는 게 무척 어려울 만큼 관리가 엉망인 상태였다. 잡초가 무성한, 말 그대로 ‘버림받은 묘지’이자 ‘저물어가는 묘지’였다. 너무 가슴이 아렸다. 죽은 자는 적이 아니다. 적일망정 인간으로서의 예의는 꼭 필요하다. 인간으로서의 군인은 누구든 훌륭하기 때문이다. 전쟁 때문에 싸웠지만 친구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유해 안장을 제대로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내용으로 칼럼을 썼고 북녘이 잘 보이는 곳에 모시자는 제안을 담았다. 더 이상 버림받고 버림받는 무덤이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다행히 정부에서 묘지를 새로 단장하기로 해서 지금은 과거에 비하면 상당히 좋아져 나름 제 모습을 찾았다. 묘지를 찾은 이후 친구 스님과 함께 ‘북중군묘지 평화포럼’을 결성하고 추운 한겨울 108일 동안 위령제를 지내주었다. 지금까지 지인들과 함께 잊지 않고 매달 묘지를 찾고 있다. 좌와 우, 어느 누구도 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민간 차원에서 정치색을 배제하고 순수한 뜻으로 이들을 추모하고 있다.
그리고 적군묘지를 새롭게 단장하는 데 있어 권철현 전 주중대사 역할이 컸다. 중국 고위급 인사가 방한해 묘지를 보면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냐며 UN묘지처럼 제네바협약에 따라 묘지다운 묘지로 만들어줘야 한다고 설명했는데, 권 대사가 이 같은 설득과 설명을 적극 받아들여 묘지가 새롭게 태어났다.
▲적군묘지는 어떤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하나.
전 세계에 단 하나밖에 없는 천연기념물이다. AP, 로이터, 아사히, 슈피겔 등은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형태로 적군묘지를 보도하기도 했다. 지구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이 묘지는 이것 하나만으로도 13억 중국인을 감동에 빠지게 할 수 있는 기념물이다. 한국이 중국과 북한에 대해 도덕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 정부가 세계 유일의 문화유산인 적군묘지를, 그러니까 중국군 유해를 송환해주기로 했다. 안타깝다. 이것은 국보 100개를 돌려준 꼴이다.
“적군묘지는 13억 중국인 감동에 빠지게 할 천연기념물”
▲왜 천연기념물이고 국보인가.
나는 유해를 송환하기 이전에 한국을 찾은 여러 중국 손님들을 적군묘지로 안내했었다. 그들은 묘지에 도착하는 순간 거의 예외 없이 주저앉아 운다. 통곡을 하는 이도 있다. 그들로서는 미처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곳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목이 메어 말도 못하고 눈물만 쏟는다. 수도 없이 고맙다는 말도 한다. 그런데 그 묘지가 중국에 있었다면 과연 중국인들이 그렇게 찾아가 감격해 하며 눈물을 흘렸을까? 아니다. 한국 땅에 있는 적군묘지이기에 감동한 것이다.
적군묘지에 안장되어 있던 중국군은 모두 무명용사들이다. 설사 고국으로 돌아간다 한들 중국인들은 그런 일에 별로 흥미를 갖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중국인들은 병사를 창이나 총알처럼 소모품으로 인식해왔다. 그렇기에 유해를 고국으로 가져가지 않았다. 죽고 나면 그뿐, 어디에 묻히든 그다지 상관치 않는다. 분명 금방 잊혀 질 것이다. 그렇기에 한국 땅에 유해가 있고, 또 적군묘지가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뿐만이 아니다. 중국군 유해를 돌려주고 한국은 얻은 게 없다. 시진핑 주석은 중국군 유해를 돌려준 것에 감사표시를 하고 박근혜 대통령이 부탁한 시안시 광복군 표지석은 세워주겠다고 했다. 북한 비핵화에 대한 협조 요구에 대해서는 중국 방식대로 노력하고 있다는 원론적 답변만 했다. 그 이상은 없다.
중국에서 먼저 적군묘지의 중국군 유해를 돌려달라고 했더라도 아직 휴전 중이라는 핑계를 대서 거절했어야 좋았다. 정말 돌려받고 싶다면 당연히 그만한 대가를 우리에게 줘야 한다. 휴전이 끝나면, 다시 말해 통일이 되면 돌려줄 테니 통일에 협조하라는 요구 정도는 했어야 했다.
▲중국 명나라의 무신인 척계광(戚繼光) 장군은 왜구와 몽골과 싸워 전공을 세운 인물로 유명하다. 16세기 중후반인 점을 감안해 임진왜란, 이순신 장군 등과 연결해서 이해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 또 십팔기와 관련이 있다는 말도 들었다. 척계광, 그는 어떤 인물인가.
척계광 장군은 왜구를 격퇴한 명나라 명장이다. 시진핑 주석이 지난 2014년 4월 28일 신장 위구르 자치구 카스를 시찰하면서 ‘왜구격살(倭寇擊殺)’이라는 말을 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중국인 중에는 척계광을 이순신 장군과 비교하는 이들도 많다. 그래서 척계광에 대해 연구한다고 하면 중국 정부가 큰 관심을 가질 만한 인물이라고 봐도 좋을 것 같다.
시진핑 주석이 한국에 온다고 해서 청와대에 십팔기 시범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달라는 편지를 보냈으나 수용하지 않았다. 십팔기 중 6개는 중국에서, 임진왜란을 통해 조선에 전해진 것이다. 시진핑 주석과 박근혜 대통령이 십팔기, 그러니까 문화교류를 보며 서로 한중우호의 역사에 동감했다는 입장 정도만 밝혀도 된다.
“십팔기는 3국 문화 통합해 창의적으로 새롭게 만든 무예”
▲문화교류로서의 십팔기 시범을 한중 정상이 함께 보는 게 어떤 점에서 의의가 있나.
시진핑 주석이 450년이 지난 명나라의 국기(國技)를 한국에서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과 그 기예를 직접 본다고 생각해보라. 2014년 11월, 중국의 ‘인민일보 시장보(人民日報 市場報, 인민일보 경제 부문 자매지)’ 기자가 찾아왔을 때 십팔기에 대한 이야기와 중국에는 남아 있지도 않은 명나라의 국기를 우리가 보존하고 있다며 동영상을 보여줬다.
그랬더니 그 기자가 깜짝 놀라며 나에 대한 호칭을 ‘사장’에서 ‘선생’으로 바꾸더라. 그는 사라진 척계광의 흔적이 남아 있고 그것도 중국이 아닌 한국에서 보존을 넘어 재현까지 하고 있다는 사실에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십팔기는 중국, 일본, 조선 등 3국의 무술에서 좋은 점만 뽑아 체계화한 것이다. 우리 것으로 만든 것이고 세계 유일한 것이다. 5000년 역사 중에서 한국이 주도적으로 3국의 문화를 통합해 창의적으로 만든 것은 십팔기가 유일하다. 중국에는 기록만 남아 있고 일본에는 기록조차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비해 우리는 지금까지 실기(實技)를 잘 보존해 재현하고 있다.
그리고 조만간 중국의 국기는 절강성(浙江省)에 전해줄 예정이다. 국가의 무예가 이웃나라에 실제로 남아 있다는 것은 매우 의미가 크다. 한중 간 우의와 문화교류에 십팔기가 큰 역할을 하리라 생각한다. 이와 관련한 내용은 올해 초 중국 ‘인민일보 시장보’, ‘인민망’, ‘중화무술’ 등에서 특집으로 소개한 바 있다.
▲십팔기에 대한 관심은 물론 보존회장을 오랫동안 맡은 것으로 알고 있다.
십팔기는 70년부터 익혔다. 보존회장은 2002년부터 맡고 있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상설 공연을 한 게 계기가 됐다. 이는 무예 공연이 본격적인 문화의 한 범주가 된 것인데, ‘무예공연문화’라는 점에서 보면 이는 처음이자 출발점일 것이다. 지금도 보존회의 무예시범 공연을 자주 행하고 있다.
▲무예는 문과 무의 관계를 떠나기 어려운데, 문과 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문(文)은 문인(文人), 문향(聞香)의 취향이 강하다. 문무(文武)가 함께 필요한데 무가 빠져 있다. 무에 관한 이야기, 즉 전쟁사에 관한 중국, 일본, 그리스 등 남의 역사는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 나라의 전쟁이나 난(亂)은 역사의 오점으로 여기는 민족이 바로 우리다. 우리 역사를 기록하는 이는 대개 문인이고, 그래서 문인 중심으로 역사가 편집됐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는 문무를 동시에 기록한다. 하지만 우리는 문에 치우쳐 있다. 이순신이 ‘난중일기(亂中日記)’를 남기지 않았다면 우리가 지금 그를 영웅으로 기억하고 있을까 하는 의아심이 들 정도다.
“무예는 정직한 학문, 정직한 문화, 당당한 문화다”
▲문화교류와 문무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해주면 좋겠다.
문화는 배척하면 안 된다. 서로 융화와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골프, 국궁과 양궁, 축구 등은 조화다. 펜싱도 마찬가지다. 왜 무술만 족보를 숨기고 배제하려 하는가. 태권도는 1965년 이름을 바꾸기 전까지는 ‘가라테’라 불렀다. 검도와 유도도 식민지 시대에 강제로 이식한 것이다.
드러나면 불편해지는 사실과 진실이 무예계에 너무 많다. 이런 사실을 무작정 덮으려 한다. 그러나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 무예는 물론 스포츠 정신에도 어긋난다. 떳떳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변태(變態)를 낳는다. 불편함은 더욱 커진다. 식민 지배 여부를 떠나 문화는 습합(習合), 다시 말하면 서로 주기와 받기를 거듭하기 마련이다.
문화는 향유하는 이가 주인이다. 우리 것과 남의 것이 있음을 인정하고 각자 자기에게 좋은 것을 취하는 것이다. 중국과 일본의 십팔기는 실기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갖고 있다. 얼마나 좋은 문화인가.
문화는 국수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가령 십팔기에는 우리나라 고대검법인 ‘조선세법(朝鮮勢法)’이라는 게 있다. 동양 검법의 비조(鼻祖)라 할 수 있는 최고의 검법이다. 우리가 잃어버렸던 것을 명나라 모원의(矛元義)가 쓴 ‘무비지(武備志)’에 실려 있어 되찾을 수 있었다.
▲무예에 대한 말씀을 들으며 인터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무예는 정직한 학문이다. 또 정직한 문화이며 당당한 문화다. 무예는 문, 즉 글과 함께 행동철학을 갖춘 문화다. 이는 또한 무예가 이 시대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존재가치이기도 하다. 무예가 있어야 포용력도 생긴다. 잃어버린 문화, 내다버린 정신이 곧 무예이고 무덕이다. 우리 역사의 절반은 새로 써야 한다. 그리고 문무를 겸비해 ‘품격’을 높여야 한다.
신성대
1977년서부터 7년간 해외 수출선원(1등기관사)으로 외화 획득에 종사, 수차례 세계를 일주하며 견문과 호기심을 넓혔다.
1985년 도서출판 동문선(東文選)을 설립해 지금까지 약 700종의 문화인류학 및 인문예술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서적을 국내에 번역 소개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한중수교 전인 1990년 서울 인사동에 우리나라 최초의 중국 원서 수입 서점을 열어 한중학술교류를 앞당기는 일에 기여했다. 또 2000년에는 프랑스 철학자 피에르 쌍소의 에세이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출판해 한국에 ‘느림의 미학’ 붐을 일으킨 바 있다.
특히 40여 년간 무예십팔기를 익힌 무예 연구가로서 ‘전통무예’란 용어를 최초로 보급했다. 현재는 후진 양성, 수행, 도인양생기공법을 가르치고 있다.
인사동에서 지식인들의 사랑방인 ‘인사문화포럼’을 운영하면서 문화 담론을 확장하는 데에 힘쓰고 있으며 ‘데일리안’ 등에 문화비평을 기고하고 있다.
저서로는 <武德-武의 문화, 武의 정신>(2006)이 있으며, 후속 작업으로 <스포츠와 품격>, <정통 프랑스식 와인 매너>, <글로벌 영재를 위한 매너스쿨> 등을 집필할 예정이다. 2014년 10월에는 <품격경영 : 상위 1%를 위한 글로벌 교섭문화 백서>(상·하)를 출간했다.
현재 글로벌리더십아카데미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관공서, 기업 등을 대상으로 글로벌 매너 진단과 교육, 각종 MICE 행사의 적정 효과 창출 가능성 여부 사전 진단 및 대책, 전 세계 중상류층 즉각 진입 가능한 고품격 와인 소통 매너 개인기 전수, 피니싱 스쿨, 어린이 매너 스쿨 등 실전 글로벌 비즈니스 매너에 대한 심층 교육 훈련과 컨설팅을 하고 있다.
[용어 설명] MICE
1990년대 후반 싱가포르, 홍콩, 말레이시아 와 같은 동남아시아 지역의 국가가 컨벤션 사업을 계기로 경제 도약의 전기를 맞이하면서 등장했다.
MICE 산업에서 MICE는 기업회의(Meeting), 인센티브관광(Incentive), 국제회의(Conference), 전시사업(Exhibition)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에서 첫머리를 딴 것이다. 종종 MICE에서 E가 행사(Event)를, C가 컨벤션(Convention)을 지칭하기도 한다.
MICE 산업은 대규모로 조직된 집단이 특정한 목적을 띠고 건설적인 방향으로 관광할 때 성립된다. MICE 산업은 그 특성상 21세기 들어 각광을 받고 있는 관광 산업과 대별되기도 한다.
산업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들 몇몇은 ‘행사 산업(Events Industry)’이 광의로서 MICE 산업에 포함된다고 간주하기도 한다.
MICE 산업은 다른 산업이 성장할 수 있도록 보조하며, MICE 산업을 구성하고 있는 산업 그 자체는 이익을 창출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MICE 기업은 대부분 공영기업(公營企業)의 형태를 띠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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